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믿음의 가정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9 views
Notes
Transcript

가정의 달

에베소서 6장 1~4절
한국의 가족 계획은 시대가 바뀌면서 상황이 바뀜에 따라 구호도 바뀌고 원하는 방향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의 모습은 상황이 바뀌든 시대가 바뀌든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라고 경험한 가정이 어떠했든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가정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가정을 이루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1. 로마 시대의 자녀들
고대사회에서 기독교는 여성들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처음 조선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 많은 선교사들이 학교를 지었는데, 특히 여학교들을 지어서 그 졸업생들이 20세기 초반 조선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이 고대사회의 여성들의 권익을 높여주었지만, 어린이들의 삶에 미친 기독교의 영향은 더욱 컸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즉 1세기 로마제국에서는 아이들의 삶을 특히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권한은 그 힘이 막강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감옥에 가두고, 때리고, 결박하고, 노예로 팔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벌을 줄 때는 어떤 방법이든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죽일 수 있는 권리도 있었습니다. 그런 권리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자녀가 장성하여 성인이 된 뒤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살리고 죽일 권리도 아버지에게 있었는데, 약하거나 기형으로 태어나면 아이를 합법적으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들을 원하는데 원하지 않는 딸이 태어났을 경우 버리거나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살던 로마 사회에서 자녀는 아버지의 권한에 완전히 옭아매어 있는, 아주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인권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물건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받아들일 것인지, 버릴 것인지도 아버지가 결정하던 억압적인 상황이 바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쓰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가지고 성도들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놀랍습니다.
2. 그리스도인 자녀와 부모의 책임과 역할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1절)
여기 보면, 자녀는 자기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 ‘이것이 옳다’라고 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2-3절)
여기서 다시 한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라고 하면서,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에서 제5계명입니다. 거기에 자세히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 (출 20:12)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수뿐 아니라 그 땅에서 계속 형통하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오래도록 살 것이다. 형통하게 살 것이다.’라는 차원에서 약속이 주어진 첫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녀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르침은 로마 사회에서 특이한 내용이 아니라 아주 흔한 교훈이었습니다. 폭압적인 로마 사회였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흔한 교훈이었습니다. 그 당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신들에 대한 공경과 더불어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에 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신들을 공경하는 것과 함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부모 공경은 십계명의 제5계명이었을뿐 아니라, 많은 지혜 문서들이 강조하는 윤리였습니다. 한국도 대대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라는 가르침은 사회의 전통과 미덕입니까, 아니면 성경의 가르침입니까?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오늘 본문의 명령이 사회에서 가르치는 윤리 도덕과는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1절을 다시 잘 보십시오.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 안에서”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은 단순한 부모 공경의 미덕에서 한 차원 더 올라가서, 모든 자녀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교훈이었습니다. 로마 사회에서 자녀는 당연히 부모에게, 특히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했지만, ‘주 안에서’ 즉 ‘주님을 경외하는 내에서, 주님의 뜻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순종하라는 것이고, 주님의 본을 따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저 사람이 내 마음에 안 드니까 너는 가서 칼로 찔러 죽이고 와라.’라고 하면, 로마 사회에서는 해야 하지만, 주 안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주님의 뜻 안에서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모를 주님과 구분시키는 동시에 주님 다음의 자리에 놓고 있습니다. 주님보다 더 앞설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공경하라. 그런 다음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부모를 공경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것을 악용한 것이 예수님과의 대화에도 나옵니다. ‘고르반’이라고 해서 부모에게 드려야 할 선물을 이미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면서 부모에게 드리지 않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미 하나님께 바쳐서 성전에 가져다가 드렸기 때문에 부모님께 참 드리고 싶지만 못 드립니다.’라고 핑계 대며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을 마가복음 7장에서 지적하십니다. 신앙을 핑계로 부모를 공경하기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제일 우선적으로 섬기고, 그다음에 반드시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부모가, 특히 아버지가 자녀를 자기 마음대로 다루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녀가 비신자인 아버지에게 핍박을 받고 폭력을 당할 때 ‘그래도 순종하라. 그런데 주 안에서 하라. 주 안에서 사랑과 존경으로 순종하라.’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답게,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부모님 앞에 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4절)
왜 ‘아비들’만 지적합니까? 당시 로마 사회에서 자녀교육의 책임이 주로 아버지에게 있었기 때문이고, 또 사회 통념처럼 아버지들이 자녀들을 폭력적으로 다루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권한이 막강한 시대에 사도 바울은 아비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4)라고 가르친 것이니, 이것은 정말 혁명적인 것입니다. 아비들은 자신이 가진 권리를 남용하지 말고, 자녀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해주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라고 해서 자기가 권리를 행사할 대상이나 자기 재산처럼 보지 말고, 자녀를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인격으로 대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녀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고 말씀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고, 부모도 자녀를 “주의 교훈(훈련)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가정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버지가 아닙니다. 부모가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그것을 깨닫고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 중심의 가정생활을 하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교훈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뒤집어보면, 그 당시 아버지들의 권한 남용 때문에 수많은 자녀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고 또 마음속에 ‘노여움’으로 가득했었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왜 다른 말 중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겠습니까? 그토록 무자비하게 폭력적으로 하니까 아이들이 당하면서도 마음속에 분노가 쌓이는 겁니다. 그래서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노여움’ 즉 분노가 바로 상처입니다.
