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01(롬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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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01(롬 5:1-11) \
<서론>
Enjoy라는 단어를 잘 아실 것입니다. 「즐겨라! 누려라!」는 뜻입니다. 취미생활을 즐기고, 음식을 즐기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을 즐기고, 하나님을 누리라니」어색합니다. 어찌 보면 무례해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과 마주할 충분한 자격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롬 5:1-5은,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진 성도」는 그럴만한 충분한 자격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져,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된 성도」가 얻는 은혜가 무엇인지 상고하겠습니다.
<본론>
1.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1).
먼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1上)라며, 반복되는 내용이지만 그리스도인의 변화의 출발점이 ‘믿음’이라 밝힙니다.
바울은 참으로 집요합니다. 요즘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를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집요함은 가스라이팅 처럼 쇄뇌적 무한 반복으로 의미화 되도록 강요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바울은 5장을 시작하며,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지는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 설명이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δικαιωθέντες)라는 단어입니다.
디카이오뗀테스(δικαιωθέντες)는 원어로 풀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지속적인 동작’이 아니라, 단회적인 동작; ‘점동작’(부정과거분사)이라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ppt 상단, 믿음-X> 수준과 단계를 정해놓고 그 수행(노력 수고) 정도에 따라, 0%에서 100%까지 서서히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ppt 하단, 믿음-점을 찍듯 단번에> 우리가 믿을 때에 점을 찍듯, 단번에 의롭다 함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업사원처럼, 노력한대로 실적대로, 자격(의)을 주신다면, 우리가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평생 하나님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어제는 못해서 10%, 오늘 좀 잘해서 30% 누리자!).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 윤리의 행함이나 공로가 전혀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순간 그리고 단번에, 의롭다 여기시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자격을, 점을 찍듯 ‘꽝!’하고 주셨습니다.
한번 찍힌 은혜의 도장(印)은, 우리에게 더 이상의 노력과 수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증과 자격만 주어집니다. 그래서 더 이상 눈치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 있게“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1下)합니다.
바울이 말하는‘화평(에이레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해한 관계적 상태를 설명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모든 관계에서 우선하는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믿음은 하나님과 화평(화해)의 관계가 되게 하여,‘평강(샬롬שָׁלוֹם)’을 누리게 합니다.
예를 든다면, 가정에서 부부간, 부모 자식 간, 형제자매간의 관계에 화평이 없다면, 절대 그 가정에는 평안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화평하는 복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평한 성도만이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하면, 하나님의 샬롬(평강)이 임하여, 환난이나 고난 중에도 마음이 고요하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하면, 걱정거리가 아무리 많아도, 샬롬(평강)은 사라지지 않기에, 광풍처럼 요동치는 현실에서도 전혀 동요치 않고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는 은혜를 얻습니다(2上).
두 번째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한 성도는, 신분이 변화 되어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는 은혜’을 얻습니다.
미국의 문호 마크 트웨인이 1881년에 쓴,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빈민가 술주정뱅이 의 아들인 거지「톰 캔디」가 「에드워드」왕자와 옷을 바꿔 입자, 엄청난 일이 벌어집니다.
식사를 위해 구걸을 해야 했으며 술주정뱅이 아빠에게 학대당하던 「거지」톰 캔디가 「왕자」의 신분으로 변하자, 이제 왕궁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은 물론이고 왕 앞에까지 언제고 갈 수 있게 됩니다.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2上)의 뜻은, ‘믿음으로 의로 여겨져 하나님과 화평한’ 성도는, 신분이 변화되어, 이제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는 은혜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들어감”(프로사고게)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특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단어‘들어감’을, 히브리서 4:16과 히브리서 10:19에서 ‘나아감’으로 사용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下)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성도는 제사장 마리아 성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 하였기에, 감히, 직접,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특권을 누림을 믿으십시오.
그렇다면, ‘나아감’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언제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고(요 14:13–14),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수 있고(요 4:24), ‘누구든지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송’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히 4:16; 벧전 2:5, 9; 계 1:6).
구약의 지성소는 그야말로 아무나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없는 성역이었습니다. 일 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대사장이 다리에 방울을 달고 들어갔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왜 방울을 달았나요? 혹여 부정함으로 죽는다면 생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보좌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는 감히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아버지를 직접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성경을 읽다가도 ‘여호와’라는 단어만 나오면, ‘아도나이; 주님’이라고 읽거나, 묵음‘입술만 들썩임’으로 대체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성도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기에, 그 후부터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성도라면, 누구든 예배에 나아 올 수 있으며, 언제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으며, 누구든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입을 열어 찬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이미 얻었습니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담대해 지십시오! 믿음의 담력을 가집시오! 하나님의 은혜에 보좌에 나아오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눈치 보지 말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 이름을 통하여 예배하고, 예수님 때문에 여호와의 성호를 맘껏 찬양하며,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는 은혜를 누리는’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2下-5).
세 번째로,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2下) 여기서 ‘즐거워하다’(카우카오마이)의 원어적 뜻은 ‘자랑하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로부터 너무 좋은 선물을 받고 ‘이거 ~ 아빠가 주신 거다!’하면서 즐거워하며 자랑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랑은 세상의 물질이나 쾌락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는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값진 보물을 가진 사람은, 그것 외에 다른 무엇을 보여주어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한다’고 말합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3)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下, 4)
먼저 단어들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환난”은 ‘곤경’, “인내”는 ‘참는 것’, “연단”은 ‘시험을 이길 수 있는/이겨낸 상태’, “소망”은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믿음을 설명하는데, 기가 막힌 언어유희를 합니다. 3절 4절의 단어들을 재배열하면, 놀라운 두 문장이 완성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소망하여 즐거워하기 때문에, 「환난」곤경도 즐거워하며, 「인내」참아내어, 마침내 「연단」시험을 이기고, 하나님만 「소망」바라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소망」”(2下)으로 시작하여, 결국은 “소망「바라는 것」을 이룰 줄 안다「경험한다」”(4下)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이 「소망; 바라보는 것의 보증」이 「성령이시다」로 결론을 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하나님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자는 그 소망이 부끄럽지(실망되지) 않도록,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보증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고 의지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실패로 끝난다면,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롬 9:32; 10:11).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성령님)이,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유일하고 가장 확실한 보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놀라운 메시지를 줍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위해서는 빌리는 돈의 가치보다 더 가치 있는 물건(物件)을 담보함으로 빌려주는 돈을 보증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기 때문에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다’(히 6:12)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맹세는, 하나님이 직접 보증하신 것이기 때문에 어느 무엇 하나 실패하거나 좌절되지 않고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우리는, 결코 무너지지 않음을 믿으십시오!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보증이신 하나님(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화평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복」, 「하나님과 화평을 누림」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복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요 14:27).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복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있는데도 지금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 문제가 무엇인가 심각하게 진단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해답은, 의외로 아주 가까운데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1)라고, 간단하지만 명료하게 답합니다.
예수를 믿었음에도 여전히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에게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만 집중한다는 것의 의미는 모든 내 시선을 예수님에게만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믿음 때문에, 단번에 나를 의롭다 여기신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만 생각하십시오. 「나는 지우고」,「오직 예수」 「오직 믿음」만 있게 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림으로,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는 은혜를 얻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