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10 금요기도회: 느헤미야 12:27-43

금요기도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 views
Notes
Transcript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를 금요기도회 자리로 부르시고 함께 말씀을 듣고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 지난 한 주의 저희를 돌아봅니다. 한 주간 살면서 하나님께 지은 죄들, 그리고 이웃에게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께 지은 죄들이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저희가 많은 죄들을 짓고 살아가지만, 저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다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힘을 얻고 한 주를 불신앙적인 모습이 아니라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날마다 저희와 함께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말씀을 기억나게 해주시고, 저희 안에서 율법이 되셔서 저희가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자 합니다. 이 시간도 함께 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느헤미야 12:27-43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Nehemiah 12:27–43 NKRV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고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 들에서 모여들었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그들의 뒤를 따르는 자는 호세야와 유다 지도자의 절반이요 또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과 유다와 베냐민과 스마야와 예레미야이며 또 제사장들의 자손 몇 사람이 나팔을 잡았으니 요나단의 아들 스마야의 손자 맛다냐의 증손 미가야의 현손 삭굴의 오대 손 아삽의 육대 손 스가랴와 그의 형제들인 스마야와 아사렐과 밀랄래와 길랄래와 마애와 느다넬과 유다와 하나니라 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샘문으로 전진하여 성벽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다윗의 궁 윗 길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감사 찬송하는 다른 무리는 왼쪽으로 행진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과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벽 위로 가서 화덕 망대 윗 길로 성벽 넓은 곳에 이르고 에브라임 문 위로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멈추매 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무리가 하나님의 전에 섰고 또 나와 민장의 절반도 함께 하였고 제사장 엘리아김과 마아세야와 미냐민과 미가야와 엘료에내와 스가랴와 하나냐는 다 나팔을 잡았고 또 마아세야와 스마야와 엘르아살과 웃시와 여호하난과 말기야와 엘람과 에셀이 함께 있으며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금요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듣고 말씀을 두고 먼저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성벽을 세우고 이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성벽을 세우면 세웠지, 이 성벽을 이들은 왜 하나님께 드린 것일까요?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구약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이 모습이 신약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는 성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백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성벽은 한 도시를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성벽을 견고하게 쌓을수록 도시의 안전은 보장되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선 성벽이 필요했고, 성벽을 만들어 백성들이 안전하게 마음 편히 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은 다른 국가들의 성벽과는 좀 다릅니다.
앞에서 포로 귀환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벽 공사를 하기 시작했었습니다. 비록 도비야와 산발랏이 이 백성들의 공사를 방해하긴 했지만, 이 대적들의 손을 하나님께서 끊으시고 무시히 성벽 공사가 마무리 되도록하십니다. 그러고나서 느헤미야는 중간에 7장부터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다지는데요.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언약을 체결합니다. 원래라면 성벽을 짓고난 뒤에 무엇을 해야합니까? 바로 서로 수고했다며 기뻐하고 먹을 것을 나누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침울한 느낌을 주는 회개를 한다니요.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것은 성벽 그자체가 유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이방 국가들은 성벽을 견고히하는 것이 곧 국가의 안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에게 있어서 성벽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중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다를 지켜주시지 않으면, 성벽은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통해 우리가 배운 사실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군사력이나 방어력이 약해서 멸망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들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포로 귀환한 백성들은 다시금 율법을 통해 되새기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포로 귀환하고 가장 먼저 세운 것은 성벽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제일 먼저 무엇을 짓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다는 것이 에스라서의 내용입니다. 에스라서에서도 성전을 짓고 난 뒤에 율법을 낭독하며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며 언약을 체결했었습니다. 바로 성전 건물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중요함을 알려준 겁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성전이 존재한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에스겔의 환상처럼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떠나실 겁니다.
마찬가지로 느헤미야도 성벽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믿음이 중요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도 성벽을 다시 짓고 율법을 낭독하며, 죄를 자백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러고나서 오늘 본문에 이르러 이 성벽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식을 시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오늘 본문 27절에서 레위 사람들을 데려와 봉헌식에서 감사하며 찬송하려고 하며, 28-29절에서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각 지역에서 예루살렘에 모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제 성벽 봉헌식 준비가 끝나게 되고, 30절에서 봉헌식이 시작됩니다. 27절에서 봉헌과 봉헌식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30절에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자신의 몸을 먼저 정결하게 하고, 그 다음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죄를 없애고 정결하게 드려야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제사장을 비롯한 모든 백성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결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도 정결 예식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느헤미야는 성벽을 행진하는 무리를 구성하게 되는데요. 31절에서 유다의 방백들과 감사 찬송하는 무리를 둘로 나누고 이들 뒤를 따르는 자는 32절부터 호시야와 유다 지도자의 절반, 또 아샤랴와 에스라와 므술람과 유다와 베냐민과 스마야와 예레미야, 또 제사장들의 자손 몇 사람이 나팔을 잡고, 스가야와 그의 형제들이 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에스라가 앞서서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다윗의 궁 윗 길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수문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결코 작은 숫자의 무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성벽의 폭은 약 3미터가 되기 때문에 이 행렬이 지나가기에는 충분한 너비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악기의 연주에 맞춰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벽을 행진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반으로 나눠진 다른 무리도 40절 하반절부터 42절까지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나머지 무리와 똑같은 구성으로 반대편으로 행진합니다.