3.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상처들
내적 치유를 하는 분들이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옛날만이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에 어릴 적에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특히 아버지로부터 상처받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그러한 상처가 자기도 모르게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실제로 폭력을 당했을 수도 있고, 특히 말로 하는 언어폭력이 더 심각합니다. 맞은 것은 상처가 조금 있으면 아물지만, 언어폭력을 당한 것은 마음에 확 박혀서 몇십 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분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사실 자기 자녀에게 상처를 주려고 일부러 노력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실수하고 상처를 줍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인간은 다 깨어진 아버지의 이미지를 갖고 있고, 그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로 자기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이것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완벽한 부모처럼 보이고, 완벽한 가정처럼 보여도 거기에서도 다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는 부모님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자라고, 또 부모가 되고서는 다시 자기 자녀에게 상처를 줍니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절대 내 자녀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몰라도, 그럼 자녀에게 물어보십시오. 정말 한 번도 상처를 안 받았는지?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상처를 주었느냐 안 주었느냐가 아닙니다. 다 주었습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다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느냐가 문제이지, 안 준 사람도 없고 안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3.진정한 치유와 회복의 길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상처들을 갖고 살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치유를 받고 회복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1)라고 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4)라고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결국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밖에 해결책이 없습니다. 아무리 무슨 심리치료를 받고, 요법을 받고, 상담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중심이 되시면 됩니다. 주님이 나의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가정의 왕으로서 다스리시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육신의 부모님이 살아 계시든지 돌아가셨든지 상관이 없이,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 가정의 중심이 되실 때 더 이상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뭡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와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공적인 예배이고, 개인 예배, 즉 말씀을 스스로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중요합니다. 공적인 예배와 개인적인 예배가 모두 중요합니다.
성전에는 성전 뜰이 있고 건물인 성소가 있습니다. 성소의 앞에 휘장이 쳐져 있는데, 그 앞에 지성소입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성전 뜰만 밟고 가는 정도가 아니라, 깊숙이 들어가 정말 그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뵙는 예배, 우리 자신이 제사장이 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죄 용서의 체험, 은혜의 체험, 결단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거기에 진정한 치유가 있습니다. 따로 내적 치유나 상담 요법을 안 해도, 정말 예배를 제대로 드리면 우리는 치유될 수 있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읽어보면, 솔로몬 이후에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었는데, 북이스라엘에는 선한 왕이 하나도 없이 다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그래도 남 유다는 다윗의 후손이 왕위를 계속 이어가면서, 나중에 바벨론에게 멸망할 때까지 이어 갔습니다.
유다에 왕들이 19명(또는 20명) 있었는데 아주 훌륭한 왕들이 있었습니다. 바른길을 갔다는 평가를 받은 왕이 8명인데, 그 중 3명(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은 ‘다윗의 길을 걸었다.’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만 해도 그 아버지 아하스가 아주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런 악한 왕에게서 어떻게 이렇게 히스기야 같이 훌륭한 왕이 나왔는지 정말 의문입니다. 그런데 또 히스기야처럼 종교개혁도 하고 다윗의 길을 걸으며 정직해 행했던 훌륭한 왕 아래에서 므낫세라는 최악의 왕이 나왔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요시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시야는 너무 훌륭했는데, 아버지도 악한 왕이었고 아들들도 전부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거기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가만히 성경을 읽다 보면 바로 거기에는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 읽어보십시오. 북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은데, 남 유다 왕 중에 ‘OOO가 OO년에 왕이 되었다. 왕의 어머니 이름은 OOO이고 OOO의 딸이다.’ 또는 ‘OOO 출신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도 그렇고 요시야도 그렇습니다. 악한 왕들도 그렇게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의 역할은 하나님이 가장으로 맡겨주셨는데, 외부로부터 내 가정을 보호하는 역할, 가정의 방향을 잡는 역할을 주로 하는 겁니다. 그럼 어머니의 역할은 뭡니까? 내부에서 자녀들을 잘 양육하고 다독여주고 바른 방향으로 가게 밀어주는 역할입니다.
아버지는 끌고 가고 어머니는 밀어주는 역할을 맡겨주셨다는 것을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방향을, 어머니에게는 밀어주는 역할을 주셨습니다. 물론 예외의 경우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무리 앞에서 이끌고 가도 어머니가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그 아들은 악한 왕이 된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악한 왕으로서 잘못된 방향으로 막 나아가더라도, 집안에서 어머니가 믿음으로 아이를 잘 양육했을 때, 훌륭한 믿음의 왕이 된 겁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바로 서면 가정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바로 섰는데 어머니가 바로 서지 못하면 그 가정은 정말 힘듭니다. 어머니는 바로 섰는데 아버지가 바로 서지 못해도 역시 힘듭니다.
그래서 아버지도 중요하고, 어머니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아이의 미래가 달려 있다.’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가정, 다시 말해 주님이 중심에 계신 가정, 주님이 다스리시는 가정, 그런 가정이야말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며 아름다운 가정입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실 때 이것이 가능합니다. 가족 모두가 예배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치유와 회복의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이렇게 주님 중심의 가정이 되어 주님께 기쁨을 드리며, 놀라운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우리 교회 모든 가정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