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자존감, 진리 안에 굳게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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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다수에 속해야 하는가?
다수에 속해야 하는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너무나 자주 접하고 익숙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다수결의 원칙’ 입니다.
이 다수결의 원칙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많이 유용하면서도, 우리를 힘들게 할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저 대다수가 동의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너무 쉽게 따라가거나,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을 본인이 동의하는 일정 단체가 동의한다는 것을 모두의 의견인 것처럼 사용하고는 합니다.
이것과 비슷하게 요즘 우리들에게 많이 드러나는 특징이 있는데, 바로 챗지피티등 AI챗봇을 통해 도드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나친 데이터 의존 현상이죠. 검색이 유용하지만, 그 검색의 결과를 검증하지 않고 지나치게 신뢰하거나, 특별히 AI를 너무 신뢰한 나머지, 연애 방법까지 지피티에게 물어볼 정도로 지나친 의존 현상들이 드러나는 것을 봅니다.
잘 사용하면 너무나 편리하고 유용하면서도, 너무나 위험한 이 현상 속에, 어쩌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점점 포기하고, 그저 대세를 따르는 것이 익숙해져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의 믿음안에서도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다수가 아니게 되며, 세상이 말하는 것과 상당히 충돌되는 경험을 수도 없이 하게 되는데, 우리는 어느 순간엔 세상의 목소리에 적당히 나의 믿음을 섞어버리거나, 어느 부분은 ‘다수가 맞다고 하지 않느냐’ 라는 충분한 고민없이 믿어버리는 경우들을 경험으로 알거나 보게 되는데요.
오늘은 “우리는 왜 다수를 따라가는 것에 그토록 집중하고 있을까? 다수가 아닐지라도 진리에 굳게 설 수 는 없을까?” 라는 질문을 가지고 우리 말씀을 나누며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세상이 악하다는 것, 하나님의 한탄하심.
세상이 악하다는 것, 하나님의 한탄하심.
오늘 말씀은 아담과 하와 이래로 사람들은 생육하고 번성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신들이 좋은대로 살아가기 시작하죠. 이들은 번성하면 번성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길을 택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의 죄악이 사람이 번성할 수록 가득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악해지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시죠.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선하다, 악하다. 이 기준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선과 악을 정확하게 나눌 수 없습니다. 선과 악, 옳고 그름에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이 기준이 다르다면, 선과 악을 규정하는 규정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기준’이 없는 시대입니다. ‘네가 생각하는 것이 곧 기준이야’라고 말하는 시대이죠. 이 말은 다시 말하면, 기준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게 얼마나 위험하냐면, 기준이 없는 사회이기에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기준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취하냐면, 옳고 그름 보다는 대세, 지금 사람들이 많이 동의하는 게 곧 기준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시대 상황과 사람들의 성향을 잘 아는 일부는 ‘PC주의, 극단적 페미니즘, 각종 정치성향 등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여론몰이를 하고, SNS, 플랫폼 등 다양한 부분에 노출시킴으로 그것이 ‘선’, 기준인 것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기준이 없다는 것은 ‘확신’이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그저 의존하며, 여기저기 끌려나가는 것을 신념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죠. 그게 잘못된 것일지라도 대세가 거기라면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준’은 명확히 있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시죠.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악할 뿐이다. 라고 하시는 말에는 ‘창조’ 라는 하나님의 명확한 기준을 사람들이 끊임없이 벗어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의 사회처럼, 하나님이 기준이 아닌 그저 대세에 따라 자기들이 기준을 만들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보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며 결정하십니다.
창세기 6:6–7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신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누군가는 하나님이 인간을 잘못지은 것에 대해 후회하신다라고 이해하여, 하나님은 완벽하지 않다라고 말하지만, 문맥과 원어의 표현들을 살펴보면 그런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끊임없이 망가져가는 그들을 보며, 그들을 심판해야한다는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으로 인한 사랑의 마음을 담으시는 것입니다.
그런거 있죠. 내가 이 사람을 너무 사랑하는데, 이 사람의 잘못된 문제가 너무 심각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진 말을 말해야하는 그 상황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에, 그들의 악함을 보지 못하는, 심판하셔야 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죠.
