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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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것을 믿느냐

지난 주 우리는 11장부터 새로운 내용이 시작되고 있고 그 이야기가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그녀들의 오라비 나사로의 병들었고 이 병든 나사로를 통해 죽을 병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속한 유대에 내려 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 즉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했던 곳과 매우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말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기회를 낮과 밤의 대비로 말씀하시면서 낮을 빛이 있는 상황으로 실족하지 않지만 밤에는 빛이 없는 어둠인데 어둠이 사람 안에 있고 없음을 통해 실족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나사로의 죽음을 오해하고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게 죽으로 가자’라는 혈기 넘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베다니에 오셨고 무엇보다 나사로가 죽었을 뿐만 아니라 무덤에 있은지 4일째라는 정보와 39절에 실제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부패가 일어난 상태라는 것을 통해 살아난 사건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러면서도 베다니는 예루살렘과 3-4킬로의 거리로 매우 가까운 거리라는 사실은 예수께서 위험 지역에 들어 왔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특히 19절에 많은 유대인들이 장례에 참여함으로 마르다 가족이 많은 유대인들과 어떤 관계인지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경우도 예수님께 비싼 향유 나드 한근을 드렸는데 이는 1년치 급여에 해당하는 300데나리온에 해당되고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에서 제자들은 200 데나리온이 족히 필요하다고 했던 것을 볼 때 나사로의 가족이 꽤 부유했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먼저 살필 것은 마르다의 반응입니다. 20절에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며 일의 진행을 잘 아는 인물로 보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 10:38–40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예수께서 베다니를 지날 때 마르다가 예수를 영접하는 적극성 뿐만 아니라 40절에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는 표현은 일을 주도적으로 해 나가는 여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와 달리 동생이 일을 돕지 않고 ‘주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행동에 ‘나를 도와 주라’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여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의 부모가 소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의 이런 적극성이 나사로 가족과 주변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입니다. 옛말에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정승 집 문지방이 닳아 없어지도록 문상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많은 유대인들이 위문하러 온 것을 보면 ‘나사로’보다는 오히려 ‘마르다’의 이런 면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보는 것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고 하는 표현은 상반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제 살펴볼 것은 예수와 마르다가 나눈 말입니다. 그녀는 예수를 보자마자 먼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결과가 달랐을 것을 의도하는 표현인데 (났는다는 믿음, -> 죽음도 이긴다는 연결점은)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지고 읽기에는 ‘원망'이 아닐까 하는 우리의 감정이입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표현인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를 보면 원망보다는 계속해 ‘예수님을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면 그녀가 알고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24절에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함으로 나사로의 죽음과 앞으로 일어날 지금의 다시 살아남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무덤 앞에서 39절에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서 냄새가 난다’ 하는 말에서 앞서 예수의 제자들 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22절의 고백은 상당한 믿음의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한계는 이미 죽은 오라버니와 많은 사람이 찾아온 지금의 상황 그리고 무덤에서 부패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부분을 현실과 어떤 위치에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봐야합니다. 현실보다 앞에 두는가? 아니면 같이, 아니면 현실 뒤에 두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매우 특이한 사람들이 믿음을 현실보다 앞에 두고 있는데 오히려 너무 나가는 바람에 비이성적인 집단으로 오해를 받거나 사이비와 이단의 경우가 이런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믿음보다 현실을 앞에 두고 있는데 우스개 소리로 현실의 고민이 많은그리스도인을 향해 기도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비기독교인들이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알았지만 믿음의 방향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23절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고 하자 마르다는 24절에 여전히 ‘안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내세웁니다. 앞서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다’ 고 하’자 ‘잔다고 착각한 제자들 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한복음 5:28–29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기억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인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고 하시면서 요한복음의 특징인 ‘영생’의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함께 기억해야 하는 것은 믿음의 결과로 얻는 영생이 무엇인가? 구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본문만으로도 해설할 부분이 많습니다. 기회를 얻어 다시 해설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한 가지 기억할 것은 다른 곳에서 ‘나는 무엇이다’라고 했던 표현이 이중으로 등장한다는 것과 ‘무엇에 대한 내용이 서술적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ㅏ즉 1) 나는 그 부활이요 -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2) 나는 그 생명이니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로 정리된 말씀은 이 말씀이 지금의 나사로 죽음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죽음도 함께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올바른 신앙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믿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답을 합니다. 이 내용은 뒤에 다루기로 하고 예수님은 다른 반응 없이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마리아 역시 ‘급히 일어나’ 그러니까 마리아는 예수께서 오신 것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있었던 그 자리에 계속 있었습니다. 마치 면접을 보는 자리처럼 말이죠. 여기 마리아가 나가자 ‘위로하던 유대인들’도 소개가 되고 그들은 이런 마리아의 행동을 무덤에 곡하러 가는 것으로 알고 따라 나섰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는 이제 유대인들에게도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마르다 ‘주께 여짜오되’ 와 달리 ‘그 발 앞에 엎드리어’라는 행동이 그녀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달리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성적인 마르다와 달리 마리아는 더 슬퍼하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이어지는 ‘그가 우는 것’은 그녀가 주님 앞에 엎드리며 말하는 것과 우는 것 그리고 온 유대인들이 함께 우는 것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우리가 읽기에 ‘심령이 비통히 여기셨다불쌍히 여기셨다’고 하는 표현을 보다 감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통에 함께 참여하고 공감대를 갖고 계신다는 것이죠. 