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경을 배워요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3 views
Notes
Transcript

공경을 배워요

1 kā·ḇēḏ 히브리어 기본형 • 심한, 누르는, 무거운, 어려운
주요 관련 문서 📷 כָּבֵד 출처: 스트롱 맹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 원어 사전 3513. כָּבֵד 카베드. kabed, honorable, honor, heavy, glorify, 풍부하였더라, 창(Gen) 13:2, 무거우니, 창(Gen) 18:20, 어두워서, 창(Gen) 48:10, 치열하나, 삿(Jdg) 20:34, 비대한, 삼상(1Sa) 4:18, 영광을 돌릴찌어다, 시 22:23. 더 읽을거리 📷 כָּבֵד 1 Lexham 히브리어 성경 어휘사전
미디어결과 없음
성경 속 의미 큰 — 형용사. 크기, 수, 양, 규모, 정도에서 평균 이상. 큰 (범위) — 형용사. 상대적으로 규모, 수나 범위가 크다; 그 종류의 다른 것보다 크다. 부유한 (물질적으로) — 형용사. 물질적인 부를 소유한. 심각한 — 형용사. 정도 또는 범위에서 아주 나쁜. 어려운 — 형용사. 성취하거나 이해하고 견디기 위해 엄청난 육체적 또는 정신적 노력이 필요한. 고집 센 — 형용사. 완강히 내키지 않거나 양보하지 않으려는 끈질긴 의지로 표시되는. 무거운 (지친) — 형용사. 큰 심리적 무게로 특징지어진다; 특히 슬픔이나 고민이나 피로함으로 내리 누르는. 힘든 (소진) — 형용사. 지칠 정도의 노력으로 특징을 가지는; 특히 육체적인 노력. 무거운 (무리한) — 형용사. 노력을 요구하거나 보여주는. 어려운 (정신) — 형용사. 이해하려고 정신적 노력을 요구하는. 두꺼운 — 형용사. 상대적으로 밀도가 높은. 무거운 (무게) — 형용사. 비교적 큰 물리적 무게 또는 밀도의.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팔다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를 멸시했어요. 하나님을 멸시한거예요. 하나님이 더 크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지금 당장 배가 고프고 힘들고 자고 싶고 아픈것이 더 컸어요. 하나님 보다 나의 어려움이 더 크게 보였어요. 에서는 무엇을 선택했나요? 선택의 순간에 나를 선택했어요. 왜요? 지금 당장에 나의 어려움이 더 커보였거든요. 다른 우상으로 나를 채우는것이 더 나아보였어요.
하나님인 이런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선택했어요. 야곱이 괜찮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크게 보았기 때문이예요. 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하실거니까요. 나는 하나님이 주신 장자의 명분을 선택해려구요.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어서 속이고 빼앗았어요. 이런 야곱의 잔머리가 잘한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야곱의 믿음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시고 야곱을 통해 축복이 대를 이어가게 하셨어요. 장자인 에서가 아니라, 차자인 야곱이 축복을 이어받았어요.

3) 야곱이 장자권을 사다(25:27–34)

이삭의 쌍둥이 아들들이 장성하였다. 두 사람은 성격이 확연히 구별된다. 출생 시에 암시된 그 특징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에서는 몸이 붉고 전신에 털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 특징대로 사냥꾼이 되었고, 들사람이 되었다(27절 상). 그는 사납고 활동적이며, 주로 들에서 지내는 사람이 된 것이다. 반면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다. “조용한”으로 번역된 탐(תָּם)은 ‘완전한, 화평한, 혹은 도덕적으로 순결한’의 의미이다. 이것은 노아에게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할 때에 사용되었으며(6:9), 아브라함에게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할 때에도 사용되었으며(17:1), 욥기 1:1에 욥에게도 사용된 단어이다. 물론 그는 내성적이며 조용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의 생활은 완전하다고 할 만큼 순결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장막에 거주하였다(27절 하). 들에서 활동하는 형과 대조를 이룬다.

뱃속에서부터 싸웠던 그들의 갈등은 부모의 편애에 의해 증폭된다. 그들의 부모는 자기의 기호에 따라 쌍둥이 아들을 각각 편애하였다. 이삭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에서를 사랑하였고, 반면에 리브가는 장막에 머물면서 음식을 만드는 일을 돕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리브가는 여호와께서 주신 신탁을 기억하였기 때문에 야곱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두 형제 중 모든 면에서 에서가 유리하였다. 그는 장자권을 가지고 있었고, 또 아버지의 총애도 받았다. 그러므로 앞으로 상속권은 당연히 형의 차지였다. 그런데 이 당연한 이치가 흔들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출생 때부터 맏이가 되기 위해 다투었던 야곱은 자라면서 자기가 장자권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빼앗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루는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 심히 피곤하였다(29절). “피곤하다”는 말의 아예프(עָיֵף)는 베고픔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힘을 쓰거나 목마름에서 오는 피로이다(삿 8:4; 사 29:8; 욥 22:7 참조). 이때에 마침 야곱이 죽을 쑤고 있었다. 이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는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치친 형을 기다리면서 치밀한 계획에서 하는 행동일 수 있다. 지쳐 있는 에서는 야곱이 끓이고 있는 붉은 색깔의 죽에 식욕이 동했을 것이다. 사실 에서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마실 물과 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참지 못하는 성격을 드러낸다.

에서가 야곱에게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고 요청한다(창 25:30). “먹게하라”는 라아트(לָעַט)의 힢일 사역형인데, 욕심스럽게 집어삼키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에서가 먹고 싶어하는 심정을 잘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다가 ‘제발’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나(נָא) 단어를 사용하여 간청하고 있다. 특히 그것은 붉은 것이었다. 그래서 식욕이 더 돋았을 것이다. “붉은”은 히브리어는 아돔(אָדֹם)인데, 본문은 여기에서 에서의 별명 “에돔(אֱדוֹם)”이 붙여졌다고 말한다(30절 하). 물론 원래 에돔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그의 몸이 붉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5절 참조). 그러나 성경은 태어날 때에 붙여진 것으로 말하지 않고 여기에서 죽의 색깔에 기인한 것으로 말한다. 두 경우 모두 히브리어 아돔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성경이 이 장면에서 그의 별명이 붙여진 것으로 언급한 것은 그만큼 이 사건에 의미를 둔 것이다. 야곱이 쑤고 있었던 이 붉은 죽이 에서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그 붉은 것이 에서의 식욕을 돋워 에서가 주체할 수 없게 만들고, 끝내는 장자권을 내어놓게 만들었다.

야곱은 지쳐있는 형제에게 자기가 쑤고 있는 죽 한 그릇을 얼마든지 줄 수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야곱은 이 기회를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야곱이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고 요구한다. 고대 근동지방의 관습에는 장자에게 상속권이 있으며, 다른 형제들보다 갑절의 유산을 상속받는다. 물론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만약 아버지가 원할 경우 장자가 아닌 아들에게 상속권을 줄 수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원할 경우이다. 그런데 야곱은 아버지의 자의에서가 아닌 자기의 힘으로 상속권을 쟁취하려고 나서고 있다. 장자권을 자기에게 돌리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에서의 약점을 파고들어 기어코 목적을 달성하고야 만다.

에서가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32절)라고 말한다. 이 말에서 보면 에서는 굶어서 당장 죽을 것 같은 상태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에서가 죽을 먹고 당장 일어나 제 갈 길을 갔다. 결코 아사 직전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없다. 집에는 하인들이 얼마든지 있다. 조금만 참고 그들에게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면 금방 가져왔을 것이다. 문제는 에서가 장자의 특권을 가볍게 여겼고, 즉흥적으로 행동하였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야곱은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행동하였다. 야곱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형에게 “오늘 내게 맹세하라”고 요구한다(33절).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었다(34절). 에서가 먹고, 마시고, 그리고 일어나 갔다. 단지 죽 한 그릇과 소중한 유산권이 맞바꾸는 어처구니없는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것이 보통의 유산권인가?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을 이어받는 권한이었다. 이것을 야곱은 알고 어떻게 하든지 획득하려고 노력했다. 야곱이 알진데 에서가 그 가치를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나 에서는 이 언약적 약속을 가볍게 여겼다. 이 사건을 두고 성경의 평가에서는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훔쳤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고 말한다(34절).

