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한 교회의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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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지난주에 이어 이번주도 초기 한국교회 이야기로 시작겠습니다.
1893년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무어’라는 분이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 우리나라 두번째 개신교 교회인 곤당골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예수 학당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거기서 배우는 아이들중에는 백정의 자식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지내는 짐승을 잡는 백정이 당시 어느 정도의 신분이었냐면 인도의 불가촉천민과 비슷합니다.
500년 넘게 천민들보다 더 밑바닥 신분, 즉 사람으로도 취급받지 못하던 존재들입니다.
그런 백정의 자식들중 예수 학당에 다니는 7살 박봉출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박봉출이 무어 선교사를 찾아와 울면서 자기 아버지 좀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버지 백정 박성춘이 장티푸스에 걸려 심한 열이 나서 죽게 생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어가는 박성춘을 고친다며 무당을 불러 굿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7살 아들 박봉출이 외국인 한 사람과 함께 나타난 것입니다.
외국인의 이름은 에비슨.
놀랍게도 그는 당시 조선 왕의 주치의였습니다.
무어 선교사의 부탁으로 그가 직접 백정의 집에 와서 치료해 준 것입니다.
박성춘은 곧 낫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처럼 천한 백정에게 왕의 주치의가 와서 고쳐줬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고 교회를 다니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백정들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교회를 다니던 양반들입니다.
어느날 양반들은 백정들과는 함께 교회를 다닐수 없다며 무어 선교사에게 항의를 합니다.
백정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가 같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럴순 없다고 하니까 양반들은 교회를 안 나와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한달 뒤에는 무어 선교사에게 이렇게 제안을 합니다.
자신들은 앞자리에 앉고, 선을 그어 백정들은 뒤쪽 자리에 앉게 하면 교회를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무어 선교사가 그 제안도 거절하자 그들은 따로 나가 양반교회를 세웁니다.
그런데 채 2년이 못돼 양반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와 곤당골 교회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백정 박성춘은 그 교회에서 장로가 됩니다.
바로 그 교회가 종로에 있는 승동교회입니다.
만약 무어 선교사가 양반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리를 나눴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교회 안에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어선교사처럼 본질을 놓치지 않는 성령충만한 지도자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가 볼 말씀에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성령충만한 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일까요?
[본론]
첫째, 성령충만한 교회도 문제는 일어납니다.
1절입니다.
1   이 시기에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 그런데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그것은 자기네 과부들이 날마다 구호 음식을 나누어 받는 일에 소홀히 여김을 받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이라는 말이 사도행전 6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제자라는 말을 사도들에게만 사용했지, 성도들에게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교회가 영적으로 많이 성숙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숙한 교회에도 문제는 일어납니다.
교회 어디선가 불평과 원망의 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이 문제의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교회 안에 두 부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한쪽을 히브리파 유대인, 다른 한쪽을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부릅니다.
먼저, 히브리파 유대인은 조상때부터 오랫동안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는 토박이 유대인입니다.
반면, 헬라파 유대인은 여러나라에 흩어져 살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대인입니다.
교회 안에 절대 다수가 히브리파 유대인들이고, 헬라파 유대인들은 소수입니다.
이들은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갈등의 여지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이 다르다보니 문제가 일어나기 쉬운 것입니다.
여기서는 과부들을 구제하는 문제가 일어납니다.
히브리파 과부들은 토박이라서 근처에 친척들이 있어 어느정도 도움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과부들은 예루살렘에 가족, 친척들이 없어 전적으로 교회에 의지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구호음식이 더 어려운 헬라파 과부들에게 제대로 공급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구호음식을 나눠주는 히브리파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 문제는 아마도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소통이 잘 안되니까 일어난 행정적인 실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라파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불평을 합니다.
아마 이 일을 최종적으로 담당하던 사도들에게도 불평과 원망을 했을 것입니다.