사랑하는 자녀들이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며, 또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이들을 심판해야하는 하나님의 마음, 그 속에서 하나님의 포기치 않으시는 간절한 그 사랑을 입은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모두가 망가졌지만, 모두가 악한 길로 향해가고 있을때 한 사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혜를 입은 노아는 어떻게 살아갔을까요? 이 부분이 다수가 아닐지라도, 진리에 굳게 설 수 있는 우리의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노아는 어떤 인생으로 살아가게 됐는지를 살펴보며, 다수를 극복할 수 있고, 진리를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힘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1.은혜를 입음, 기준을 명확히 하다.
1.은혜를 입음, 기준을 명확히 하다.
진리에 굳게설 수 있는 첫번째 힘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여호와의 은혜를 입은 노아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씀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창세기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먼저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의’ 아까도 설명드렸듯이, 선과 악을 규정하려면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고 했죠? ‘기준’입니다.
여호와의 은혜를 입은 노아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흔들리고, 우리가 대세에 따라가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명확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노아를 ‘의롭다. 의인’이라고 칭해주신 가장 큰 이유였죠.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9절 이후로 은혜를 입은 노아에게 하나님이 어떤 명령을 내리시는 지 알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불러 세상을 심판할 것인데,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노아를 향해 이렇게 약속하시죠.
창세기 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노아와 그 가족들을 살려주시고 방주에 태우시겠다는 그 말씀,
이 말씀을 들은 노아는 어떻게 하죠? 삶의 기준이 바뀌어버립니다.
창세기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그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말씀을 기준삼아 살기 시작합니다.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쉽게 말해, 하나님을 향한 경험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만남과 부르심을 확인하는 순간인 것이죠.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기준이 바뀝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이상 기준이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이죠.
기준을 명확히 하는 삶은 어떤 건가요?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질문이 들어올때 말씀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지 먼저 묻는 것이죠.
2. 하나님앞에 솔직함, 성실하게 길을 걷다.
2. 하나님앞에 솔직함, 성실하게 길을 걷다.
두번째로 기준이 우리안에 명확하게 세워진다면, 우리는 삶의 여정가운데 현실적인 고민이 생깁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앞에 솔직함을 가지고 성실히 나아가야합니다.
때로는 세상의 메시지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우리가 종종 하는 실수는,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말씀의 기준을 저버리고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리고 기도의 내용에 말씀의 기준으로 정하지 않은 일은 숨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점점 하나님앞에 숨기는게 많아질 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다시 멀어지고, 말씀이 기준이 아닌 내 생각을 기준으로 다시 살기 시작하는 것이죠.
말씀을 기준으로 살았던 노아는 어땠을까요?
창세기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완전했습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는데 완전했다고 하나님의 평가가 있었죠.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숨이 턱 막혔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완전할 수 있지? 나조차도 완전하지 않은데?
저는 호기심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궁금한 걸 정말 못 참거든요. 제가 제일 힘들어하는게 이런거에요. 누가 이렇게 말하는거에요. “저기 있잖아~ 할 말이 있는데..” “응, 뭔데?” “아니야...” 정말… 쉽지 않습니다. 너무 궁금하잖아요
그리고 주변에서 뭔가 이슈되는게 있으면, 저도 해봐야해요. 요즘은 쿠팡 트럭이 해보고 싶어요 주변에 그런거 해본 사람들이 얘기해주는데 너무 재밌어 보여서 궁금한거죠.
이렇게 호기심이 많으면 뭐가 문제일까요? 고민은 짧고 행동은 빠르다는 거에요. 하나님은 저에게 수많은 실패와 뼈아픈 경험을 선물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이야기가 많아요. 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노아를 보는데 ‘완전하다’라니까 저 조차도 할 말이 없는거죠. 저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죠. 끊임없이 실수하고, 넘어가고, 시대 따라가다가 아차! 하고 다시 오기도하고 하는데 노아는 ‘완전하다’라니요.
설교준비하면서 이 단어에 좀 낙심이 되다가 원어와 용례들을 살펴보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시는 ‘완전’의 의미는 조금 다르더라구요.
