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 바다를 가르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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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박수 올려드리겠습니다.
말씀봉독(시편 66:1-12)
시편 66:1–12 (NKRV)
1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2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3 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4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5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6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7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
8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9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10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11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12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할렐루야!
오늘도 목요영성집회에 나아오신 모든 성도님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기도하러 나아오신 모든 분들의 기도를 주님이 물리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시간, “내 앞에 바다를 가르시는 하나님”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 나누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릴 적 즐겨하던 추억의 놀이가 하나쯤 있을 겁니다.
저는 어렸을 때 땅따먹기 놀이를 많이 했습니다.
그림을 한 번 보여드릴게요. (따로 첨부)
제가 직접 그려봤는데요.
여기 계신 분들도 많이 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이 땅따먹기 놀이를 어떻게 했었죠(이 때 그림을 내려주세요)?
흙바닥에 나뭇가지 하나로 기다란 직사각형을 그리죠.
그 안에 1단부터 8단까지 칸을 나눕니다.
그리고 작은 돌을 던져서 한 발로 뛰어 8단까지 갔다가,
돌아오면서, 돌을 되찾아옵니다.
8단까지 성공하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나요?
하늘로 가죠.
그 하늘에서 뒤돌아 돌은 던져서, 돌이 떨어지는 곳은 이제 자기 땅이 됩니다.
그럼 다른 사람은 그 땅을 밟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땅의 주인은 어때요? 한 발로 섰던 그 땅을 이제, 두 발로 디디고, 설 수 있게 됩니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크고 나서 이 땅따먹기 놀이를 묵상해보니까 참 은혜가 됐습니다.
왜 하필 돌을 하늘에서 던질까?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돌은 어떻게 땅을 소유할 수 있을까?
이런 장난스런 호기심에서 시작해 우리의 ‘산 돌’이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은 저 높은 하늘에서 모든 영광 버리시고 이 낮은 땅 위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땅이 아닌, 죄악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죄악의 바다를 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른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갈 수 있게 됐죠.
말씀 한 구절을 같이 볼까요 여러분?
베드로전서 2:4 (NKRV)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 산 돌이신 예수님은 사람에겐 버려지셨으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택하시고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돌 던지듯 이 세상으로 던지셨습니다.
던져지신 예수님은 죽음의 바다에 떨어져 그 바다를 가르시고 우릴 건져내셨습니다.
돌 하나가 어떻게 바다를 가르냐구요?
예수님은 이 세상이 담을 수 없는 크신 구원의 ‘산 돌’이시기 때문에 가르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더러 뭐라고 말합니까?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다른 것 의지하지 말고, 산 돌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라고 합니다.

본론

사랑하는 목영의 가족 여러분.
우리는 산 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득 되는 게 없다며,,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진 않습니까?
성도는 산 돌이신 예수님을 소유해야 합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 위에 떨어져야, 우리 마음 속에 범람하고 있는, 두려움의 바다가 갈라집니다.
그리고 마른 땅 위에 두 발로 굳게 서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 66편 저자도 고난의 바다가 갈라지는 역사를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이뤄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본문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66:1 (NKRV)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 여러분. 온 땅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이 지구는 땅과 바다.
이 두가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럼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온 땅은, 바다가 아닌 곳까지만 말하는 걸까요?
땅은 보통 영어로 ‘land’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영어성경에선 이 ‘온 땅’을 ‘all the earth’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본문에서 바다를 땅으로 바꾸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의 영역도, 두 발 딛고 설 수 있는 온 땅으로,,, 바꾸실 수 있다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요?
바다가 시작되는 곳에서 우린 멈춰야 하나요?
‘내 앞에 저 바다는 내가 건널 수 없으니, 나는 여기까지야. 여기서 그만둘래.’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이
저 바다 건너편에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제한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으실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 저 곳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라면, 이 바다를 갈라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시겠습니까?
기도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시편 66:6 (NKRV)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 시인은 먼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마치 지금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것처럼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이죠?
바다를 변하여 육지게 되게 하신 겁니다.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게 하신 겁니다.
본문 6절은 홍해가 갈라진 사건과 요단강이 갈라진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애굽을 막 탈출했을 때 일어난 일이고,
요단강이 갈라진 사건은 출애굽이 끝이 나고 가나안에 입성하기 직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출애굽 시작과 끝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끄시고 홍해와 요단강을 만나게 하셨을까요?