잘못하다가는 이 갈등으로 인해 교회 안에 분란이 일어날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충만하고 제자들이 모인 성숙한 교회임에도 문제는 발생합니다.
세상 어느 교회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 세상에 있는한 완벽할수도 없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서 문제는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찰스스펄전 목사님께 어떤 젊은이 한명이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교회를 찾고 있는데 혹시 목사님이 추천해주실 수 있는 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님은 나도 찾고 있는데 아직 못 찾았다네. 혹시 자네가 찾으면 내게 연락해주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청년이 실망하고는 목사님 방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목사님이 그 친구에게 한 말씀을 더 합니다.
“젊은이, 혹시 완벽한 교회를 찾았더라도 그 교회는 가지 말게. 자네가 그 교회를 다니면 그 교회는 더이상 완벽한 교회가 될 수 없을 거네.”
이 땅에 있는한 문제가 아에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물론 심각한 도덕적, 윤리적 문제가 있다면 잘못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차이로 인해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는 휴양지가 아닌 병원입니다.
마음에 병을 하나씩은 갖고 있는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나만 병이 없다고 여긴다면 그렇게 여기는 게 병일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갈등이 일어날수 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과연 사도들은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풀어 나갈까요?
둘째, 성령충만한 교회는 함께 세워나가는 교회입니다.
2-3절입니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제쳐놓고서 음식 베푸는 일에 힘쓰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3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이 문제를 몰래 덮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런 갈등은 사탄의 역사라며 더 기도하자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헬라파 과부들에게 좀 더 잘해주겠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자신들의 사역을 돌아봅니다.
자신들에게 부족한 부분이 어디였는지 살펴봅니다.
사도들은 구제하느라 너무 바빴습니다.
그래서 정작 본연의 임무인 기도와 말씀은 소홀히 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기적을 일으키고, 성령충만한 사도들일지라도 하루 24시간은 누구나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교회가 커지고 구제 일이 점점 많아지다보니 너무 바빠 진짜 해야할 일에는 소홀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충만한 사람은 문제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그 문제의 본질을 간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충만하면 어떤 실수도 안할 거 같습니다.
성령충만한 목사님은 하나님과 친하니까 절대 실수도 안할거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실수하면 기도를 많이 안하셨나 생각합니다.
성령충만함이 부족한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령충만해도 여전히 실수할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다고 항상 판단이 옳고 실수하지 않는게 아닙니다.
실수하지만 성령충만하기에 실수를 기회로 만들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사도들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사도들은 자신들이 하던 구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깁니다.
자기들만 모든 권한을 움켜쥐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위임이라고 말합니다.
가진 권한과 권위를 위임하고 나눌줄 아는 지도자가 성령충만한 지도자입니다.
어떤 목사는 교회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신이 결정하려고 합니다.
혼자 독불장군처럼 모든 권한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려고 합니다.
어떤 목사는 남에게 시키면 만족하질 못해 자신이 다 하려고 합니다.
맡겨야하는데 맡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정작 자신이 집중해야할 기도와 말씀을 제대로 세우지 못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점점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됩니다.
사역을 위임하고 권한을 나누는 것도 교회를 함께 세워나가는 과정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는 구제를 담당할 일곱명의 일꾼을 뽑습니다.
아마도 완전수 7을 생각해서 제자들을 대표하는 일곱명을 뽑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사실이 하나 등장합니다.
사도들이 직접 일곱명을 뽑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그들을 뽑을수 있게 합니다.
사도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직접 물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평소 보기에 신앙심이 좋다고 여겨지던 사람들을 뽑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성도들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침례교 역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회중들의 뜻을 묻는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회중들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목회자의 판단이 옳아 보여도 최종적으로 회중들이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서로간의 설득과 수용의 절차는 매우 중요합니다.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모두 거친 후에는 결국 회중들의 판단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 과정도 교회를 함께 세워나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럼 성도들은 어떤 사람을 뽑았을까요?