이들이 성벽을 반반 나눠서 돌고 난 뒤에 40절에서 성전 앞에 두 무리가 함께 서는 것으로 행진이 끝납니다. 그리고 43절에서 성전에서 이들이 하나님께 큰 제사를 드리고 이 성벽을 하나님께 드린 것을 심히 즐거워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즐거움은 그들 내면에서 나오는 즐거움이 아니라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인 남성은 말할 것도 없이 부녀와 어린 아이까지도 이것을 즐거워하여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예루살렘 밖 멀리까지 들릴 정도로 큰 즐거움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준 봉헌식은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이 단순히 한 도시의 성을 건축하는 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을 가진 ‘봉헌’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듯이 성전과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로 보고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일이라고 보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느헤미야는 11장 1절과 18절에서 예루살렘을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하였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예루살렘이라는 장소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거하시는 장소적인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또한 성경 전체에서 보면 예루살렘을 가리켜 다윗 성이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시온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성벽을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를 짓는다는 의미이며,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믿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성벽은 단지 예루살렘 도시를 지키고 방어하기 위한 수단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이곳에 거하시며 보호하신다는 것을 외적으로 보여주는 의미입니다. 성벽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 자체도 하나님께서 이곳에 거하시고 보호하셔야만 진정한 성벽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본문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한 과정은 마치 침울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다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따라서 오히려 이러한 과정은 성벽을 재건했다는 기쁨을 더욱 크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기쁨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43절에서 하나님께서 크게 즐거워하셨음을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본문은 다소 거리가 있는 본문 같습니다. 대한민국에는 많은 도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있었던 성벽이 이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성벽은 그저 문화재가 되어버렸고, 본래 기능이 상실되었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성벽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외적인 성벽은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성벽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성벽이 이미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강한 성벽입니다.
구약에서 예루살렘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이 특별히 거하시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 예루살렘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셨고,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적으로 기원후 70년에 로마 장군인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질 수 있는 이 예루살렘을 허무시고, 허물어지지 않고 영원히 견고한 새 예루살렘을 자신이 직접 세우셨습니다. 이 새 예루살렘은 보이지 않으나 어떠한 대적이 와도 끄떡 없는 견고한 도시입니다.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세운 성벽은 도비야와 산발랏이라는 대적들로 인해 위기가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예루살렘은 그분이 직접 죄에서 승리하셔서 자신의 몸으로 성벽을 세우셨기 때문에 완전한 안전이 있는 도시입니다.
이 새 예루살렘을 지금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모인 예루살렘입니다. 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통해 우리의 성벽이 되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오늘 본문의 유다 백성들처럼 기쁨으로 찬송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회개하며, 언약을 체결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성벽을 완성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찬송한 것처럼 우리의 성벽되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큰 기쁨으로 그리스도를 찬송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사도 요한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새 예루살렘에서 구원받은 백성이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더 나아가 이 찬송 소리가 오늘 본문의 43절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찬송함으로 온 교회에 기쁨이 가득하게 될 때 즐거운 소리가 이 오정동을 넘어 이 대전 시내에까지 멀리 퍼지게 될 겁니다. 또한 우리에게 세상의 강한 풍파가 몰아쳐와도 우리의 성벽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어떠한 대적도 우리에게 위협은 줄 수 있으나 우리를 결코 무너뜨리진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벽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큰 복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성벽을 하나님께 드리고, 유다 백성들은 이것을 즐거워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성벽은 언제나 허물어질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대적이 공격하여 위험에 처할 수도 있고,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예루살렘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이곳은 안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새 예루살렘을 세우시기 위해 십자가를 통해 죄를 이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대적도 이곳을 넘보지 못합니다. 이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기억할 때 우리는 이 새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 찬양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성벽이 되신 그리스도께 날마다 찬송함으로 큰 기쁨을 누리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두고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것을 찬송하며 기쁨을 누리는 유다 백성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구약 백성들보다 더 큰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림자로 복을 누렸지만, 우리는 완전히 드러난 그리스도라는 견고한 성벽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어떠한 대적이 와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합시다. 우리의 성벽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기도를 합시다. 또한 우리의 성벽이신 그리스도께 날마다 찬송하며 기쁨을 누리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이 시간 같이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