근본적으로 이러한 일은 그들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신약성경은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를 음행하는 자와 동류인 망령된 자라고 부른다(히 12:16). 야곱이 간교한 수를 부려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을 귀하게 여겨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것을 획득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된다. 로마서 9장은 육신의 자녀인 이스마엘과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서로 대조시키듯이 에서와 야곱도 서로 대조시키고 있다(롬 9:7–13). 결국 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육신에 속한 자녀가 되고, 야곱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약속의 자녀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말라기서는 하나님이 에서는 미워하였고,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말한다(말 1:2, 3).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은 부족한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사랑하셨다. 마치 계속 반역을 도모하는 이스라엘을 사랑한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야곱의 행위를 미화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실상 형을 속인 것이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이 야곱의 악한 행위는 그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갈 것이다. 미래의 역사에서 야곱은 자신이 형을 속인 것처럼, 자기의 자녀들로부터 속임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행위대로 갚으시는 분이시다.

교훈과 적용

1. 하나님의 선택에는 자율권이 있다. 리브가에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예언하신 것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동생을 점지하셨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자의적인 선택이었다. 말라기서는 여호와께서 에서는 미워하였고,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말하였다(말 1:2, 3). 바울은 이 말라기서를 인용하면서(롬 9:13), 이런 하나님이 불의하냐고 묻는다. 마치 토기장이가 자신의 마음에 따라 귀히 쓸 그릇,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런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이 꾸짖을 수가 있는가?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다. 그것은 나의 잘났음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 때문에 내가 믿는 자로 선택받았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 이삭은 장자의 명문을 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다. 그것은 단순한 장자권이 아니었다. 언약적 약속의 유업을 이어받을 상속권이 담긴 장자권이었다. 언약적 약속의 귀중함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그것을 거저 던져버린 것이었다. 자기 후손들에게 그 약속을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복을 내던진 것이다. 그로써 그는 망령된 자라고 불렸다(히 12:16).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믿음을 귀히 여겨야 하겠다. 후손들에게 이 믿음을 물려주는 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3. 이삭의 두 아들의 갈등은 그들의 생전에 계속되었지만, 그러나 그들 세대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그들의 후예인 이스라엘과 에돔은 구약 역사 내내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에돔에게 지나갈 것을 요청했을 때에 에돔이 거절하여 둘러가야만 했다(민 20:14–21). 왕국시대에도 서로 적대시 하였고, 상대방을 침략하기도 하였다. 바벨론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에 에돔은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대행위를 하였다(옵 10–14; 겔 25:12–14; 겔 35:5; 36:2–3).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원을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에돔을 징벌하신다(사 34:8–9; 63:1–4). 그리고 에돔이 멸망하여 이스라엘 왕국에 병합될 것이다(옵 18–21; 말 1:4). 결국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고 한 하나님의 신탁이 성취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세계 역사를 유심히 관찰해야 할 것이다.

출애굽기 20장 강해 나를 사랑하는 자는
말씀 출애굽기 20장 1-출애굽기 20장 17
요절 출애굽기 20장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지 50일이 지났습니다. 그들은 여러모로 부족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음란하고 불평 불만을 많이 하였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사랑하고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거룩한 나라로 만들어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 나라로 소망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소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십계명을 주셔서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십계명은 성경 전체의 계명을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요약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십계명을 지키는 자는 천 대까지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 동시에 십계명을 잘 자키지 못할 것을 아시고 제사 제도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새언약을 통하여 십계명을 주실 뿐 아니라 십계명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더 행복하기를 바래서 주신 은혜의 계명입니다. 우리가 은혜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천대까지 복받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 애굽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이들은 바로의 억압으로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긍휼의 하나님은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사 이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집트 백성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셨고 나중에는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을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인을 희생시킬 정도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셔서 홍해의 물을 갈라지게 하시고 물 속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를 지날 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고 바위에서 샘물 나게 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과 능력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주이십니다.
(은혜의 계명)
이제 출애굽한 지 50일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를 때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 그 약속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시내 산에 이르렀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은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상에서 구별된 거룩한 백성입니다. 빛의 백성입니다. 이들은 이제 이방인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이 계명은 하라, 하지 말라 말씀하심으로 부담스럽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주신 은혜의 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천대까지 복을 주시려고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면 더 자유롭고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이 계명은 무겁지 않고 가볍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주시는 말씀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그 한 말씀 한 말씀을 달고 기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신을 있게 말라)
3절을 보십시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하나님 앞에 있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처음에 나 외에 다른 남자나 여자를 있게 말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요즘 애인들은 내 꿈만 꾸라고 말합니다. 상대방만 사랑해야 서로의 관계가 깊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데 가장 중요한 것도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우상을 하나님 앞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나만이 하나님 앞에 있게 해야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태양신을 섬겼고 가나안 사람은 농경의 신 바알, 다산의 신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현대인들은 황금의 신을 섬깁니다. 바카스의 신, 곧 술의 신을 섬깁니다. 스포츠를 신으로 섬깁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성경책 위에 축구공을 올려 놓아라. 그러면 열광할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돈을 신으로, 가족을 신으로 섬기고, 나 자신을 신으로 섬깁니다. 담배와 술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참신이다)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까? 그들은 출애굽하면서 애굽의 신이 헛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 사람을 몰아내면서 그들의 신도 헛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만이 참신이고 유일한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출애굽시키신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들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부처가, 공자가, 마호메트가 천지를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돈이, 연인이, 부모가, 내가 천지를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신 동시에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친히 우리를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애인이라도,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이라도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분들은 없습니다. 나 자신도 나를 위하여 죽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 죽을 자격도 없고 죽을 능력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오래 참고 감당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여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그분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신을 섬기면 결국 다른 신을 섬기는 그것 때문에 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섬기면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4,5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우리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할 우상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어떤 것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을 모세에게 주시는 그 순간에 산 밑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사사시대에는 엘리 제사장이 십계명을 넣은 언약궤를 우상처럼 이용하려다가 전쟁에서 패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는 성전을 우상시하여 로마군이 쳐들어왔을 때 그곳에 피하였다가 몰살을 당합니다. 때로는 주의 종 모세를 우상으로 섬기다가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 우상을 만들기도 합니다. 기드온이 입었던 에봇을 섬기기도 하였습니다.
요즘은 성경책이나 목에 거는 십자가, 주의 종인 목사를 섬기는 자도 있습니다. 가톨릭처럼 마리아상이나 베드로 상을 만들고 절해도 안 됩니다. 일본인처럼 신사 참배해도 안 되고 느브갓네살 왕이 만든 금신상에게 절해도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우상들과 달리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성령과 말씀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우리 예배 시간에 오직 성령의 임재를 갈망하며 말씀을 듣고자 해야 합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우상을 만드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의 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지옥처럼 무섭습니다. 여호와의 불길같이 타오릅니다. 이들의 죄를 갚으시되 삼사 대까지 갚으십니다. 질투는 진리와 사랑에서 나오는 분노입니다. 죄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남의 아내가 바람을 피우면 질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가 바람을 피울 때 질투하는 것입니다. 바람 피우는 것은 가정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긍정적인 분노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할 때 질투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도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고보서 4장 5절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하나님은 우리를 전폭적으로 사랑하셨고 우리도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나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면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질투는 지옥처럼 무섭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드려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는 성령과 말씀 외에 어떤 것도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을 섬기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해서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6절을 보십시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합니다. 하나님께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분을 우리의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그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분과 교제하는 예배 시간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 듣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분과 교제하는 기도의 시간을 행복하게 여겨야합니다. 하나님 한 분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 한 분이 계심으로 나는 부족함이 없고 기쁘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 눈에 보이는 것에 하나님보다 더 관심을 갖습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께는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소외시키기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이 슬퍼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울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분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 한 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천 대까지 은혜를 주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 자신이 변화됩니다. 사랑은 남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내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고 행복해 지고 힘이 나고 겨울이 춥지 않게 느껴집니다. 사랑하면 생명력으로 충만해집니다.