애굽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 머물러 있는 것을 그냥 보고 계시지 않았던거죠.
정한 때가 되었으니 이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땅에 머물러 있지 않고 때가 되면 약속의 땅으로 가야 하는 겁니다.
그 땅으로 향하는 데에 있어서 가로박는 바다가 있다면, 범람하는 강이 있다면, 하나님이 갈라 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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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떻게 홍해와 요단강을 갈라주셨나요?
항상 말씀으로 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자는 바다가 갈라지는 역사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자는 기대하지 않고 절망합니다.
출애굽기의 14장 12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출애굽기 14:12 (NKRV)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갉아먹던 애굽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을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예전 모습과 참 닮아있지 않습니까?
죄악 가운데서 허우적대며 숨이 끊어지기 일보직전이었던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께 우리는 어떻게 불평했습니까?
왜 굳이 나를 건져내서 이 고생 시키시냐고.
이렇게 불평한 적은 없습니까?
이런 자에겐 하나님의 말씀이 꼬옥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4:13–14 (NKRV)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을 그저 지켜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불가능의 영역을 기적처럼,, 두 발 딛고 설 수 있는 마른 땅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홍해가 갈라졌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홍해가 갈라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봇처럼, ‘어, 갈라졌네? 이제 건너면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좌우에 출렁이는 파도벽이 높게 솟아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 사이를 지나가라고 하면 선뜻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한참 망설일 것 같습니다.
파도벽이 무너져 나를 덮칠 것 같습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역사하시는 것 같긴 한데, 고난의 파도가 너무 높아 보입니다.
그 파도가 조금만 출렁여도, 내 마음은 너무 쉽게 무너집니다.
그럼 의심에 사로잡히고 두려움에 짓눌리게 됩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불안한 요소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는 성도를 보시고, 그들을 위해 ‘말씀’이라는 ‘울타리’를 둘러치셨다.” _ 존 칼빈.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이라는 파도벽이 높을까요?
하나님이 둘러주신 말씀의 울타리가 더 높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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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파도벽이 무섭게 넘실거렸지만, 그 파도벽보다 더 안쪽에,, 말씀의 울타리가 더 높이 쳐져있었습니다.
파도의 벽이 무너져도 말씀의 울타리가 막아주는 겁니다.
여러분 눈 앞에 보이는 고난의 파도보다 말씀의 울타리가 여러분에게 더 가깝고, 더 높게 둘러쳐져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은 고난의 파도에 휩쓸려 망하고 맙니다.
말씀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는 극명하게 나뉩니다.
출애굽기 14장의 장면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오던 애굽 군대 진영에는 흑암을 보내셔서 앞이 보이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불기둥으로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기시고 태워버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뜻하게 보호하던 불기둥이 말씀 없는 자들에겐 이런 패망을 가져다 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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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스라엘 진영에는 마른 땅을 깔아주셨고, 빛을 보내셔서 밤인데도 앞이 잘 보일 수 있도록 밝혀주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펼쳐진 마른땅에 가로등을 세워주신 겁니다.
그런데 애굽 군대가 그 가로등에 닿을 때에는 그 불을 꺼트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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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자와 거역하는 자의 삶이 이렇게 상반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만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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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긴 하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엔,
제가 믿음이 부족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계세요.
여러분, 그런데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연약함과는 관계없이 스스로 무장하고 두려움을 이겨낸다.”_존 칼빈.
믿음을 의인화해서 말하고 있죠.
여러분.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유한한 것을 선물로 주셨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궁무진하고 완전한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선물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어떠함과는 관계 없이 점차 두려움을 이겨내고,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게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여기 모인 모든 분들이,
믿음에 자신을 온전히 맡겨, 믿음에 이끌림 받는 인생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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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삥 둘러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믿음은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40일만에 돌파할 수 있는 광야를 40년 동안이나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결국 가나안 코 앞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미련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그들을 인도한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마주한 곳이 어디입니까? 요단강이었습니다.
요단강 앞에 섰을 때는 우기였기 때문에 평소보다 요단강물이 더 높게 뿔어있었습니다.
