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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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 예수 그리스도
요한 일서 1:1-4
[요일1:1-4]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인트로)
샬롬 오늘도 하나님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청년 여러분 반갑습니다. ◡̈
오늘도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생명의 말씀 :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생명의 말씀이라… 살아 있는 글?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생명을 검색해보면, 사람이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힘, 혹은 생물로서 살아가게 하는 힘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정말 살아가게 하는 힘이 바로 말씀이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가 이시간 함께 알아가면 좋겠습니다.
개신교는 말씀이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설교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ㅎㅎ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졸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ㅎㅎ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제 사설을 이야기 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시간이기에 저에게는 굉장히 엄중한 책임이 따르는 자리이고, 여러분들 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수 있는 귀한 시간입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은 요한일서 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제자,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이 자신이 목회하던 에베소교회에 이단의 가르침을 지적하고, 사도로서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을 전하는 서신이 요한일서 입니다.
요한일서 당시 이단은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현재는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JMS, 통일교, 구원파등등 참 이단이 다양한데요. 요한이 살았던 1세기에도 이런 이단이 존재하였습니다. 영지주의라는 이단의 핵심은 예수님의 육체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뭐냐하면? 예수님은 육체로 오신 분이 아니라, 영으로 오신 분이고, 성경이 기록한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고, 주무시고, 슬퍼하시고, 기뻐하시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모든 육체적 행동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육체는 썩었고 더럽기 때문에 예수님은 더러운 육체를 입고 오신 것이 아니다. 육체를 가지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언뜻 듣기에 굉장히 그럴싸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같이 완전한 분께서 더러운 육체로 오시지 않고 뭔가 영적인 분으로 오셔서, 뭔가 영으로 오시는게 우리가 생각하기에 더 성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 육체를 입고 오셨다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고. 성육신으로 오셨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영지주의의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잘못된 가르침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영지주의가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단이 아닌 건강한 교회에서 신앙생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단적 가르침을 따르는, 영지주의적 가르침을 따르는 행동들이 혹은 순간들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로 신앙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여러분 생각하시기에? 뭔가 영적이고, 기도도 많이하고, 뭔가 산에서 사는 사람 이 땅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보이지는 않나요? 뭔가 이 도시에 사는 우리보다는 산속에서 수양하며 매일 기도만 하는 분이 더 영적으로 보입니다. 그런 분들은 뭔가 성스럽고 뭔가 더 거룩할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더 거룩해지기 위해서, 산 속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나아가야할 방향일까요?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룩한 것은 구별된 것인데, 그런 어떤 세속적인 것 이 도시에서 떠나는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산속에 들어가면 도시보다는 죄를 지을 환경적 요소가 적은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만 혹은 도시와 떨어저 더 산속으로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은 영지주의적 사고일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을 것 같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주치지도 않고, 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영지주의적 사고 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은 우리게 말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이야기 합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아는 유명한 퇴사짤 처럼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새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익살스럽게 짤처럼 대사치기)== (분위기 보고 한 번 더 시도)라고 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반대로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삶이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과 같다면, 아니 아예 그런 생각조차 갖지 않고, 예수님 믿는 것 따로, 살아가는 것 따로, 그저 종교생활만 하면서 교회를 다니고, 이 세상속에 사니까, 교회에서는 영적으로 세상에서는 세상적으로 살아간다면, 이는 영지주의와 같이 신앙생활 하는 것 입니다.
1세기 영지주의는 ==금욕주의==를 낳았고, ==쾌락주의==를 낳았습니다. 양 극단에 치우쳐져서 잘못된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육체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영만 중요한 것이니까 육체를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사용하던지, 아님 완전히 억제해서 세상을 피해서 자신의 육체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하는 극단적 금욕주의를 행하든지, 이런 두 가지의 결과를 낳은것이 영지주의 입니다.
요한은 1세기에 영지주의를 염두하고 글을 썼듯이, 현대에 우리에게도 요한일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를 피하라고 말이죠. 이런 배경을 가지고 요한 일서를 읽어 보려 합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2절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라고 요한은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들은바요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바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금 현대 시대는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데,??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 참 무엇을 믿는 것인지 어렵게 여길 수 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위에서 감각적인 동사를 사용한 이유는 여기서 요한이 이야기하는 바는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바탕으로, 수신자 들이 잘못된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요한이 직접 겪은 예수님에 대해 ==감각적인 동사를== 사용하여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감각적인 동사적 표현==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해서 시각적으로 예배할 것을 만들거나, 혹은 시작적인 어떤 장치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비슷한 계열을 하는 종교로 천주교가 있습니다. 다들 아시죠? 개신교와 비슷한 계열을 따르지만, 차이점이 많이 있는 종교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우리가 생각하는 교회들을 개신교라 합니다.)의큰 차이점 중에 하나는, 형상과 그림등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이 보시면 알듯이 교회에는 예수님의 형상이나, 혹은 예수님의 그림이나, 조각들이 주로 없습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그런 형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리아 상도 성당에는 있고, 예수님상도 조각해서 만들어 놓습니다. 이와 반대로 교회는 그 어떤 것도 형상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기억하면서 예배를 하지 않습니다. 시각적인 것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하는지는 십계명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5장은 십계명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2계명을 살펴보겠습니다. 2계명은 예배의 방법에 대한 설명으로, 신명기 5장 8과 9절 상반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드릴게요. 잘 들어주세요 "[신5: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9절)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위 말씀은 우리게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할지, 예배의 방법에대해서 말해줍니다. 어떤 형상을 가지고, 만들어서 섬기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5장 10절을 보겠습니다. 10절을 보면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예배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예배의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이죠.