이 단어는 תָּמִים 이라는 단어인데 ‘완전하다’ 외에 흠이없다. 솔직하다. 정직하다. 충실하다. 라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에요.
하나님께서 노아를 바라보실때 이 단어를 쓰신 이유는, 하나님 앞에 솔직했다는 것이죠. 정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실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앞에 솔직한 사람, 그게 바로 노아였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죠? 세상에 목소리, 휘둘릴 수 있겠죠. 여러 상황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만큼은 솔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묻기위해, 또 하나님 앞에 연약함이 있을 지라도 숨김없이 솔직함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흠없다’, ‘완전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노아도 역시 죄인입니다. 완전하지 않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에 그 은혜를 바라보고 솔직함으로 나아갔기에 완전하다고 평하신 것이죠.
우리도 죄인이었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은혜로 하나님앞에 솔직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앞에 그렇게 솔직하게 나아가고, 어떤 상황일지라도, 내가 넘어지고 무너지더라도, 하나님께 다시, 또 다시 나아가는 것을 성실, 충실하다, 완전하다고 하나님은 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세가 아닌 진리안에 굳게 서는 두번째 힘은 ‘하나님앞에 솔직해지는 것, 성실하게 그 분앞에 끊임없이 나아가며 다시, 다시, 또 다시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몸부림인 것입니다.
3. 소외됨을 누림, 영적 자존감을 세우다.
3. 소외됨을 누림, 영적 자존감을 세우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기준 앞에, 성실하게 살아가다보면, 우리안에 세워지는 가장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은 하나님안에서 우리가 세워져가고 자라가는 것인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진리안에 굳게 서는 가장 강력한 힘이기도 합니다.
바로 세번째, 소외됨을 누릴 수 있는 강력한 힘, ‘영적 자존감’을 세워가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자존감은 참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들어서야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너무 의존적이거나 너무 이기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가리고자 합니다.
이 두가지 행동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저 대세를 따라감으로 누군가에 인정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거나, 다른 한쪽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그것을 가리기 위해 대세를 주도하는 척을 함으로 주변의 인정을 얻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둘 다 확신이 없이 주변의 결정, 대세에 집중한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 핵심은 사람들의 ‘인정’ 이 포인트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관계중심적인 사회라서 대세를 따르는게 익숙한 우리나라의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보이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조심스러움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이 친구랑 밥먹으러 가는데 친구가 이런 질문을 하는거에요. “근데 우리 어디가?” “나 너 따라가고 있는데?” “난 너 따라가고 있었는데?”
자신의 고민보다는 대세를 따라가는게 익숙해서 벌어지는 헤프닝이죠. 반대의 경우는 밥먹으러 가기만 하면, 내가 밥살게!, 이건 내가 쏜다를 남발하는 기관총 형으로 주도적인 것을 강조함으로 주변의 마음과 인정을 얻고자 해서 일어나는 헤프닝
놀라운 건 이 두가지를 제가 다 해봤다는거죠. 한쪽은 내가 혹시 튀어서 미움받을까봐 결정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다른 한쪽은 내가 튀지 않으면 관심에서 사라질까봐, 내가 부담이 되더라도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자존감은 어떻게 세워지나요? 아이러니하지만 자존감은 내가 스스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관계안에서 세워지게 됩니다. 누군가를 통해 내가 거부당하더라도 완전히 거부당하지 않을거라는 경험, 내 생각을 받아주고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과정으로서 인정받은 경험들이 쌓이면서 자존감은 세워지는 것이죠.
결국 우리의 자존감이 낮은 이유는 내가 그런 인정의 경험을 아직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경험을 원하는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정의 경험들을 통해 자존감이 높아진 사람은 주변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고 나의 기준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자존감이 높아지면 변화가 생기는데, 어느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이 잡힌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에 대한 어느정도의 확신이 있기 때문이죠. 나의 의견을 충분히 어필할 수 있고, 거부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노아는 어땠을까요? 하나님이 노아에 대해 평가하는 마지막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노아가 가는 길은 사람들과 반대되는 길이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노아에 대한 이야기의 흐름과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노아는 철저하게 사람들에게 외면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7: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때를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이 마지막 때에 어떻게 살게 될 지를 말해주시는데, 이 때 노아의 때를 설명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동안 노아와 가족들 외에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대다수가 하는대로 살았으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고 바라봐주지 않는 외로운 길을 걸어갔던 것이죠.
