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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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영광을 보다
이 땅에서 영광을 보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저자 요한사도는 ‘’ο’ υιοσ του Θεου’ 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5:1-8:11 절까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시고 이어지는 긴 논쟁을 8:12-10:42절까지 살폈습니다. 그 결론은 세례 요한이 증거가 모두 참이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전합니다. 오늘부터 살필 11장과 12장은 예수님의 공적 사역에 극적인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11장은 6번째 기적인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을 통해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부활과 구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몸) 유대인 지도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죽이고자하는 모의가 구체적으로 진행됩니다. 요한복음 11:47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53절에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게 됩니다.
12장은 ‘유월절 엿새 전에’라고 말하면 마리아라는 여인이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멀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는 사건으로 시작해 예수의 죽음을 향한 일련의 과정이 시작되는 부분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시작인 ‘어떤 병자가 있으니’라고 시작하는 변화는 앞서의 예수의 정체성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과 12장의 새로운 시간의 시작 사이에 위치해 마치 책의 접히는 부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을 통해 죽음과 생명이 눈 앞에서 기적처럼 등장함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죽음을 이긴다 등 ‘ό υιοσ του Θεου’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름’, ‘생명을 얻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이 여기에서 멈춰섭니다. 죽고 산다는 경험이 흔한 것도 아니며, 그와 유사한 죽을 고비 앞에서 살려달라는 간절함으로 죽다 살아났다고 할 때 유사한 경험처럼 말합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이 기적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병자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인데 오히려 마리아를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그녀가 한 일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았던 그녀입니다. (복음서 미리 알고 있다 눅7:36-50, 막14:3-9 마가는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누이들은 병든 오빠를 위해 예수께 사람을 보내에 이 사실을 알립니다. 4절에 예수의 반응은 ‘죽을 병이 아니다’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인데 그 내용이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한다고 조금은 이해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 혹시 앞서 9장의 맹인을 고치시는 사건을 통해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표현을 기억하십니까? 저자인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36번의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δόξα) 1: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대표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좀 더 기억력이 좋으신 분이시라면 첫 번째 기적인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물로 변화하는 기적을 보여 제자들에게 믿게 하시고 이 표적을 가리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부정적으로는 5:41절에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표현을 보니 영광이라는 단어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으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올림픽에 선수가 나가서 금메달을 따면 ‘영광스러운’ 이라는 부사가 그 선수의 금메달을 딴 모습을 말해줍니다. 4년 동안 그보다 더 오랜시간 운동하면서 선수가 진정한 선수 다운 모습을 메달이라는 결정의 장면을 통해 함축한 말이 ‘영광스럽다’는 것이죠. 그렇듯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어렴풋 여러가지의 형태로 알 수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표현은 하나님이신데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이죠./ 마치 우리 집에 우리 교회에 아주 높은 위치의 누군가가 방문한다던지 또는 저와 여러분이 꿈에 그리던 장소에 방문을 할 때 ‘오셔서 영광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어 영광입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자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온 것은 지극히 큰 영광입니다. 그러하신 분이 기적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는 일을 통해 ‘영광스러움’을 우리는 보게 된 것이죠. 저와 여러분이 진천 선수촌에 가서 선수들이 엄청난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본다면 정말 믿기지 못한 모습을 경험하게 되죠. 예를 들어 예능 프로에 국가 대표를 하거나 한 사람들이 전혀 다른 축구를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보다가 실제로 경기를 한 사람들이 하는 말은 ‘체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광은 보기만 해도 드러나고, 경험을 하면 더 확실해지는 것이죠. 이런 것처럼 사람도 ‘영광’을 취합니다. 성공한 것, 출세한 것, 돈을 많이 번 것이나 재주가 뛰어난 것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영광을 취할 때 오로지 영광을 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속담에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에 재미있는 표현은 토끼가 왕노릇하는 우수운 상황을 빗댄 말이지만 이미 호랑이라는 존재가 있었고 부재한 상태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죠. 즉 토끼는 호랑이가 가진 우월한 어떤 것들을 마치 자기 것인냥 있는 체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의미는 유대인들이 영광이요 빛으로 오신 예수님 즉 이미 구약의 예언을 따라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셔야할 마땅한 영광을 스스로가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사건은 부활 사건의 맛보기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생명을 주신다는 놀라운 사역의 맛보기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현실은 나사로의 고통, 누이들의 고통입니다. 6절에 ‘들으시고’ 그럼에도 ‘이틀을 더 유하시고’ 7절에 ‘유대로 다시 가자’합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지금의 상황인 ‘돌로 치려 하였는데 도 그리로 가시려 합니까’라는 답을 합니다. 5절에 예수는 이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있는 곳은 예루살렘의 근처요 예수를 돌로 치려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오히려 말리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문제는 너무 자주 있습니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세상에는 이걸 들어주면 저것이 문제가 되고 저걸 들어주려니 내가 곤란을 겪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개인사야 그렇다고 하지만 가장이나, 회사의 사장, 그룹의 회장 더 나아가 정치인과 대통령 등 어떤 결정을 해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더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유대에 다시 가는 것은 정말로 불미스러운 일 즉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것이죠. 그러나 사랑하는 이와 그 가족의 아픔 역시 결코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럴 대 보다 먼 곳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런 상황을 아실 뿐만 아니라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 편에서, 사람 편에서의 일들에 대한 ‘너희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답이 요한복음 11:9–10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입니다.