이 표현이 11장에서만 2번 기록하는데 ‘엠브리마오마이’ 는 오히려 엄하게 꾸짖는 또는 경고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같은 단어가 마태복음 9:30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마가복음 1:43 “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혹은 책망하다 마가복음 14:5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 대해서 책망하고 경고하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올다는 것이죠. 또한 ‘불쌍히 여기셨다’ - 타랏소는 총 17번 신약 - 주로 ‘괴롭다’ ‘근심하다’로 사용하는데 본문에서는 의역해 ‘불상히 여겼다’로 의역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어지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장면과 맥락을 같이하도록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의 늬앙스는 죽은 나사로 그리고 가족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나 예수님의 인간적인 공감으로 읽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보고 스스로 괴로워 근심하신 것으로 / 죽음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죽음 앞에 슬퍼하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시는 비통한 마음, 인간의 어리석은 인식의 한계를 근심하며 괴로워 하신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표현에 대해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굳이 틀린 표현이라고 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싶지만 죽음은 현실만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닌 우리 마음까지 어둡게 합니다. 잠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개는 훌륭하다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견주가 개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강형욱씨는 견주의 사랑하는 마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대하는 태도를 교정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태도를 보고 화를 내는 장면을 가끔 볼 수 있죠 그때의 상황이 매우 유사한 것이죠. 누가 더 개를 사랑하는가는 식으로 접근하면야 당연히 견주이겠죠. 하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사랑하는가?라고 질문을 바꾼다면 답은 달라집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 뿐인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의 형벌을 감당케 하신 사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로마서 5:8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앞서 보여주셨던 기적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거나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것(4), 38년된 병자 치유(5) 오천명이 먹는 기적이나(6). 물위를 걷거나 (6)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친(9) 사건까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기적이라면 ‘다음에 대한 기대’는 오히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질문하면 이 또한 어려운 질문처럼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이미 다 경험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없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어린 시절 부모들은 어린 아기에게는 불가능한 일들을 요구합니다. 아이에게 뛰어 품으로 오라고 할 때 어떤 상황과 상관없이 부모의 품으로 뛰어듭니다. 어떤 상황에도 상관없이 말입니다. 높은 곳이든, 위험한 곳이든 말입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죠. 하지만 이제 다 컸다고 하니 이런 저런 모든 것을 다 따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를 오해합니다.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이렇게 비유적인 표현이 예수의 비통함과 불쌍히 여기셔서 눈물까지 흘리신 이유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인 37절의 표현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는 말에 힌트가 있는 것이죠. 맞습니다. ‘죽지 않게 할 수’ 있는 분이시고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무덤 앞에 서신 예수님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과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의 모습을 여러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무덤은 우리의 장례와 달리 돌로 된 곳을 미리 파두거나 굴과 같은 곳으로 그 입구를 큰 돌로 막아 두는 형식입니다.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 하니 마르다는 나서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고 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상기 시킵니다. 불과 얼마전 마르다와의 대화를 기억해 보세요.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입니다.
다시 마르다의 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마르다는 눈 앞에 보고 있는 예수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저자 요한이 요한복음을 쓴 목적에 가장 부합한 고백입니다. 요한복음 20:31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두 번째 구절인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사건의 ‘영광’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갖는 ‘영광’을 보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여전히 마르다는 ‘그 이름을 힘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다시 살아남’이며 우리 신앙의 끝인 ‘다시 살아나 ‘ 영원히 살게 됨을 나사로의 다시 살리신 사건을 통해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열린 무덤 앞에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우리의 기도는 이러합니까? 늘 부족한 것 투성이 없는 것에 대한 궁핍과 부재에 대한 불평이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는 마음을 막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분향단에 태워 올리는 연기입니다. 죽은 시체에서 냄새를 숨길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제단의 분향도 냄새를 숨길 수 없듯 우리의 기도 역시 이렇듯 감사의 냄새가 먼저 나야 합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여’라고 불렀습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일을 압니다. 늘 나의 부족함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신이야 말로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유가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라는 것도 말입니다. 자녀에게 잘되길 바라는 것은 성공과 부의 축척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나 답게’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간절함을 자녀들은 알아야 합니다.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은 1장에서 이미 하나님과 함께 하신 ‘말씀’이 창조의 사역에 함께 하신 분이심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죽은 자가’ 나사로의 실체는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있었고 그대로 나올 수밖에 없는 존재이듯 우리가 아무리 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할지라도 불러 주기까지는 몸짓에 불과한 것처럼 저와 여러분에게 ‘불러 주신’ 것 때문에 이 세상에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맞추는 순간이야 말로 부모와 자녀가 관계로 이어지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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