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최선과 하나님의 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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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1~10
가정의 달 5월을 맞으면 ‘가정’에 관한 주제로 설교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조금 소외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슬하에 자녀가 없는 분들, 일찍 부모님을 여읜 분들, 연세가 지긋하셔서 자녀들이 모두 출가하고 두 분이 따로 사시는 분들이나 반대로 아직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지 않은 분들에게는 이런 주제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5월 가정의 달이면 목회자들이 늘 그렇게 정형화된 가정만을 염두에 두고 메시지가 전해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요. 저도 그럴 수 있겠다 싶어서 적용 범위를 좀 더 확장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즉 혈연에 근거한 가정을 넘어 영적인 가정으로 그 범위를 확장해서 본문을 보고 원리를 찾고 적용하는 방식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데요.
오늘 살펴볼 본문은 모세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애굽에 살고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에 70여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40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200만 명 이상으로 불어나자 애굽의 두려움이 되지 않았습니까? 모세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는 위대한 이야기의 주인공이죠.
그런데 사실 이 이야기는 모세에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모에게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는 성경의 많은 인물이 단지 자신이 살던 때에 믿음을 갖게 되어 그 믿음으로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기보다는, 일찍이 그들에게 믿음을 전수하여 준 이들이 있었다는 기록을 많이 보게 됩니다.
자, 그럼 먼저 모세의 탄생과 성장을 위해 모세의 부모가 한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1-4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강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오늘 설교는 출애굽기 1장에 나와 있는 사건들을 알지 못하고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인데요. 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을 숨겨야 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3개월쯤 된 아기를 왜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 강가에 둬야 했던 것일까요?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후손 70명이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의 인도를 받아 애굽의 고센 지역에 들어가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400여 년이 흐른 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조가 애굽을 집권하게 되죠. 그런데 그 새로운 왕조가 보기에 히브리인의 수가 너무 많은 거예요. 히브리인의 수가 계속 늘어나 폭동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한 애굽 왕조는 본격적으로 히브리인들을 핍박했습니다. 더 많은 노역을 시켜서 죽게 만들어서 인구를 줄이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생각만큼 인구가 줄어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마지막으로 나온 명령이 출애굽기 1장 22절입니다.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여러분, 이게 뭔가요? 한시적으로 얼마동안 히브리인 남자아이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는 것이죠.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바로 모세가 태어난 것 아닙니까? 모세의 부모는 태중의 아기가 여자 아기이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그래야 사니까요. 그런데 남자아이가 태어난 거죠. 부모가 이 아기를 바로의 명령대로 나일강에 던져야만 했는데,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부모는 3개월 동안 아기를 숨겨야만 했는데요. 그런데 3개월이 넘어가면서 모세를 숨겨 키우기가 어려운 거예요. 아기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고 아기를 키우는데 필요한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는 이웃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개인주의적인 분위기이지만, 모세 시대는 그러질 않았습니다. 이웃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을 알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던 거예요.
