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정의하신 가정(막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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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수많은 캠페인들이 생기고 또 다양한 이벤트들이 많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스승의 주일, 부부의 주일 등 한 주 한 주마다 주제를 정하여 지키기도 합니다.
가정의 달이 생긴 이유는 가정의 소중함을 잊고 지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세상은 가정을 함께 살아가는 모임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정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해주십니다.
오늘 본문 속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여전히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왔고 예수님께서는 이전과 같이 가르치시고 고치십니다. 그러던 중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와 묻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이 질문은 윤리를 넘어 정치적으로 연결된 질문이었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헤롯이 자신의 아내였던 파사엘리스와 이혼하고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그를 책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세례요한은 헤로디아에 의해서 처형을 당합니다. 이혼은 대답하기 어려운 아주 민감한 주제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두 가지 목적으로 예수님께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째로는 이런 정치적 이슈에 예수님께서 발을 담그도록 유도하여 로마의 심판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둘째로는 정말 예수님의 답변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리새파에서도 이혼에 대하여 긍정적인 힐렐파가 있는 반면 부정적으로 보는 샴마이 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딜레마에 속에서 허를 찌르는 접근으로 명답을 내려주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합니다. 우리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접합니다. 이것이 맞나 저것이 맞나 고민하고 있을 때에 성경은 ‘하나님이 옳다’라고 대답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십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이혼 증서를 써주면, 이혼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이 생긴 이유는 너희의 완악함 때문이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완악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입맛대로 사용하여 자기 마음가는 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 당시에 이혼은 굉장히 흔했습니다. 심한 경우 남편의 말 한 마디로 여자를 내쫓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혼은 흔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소위 성격 차이로 인한 헤어짐, 갈라섬으로 인한 이혼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분위기였고 유대인들 중에서도 힐렐파는 아무런 연고 없이도 이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을 보호하고 이혼을 쉽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모세를 통하여 이혼증서라는 율법을 정하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은 이혼장려가 아닌 이혼을 막기 위함이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가정에 대해 정의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정리해주신 가정을 좀 더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길 소망합니다.

가정은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어있는 공동체다.

예수님의 첫 번째 가정에 대한 정의는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정하신 질서요 섭리입니다. 이 질서를 따를 때에 가정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세상의 소리를 들어보면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질서와는 맞지 않는 관계를 가정이라고 부르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가정 안에서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가정도 보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질서가 아닌 내 생각과 욕망에 대한 집착으로, 완악함으로 가정이라는 개념을 오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대에 휩쓸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와 말씀을 내 생각과 마음대로 바꾸고 남용하지 않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완악함으로 세워진 가정은 관계에 문제가 생기기 쉽습니다. 가정은 정서적 외로움이나 쾌락만을 채우기 위한 목적의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정은 어떤 공동체일까요? 제가 결혼하기 전 목사님께 교육을 들을 때 이런 내용을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정을 세워야 하는 이유는 사랑도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대한 순종적 측면 때문이다. 여기에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것 또한 하나님의 질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함으로 가정에서 자녀를 낳고 키우고 그 안에서 인격적인 하나님께 힘과 지혜라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우리의 완악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함으로 가정을 세워나가다 보면 우리는 가정 가운데에서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또 경험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이사야나 호세아서를 통해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부부관계나 자녀관계를 통하여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씀해주시고 또 경험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 안에 또 은혜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가정은 사랑이 넘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계좌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끊임없는 사랑을 받길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사랑을 하려하면 언젠가 잔고가 0이 됩니다. 잔고가 떨어지면 티가 납니다. 사랑이 떨어진 관계에는 곧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면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 사랑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사랑이 넘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을 잠시 잊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하나님께 다시 사랑을 받아 공동체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뜻과 욕심이라는 완악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주인인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특별히 가정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권위에 순종함으로 넘치는 사랑을 받고 배우자에게 그리고 자녀와 부모에게 다시 흘려보내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부모를 떠나 둘이 아닌 한 몸이 된 공동체다.

두 번째로 둘이 아닌 한 몸이라는 말씀은 가정은 육적으로 하나 되는 것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하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누군가와 온전히 하나되기를 갈망하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둘이 있지만 혼자있는 것 같을 때 가장 큰 박탈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타락했고 완악하기에 육적으로는 하나 될 수 있어도 영적으로 하나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밥은 함께 먹을지라도 마음은 서로 다른 곳에 있고 잠은 함께 잘 지라도 다른 꿈을 꿉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아내나 남편이 아니라 원수와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말도 듣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회복되어 영적으로도 하나 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명쾌한 해답을 줍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깨어진 것을 회복케하시고 화목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롬5:1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원수를 물리치셨고 우리와 연합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고린도후서 5장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화목케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리치신 원수는 아내나 남편도, 부모나 자식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속 완악함이요 하나 되지 못하도록 막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원수를 물리쳐주셨습니다. 이를 믿는다면 남은 일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 되어 화목하게 되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하나가 되기 위한 회복의 시작은 내가 먼저 예수를 바라보고 화목케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가정이 하나 되어 함께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이 함께 예수라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온전한 한 몸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속한 모든 가정이 예수를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완악함을 이기고 화목케하는 자가 되어 예수 안에서 영과 육 모두가 하나 되는 복된 믿음의 가정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임의로 나눌 수 없는 공동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가정은 임의로 나눌 수 없는 공동체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정의하신 가정은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가운데에 순종함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워진 가정은 인간의 뜻으로는 나눌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격차이로,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이미 하나가 된 둘을 큰 죄의식 없이 인간의 뜻만으로 나누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이 모든 이혼의 경우에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혼에 대한 법을 정해주신 것처럼 특별한 경우 성경과 법의 테두리 안에서 면밀히 살펴보고 이혼을 결정해야 하는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하는 것은 우리의 완악함 때문에, 우리의 생각과 욕망 때문에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가정을 임의로 다시 둘로 나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이혼의 영역에서만 적용되어지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또 가정 안에서 하나님께서 정한 질서가 있는데 우리의 임의대로 완악하게 행동하는 일들이 우리 삶에 없는지 돌아보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또 삶 속에서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정을 세우고 가정을 회복시키며 화목케 하는 직분을 잘 수행하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 우리 삶 속에서 완악함에서 돌이켜 하나님께서 만드신 질서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인데, 짝지어주신 남녀가 부모를 떠나 둘이 아닌 한 몸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세상은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질서를 깨고 악용하지만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지켜 가정과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날마다 하나님께 사랑을 충만히 받아 받은 사랑을 전하는 모든 성도님들과 그 가정이 되길 소망합니다.
또 우리 삶과 가정이 예수를 바라보길 소망합니다. 완악함이라는 원수를 이기고 영과 육이 하나된 가정, 예수로 회복되는 가정, 예수로 사는 가정이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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