나뿐 아니라 자녀도 천대까지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진정 자녀가 복받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복받는 비결은 아주 단순하게 나옵니다. 구약 성경 전체에서 반복하여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크게 축복하여주십니다.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 몸도 건강하게 하십니다. 장수하게 하시고 인간 관계도 평화롭게 하십니다. 여러분 정말 천대까지 복을 받고자 하십니까? 그러면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7절을 보십시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 직원을 뽑을 때 아버지 성함을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 성함을 ()자, ()자, ()자라고 경외심 있게 말하는 사람을 뽑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물어보아서 경외심을 알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높으신 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농담이나 욕설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믿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비가 안 오면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이런 말도 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말아야합니다. 놀랐을 때 o my god이나 젠장할 때 jesus christ라고 쓰는 표현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나의 죄악된 행실로 하나님이 욕을 먹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해야합니다. 거룩한 행실을 살고 착한 행실을 살아야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라)
8-11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만나를 주실 때도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성막을 지을 때도 안식일은 짓지 못학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일을 하는데 일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 탐심으로 더 일하고자 하는 것에서 자유을 얻게 하십니다. 내일을 믿지 못하고 불신하고 염려하는데서 자유를 얻기 원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주체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집에서 일하는 종까지 포함됩니다. 심지어 육축이나 손님까지 안식하게 해야 합니다. 땅도 안식하게 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특히 일꾼이나 종이나 소와 같은 약자를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
안식일의 기원은 창세기에서 시작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칠일 날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날과 다르게 안식일을 복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날로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리도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하나님의 날입니다. 안식일 날 예배드리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주일 다 하나님과 만나야하지만 특별히 안식일을 정해놓고 안식일만이라도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날은 나와 지내자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날은 만사를 제쳐 놓고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야합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과 만나는데 방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안식일일 날은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교제를 합니다. 안식일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합니다. 성도 간에 사랑해야합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병든 자를 치료하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주안에서 서로 간에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야합니다.
우리가 대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상황에서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안식일 지키는 훈련을 하셨습니다. 그 훈련 중에 불신과 탐욕으로 안식일에도 만나를 주우러 나갔다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안식일을 온전히 지켜야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면 손해볼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자에게 더욱 크신 은혜를 주십니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켰다고 그들이 가난하게 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이 주일날 놀았다고 비기독교인들보다 더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안식일을 지키는 자가 물질적으로도 더 복을 받습니다.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유대인과 안식교인은 지금도 토요일 안식일을 지킵니다. 우리는 신약에 와서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후 첫날을 주일로 지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이 주신 십자가의 멍에를 질 때 마음에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안식일 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깊이 바라보아야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할 때 안식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소망해야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12절을 보십시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네 자식을 사랑하라는 말은 십계명에 없습니다. 자식 사랑은 자연스럽지만 부모 사랑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모는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부모는 우리를 낳아주시고 어렸을 때부터 보호하시고 양육해 주신 분이십니다. 때로 부모님은 자녀들을 화나게 할 수 있습니다. 술을 드시고 와서 가정 폭력을 행사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는 자녀 양육의 책임을 소홀히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를 세워주신 하나님을 보며 공경해야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자는 육신의 아버지도 공경합니다. 부모의 말씀에 주안에서 순종해야합니다. 주님이 금하는 것을 하라고 할 때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나님이 아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통하여 자녀에게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장수하게 도우십니다. 또한 부모를 공경해야 사람들과도 바른 관계성을 맺고 하나님과도 바른 관계성을 맺을 수 있습니다. 부모님께 공손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부모 공경은 절대적입니다. 부모를 욕하는 자와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십니다.
(부모를 공경한 사람들)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이 있었습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 후에 발가벗고 누워서 추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때 함은 아버지의 허물과 연약함을 보고 다른 사람에게도 퍼뜨렸습니다. 하지만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허물을 보지 않고 뒤로 들어가서 덮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효도는 부모의 실수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따라가며 효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효심을 보시고 그를 다윗의 증조할머니요. 메시야의 조상으로 귀하게 쓰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아버지에게도 순종하며 섬기셨습니다. 돌아가실 때는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우리가 멀리 있는 부모님께 자주 전화라도 드리고 편찬을 때는 찾아가 뵈어야 합니다. 돈을 벌면 용돈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할 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다음에 부모를 공경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주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하라고 합니다. 순종하는 것이 공경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공경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부모님이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하면 그 말은 순종할 수 없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13절을 보십시오. "살인하지 말지니라."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피 흘려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존귀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사람을 무시하고 인격을 모독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미워하고 분노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명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자살해도 안 되고 자학해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존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14절을 보십시오. "간음하지 말지니라."
간음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모든 성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도 간음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간음은 가정의 질서를 깨뜨리고 사회의 질서를 깨뜨립니다. 간음은 사랑이라는 말로 미화합니다. 그러나 간음은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죄악입니다. 간음은 하나님의 성전이요. 성령의 전인 우리의 몸을 사랑하지 않는 죄입니다. 몸을 더럽히는 죄악입니다.
간음은 몸 안에 짓는 죄입니다. 생명을 잉태하는 죄입니다. 임신하면 한 생명을 파멸시키는 죄입니다. 이 시대는 간음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혼전 순결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유부녀나 유부남이 애인을 두고 자연스럽게 바람을 피웁니다. 동성애를 즐깁니다. 이것이 문화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음은 자신을 미워하고 가족을 미워하고 상대방을 미워하여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
15절을 보십시오.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도적질은 남의 소유를 몰래 아니면 힘으로 빼앗는 것입니다. 이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파괴하는 행위요.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사유재산을 소중히 여기듯이 남의 사유재산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도둑이 많아지면 사람들을 일을 하지 않게 되고 놀고 먹으려고 합니다. 그런 사회는 자연히 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도둑질을 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도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야할 사람들의 마음을 압살롬처럼 도둑질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거짓증거하지 말라)
16절을 보십시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거짓 증언을 하면 나의 말에 따라서 애매한 사람이 엄청난 피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은 사람들과의 신뢰를 깨뜨립니다. 거짓말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깨뜨립니다. 거짓말은 사단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고 진실하십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를 거짓말로 숨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진실하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해야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옳다 아니다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회가 신용사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진실하게 신앙 고백을 해야 합니다. 죄를 은폐하지 말고 진실하게 고백해야합니다. 그래야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웃을 탐내지 말라)
17절을 보십시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탐심을 지나친 욕심을 말합니다. 적당한 욕심은 건강한 것이지만 지나친 욕심은 병든 것입니다. 우리가 식욕으로 밥을 맛있게 먹는 것은 좋지만 탐욕으로 식사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이 우상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탐심은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정욕에 탐심이 있으면 간음을 하고 물질욕에 탐심이 있으면 도둑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을 때 생기는 욕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만족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해야합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실 때 우리는 부족함이 없이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고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실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됩니다. 그 때 우리는 만족하여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길 수 있고 순결할 수 있고 자신의 재산에 만족할 수 있고 진실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하나님을 마음에 모심으로 십계명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세를 통하여 듣고자 함)
18,19절을 보십시오.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말씀하실 때 시내산에는 천둥이 우르릉쾅쾅 치고 번개가 번쩍 번쩍하였습니다. 나팔소리는 점점 더 크게 울렸습니다. 산에는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올랐습니다. 백성들은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십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 말씀을 하나님이 친히 하신 말씀으로 경외심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지 말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셔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 순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종을 통하여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마음을 축복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게 주의 종을 통하여 말씀을 듣고자 할 때 그들에게 영원히 복을 주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도록)
20,2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모세는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불 가운데 임하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경외하는 지를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들로 하나님을 무서워하여 십계명을 지켜서 범죄하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무서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만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죄를 무서워 하지 않고 죄를 쉽게 짓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무서워하면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잘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임하시자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멀리서고 모세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갔습니다.