그럼에도 노아는 왜 주변의 반응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노아를 설명해주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삶을 통해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고, 그 분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갔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믿음의 삶을 사는 우리는 충분히 노아의 삶이 어땠을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참 많이 외로웠을 겁니다. 사회에 배척당하고 때로는 대다수가 가는 길을 가지 않는다고 모진 말을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기준삼아 하나님앞에 솔직함으로 성실함을 가지고 살았던 노아는 때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격려로 힘을 내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부딪힐 때도 있었을 것이며, 믿음으로 결정한 그 길 가운데 과정속에 하나님의 인정으로 채워져가는 경험을 수도 없이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과정속에 노아는 믿음이 단단해졌겠죠. 그 과정속에 노아가 얻고 세워져 간 것이 무엇입니까?
‘영적 자존감’ , 하나님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도우시는 분이라는 것을 삶의 수많은 경험으로 세워져 어떤 상황에도 습관처럼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그 속에서 마음이 무너지고 실수할 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심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것 아닌가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이 ‘영적 자존감’ 입니다. 이것은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서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지며 그럼에도 하나님께 성실하게 솔직하게 나아가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며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영적 자존감,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
영적 자존감,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의 인생의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그럼에도 참 쉽지 않은 것은 여전히 나의 영적자존감이 낮으니, 하나님에 대한 확신, 그 부르심의 확신이 약해서 여기저기 휘둘리며 사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세상이 말하는 목소리가 너무 달콤해서, 하나님께 묻기도 전에 시도해보다가 마음고생할 때도 있고, 말씀의 기준으로 살려다 보니 내가 피해봐야되고, 마음아파야 하는 상황에 속상해서 그냥 맘편하게 세상방식대로 살고 싶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애써 외면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노아처럼, 솔직하고 성실하게 다시, 또 다시 주님의 말씀앞에 나아갈 때 때에 따라 주시는 위로와 격려가, 때로는 강하게 돌아오라 외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이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인정해주시고,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이 삶속에서 경험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의 ‘영적 자존감’은 날로날로 자라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삶의 과정을 친히 겪으시고 우리에게 믿음의 삶의 모습을 가르쳐주시고 ‘영적 자존감’을 세우시는 은혜를 부으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께 우리가 순간 순간 나아갈때 마다 각자에게 필요한 때에 맞는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도우시고 채우시는 분임을 배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영역속에 부르시는 그 부르심의 자리는 세상과 다른 길이기에 언제나 외로울 것 같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장 행복한 자리라는 사실을 배우며 확신할 것입니다.
지금의 모습이 우리의 믿음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의 믿음은 점점 더 성숙해지고 자라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확신이 우리가운데 점점 세워질 것입니다.
이 사실만 우리가 놓치지 않기 원합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사는 명확함,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앞에 솔직함으로 성실하게 나아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삶속에서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방향입니다.
우리 이 시간 믿음의 고백을 담아 이렇게 찬양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찬양을 찬양할때에 창세기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의 부르심은 노아가 어떤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밖에 이 악한 세상에, 그토록 사랑하시는 자신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간절한 사랑의 외침입니다. 믿음의 삶 살아내는 것 이전에, 놀라운 사랑의 ‘구원’ 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라는 방주로 우리들을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의 외침, 그 부르심,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어떤 행위로 얻어낸 것이 아닌 우릴 향한 간절한 사랑의 외침의 증거인 ‘부르심’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이 시간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묵상하며, 은혜를 고백하며 나아갑시다.
기도제목 1
우리 이 시간 가슴에 손을 얹고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은 나를 부르심에 후회가 없으십니다.x3” 주님께서 이 땅을 보며 한탄하시고 무너져가는 세상속에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방주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외침에 우리 다시 반응합시다. 이 시간 나를 부르신 주님의 마음을 묵상하며 각자의 고백을 담아 주여 한번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