복음의 능력, 성령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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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초기 선교 역사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이자익과 조덕삼 이야기입니다.
이자익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7세에 김제에서 제일 부자였던 조덕삼 집에서 머슴살이를 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신분차별이 분명했기 때문에 이자익과 조덕삼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테이트라는 선교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에게 복음을 듣고 함께 침례를 받게 됩니다.
주인과 종과 함께 침례를 받는것도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두 사람은 교회에서 형제라고 부르는 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머슴한테 형제라고 부르고, 주인한테 형제라고 부른다는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곳에 금산교회가 세워졌고, 둘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교회는 더 성장하게 되었고, 장로를 뽑을 때가 되었습니다.
장로 선거를 하였는데 주인이던 조덕삼은 떨어지고 머슴이던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덕삼이라면 어떨꺼 같습니까?
저라면 창피해서 교회를 옮겼을거 같습니다.
그런데 조덕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앞으로 이자익 형제를 장로로 잘 받들고 교회를 더욱 잘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본론]
오늘 말씀에는 베드로의 첫번째 설교가 등장합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신후 베드로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담대히 말씀을 전합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의 핵심은 복음입니다.
과연 베드로가 선포하는 복음과 우리가 알고있는 복음이 같을까요?
그리고 그 복음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먼저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복음은 종말의 때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17-21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또 나는 위로 하늘에 놀라운 일을 나타내고, 아래로 땅에 징조를 나타낼 것이니, 곧 피와 불과 자욱한 연기이다. 주님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오기 전에 해는 변해서 어두움이 되고, 달은 변해서 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종말이라고 하면 세상이 끝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보면 지구가 불타거나 망가져 사람이 살수 없을 곳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종말의 때는 조금 다릅니다.
종말의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이미 온 종말과 아직 오지 않은 종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의 시작때는 세상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구원과 심판이 결정되는 때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베드로는 요엘서 2:28-32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종말의 때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설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구약의 예언자 요엘은 종말의 때가 되면 일어날 일을 선포합니다.
종말의 때가 되면 하늘과 땅에 징조가 일어납니다.
피와 불과 자욱한 연기를 보게 됩니다.
해가 변해 어두움이 되고 달이 변해 피가 됩니다.
이런 용어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표현들입니다.
그만큼 긴박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확실한 종말의 징조가 있습니다.
아들도, 딸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차별하지 않고 성령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고, 꿈도 꾸게 됩니다.
원래 이런 것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께 말씀을 받을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종말이 오면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임한 일을 보십시오.
그곳에 있던 120명의 제자들이 여러 나라 말로 하나님의 큰 일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종말이 시작되면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이뤄집니다.
그 구원과 심판을 가르는 분이 바로 메시아 예수님 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받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단순히 그 분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그 분을 내 삶의 구원자로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죽이고 말았습니다.
의지하고 따르지는 못할망정 죽이고 말았으니 도저히 구원받을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순히 그들의 악함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뒤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죽으실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둘째,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25-28절입니다.
다윗이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나는 늘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보았다. 나를 흔들리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기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체도 소망 속에 살 것이다. 주님께서 내 영혼을 지옥에 버리지 않으시며, 주님의 거룩한 분을 썩지 않게 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 주셨으니, 주님 앞에서 나에게 기쁨을 가득 채워 주실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언급합니다.
부활은 메시아의 새 시대가 열렸다는 일종의 싸인입니다.
죽음은 인류를 절망에 빠뜨리는 절대적 힘입니다.
어느 누구도 벗어날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뒤집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세상에 새로운 힘과 질서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에서 약속되고 예언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윗의 시인 시편 16:8-11 을 근거로 듭니다.
거기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지옥에 버리지 않고,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죽지 않았나요?
아닙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무덤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시편은 다윗 자신이 아니라 다윗의 후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000년 전 다윗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시에서 예수님을 예언하고 있던 것입니다.
예언이 성취된 부활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직접 보고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기 위한 과정입니다.
셋째, 복음은 예수님의 왕되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33-36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리셔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일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키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또다시 다윗의 시편 110:1 을 인용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왕이 되셔서 이 땅에 대리자로 보내주신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 왕이시라는 보증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기도 하시고 심판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세상의 마지막때가 되면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37절입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첫번째 반응은 마음이 찔린 것입니다.
마음이 찔렸다는 말은 어찌할바를 몰랐다는 의미입니다.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 이 땅에 오셨는데 그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무시하고 핍박했습니다.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왕을 자신들이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어찌할바를 몰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반역과 죄악을 이미 아셨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심판하고 죽이는 대신 자신의 아들을 죽이며 스스로 심판받기로 하신 것입니다.