(신상을 만들지 말라)
22,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말씀하신 모습을 보이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말씀으로 계시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은이나 금으로 신상을 만들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영이심으로 소경이나 귀머거리나 지적 장애인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해야 합니다. 십계명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 중에서 제이 계명을 다시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는 이 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자 아수러앨 백성들은 산 밑에서 금을 모아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악한가를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복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 복을 주리라)
24-26절을 보십시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신 후에 토단을 쌓고 양과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드리는 법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십계명을 잘 지키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회개하고 제사를 드리도록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여 회개하는 곳에서 임하여 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를 기억하고 예배드리는 곳에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정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 돌을 이용하여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정으로 쪼면 부정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가식이 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층계로 제단에 올라서 하체가 드러나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경건함을 유지해야합니다. 우리가 예배 때 지나치게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제사제도를 주신 이유)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는 그 순간에 인간이 십계명을 다 지키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십계명 위에는 속죄소를 두어 죄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십계명을 다 못 지키면 회개하고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을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임재하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한 것을 아시고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의 마음 속에 새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율례를 행하게 하여 우리가 규례를 지키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며 성령 안에서 십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투쟁해야합니다. 그러면 복을 주십니다.
(화목제물되신 예수님)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십계명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열왕기 상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몇몇 왕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왕들이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다른 신들에게 자신의 자식을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였지만 이들은 회개하기보다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나라를 망하게 하셨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서 망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두신 소망을 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번제와 화목제물로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십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소원을 두시고 힘을 주시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화목제물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매일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 십계명을 온전히 지키고자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천대까지 은혜를 주실 줄을 믿습니다. 아멘!
출애굽기 20장 강해 나를 사랑하는 자는
말씀 출애굽기 20장 1-출애굽기 20장 17
요절 출애굽기 20장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애굽기 20장 강해 끝입니다.
(기도의 사람 이삭과 리브가)
19-2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사십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이삭은 믿음의 결혼을 통하여 리브가를 아내로 얻었습니다. 이삭이 결혼한 나이는 40세였습니다. 그런데 40이 지나고 오십이 가까워 와도 리브가는 아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도 자녀를 낳지 못하였는데 이삭도 자식을 낳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시련을 통하여 훈련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문제에 빠져서 하나님께 불평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앙 생활에 피해의식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첩을 얻어서 서자 이스마엘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사명을 떠나서 13년을 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이런 아브라함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복형 이스마엘은 12 아들을 낳았는데 자신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주권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변함없이 리브가를 사랑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낙망치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변함없이 기도하였습니다. 이삭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을 잘 계승하며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믿음을 받으시고 리브가에게 쌍둥이를 잉태하게 도우셨습니다. 우리에게도 한 사람의 제자양성의 열매가 없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들도 이삭처럼 변함없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제자의 열매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를 생활화한 리브가)
22절을 보십시오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하였을 때 아이들이 배에서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먼저 나오려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리브가는 복통을 임산부의 당연한 현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리브가는 배가 아픈 데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는가를 여쭈었습니다. 리브가는 이 작은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리브가는 기도가 생활화되어 있었습니다. 리브가의 기도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우리가 배가 아플 때, 마음이 아플 때, 이가 아플 때, 이런 모든 때에 기도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는 그린 축제 때 기도하자 하나님이 일하심을 체험했습니다.
(은혜의 복음)
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리브가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아이를 통하여 두 국민을 만드십니다. 둘째가 더 강해지고 첫째는 둘째를 섬기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약간의 충격을 받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아무 선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어떤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야곱을 택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보면 하나님을 편애하시는 분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복음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복음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태중에서 야곱을 택하신 것을 통하여 은혜의 복음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기초하여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에 의해서 부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와 주권에 기초하여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르심은 절대적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이 창세 전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우리의 의지가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가운데 황인종으로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남자나 여자로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우리의 키, 얼굴 형태, 성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만 믿고 순종함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영접해야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부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어미 태에 있을 때부터 계획하시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구원받고자 하는 소원도 없었고 타락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찾아오사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절대적인 은혜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므로 우리의 구원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금 잘못했다고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아들이 잘못했다고 부모가 아들을 호적에서 파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내어나고자 하는 아무 소원도 의지도 없는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태어난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다만 믿음으로 영접해야합니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천안 유비에프 교회를 선택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로 우리를 인도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부부를 선택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부를 짝지워 주셨습니다. 우리가 부부를 선택했다면 우리는 싫어지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으므로 우리는 다만 영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부 간에 이혼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는 너무 운명적이고 답답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단이 주는 생각입니다. 운명과 섭리는 전혀 다릅니다. 운명은 우리를 망하도록 결정한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사단은 인간의 자유 의지도 인격도 무시합니다. 운명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답답합니다. 운명은 인간의 의지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 결정론입니다. 하지만 섭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우리를 잘 되도록 예정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하나님은 온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찾고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성령을 주시고 예수님을 믿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에서도 믿음으로 살면 그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삼아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신비롭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영광스럽게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8장 30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태초에 우리를 미리 아시고 예정하셨습니다. 때가 되자 주의 종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르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예정된 미래입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미래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에서와 야곱의 명명命名)
24-26절을 보십시오.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
창세기 저자는 야곱과 에서의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 말합니다. 첫째 아들 에서는 가죽처럼 털이 많은 털 사람이었습니다. 그 얼굴은 불그스름했습니다. 그래서 붉다는 뜻으로 첫째의 이름을 에서라고 붙였습니다. 둘째인 야곱은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그는 집념과 투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잡았다는 뜻으로 이름을 야곱이라고 붙였습니다. 한 사람은 외모를 보고 이름을 붙였고 한 사람은 내면을 따라서 이름을 붙였습니다.
(에서를 사랑한 이삭)
27, 28절을 보십시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에서는 야성미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운동신경이 발달하고 사냥을 잘 하는 사냥꾼이었습니다. 이삭은 미식가였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밋있는 고기를 많이 해오자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이삭은 육적인 것에 기초하여 에서를 사랑하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고 장막에 거하여 어머니를 주로 도와주었습니다. 리브가는 자신과 함께 있는 야곱을 사랑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리브가는 임신할 때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
29-33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이 말씀에는 야곱이 어떻게 장자의 명분을 사게 되었는지 나옵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난 후에도 차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한이 맺혀 있었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자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어느날 기회가 왔습니다.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서 매우 배가 고팠습니다. 야곱은 이때를 노리고 에서를 위하여 팥죽을 쑤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평상시 팥죽을 좋아한다는 것을 치밀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팥죽을 요구하자 대가로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하였습니다. 에서는 말 합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장자의 명분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에서는 배고플 때는 장자의 명분이 아무 유익이 없다고 장자의 명분을 팝니다.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에서)
34을 보십시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창세기 저자는 이 사건에 대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서의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을 말합니다. 에서는 팥죽을 중시했고 명분을 경시했습니다. 그는 세상 것을 중시여기고 하나님을 경멸히 여겼습니다. 그는 실용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졌습니다.
