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성 제도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신 19:1-13)
매일성경 새벽기도(신명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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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도피성 제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땅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도피성을 지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도피성은 의도치 않게 실수로 사람을 해친자가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는 장치로서, 하나님은 구체적은 사례까지 들어서 부지중에 사람을 해친 자를 보복의 칼로부터 지키시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게다가 주의 명령을 잘 지켜 행할때는 원래 셋에다가 셋을 더하여 도피성을 확대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그러나 사람에 대한 원한을 품고 의도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도피성으로 피했더라도 끌어내어 죽이라고 하십니다.그렇다면 도피성 제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첫번째로 도피성 제도를 통해 하나님은 생명을 소중이 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이 당시의 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즉 복수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실행되던 시절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중 누군가가 죽임을 당했다면 당연히 그 죽인자를 해쳐야 하는 정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죽은자도 안타깝지만, 실수로 그를 죽인 자의 생명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고의 적인 살인이 아니라 실수로 인한 일이라면, 살인자에게도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사람을 죽인 일은 분명한 잘못입니다. 결코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사고는 어느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운전을 하거나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사고들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사회는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때문에 이렇게 우발적으로 사고로 발생하는 사망 사고에 대해서는 살인죄로 처벌하지 않습니다. 피해보상만 하도록 합니다. 사실 사고를 당해 죽은 사람들의 유족도 충격이 크겠지만 그 사고를 낸 사람들도 평생 큰 고통을 안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은 비교적 근래에 들어서 생긴 개념인데요, 하나님은 이미 수천년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제도를 만들어 두셨던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비록 허물이 있는 사람의 생명도 하나님은 긍홀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잘못이 실수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 나아가 상대방이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도 하나님처럼 긍휼히 여기며 자비를 베풀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아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두번째로 죄를 미워하시고 분명히 처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도피성 제도에는 한가지 원칙이 있는데, 고의로 살인한 자는 도피성을 방패로 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이런 원칙이 없다면 도피성은 고의적인 살인을 한 자들로 우글댈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전체가 온갖 살인이 난무하는 무법지대로 변하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은 오늘 본문 11절 이하에서 이웃을 미워하여 의도적으로 사람을 해친 자가 도피성으로 들어오면 장로들은 그를 보복자의 손에 넘겨주고, 그를 결코 긍휼히 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제도라고 해도 헛점이 있으면 죄악을 저지르는데 이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그 가능성을 원천에 차단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실수에 대해서는 자비를 베푸시지만, 의도적인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응징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며, 그 죄는 반드시 처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 살아갈때에 우리는 결코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죄의 길로 걸어가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반드시 처벌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우리는 깨어있는 자가 되어, 죄악을 멀리하는 성결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치밀하고 선명하신가를 보여줍니다. 도피성 제도를 가만히 살펴보면 매우 치밀하고 선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고의적인 살인인지, 아니면 실수에 의한 것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도 제시하십니다. 무엇입니까? 평소에 그 이웃을 미워했느냐 그랬지 않느냐입니다. 또한 이 살인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는지도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준을 정해놓지 않거나, 두루뭉술하게 정해 놓으면 불필요한 다툼이 생길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법조항을 보면 왠만하면 모든 것을 명확하게 규정지으려고 합니다. 만약 법이 사안에 대해 명확하게 규정해주지 않으면 다툼의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법을 만드는 사람들도 사람인지라, 애매하게 정의하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 사람들이 헌법재판소에 소원을 해서 수정합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헌법 재판소 같은 곳이 없었기에, 이런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기준도 미리 세워 두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하나님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세밀하게 역사하시고, 또 정확하게 일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교회에서 은혜라는 말을 만이 합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잘못을 해도 눈감아 주고, 봐주고, 사고를 쳐도 그냥 넘어가고… 대충 대충 일하면서 좋은게 좋은 거다.. 뭐~ 이런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은혜도 선명한 기준이 있을 때 더욱 은혜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없이 모든 것을 은혜라는 말로 덮어 버린다면 그 은혜는 진짜 은혜가 아니라 싸구려 은혜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음은 따뜻하게, 제도는 선명하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지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