쉽게는 옳은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의 법칙을 가지고 밝을 때 움직입니다. 예를 들어 한라산 처럼 높은 산에 오를 때 입장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평균적인 시간 즉 어둠이 내려 앉기 전에 하산해야 하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 그렇게 정해 놓은 것이죠. 정상 근처에 가서도 이 시간에 여길 통과하지 못한다면 중간이라도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내려가라는 조치입니다. 우리 삶에도 그런 때가 있습니다. 늦은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때를 맞춰서 살아야 하는 것을 낮과 밤이라는 대비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보는 것은 실족하지 않는 것’, 어둠인 밤은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한다고 하는 비유는 낮에 다니면 외부의 빛이 우리에게 인식케 하는 일반적인 것이라면 어움은 빛이 없음보다 더 위험한 ‘그 사람 안에 없는’ 상태의 모습을 말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밤에는 무서워 난 안나가는데요 하면 맞습니다. 그런데 밤이라고 우리가 안사는 것은 아닙니다. 동면하는 동물을 보십시오. 그들의 세계는 오직 낮에만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어두운 세계인 밤도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세계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법으로 지키고자 여러 법을 만들지만 사건 사거는 여전히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회전 신호 원칙을 만들었지만 사고가 일어나고 그렇게 만들어 놓으니 핸드폰을 보면 걷는 아이들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습니다.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다’는 조건은 비록 법이 우회전 차량을 법적인 통제로 못하게 한다고 해도 내 속에서 ‘걸으며 스마트 폰을 보는 것은 위험’이라는 ‘아는 힘’이 ‘나 하고 싶은대로 할 거야’라고 하는 어둠을 이기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어둠은 외부의 태양 빛이 없는 시간이 아니라 진짜 어둠은 내속에 ‘빛’이 없는 것입니다. 1장 4-5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개닫지 못하더라’입니다. 여러분 태양의 빛 1% 만으로도 지구는 어둠 없이 빛의 영향 아래에서 살고 남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 촛불 하나는 어슴프레 하지만 어둠을 물리칩니다. 적과의 교전 상태에 밤에 빛 한줄기는 부대의 위치를 노출시켜 위험 천만한 상태가 될 만큼 치명적입니다. 그럼에도 사람 속에 있는 어둠을 밝히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진짜 문제는 죽음에 임박한 나사로 보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둠’이야 말로 죽음을 향하는 고속도로와 같은 것입니다. 우회전 하는 차량이 신호를 잘 지켜서 나를 보호해 줄꺼야 맞습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도 걸으며 주위를 잘 살펴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조심해야 하고 그래서 건널목을 건너거나 걸어 다닐 때는 스마트 기기를 안보는 것이 법으로 쓰여지지 않았다고 해도 올바른 판단이야라는 내면 세계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유대로 올라가면 외부적인 요소는 돌로 치려는 위협이 있지만 그럼에도 ό υιοσ Θεου 로 영광을 받게하려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길로 걸어가야 하는 빛의 길을 가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빛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 내적인 어둠을 밝혀 실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하루 하루가 소중합니다. 때론 동면하는 동물처럼 잠에 취해서 때론 스스로 육체의 약함에 취해서 당연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건강을 위해 밝은 낮에 걸어야 하고 우리 마음을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책을 읽어야 합니다. 또한 살아가는 다양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보다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며 ‘저 사람의 생각은 이렇구나’하면서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시간은 영광을 향하여 맞춰졌고 더 확실하게 비춰집니다. 친구 나사로의 잘들었음을 아시고 깨우러 가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사로의 죽음을 알 수 없습니다. 13절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슴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이라고 알았습니다. 우리는 ‘내 마음을 그렇게 모르냐’하지만 말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내적인 상태야 오죽하겠습니까? 예수는 ‘나사로가 죽었다’라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5절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어찌들으면 그렇게도 예수께서 오시길 원했던 누이들의 마음도 모르시고 이렇게 말하실까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간다하면서도 이런 말을 따라 가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예수님 처럼’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생의 생노병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위로에 맞는 말을 전해야 하고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실 말씀으로 넘어서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실 ‘영광’ 그리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은 제자들의 상황이 아직도 믿음의 분량이 자라나지 못한 상태임을 반증합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등장합니다. 그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표현은 어리석고 내면의 자기 정체성이 부족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마치 아이들이 부모에게 ‘하면 될거 아니야’하면서 투덜거리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상황을 대하는 자세는 하루 아침에 습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사실 조차 좋은 습관을 길들이듯 하나님의 말씀을 곁에 두고 교회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가운데 자라납니다.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은 그야말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 너머의 ‘하나님의 영광’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선을 갖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과 같습니다. 저자 요한은 그들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때에 깨달았다고 자주 언급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그와 같은 비슷한 상황에 있더라도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의지하며 끝까지 붙잡고 경주해야 합니다. 교회를 일주일에 거쳐가는 곳으로 인식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열고 교회 구성원과 방문하시는 분들과 교제하고 이야기하십시오. 교제하십시오. 그렇게 관계를 타고 교회는 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