결국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위해 특별한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요.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러 나오는 나일강 강가에 모세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십계>를 보고 오해할 수 있는 게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나일강에 흘려보낸 것이 아닙니다. 영화에서는 그렇게 묘사되지 않습니까? 흘려보낸 게 아니라, 잘 만든 특별한 요람에 모세를 담아, 바로의 딸이 지나가면서 볼 수 있는 강가에 둔 것이죠.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볼 수 있도록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에게 그 근처에서 지켜보도록 지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부모가 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세의 부모가 한 일을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아기를 강에 띄워 보낸다는 것은 당시 히브리인들 사이에서도 독특한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은 대부분 그 시절에 아들을 낳으면 진짜 나일강에 던졌을 것입니다. 또는 아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숨겨 키우다가 발각되어 어려움을 겪게 된 이들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모세 같은 방식으로 키워진 경우는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것을 믿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23 합독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 ‘믿음장’ 아닙니까? 우리는 언뜻 23절의 내용을 보면서 “믿음으로 모세가”라는 구절 때문에 모세의 믿음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행동하는 이는 모세가 아니라 모세의 부모였던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가 모세 안에 있는 특별한 것을 알았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당시 스스로를 신이라고 여겼던 바로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기를 키우기로 결단했던 것입니다. 그럼, 왜 하필 3개월이 지난 후에 모세를 나일강에 띄웠을까요? 그사이에 믿음이 없어지고 바로의 명령이 두려워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출애굽기를 기록한 모세는 그 사건이 믿음이 없어 생긴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한 단어를 통해 보여주시는데요. 2장 3절에 나오는 아기를 담은 상자를 의미하는 특별한 단어가 바로 그것입니다. 즉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위해 “갈대 상자”를 만들었다고 하죠. 여기서 ‘상자’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바로 히브리어로 테바( תֵּבָה )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딱 두 번밖에 쓰이지 않는 아주 희귀한 단어이기도 한데요. 다른 한 번은 어디에 쓰였을까요? 창세기 6:14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테바)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이 노아가 만든 ‘방주’를 가리킬 때 쓰인 단어가 바로 ‘테바 ’입니다. 어떤 식으로 아기가 살아남을지는 모르지만, 모세의 부모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기를 위해 갈대 상자를 만들면서 이 상자가 ‘자식을 위한 구원의 방주’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만든 상자에 3개월간 키운 아들을 넣은 것이죠. 하나님이 이 아들을 구원하실 것이고 이 아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한 행동이었습니다. 아기를 키운 것도, 아기를 갈대 상자에 넣은 것도 다 믿음으로 한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생명을 걸고 아들을 돌본 것도, 그 생명 같은 아들을 강가에 띄운 것도 모두 믿음의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자, 그럼 이 믿음의 행동이 낳은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출애굽기 2:5-9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강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바로의 딸이 곧 목욕하러 나왔는데, 마침 시녀들이 주변을 점검하다가 갈대 사이에서 상자 하나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걸 가져와서 열어보는데, 그 속에 아기가 담겨 울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때 바로의 딸의 마음에 불쌍한 마음이 밀려오게 된 것이죠.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바로의 딸은 이 아기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명령 때문에 나일강에 던져진 히브리 사람의 남자 아기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바로의 딸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7절이죠.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고용해서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굉장히 극적인 것 같은데요. 여러분, 사실 이 장면에서 미리암이 등장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의심을 받을 거잖아요? 갈대 상자가 나일강가에 있는 것도 이상한데, 이 갈대 상자 안에 히브리 아기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아기를 보고 있는데 히브리 여자가 오더니, “혹시 유모가 필요하지 않으세요?”라고 한다면 누가 봐도 이 여자가 ‘아기의 엄마이거나 가족이겠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의 딸이 그 노골적인 사기에 속아줬다는 것 아닙니까? 9절에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아주 기분 좋게 속아줬습니다. 심지어 그 유모에게 임금을 주겠다고까지 합니다. 자! 그렇게 아기를 데려올 기약을 정하고 아기를 즉시 미리암의 손에 맡겨 친엄마에게 돌려보내게 된 것이죠.