이런 가치관은 현실적으로 많은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이런 가치관 때문에 그의 미래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장자권은 가문을 대표하는 기능이 있고 제사를 받드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서 장자권은 메시야의 조상으로 쓰임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 구속 역사에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현실적 유익으로 살았다면 애굽의 왕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명분을 더 중시 여겼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 귀한 분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 위해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애굽의 왕자를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치관을 축복하셔서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신자의 명분, 목자의 명분이 있습니다. 신자의 명분 즉 크리스찬으로 명분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이 순교자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신자의 명분을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재는 명분을 파는 사람이 지혜롭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명분을 지킨 자는 천국에 가고 명분을 판 자는 지옥으로 갑니다. 신자의 명분을 지킨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목자의 명분이 있습니다. 목자의 명분에는 의무와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명분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의 열매를 주십니다.
(영적 가치관의 중요성)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영광스럽게 인도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단 한 가지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적 가치관이요 믿음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것을 경홀히 여긴다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사단이 다스리는 운명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섭리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우리의 미래는 영광스럽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버린다면 우리는 슬픈 운명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에서와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면 우리는 야곱과 같이 영광스럽게 살 것입니다. 우리와 프랑스와의 축구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쪽으로 결과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야곱과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25장 강해 야곱과 에서
말씀 창세기 25장 1-창세기 25장 40절
요절 창세기 25장 34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창세기 25장 강해 끝입니다.
출애굽기 제 11 강
말씀/출애굽기 20:1-26
요절/출애굽기 20:2,3
십계명
본문은 유명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의 전제가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이 명령을 주신 하나님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으로, ‘네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종 되었던 집’이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애굽 사람들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애굽 사람들의 말을 따라야 했고, 애굽 사람들이 시키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애굽 사람들을 위해 존재했고 살았으며 일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시키면 이제 갓 태어난 아이라도 나일 강에 던져야 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내용상으로는 사람의 종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사람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어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람에게서 인도해 내셨고, 그들은 사람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자유인이 되었으며 하나님께로 인도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와 그 국민들을 강한 손으로 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해 내지 않으셨더라면 그들은 평생, 자손 대대로 사람의 종이 되어 사람을 섬겨야 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종으로 살았다면 그들만의 독자적인 사상이나 철학, 혹은 문화를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애굽 사람들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람의 종 된 데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해 낸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지켜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대표적 계명이 십계명이었습니다.
제 일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데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들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아름답고 광대한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셨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만이 모든 대적들을 깨뜨리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들을 인도하시며 축복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이 말씀에서 ‘다른 신’이란 무엇입니까? 물론 여호와 하나님 외의 다른 신, 곧 여호와라는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가진 ‘신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신’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신’은 인간을 능가하는 존재, 인간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진 존재,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존재, 사람을 돕고 축복하고 구원할 존재를 말합니다. 그렇게 볼 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이 말은 여호와 외의 다른 이름을 가진 신을 그런 능력을 가진 존재, 그런 일을 하는 존재, 사람을 돕고 구원하는 존재로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말도 됩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들이 많았습니다. 각 민족, 각 부족들은 각기 나름대로 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각 민족들은 자기들의 신이 자기들을 돕고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듣지도 못했고 체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스라엘은 출애굽 역사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치심으로 강력한 애굽 기병대가 물에 빠져 죽어 떠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출 14: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그리고 이스라엘은 춤추며 노래했습니다. 출 15:1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들은 여호와 외에 누가 신인가 말했습니다. 출 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은 여호와와 같은 그런 일을 할 신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호와 외에 신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신이 자기 백성을 그렇게 구원할 수 있는가? 그래서 제 일 계명이 이러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제 이 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왜 우상을 만들고 형상을 만들까요? 그들은 눈에 보이는 신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은 보이는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은 구체적이지 못한 것 같고 막연한 것 같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눈에 보여야 존재하는 것 같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은 믿을 수 없었을 것 같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신이라고 하면 신이 그 형상으로 제한되고 묶여버리고 맙니다. 송아지 형상을 만들면 신이 송아지 모양을 한 것이 됩니다. 미켈란젤로의 그림 중 천지창조에는 긴 수염을 가진 노인이 한 젊은 청년과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창세기의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을 만드는 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인데, 그 그림에는 하나님이 긴 수염을 한 노인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런 모양으로 제한됩니다. 그런데 과연 아담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 긴 수염을 가진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영이시며 말씀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형상으로 자기를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귀에 들려오는 말씀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눈에 보이는 형상에서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형상을 만들고자 합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려 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구체적인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요? 얼마 전에 유명 연예인 중 한 사람의 휴대폰 복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일은 그 연예인의 매니저가 그 연예인을 감시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연예인은 신비 콘셉트로 광고 모델에서 비싼 값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연예인의 사생활이 노출되면 신비감이 깨지기 때문에 사생활이 노출되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 연예인의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실제 생활은 그리 신비롭지 않다는 것을 그 매니저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도리어 속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도 결국 눈에 보이는 우상에 속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이 눈에 보이는 것에 속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ㅂ모이는 우상에게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사람들이 왜 보이는 우상에게 절합니까? 보이는 우상이 그들을 축복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우상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상이 그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역으로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도와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지 않고 도리어 보이는 우상이나 혹은 능력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이 그들을 축복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우상, 사람에게 절합니다. 또 섬깁니다. 우상이나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합니다.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본문을 보면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는 그들이 왜 여호와 하나님을 미워합니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으시고 또 자기들을 도와주지도 축복하지도 않으면서 여러 가지 요구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생각에는 우상이 눈에 보이니 좋게 보이는데 여호와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 보기에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살면서도 잘만 사는 것 같은데,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들에게 욕심대로 살지 말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고 말합니다. 안식일에도 열심히 일을 해도 제대로 먹고 살기 힘들 것 같은데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히브리 노예는 칠 년째는 그냥 풀어주라고 합니다. 그러면 손해만 봅니다. 사람들은 그런 모든 것이 싫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을 하라고 시키시는 하나님까지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해주지 않으시면서 이것저것 힘든 것을 요구만 한다고 생각되니 힘들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그러나 한편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우상에게서 축복이나 도움이 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변함없이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진정한 도움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비록 사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시며 함께 하시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비록 사람 눈에는 안 보일지라도 선한 목자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제 삼 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망령되게 부른다’는 것은 헛되이 부른다는 말이요, 이를 다시 말하면 아무 기대 없이 부른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는데 그 하나님에게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부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습관적이 되거나 율법적이 되면 그렇게 됩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도움을 청하기는 하지만 실제 해결에 있어서는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거나 자기 나름대로 이런 저런 방법을 찾거나, 도와줄 사람을 찾아다닌다면, 그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죄 없다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여호와께 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입을 벌렸으면 여호와께서 그 입을 채워주실 것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 기쁨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제 사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먹고 살기 힘든 시기에 안식일 하루를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은 큰 손해인 것 같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힘든 시기에 먹고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축이라도 할 것 같습니다. 특히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하루 쉰다는 것은 하루를 굶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누가 하루를 아무 일도 안 하고 쉴 수 있을까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안식일에는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이 안식일 하루를 쉬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셨음을 인정하는 것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 하루를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 안식일 하루를 쉰다는 것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먹이실 것을 믿는 것이 됩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에게 날마다 먹을 것, 곧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날마다 자기 양식을 거두라고 말씀하셨고 안식일에는 거두러 나가지 말고 장막에서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위해서는 그 전 날에 두 배의 양식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양식을 미리 주셨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아주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에 양식을 거두러 나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먹이신다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에 애굽에 있을 때는 애굽 사람들이 주는 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목축업을 하였지 농사는 짓지 않았습니다. 농사는 애굽 사람들 몫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들이 주지 않으면 빵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애굽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요구를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안식일에도 나와서 일하라고 하면 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했다가는 양식을 얻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 때에는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의 삶, 심지어 목숨까지도 좌지우지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손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책임지고 먹이고 입히십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 점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 삶, 자기들의 먹고 마시는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편히 쉽니다.