인간은 시각적인 것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아론도 모세가 잠시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황금을 가지고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예배하고, 이 금송아지를 보면서 우리를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라 생각하고 숭베했습니다. 이를 본 모세는 정말 크게 화를 내면서 잘못되었다 호통을 칩니다.
인간은 시각적인 것이 굉장히 많이 이끌립니다. 여러분 중에도, 시각적으로 하나님을 혹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된다면 나는 믿겠다. 하는 분이 이중에도 계실 것 같습니다. 성경에 나온 도마처럼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자신이 못박힌 손을 보여주심으로, 창에 찔리신 몸을 보여주심으로 그분을 믿고 싶어하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런 형상 하나님을 본뜬 그 어떠한 형상, 심지어 예수님이라 생각되는 그 어떤 조각들을 보는 것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인간이 생각하기에 직접 보여주면 믿기도 쉽고 편리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은 우리가 듣는 이 말씀을 통해서, 사도들의 증언이 담긴 이 서신을 통해서 듣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시고, 우리가 어떤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서 편하게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것을 금지 하십니다.
이어서 보길 원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제가 놓칠뻔 했습니다. 바로 1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과 2절에 등장하는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입니다. 이 두 가지의 단어가 가리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너무 제가 단정지어서 말했는데요. 설명을 조금 붙혀보겠습니다.
2절의 영원한 생명은 1절에 나오는 생명의 말씀에 관한여 라는 부분과 함께 해석을 해야합니다. 보고 들은 바를 반복해서 요한이 설명하는데,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라는 문장을 보면 병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요한이 쓴 다른 글인 요한복음을 보면 생명과 말씀은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 자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합해서 본다면, 태초부터 계신 말씀인 분이 육신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는데, 그분은 생명의 말씀 그 자체 이시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며, 그 분을 믿는 모든 자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힘으로서 생명을 정의했을 때 사람을 영원히 살아있게 하는 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는 것 입니다.
그럼 이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가가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그냥 죽지 않고 불로장생하는 것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지옥같은 세상을 산다면 그게 좋은 것일까요? 현재의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땅의 삶에서 계속 죽지 않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고, 그게 좋은 것이 될까요?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3절을 통해서 본다면 사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로 헬라어로 코이노니아라고 하는데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누리시는 영원한 사귐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현재 저와 성경공부를 하는 친구들은 삼위일체에 관해서, 조금은 배웠습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이 누렸던 사랑을 알 것입니다.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사랑으로 충만히 계셨고, 이 세상을 만드신 것도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물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삼위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창세전에 거하셨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귐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창세전 이 세상을 만들기 전부터 함께 하셨던 그 분들의 사귐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영광 스럽지 않나요? ㅎㅎ 그렇기에 현재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에서 충만한 기쁨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죠.
이 것이 감이 잘 안오시리라 생각되기에 조금 실재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역으로 설명해볼까 합니다. 모두가 자기 뜻대로 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이곳에는 법이 있습니다. 법은 구성원 모두가 잘 지킴으로 서로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 곳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법을 좀 지키지 않으려하고, 남들은 나를 위해서 잘 지켰으면 한다면 어떨까요? 이 곳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고 혼돈이 찾아오겠죠. 이런 곳에서 영원히 산다면 어떻겠습니까? 매 순간이 쉽지 않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은 자신을 위한 사람들이만 모여서 아수라장 같은 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따름으로 자신을 위하기 보다,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 현실은 어떻습니까? 제가 가정한 그곳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유익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법을 어기면서 까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고 개인주의가 심화되면서 남들의 유익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이 현실속에서 이러한 개인주의를 거스르는 집단이 있습니다. 모두 자신들을 위해서 살아갈때 자기를 부인하며 이웃을 사랑하기를 애쓰는 모임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로 모인 우리 입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이웃을 사랑하기를 힘쓰고 있다고 말하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줍니다.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며 요약을 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요한일서는 영지주의를 바탕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영지주의는 예수님의 육체를 믿지 않아서, 금욕주의 혹은 쾌락주의를 낳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어쩌면 이와 같지는 않는지 우리도 때로는 너무 금욕적으로 신앙생활 하려는 것은 아닌지, 혹은 예수님의 이름만 믿고 교회만 다니고 실제적 삶에서는 세상사람과 똑같이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습니다.
이어서 말씀은 들음에서 난다. 였습니다. 우리는 시각적인 것에 많이 이끌리지만 하나님은 어떠한 형상을 지으시고 그것에 경배함으로 예배하라고 하지 않으셨고,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르며, 말씀을 통해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사랑함으로 예배하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전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인간을 정말 살아있게 하며,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찬양팀 올라와 주세요~~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분을 믿는 믿음 덕분에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을 선택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게 말씀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귐에 초대하신 분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이 세상이 존재하기 전 부터 맺은 사귐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것,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내가 믿고 싶은대로 믿는 것이 편하고, 당연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것, 쾌락주의자 처럼이 아니라,그냥 교회에 왔으니까 여기 와서 종교적인 활동만 하고, 세상에 살면서는 아무상관 살아가려 않는 것은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물론 절대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쉽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의 힘으로는 불가능 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어야 하고,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기도의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 함께 찬양하기 전에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여태 살아오면서, 내가 너무 종교적으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혹은 내가 믿고 싶은대로, 믿으려 했던 것은 아닌지, 아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은자인데, 그런건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아간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서, 이런 나에서 온전히 돌아서는 내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