셋째, 성령충만한 교회는 은사를 따라 봉사하는 교회입니다.
3-6절입니다.
3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4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5   모든 사람이 이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이방 사람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인 니골라를 뽑아서,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사도들이 직접 일곱일꾼을 뽑지는 않지만 뽑는 기준을 알려줍니다.
두가지 입니다.
3절에서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입니다.
5절에서는 이 말을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신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삶의 차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망이 있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변화된 삶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검증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잠깐 반짝하는 사람을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둘째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신망이 삶의 차원이었다면 성령과 지혜는 신앙의 차원입니다.
지혜는 성령충만함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성령과 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여 영적분별력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서 3장 17절은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화평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지혜의 결과가 삶으로 드러난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명의 일꾼을 뽑는 기준은 신앙이 삶으로 온전히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구제를 맡아 일한다면 불평과 원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자신들의 일을 대신할 일곱명의 사람들을 뽑는 이유가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자신들이 본연의 임무인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말은 사도들의 기도와 말씀이 구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2절에서 음식 베푸는 ‘일’에 사용된 단어와 4절의 기도하고 말씀 섬기는 ‘일’에 사용된 단어가 같습니다.
모두 ‘일’을 뜻하는 단어가 디아코니아, 즉 봉사입니다.
한쪽은 음식 봉사고, 다른 한쪽은 기도와 말씀 봉사일 뿐입니다.
한쪽이 더 가치있고 다른 한쪽이 덜 가치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와 말씀도 중요하고 구제도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이 구제를 나몰라라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직접적인 일을 하지 않을뿐 분명 여전히 최종적인 책임을 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일꾼들도 구제를 담당한다고 해서 기도와 말씀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게 아닙니다.
다음 장에 보면 곧바로 스데반과 빌립의 놀라운 말씀 전파 사역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지 각자의 은사와 역할에 맞춰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충만한 교회는 은사와 역할에 맞춰 봉사하고 섬기는 교회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령충만한 교회의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위기를 지혜롭게 잘 해결하니 기회가 됩니다.
교회의 연약한 부분을 더욱 든든하게 세우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퍼져 나갑니다.
이 말을 개역개정에서는 ‘점점 왕성하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원래 이 단어는 ‘말씀이 점점 자라나다’는 의미입니다.
식물이 자라서 열매를 맺듯 말씀도 자라나 열매를 맺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양적으로 제자들 수가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더욱 성숙하고 질적으로도 수준높은 교회가 되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많은 유대교 제사장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의 성전과 제사 제도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기득권을 누리던 종교지도자들의 발악은 더욱 커질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제자들을 더욱 박해하고 위협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드러난 부분이 바로 이어서 나오는 스데반의 순교 장면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좋은 일만 있을거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항 역시 커집니다.
세상과 더욱 부딪힐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게 다 잘되고 있는게 성령충만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내 생각과 내 삶에 부대낌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성령충만함의 증거입니다.
그럼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결론]
사랑하는 다카포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성령충만한 교회는 문제가 없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 땅 위에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성령충만한 교회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교회입니다.
성령충만한 교회는 은사를 따라 봉사하며 함께 세워가는 교회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승동교회 이야기를 좀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백정 박성춘의 아들 박봉출은 나중에 이름을 박서양으로 바꿉니다.
그는 예수학당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1899년 제중원, 지금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1회 졸업생이 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외과의사, 최초의 백정출신 의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여전히 신분차별이 있어 사람들은 그의 진료를 받는 것을 꺼려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속에 있는 오백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왜 보지 못하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간도로 이주하여 구세의원과 숭신소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또한 아버지 박성춘은 끊임없이 백정의 신분차별을 없애는 운동을 펼쳐 결국 동등한 국민의 자격을 얻어냅니다.
나중에는 독립운동가가 되어 시민 대표로 만민공동회에서 연설까지 했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도 이런 성령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길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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