제 오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곧 현재의 자기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자기를 존중할 때 부모를 공경할 수 있습니다. 또 역으로 부모를 공경하게 되면 현재의 자기를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이 현재의 자기를 존중하지 않으면 자기를 있게 한 부모를 공경하지 못합니다. 현재의 자기에 대해서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부모를 멸시하며 함부로 대합니다. 또 현재의 자기가 마치 오직 자기의 힘이나 능력으로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부모를 공경하지 못합니다. 현재의 자기 존재나, 자기 재능, 자기의 가진 모든 것이 부모로부터 주어진 것을 인정하면 부모를 공경하게 됩니다. 부모가 자기 존재의 근원임을 인정함으로 부모를 공경하게 됩니다.
부모가 자기의 존재의 근원임을 인정하고 공경한다는 것은 곧 그 부모를 있게 한 부모도 공경하게 되고, 또 그 부모도 공경하게 됨을 뜻합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이르게 되고, 하나님을 공경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공경하면 또한 부모도 공경하게 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계명은 앞의 계명들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앞의 계명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음을 알고 그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결국 부모도 공경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 존재의 근원을 알고 인정하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효자는 오래 삽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감사가 있고 빛이 있습니다. 현재의 자기가 어떠하든 자기 존재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그만큼 자기 존재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죄에 내던지지도 않습니다. 마음에 감사가 있으니 오래 삽니다. 또 어려움이 있어도 부모를 생각해서 극복하고자 합니다. 극단적인 경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청년이 너무 힘들어 자살을 생각하다가도 자기가 죽으면 부모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할까 생각하고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어서 그런 생각을 접고 열심히 살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부모를 공경한 덕에 일찍 죽지 않은 셈이 됩니다.
제 육 계명
“살인하지 말라.” 이 말에서 ‘살인’이라는 말의 원뜻은 마음에 원한을 품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당한 일에 대한 복수에서 나온 살인을 말합니다. 물론 일반적인 살인도 포함되겠지만, 특별히 그런 잔인한 살인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복수는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악한 짓을 했다면 사람이 그를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처단하십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성경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으로서 악을 친히 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원수를 갚으십니다.
하나님께 원수를 맡기지 않고 사람이 직접 갚는다는 것은 사람이 곧 하나님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이요, 사람이 재판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선, 악을 결정하는 것이 됩니다. 선, 악을 결정하고 벌하는 일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역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질서가 세워집니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선, 악을 따라 다른 사람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하면 죽이고 싶어 합니다. 내 생각대로 다른 사람을 벌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람 사이에는 갈등과 싸움이 끊이지 않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끊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사람 사이에 악한 마음과 두려움이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곳이 바로 지옥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죽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죽이고자 싶은 마음이 있는 곳도 곧 지옥입니다. 그래서 이런 계명이 주어졌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제 칠 계명
“간음하지 말라.” 이 계명에서 ‘간음’은 특히 결혼한 남자 혹은 여자와의 불륜한 성관계를 말합니다. 그런 간음이 행해지면 어떻게 됩니까? 가정이 깨집니다. 가정이 깨지면 어떻게 됩니까? 자녀들이 내적으로 건강하게 자라지 못합니다. 도리어 내적으로 병듭니다. 자녀들이 내적으로 병들면 그 가정이나 그런 자녀들이 자라는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회도 결국 병들고 말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결혼은 하나님이 친히 이루신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룰 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정을 통해서 건강한 자녀를 낳고 키우고자 하십니다. 건강한 가정에서 건강한 자녀들이 태어나 자랄 때 한 사회, 더 나아가 온 인류는 희망이 있습니다. 반대로 가정이 지켜지지 않으면 인류 전체가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제 팔 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이 계명에서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무엇을 도둑질하는 것인지 명시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든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남의 지식, 남의 마음, 남의 사람 등 남의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도둑질한다는 것은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가져오는 것입니다.
가져오고 싶으면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주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가져오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것을 몰래 가져올 때 남에게 치명적 상처를 줄 수 있고 심하면 그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도둑이 한 농부가 한 해 동안 땀 흘려 키워서 수확한 것을 도둑질했다면 그 농부의 마음은 어떠하며, 그 농부의 가정은 어떠하겠습니까? 도둑질하는 사람은 자기가 얻는 것만 생각하지, 그것을 도둑맞은 사람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곧 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 구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 계명에서 ‘이웃’은 같은 공동체 내의 사람을 말합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을 말합니다. 거짓증거란 그 이웃을 해치기 위해서 누군가와 짜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곧 그 이웃을 죽이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악을 행치 않아야 합니다.
제 십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 이 모든 것이 결국 이웃의 것을 탐내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않으면 이 모든 악을 행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한다면 살인할 이유가 없을 것이며, 간음하거나 도둑질할 이유가 없습니다. 간음은 이웃의 아내나 남편을 탐내기 때문이 아닙니까? 도둑질하는 것도 결국 탐내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탐냅니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좋아 보이는 것을 탐냅니다. 그리고 탐내기 때문에 간음도 하고 도둑질도 합니다. 탐내지 않으면, 곧 마음에 탐심이 없으면 악도 행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탐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고 또 모든 것을 공급하심을 안다면 탐내지 않습니다. 탐나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사람에게서 가지려고 하지 않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바랄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모든 좋은 것이 옵니다. 그리고 이를 알고 믿을 때 주어진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다른 신을 둘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을 우상으로 삼고 기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종 되었던 집에서 나를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출처] 출애굽기 11 강(20:1-26) 십계명|작성자 이바울
창세기 18
영광스러운 축복의 계승자
말씀: 창세기 25:22-34, 27:1-45
요절: 창세기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오늘 말씀은 믿음의 2대 조상 이삭이 3대 조상 야곱에게 축복을 계승하는 내용입니다. 이삭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에서와 야곱 쌍둥이입니다. 쌍둥이라도 에서가 먼저 나왔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에서에게 축복이 계승되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둘째인 야곱에게 축복이 계승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영적인 축복을 계승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 또 어떤 자가 이런 축복을 계승하는가? 배우길 기도합니다.
첫째로, 축복의 계승 역사는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요, 주권입니다. 25:23절에 보면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하고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삭이나 리브가가 두 아들들 중에서 누구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로마서 9:11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에서나 야곱이 엄마 뱃속에서 무슨 선과 악을 행했겠습니까? 두 아이를 잉태케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야곱을 선택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축복의 계승자로 선택 받았다고 해서 결코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택하심의 은혜에 감사해야만 합니다.
우리도 내가 구원 받고 목자로 선택받은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9:15,16절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요, 아무 자격 없는 나를 선택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항상 겸손할 수 있고, 무익한 종의 자세로 충성을 다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소중히 여겼지만, 에서는 이를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형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으로 들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신이 털옷 같아서 야성미가 넘치고 남자다웠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하고 주로 장막에서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요리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에서가 훨씬 더 리더감 같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영적인 가치관이 없었습니다. 25:29절에 보면, 에서가 들에서 돌아왔는데 심히 피곤하고 배가 고팠습니다. 때마침 야곱이 죽을 쑤고 있었는데 그 냄새가 죽여주었습니다. 에서는 군침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야곱, 나 배고파 죽겠는데 팥죽 좀 먹자” 이때 야곱이 말했습니다. “형, 내가 팥죽 줄테니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파시오” 이때 에서가 영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뭐,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내가 굶어 죽었으면 죽었지, 장자의 명분은 못 판다” 그렇게 말하고 집에 들어가서 라면 끓여 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에서가 뭐라고 말합니까? 32절을 봅시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에서는 자신이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밥 한 끼 못 먹었다고 죽습니까? 에서가 얼마나 육신적이고 감정적인 자인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육신의 욕망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34절에 보면, 에서가 팥죽을 먹고 마시고 일어나 가버렸습니다. 그는 정신없이 죽을 먹고, 국물하나 남기지 않고 다 마시고 일어나 갔습니다. 그는 오직 먹는 즐거움에 사로잡혀 다른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미련없이 팔았습니다. “배고파 죽겠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소용이 있어? 엣다, 장자의 명분, 야곱 너나 가져라” 장자의 직분이 귀찮다는 듯이 야곱에게 넘겨 버렸습니다.