이렇게 모세의 엄마, 모세의 누나, 모세의 새엄마인 바로의 딸, 이 여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모세를 살렸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이 세상 최초로 자기 자식에게 젖을 먹이면서 양육비를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직업이 없죠? 모세는 이렇게 어머니 품에서 자라면서 바로의 딸의 아들이라는 신분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모세가 태어나고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보았는데요. 알고 보니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세가 아닌 바로 모세의 부모 아닙니까? 어머니 요게벳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게, 분명히 이 모든 과정을 남편과 상의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 역시 “그 부모”가 믿음으로 그런 일을 했다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저는, 이제 이 이야기에 담긴 몇 가지 실천적인 원리를 정리해 보았는데요. 저는 이것을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부모의 최선”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녀나 손주가 있는 분이라면 자신의 삶에 적용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아직 자녀가 없다면 앞으로 자녀가 생겼을 때를 생각하며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 짝꿍으로 맺어진 분들도 그 아이가 내 영적 자녀라고 마음으로 품고 적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품어야 할 모세의 부모에게 배워야 할 첫 번째 최선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기’입니다. 여러분, 모세의 부모는 바로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바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구원자가 태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예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갓 태어난 남자아이들은 모두 나일강에 버리게 한 것이죠. 이와 비슷하게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때, 헤롯이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학살했던 것 다들 기억하시죠? 여기서 ‘바로 = 헤롯 = 사단 = 세상’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요. 계속해서 역사 속에서 일어나고 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도 우리 자녀가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고 그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자로 커 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부모들을 위협하고 있어요. 아이를 믿음으로 키우면 망한다고 겁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세상이라는 ‘나일강’으로 던지라는 거예요. 나일강은 애굽의 풍요를 상징했습니다. 나일강은 세상의 풍속을 상징하는 거예요. 이 세상이 말하는 다양한 기준, 수많은 평가 기준에 맞추라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 자녀를 키우는 엄마들이 가장 신경 쓰이고 부담스러워하는 모임이 뭔지 아세요? 또래 엄마들 모임입니다. 그 모임에서요. 거기서 세상의 수많은 가치관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가치관대로 내 아이를 키우지 않으면 엄마인 내가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아이가 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의 소리들이 말하고, 세상의 지혜자들이 이끄는 대로 아이를 키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바로의 말을 듣고 내 자식을 나일강에 던지는 것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부모인 여러분! 할아버지 할머니 여러분!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바로와 헤롯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단이 하는 거짓말에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모세의 부모는 바로의 명령을 어겼지만 모세는 죽거나 망하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다르게 키우고 믿음으로 키운 우리 아이들이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그 물에서 건져주시는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가하면 모세의 부모에게 배워야 할 두 번째 최선은 ‘자녀 안에 깃든 하나님의 꿈 바라보기’입니다.
모세를 보면서 그의 부모는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모세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봤을 때, 그 부모는 모세를 나일강에 던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은 그냥 주어진 생명이 아닙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뜻과 계획 속에서 우리에게 찾아온 한 생명 아닙니까? 지금 내 앞에 한없이 연약한 모습으로 있는 그 아기도, 정말 대책 없어 보이는 그 사춘기 자식도, 너무 오랜 시간을 헤매고 있는 다 큰 자식도 모두 하나님의 큰 계획과 꿈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부모는 바로 그것을 보는 사람 아닙니까? 믿음의 부모는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온통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한 인생을 평가합니다. 이런저런 시험을 봐서 평균 이하의 성적을 받으면 낙오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점수 때문에 부모는 실망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부모는 자녀를 그렇게 보질 않더라고요. 하나님이 내 자녀를 왜 이렇게 빚으셨을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 자녀가 가지고 있는 독특함에 주목하고 그 독특함과 개성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부모입니다. 큰 멍에는 자신이 지고 자식과 함께 그 길을 가려는 부모, 그래서 그 자녀에게 살길을 열어주고 함께 꿈꾸며 함께 기대하며 걸어가는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중요한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죠. 우리를 몹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보내신 자녀를 품고 이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 무엇인지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함께 멍에를 메어 주세요. 온통 보이는 것으로 내 자식의 가치를 판단하는 세상 속에서, 세상과 전혀 다른 기준으로 자녀를 바라보는 믿음의 부모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런가하면 부모가 해야 할 최선 세 번째는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입니다. 3절 합독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담아 나일강가 갈대 사이에 두고
여러분,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가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은 열심을 다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보게 되는데요. 하나님을 믿으니 자신은 기도만 하겠다면서 부모로서 마땅히 해야 할 양육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있는데요. 이분이 중학교 2학년 때,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던 친구가 있었대요. 결국 그 친구는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친구를 칼로 찔러서 결국 학교를 자퇴해야만 했습니다. 왜 그렇게 자신을 괴롭혔는가 했더니 그 친구는 교회가 너무 싫었는데, 마침 그 목사님이 목사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그렇게 괴롭혔다고 그래요. 알고 보니 그 친구의 엄마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는 교회 권사님이셨습니다. 새벽기도회에 가면 거의 3시간씩 기도하고 오셨대요. 그렇게 기도를 길게 하다 보니 중학생인 아들의 도시락은커녕, 아침도 제대로 챙겨주질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천 원씩 받아서 아침과 점심을 다 매점에서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 엄마가 늘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너는 잘될 거야, 내가 새벽마다 너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니까. 너는 잘 될 거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엄마의 그 말이 너무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나중에 교회에 불을 질러 버리겠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숨기고 3개월간 먹이고 입히고 키웠습니다. 3개월이 지나 더 이상 그 방식으로 키울 수 없게 되었을 때, 모세를 위해 갈대로 상자를 만들었고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정성스럽게 역청과 나뭇진으로 이중 방수 작업을 했습니다. 바로의 딸이 목욕하는 시간과 장소를 확인했고, 그 옆에 누나 미리암을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미리암에게 해야 할 말을 수도 없이 가르쳤을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잘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던 것 아닙니까?