어찌할바를 몰라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두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첫째, 회개입니다.
회개란 단순히 후회하는 감정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란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대신 붙잡고 있던 우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내 욕망대로 살던 모습을 후회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둘째, 침례입니다.
침례는 내가 진실로 회개했다는 것에 대한 외적인 표현입니다.
이제는 내 뜻과 욕망대로 살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믿음과 헌신의 표시입니다.
물에 들어갈때 내가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고 물에서 나올때 내가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내 옛 사람은 죽고 새 생명을 얻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때 죄의 용서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성령은 구원받은 사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더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죄를 아에 짓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죄에게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에 넘어져도 회개하고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 합니다.
나만 신경쓰고, 세상만 신경쓰고 살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말과 생각,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말하는 죄로 비뚤어지고 왜곡된 세상에서 구원을 받는 길입니다.
그럼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41-42절입니다.
그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침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그 날에 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늘어났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그들은 베드로가 선포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한후 침례를 받습니다.
복음은 그들의 삶을 바꿔놓았습니다.
무늬만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삼천명이 주님께 돌아와 교회가 탄생합니다.
물론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무조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흥의 때가 되면 복음의 능력이 일어납니다.
1904년 영국 웨일즈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반 로버츠라는 한 무명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기독교는 힘을 잃어갔고 세상이 죄로 물들었습니다.
그는 이에 대한 애통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흥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갖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0년이 지나 26세의 목회자 후보생이 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광부들이 사는 자신의 고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로 한 것입니다.
당시 그곳은 술집과 술 주정뱅이들, 싸움꾼들, 매춘부들이 넘쳐나던 곳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의 한 작은 교회의 담임목사님에게 사정사정해서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때 그곳의 성도들이 17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복음을 들은 성도들은 모두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그의 설교가 대단한게 아닙니다.
베드로의 설교처럼 단순했지만 성령의 불이 그곳에 떨어진 것입니다.
놀랍게도 30일만에 3만 7000명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옵니다.
그리고 5개월후 웨일즈 전역의 10만명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옵니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넘쳐나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거리에서 싸우는 사람이 없어져 감옥은 텅텅 비었고, 술주정뱅이들과 매춘부들도 사라져 갔습니다.
그 놀라운 성령의 불이 우리나라까지 옮겨와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도 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에 목말라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더 가르쳐 줍니다.
말씀으로 성도들을 양육한 것입니다.
또한 서로 사귀는 일, 즉 성도들의 교제가 일어납니다.
음식을 서로 나눠먹고, 성찬식도 하고, 서로 기도하기에 힘씁니다.
그 뿐입니까?
그들은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자신들의 소유도 자발적으로 내놓습니다.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합니다.
이 말은 공산주의처럼 재산을 모두 강제로 내놓고 함께 나눠서 썼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일부 재산을 자발적으로 교회에 헌납하고 공유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일이 쉬울까요?
그냥 헌금만 열심히 하면 되지, 무슨 구제까지 하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을 따르려 합니다.
자기 부인이 바로 자기 소유를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진짜 회개는 지갑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제 형제, 자매를 향한 그들의 사랑과 긍휼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령이 일하신 증거입니다.
또한 그들은 성도의 집에서 열심히 모입니다.
말씀도 배우고, 식사도 함께 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며 행복해 했던지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삽니다.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그들의 모습을 부러워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날마다 늘어가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의 모습과는 참 다른 모습입니다.
요즘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호감보다는 비호감인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나 커뮤니티 댓글들 봐도 교회, 목사, 성도들을 안 좋게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 성령의 역사가 임한 교회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욕하기보다는 칭찬하고 호감을 갖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다카포 형제, 자매 여러분~
베드로가 전한 복음은 사람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자기 생각과 욕심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 성령의 역사입니다.
제가 처음에 소개했던 이자익과 조덕삼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덕삼은 교회에서 자신의 머슴이던 이자익을 장로로 잘 섬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조덕삼은 이자익이 목사가 되도록 평양신학교에 보내고, 그의 학비까지 대줍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이자익을 자기가 다니는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초빙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자익은 오랫동안 금산교회 담임목사를 하였고, 장로교 총회장을 3번씩이나 하게 됩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게 복음의 능력, 성령의 역사입니다.
복음의 능력, 성령의 역사는 병치유나 기적만 있는게 아닙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 사랑때문에 사랑과 섬김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며 형제의 유익, 자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삶입니다.
그런 놀라운 복음의 능력, 성령의 역사가 우리 교회가운데도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