성경은 그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말합니다(34b).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영어성경에 ‘despise’로서 “멸시했다” “비웃었다” 그런 뜻입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당장 배고픈 현실문제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장자의 명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멸시했습니다. 히브리서 12:16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린 에서의 행동을 음행의 죄와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망령된 자라는 것입니다. 망령된 자는 ‘godless’로서, 그는 마음에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없으니 육신의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에서와 같이 살아갑니다. “예수가 뭐 밥 먹여 주냐?” “취직 시켜 줘?” “너나 잘 믿어, 난 그딴 것 필요 없어” 세상 사람들에게는 지금 당장, 배부르고, 즐겁고, 재미있으면 다 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가치요, 진리요, 인생목적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 밤, 광주 치평동 한 나이트클럽에서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술 마시고 춤추며 광란의 불금을 보내다가 구조물이 붕괴되었습니다. 이 사고로 두 명이 죽고 10여명이 다쳤습니다.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는 금요일 밤 많은 세상사람들은 밤을 새워 먹고 마시고 육신의 쾌락을 즐기고자 합니다. 이처럼 육신적인 자들을 하나님은 축복의 계승자로 삼지 않으십니다. 영적인 것의 가치를 모르고, 망령되게 살아가는 자는 결코 언약의 계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생각했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유산을 이어받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장차는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를 탄생시키는 가문으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특권이기도 하지만 그 그릇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책임도 따랐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함께 자라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자신의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으로 부름 받고,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된 것,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게 된 것, 뭇별의 환상을 보여 주시고 열국의 아비로 세우신 언약, 부모님이 어떻게 믿음의 가정을 이루었고, 20년 동안 자식이 없었지만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들 쌍둥이를 낳게 해 주신 것, 그리고 흉년의 때에 말씀에 순종해서 그랄에 거했을 때 100배의 수확을 얻게 된 것 등등. 믿음의 역사에 대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이런 가정에 태어난 것을 무한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찌하든지 이 귀한 역사를 계승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에서가 주로 내일은 무슨 짐승을 사냥할까? 고민할 때, 야곱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형 에서가 말씀공부 시간에 주로 졸고, 스마트 폰만 만지고 있을 때 야곱은 큰 감동을 받고 밤을 새워 소감을 썼습니다. “나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믿음을 계승하여 믿음의 가문을 일으키리라” 하나님은 이처럼 영적인 가치관이 있는 야곱을 언약의 계승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외모가 얼마나 멋있는가? 사냥 실력이 얼마나 좋은가? 이런 것을 중요시 하지 않으십니다. 성격이 좀 소심하고 남자다운 매력이 부족해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사람, 믿음을 귀히 여기는 사람을 언약의 계승자로 선택하십니다. 메시야의 족보를 기록한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맨 첫 페이지, 메시야의 족보에 야곱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기록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18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했습니다. 팥죽 한 그릇이 먹을 때는 맛있지만 먹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장자의 직분은 영원히 남습니다.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선지자 엘리사가 선배 선지자 엘리야를 열심히 따라 다니며 배우고자 애를 씁니다. 엘리야가 승천하기 직전에 소원을 물어 보자 뭐라고 답합니까? “당신의 성령의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왕하2:9)” 갑절의 영감을 구합니다. 사실 엘리야의 사역을 계승해서 섬긴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북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달리 바알선지자들이 득세합니다. 엘리야를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쳤던 이세벨 여사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도 없이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엘리야가 살아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며 사명을 감당했지만 엘리야가 승천하고 나면 슬그머니 보따리 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북이스라엘의 영적 각성운동을 일으키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하는 열정이 넘치는 엘리사를 엘리야의 계승자로 세우시고 구원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에게 직분을 맡겨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가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1:12-14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과거 무지와 교만으로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신을 구원하신 것만도 감사한데 그를 충성되게 여겨, 사도의 직분을 주셨으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는 이 직분을 감당하느라 누구보다 많이 수고했지만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15:10).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도의 직분을 귀히 여긴 바울을 세계선교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곽아브라함 목자님은 힘든 의대공부를 하면서도 캠퍼스 목자라는 명분을 귀히 여기고 시험기간에도 매주 요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졸업후 결혼할 때도 건설회사 사장이 병원차려 준다며 사위 삼고자 했지만 한 눈 팔지 않고 믿음의 결혼을 했습니다. 강진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며 주말부부로 살면서도, 토요일이면 광주에 올라와 주니어 학사팀 말씀공부를 인도했습니다. 주일 새벽기도를 절대적으로 감당했습니다. 이로서 의대 가운데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 영향력 때문에 손다니엘, 곽모세, 유다니엘 목자님도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사명중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뭇별파트로 장가간 박현민 목자님도 지난 여름 수양회때 맹장 수술한 다음날, 피주머니를 달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지난 여름수양회때 다들 바쁜 스케줄이 있지만 메시지와 장기자랑, 드라마, 특송 등을 섬기고, 양들을 초청하느라 많은 시간과 물질을 희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진심을 받으시고 전무한 수양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다윗 목자님은 학교에서 유럽여행을 가도록 지원해 주지만, 여름수양회와 겹쳐서 이를 반납하고 양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때 최필훈 형제가 수양회에 참석해서 큰 은혜를 받고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시대에 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명분을 귀히 여기고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를 생명구원역사에 귀하게 들어 쓰실 것을 믿습니다.
셋째로, 에서와 야곱의 가치관은 결혼하는데서도 나타났습니다. 26:34,3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언약의 계승자로서 결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후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혼시킬 때도 가나안 여자가 아닌 믿음있는 사람과 결혼 하도록 하란으로 보냈습니다. 에서도 자라면서 분명히 부모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부모님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40세에 가나안 사람인 헷 족속의 딸들과 결혼해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삭과 리브가는 마음에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어떻게 결혼했습니까? 28:1-5절에 보면 이삭이 야곱이 불러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지 말고 밧단아람으로 가서 외삼촌 라반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말합니다. 이에 야곱은 순종해서 밧단아람으로 가서 믿음있는 라반의 딸들과 결혼을 합니다. 이로서 12명의 믿음의 아들들을 낳아서 이스라엘 민족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에 기초해서 결혼한 에서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결혼한 야곱은 전혀 다른 열매를 맺게 됩니다.