여러분,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이에게 아침밥을 차려 주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성경을 읽어 주는 것이 아이와 함께 놀이공원에 가는 것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부모는 기도해야 한다고 자식을 방치해야 하는 게 아니고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자녀든 남의 자녀든 또는 영적인 자녀든, 그들이 자라기 위해 필요한 일상의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물질을 쓰고, 마음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죠.
제가 최근에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인 손웅정 씨가 쓴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라는 책을 읽었거든요. 아시다시피 손흥민 선수 아버지는 TV이나 각종 매스컴에서도 아들을 월드클래스 선수로 키워낸 훌륭한 분 아닙니까?
그 책의 중반부쯤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볼보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내 자식을 내가 가르친다는 것은 보통 꼼꼼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점검해야 할 것투성이다. 게다가 나는 좀 유난히 좋은 말로는 꼼꼼하고 나쁜 말로는 까다롭다 할 수 있는 인간형이었다.”
이제 이분이 아들 둘에게 10대 때부터 축구를 가르치는데요. 책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공다루기를 하는 기본기부터 사람 됨됨까지 모두 아버지인 손웅정 씨가 엄청 엄하게 직접 다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분은 손흥민 선수에게 단 한 번도 “너는 월드클래스 선수가 될 것이다.” “너는 국가대표가 될 것이다.”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오히려 언제나 두 아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면서 뛸 때 같이 뛰고 어느 때는 먼저 뛰기도 하고 늘 새벽에 먼저 일어나서 독서하고 두 아들이 학교를 마치고 오는 시간에 맞춰서 미리 운동장에 나가 흙바닥을 청소하고 바람 빠진 공들을 꺼내 하나하나 바람을 넣고 심지어 겨울에는 소금기가 있어야 눈이 빨리 녹으니까 겨울에 100포 이상의 소금을 구해서 운동장에 뿌리는 일도 직접 하셨다는 거예요. 잠깐만 게으르면 땅이 금세 질척거리니까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운동장을 정비하셨다고 합니다.
이분이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였냐면 한여름에 아들인 손흥민 선수를 나무 그늘에 두고 아버지인 본인은 땡볕에 나가서 손흥민 선수가 슈팅 연습한 공을 주워 오는 일이었대요. 그 한 여름에 얼마나 뜨거웠겠습니까? 그런데 아빠가 아들을 위해 땡볕에서 볼보이를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감싸고 돌면서 무슨 선수를 만들겠냐?”며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운동선수는 훈련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거예요. 아들이 훈련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자신은 땡볕에서 볼보이를 하는 게 부모인 자신의 역할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부모는요. 자식을 위해 기꺼이 땡볕에 서서 행복한 볼보이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너는 월드클래스가 될거야” 말로 손흥민 선수를 만든 게 아니잖아요? 손선수의 아버지는 축구를 가르치는 부모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분은 축구선수로서의 삶도 아버지로서의 삶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부모도 믿음을 말로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의 방식은 우리 아이들에게 삶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부모인 우리가 예수님을 보여주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의 부모처럼 부모인 우리의 사랑이 가장 구체적인 방식으로 자녀들과 다음 세대에게 흘러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가하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 인정하기’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자신들의 최선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신뢰했습니다.