여러분들 장마철에 한강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그 범람하는 한강물에 발을 담궈보라고 하면,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한 발 넣자마자 떠내려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호수아 3:8 (NKRV)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요단 강물에 발을 담그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슨 뜻을 가지고 이렇게 명령하셨을까요?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홍해를 건넜을 때처럼 이번에도!! 말씀으로 물을 갈라주시겠다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에 제사장들이 순종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여호수아 3:15–17 (NKRV)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 제사장이 발을 담그자 30km 상류에서부터 물이 멈춰섰습니다.
누군가가 강물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강물이 성난 맹수처럼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발을 구르고 있지만 누군가 굳게 막아서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젖어있던 강바닥이 마른 땅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갈라놓은 그 물 위를 마른 땅 걷듯이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당연히 두려운 일이라는 걸 압니다.
아무리 30km 상류에서 강물이 멈춰있지만, 그 요단강을 건너는 중간쯤 강물이 다시 쏟아지면 다 죽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똑같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만, 이렇게 말씀대로 살아가다가 고난이 나를 덮쳐버릴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멈춰서 있을 겁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요단강을 갈라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요단강이 갈라진 것도 언약궤를 멘 제사장의 단 한걸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갈라진 그 곳을 또 한 걸음 내딛으면 됩니다.
여러분의 오늘이 참 힘들었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 삶의 고난들이 성난 요단강물처럼 당장이라도 쏟아질 기세로, 발을 구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 삶도 마찬가지거든요.
우리의 인생이 다 달라도 고난이 즐비해 있다는 것만은 다 똑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래도 한 걸음 더 떼봅시다.
하나님이 갈라주셨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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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 때는 고난의 강물이 다___ 마를 때까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바다를 가르시고 마른 땅으로 바꾸어주셨는데도 언제 갈라질 거냐며 한탄만 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믿고 나니, 이미 갈라진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고, 울타리가 나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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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절망하고 주저 앉아있었던 그 자리는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에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만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 땅을 여러분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미 주님께서 말씀으로 갈라놓으신 그 길을 함께 걸어나가봅시다.
우리 본문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66:12 (NKRV)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 그 길 가운데 나를 핍박하는 사람도 만날 수 있고 불을 통과하는 듯한 고통도 잠시 주어지겠지만, 결국 우리는 약속의 땅에 도착하고 풍부한 은혜를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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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까 요단강을 갈라주신 하나님의 언약궤가 말씀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 가운데, 산 돌로 던져지셨습니다.
요한복음 1:14 (NKRV)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하나님이 가르신 바다 가운데에 여러분 혼자 버려져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쇼.
여러분이 고난의 한 복판에 있어도 예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도 않으시고 떠나지도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난 맹수처럼 발을 구르던 요단강물을 막고 계셨던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죽음의 강물이 우릴 덮치려고 할 때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을 내어던지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그 희생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사야 53:4–5 (NKRV)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사랑하는 여러분.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의 강물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돌맹이처럼 이 땅 위에 던져지셨습니다. 하나님 손에 말이죠.
그리고 이사야서 53장 말씀을 보니, 그 예수님은 하나님께 맞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는,, 너무 억울한 일 아닙니까?
도대체 저와 여러분이 뭐라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돌맹이처럼 다루시고, 그 크신 손으로 예수님을 때리시는 겁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요단강물을 찢겨진 몸으로 막아서신 겁니다. 찢어진 살갗에 빠른 물살이 채찍처럼 꽂히고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데도 비켜서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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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강물을 막아서기 위해
자신의 육신이 갈라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은혜를 입었는데, 우리는 왜 갈라진 바다를 두렵다며 걸어가지 못하는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십시오 여러분.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찢기신 예수님의 사랑을 의지하십시오.
의지하시기만 하면, 믿음의 발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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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모인 모든 목영의 가족들이 고난의 바다를 만나도,
예수님께서 반드시 갈라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반드시
즐거움이 가득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마음 속에 절망이 꿈틀대고 있다면, 털고 일어나 주님께 찬양하고 기도합시다.
신실하신 주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꼭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설교 끝.-
우리 그 믿음으로 이시간 함께 찬양합시다.
고난의 바다를 가르시고 약속의 땅으로 바꾸어주시는 신실하신 주님을 높여드리며 찬양하겠습니다.
‘내 구주 예수님’ 함께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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