바로의 명령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아기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기로 계획하셨다면 그 계획을 바로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일강가 갈대 사이에 갈대 상자를 둘 때도 마찬가지죠. 최선을 다해 상자를 만들었고 시간과 장소를 정했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딸인 공주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또 공주가 상자를 발견하더라도 그 안에 있는 아기를 보고 죽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인간의 모든 계획은 완전하지 못해요. 늘 불안 요소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부모는 갈대 상자를 그곳에 두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땅을 통치하시면서 무엇 하나 그분의 뜻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주 낙심할 수 있습니다. 목사인 저도 두 아이를 키우면서 몇 번이고 낙심하고 실망할 때가 있었습니다. 생각대로 안 되는 것이 더 많았습니다. 바로의 말이 맞는 것도 같고 나일강의 흐름이 옳은 것도 같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아무리 목사 가정이라도 이렇게 키우다가 우리 아이가 망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밀려올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열심히 키웠는데 자녀들이 내가 생각하는 믿음 안에서 살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닌데 자녀가 믿음 안에서 살아가 주질 않아요.
여러분, 우리는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운동장에 소금 포대를 100포씩 뿌려서 눈도 치우고, 공에 바람도 다 넣고 땡볕 아래에서 볼보이를 하더라도요.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이 상황이 답답하고 서운한 마음도 드실 거예요. 그러나 열매가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최선을 다한 후에 평안하게 그 결과를 만드실 하나님에게 의탁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믿음의 부모가 드리는 기도에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자녀의 생명이 주 안에서 발견되기를 구하는 부모의 기도를 자신이 섬기는 목장과 교회학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를 원하는 그 목장섬김이와 교사의 기도를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친히 그분의 때에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그 영혼들 가운데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주님을 향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는 모든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이 이야기의 결론을 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출애굽기 2:10 합독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모세는 결국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고, 어느 정도 자란 후에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의 손자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 배우며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의 딸이 이 아기에게 ‘모세’ 즉, ‘물에서 건져내다’라는 이름을 붙여 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이렇게 되리라 생각이라도 했을까요? 그저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 앞에서 자식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너무도 예상 밖의 일이죠. 죽을 수밖에 없던 아기, 갈대 상자에 들어 있던 아기, 자신의 품에서 젖을 먹던 아기, 이 아기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원자로 자라다니요?
그러나 그 일이 이렇게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일을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음 세대를 키우고자 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동시에 우리 자녀와도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손주들과도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내가 기도 짝꿍으로 품은 영적인 자녀들과도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부모인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위대한 일을 하시고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넘치도록 능히 하실 구원의 역사에 쓰임 받는 저와 우리 교우님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후 찬양 :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합심기도
오늘 말씀 기억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길 원하는데요.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다 컸든 어리든 부모인 우리가 거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으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부터 믿음으로 양육할 것을 결단하세요. 자녀들이 믿음 없다고 탓하지도 마세요. 부모인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히브리서가 모세의 부모의 믿음에 주목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모세의 부모처럼 최선을 다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세요. 우리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통성으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부모인 우리가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하길 원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식이 나일강이라는 세상에 빠지지 않도록 갈대 상자에 역청을 바르고 나무진을 발라 강에 띄우는 최선을 다하길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최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부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녀가 없거나 자식을 다 키운 분들에게는 다음세대를 위해 이런 마음을 품게 하셔서 우리 하름교회 어른들이 믿음의 유산을 잘 계승해 주는 교회, 10년 후, 30년 후가 더 비전 있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결단의 찬양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교회의 어른으로서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는 믿음과 더불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길 다짐하는 우리 성도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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