27장을 보면 이삭이 야곱을 계승자로 세우고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27:1절에 보면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서 영적인 분별력이 희미해졌습니다. 이삭은 사냥한 별미를 좋아했기에 에서가 짐승을 잡아 오면 그것을 먹고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리브가가 야곱을 에서로 변장시켜 이삭에게 보냅니다. 어찌하든지 야곱이 축복을 계승하도록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음이 약한 야곱은 주저했습니다. 그렇게 했다가 들키면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13)” 이렇게 해서 결국 야곱이 축복을 받도록 합니다. 리브가의 행동이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또 에서인체 하고 이삭에게 가서 축복을 받은 야곱도 꼭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 때문에 후에 댓가를 치룹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 밑에서 사기를 당하며 20년 동안 죽도록 고생합니다. 리브가는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허물도 쓰셔서 축복이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계승되게 하셨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어떻게 축복합니까? 28,2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삭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풍성한 곡식의 축복을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중동지방은 비가 잘 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슬을 많이 내려 주셔서 곡식이 잘 자라도록 축복해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이삭은 야곱이 복의 근원이 되어서 만민이 그를 섬기고 열국이 그에게 굴복하도록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는 장차 야곱의 후손이 모든 민족위에 뛰어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을 의미합니다(출19:5,6). 또 그 후손 가운데서 인류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 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서 죄와 죽음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모든 만민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빌2:10). 이 예수님을 탄생하는 메시야의 혈통으로 택함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어, 이삭을 거쳐, 야곱을 지나 그 후손들에게 흘러 갑니다. 야곱은 그 축복의 main stream에 서게 됩니다.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살면서 인류 구속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는 것,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허물진 저희를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하시고 이 시대에 복의 근원이요, history maker로 불러 주셨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맡겨 주시고 죄로 병든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이런 영적인 역사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기를 쓰고 이 역사에 계승자가 되고자 합니다. 좀 고생을 하고 시련이 있을지라도 기꺼이 이 길을 가고자 합니다.
김요나단 목자님은 군대를 장교로 갔다 와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만 바라보고 계신 부모님을 생각할 때 하루 빨리 시험에 패스해서 안정된 자리를 잡는 것이 능사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센타 사정을 보니 건축역사는 시작되었고 풀타임으로 복음역사 섬길 일군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계획을 내려놓고 풀타임 목자로 자원했습니다. 장교생활하며 번 물질도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김승리 목자님과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가난한 인턴목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양들이 감동을 받고 바로 열매가 맺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수 년 동안 양들이 밥만 얻어먹고 떠나갔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때의 선택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충성을 받으시고 시온성 중건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많은 실패를 경험했지만 참고 인내했을 때 올해 많은 소망스런 양들을 파트가운데 보내 주고 계십니다. 장차 수많은 목자들을 세계 각국에 선교사로 파송하는 열방의 선지자로 귀하게 쓰시리라 믿습니다.
30절을 봅시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후에 에서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께 드리고 축복 받기를 원했습니다.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그러나 이삭은 이미 야곱에게 축복을 해 버렸기 때문에 에서에게 줄 복이 없었습니다. “아니, 내가 축복한 아들이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었단 말이냐. 그러나 이미 그를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33)” 이때 에서는 슬피 울며 부르짖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34)”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36)”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그리하소서(38)” 에서는 소리 높여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영적인 축복은 아버지인 이삭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복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야곱이 자신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빼앗았다고 분통해 했습니다. 그러나 실은 자신이 이미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삭은 에서의 미래에 대해 말씀해 주었습니다. 39,40절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 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과는 거리가 먼 자가 되고 맙니다. 사막의 도적떼가 되어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먹고 사는 신세가 됩니다.
우리는 축복을 빼앗기고 소리 높여 우는 에서의 모습에서 마지막 날 구원을 받지 못해 애통해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 13장 좁은 문 비유 에서 구원의 문이 닫힌 후에 어떤 사람들이 울부짖습니다. “주여 열어주소서.”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자들아 떠나가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눅13:27,28)” 신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산 자들은 마지막 날 밖에 던져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복을 사모하며 영적인 가치관을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깨닫게 됩니다. 요즘 세상은 갈수록 물질적이고, 감각적이고, 찰라적인 것에 최고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다. 에서와 같이 당장 맛있고 재밌고 풍요로운 것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자신의 영혼을 팔아 버립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12:17절에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육신적인 삶을 살다가 나중에 눈물을 흘리며 사정해도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지금 빨리 회개하고, 지금 영적인 가치관을 따라 살아야합니다. 방학동안에 말씀 특공대를 하고, 로마서를 암송하고, 양들을 섬기고, 하나님 역사에 헌신하는 것이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장차 영광스러운 축복의 계승자로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8:18절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하늘 영광을 소망 하며 기쁨으로 제자의 길, 사명인의 길을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창세기 18
영광스러운 축복의 계승자
말씀: 창세기 25:22-34, 27:1-45
요절: 창세기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오늘 말씀은 믿음의 2대 조상 이삭이 3대 조상 야곱에게 축복을 계승하는 내용입니다. 이삭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에서와 야곱 쌍둥이입니다. 쌍둥이라도 에서가 먼저 나왔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에서에게 축복이 계승되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둘째인 야곱에게 축복이 계승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영적인 축복을 계승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 또 어떤 자가 이런 축복을 계승하는가? 배우길 기도합니다.
첫째로, 축복의 계승 역사는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요, 주권입니다. 25:23절에 보면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하고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삭이나 리브가가 두 아들들 중에서 누구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로마서 9:11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에서나 야곱이 엄마 뱃속에서 무슨 선과 악을 행했겠습니까? 두 아이를 잉태케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야곱을 선택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축복의 계승자로 선택 받았다고 해서 결코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택하심의 은혜에 감사해야만 합니다.
우리도 내가 구원 받고 목자로 선택받은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9:15,16절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요, 아무 자격 없는 나를 선택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항상 겸손할 수 있고, 무익한 종의 자세로 충성을 다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소중히 여겼지만, 에서는 이를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형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으로 들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신이 털옷 같아서 야성미가 넘치고 남자다웠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하고 주로 장막에서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요리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에서가 훨씬 더 리더감 같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영적인 가치관이 없었습니다. 25:29절에 보면, 에서가 들에서 돌아왔는데 심히 피곤하고 배가 고팠습니다. 때마침 야곱이 죽을 쑤고 있었는데 그 냄새가 죽여주었습니다. 에서는 군침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야곱, 나 배고파 죽겠는데 팥죽 좀 먹자” 이때 야곱이 말했습니다. “형, 내가 팥죽 줄테니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파시오” 이때 에서가 영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뭐,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내가 굶어 죽었으면 죽었지, 장자의 명분은 못 판다” 그렇게 말하고 집에 들어가서 라면 끓여 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에서가 뭐라고 말합니까? 32절을 봅시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에서는 자신이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밥 한 끼 못 먹었다고 죽습니까? 에서가 얼마나 육신적이고 감정적인 자인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육신의 욕망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34절에 보면, 에서가 팥죽을 먹고 마시고 일어나 가버렸습니다. 그는 정신없이 죽을 먹고, 국물하나 남기지 않고 다 마시고 일어나 갔습니다. 그는 오직 먹는 즐거움에 사로잡혀 다른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미련없이 팔았습니다. “배고파 죽겠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소용이 있어? 엣다, 장자의 명분, 야곱 너나 가져라” 장자의 직분이 귀찮다는 듯이 야곱에게 넘겨 버렸습니다.
성경은 그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말합니다(34b).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영어성경에 ‘despise’로서 “멸시했다” “비웃었다” 그런 뜻입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당장 배고픈 현실문제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장자의 명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멸시했습니다. 히브리서 12:16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린 에서의 행동을 음행의 죄와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망령된 자라는 것입니다. 망령된 자는 ‘godless’로서, 그는 마음에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없으니 육신의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에서와 같이 살아갑니다. “예수가 뭐 밥 먹여 주냐?” “취직 시켜 줘?” “너나 잘 믿어, 난 그딴 것 필요 없어” 세상 사람들에게는 지금 당장, 배부르고, 즐겁고, 재미있으면 다 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가치요, 진리요, 인생목적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 밤, 광주 치평동 한 나이트클럽에서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술 마시고 춤추며 광란의 불금을 보내다가 구조물이 붕괴되었습니다. 이 사고로 두 명이 죽고 10여명이 다쳤습니다.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는 금요일 밤 많은 세상사람들은 밤을 새워 먹고 마시고 육신의 쾌락을 즐기고자 합니다. 이처럼 육신적인 자들을 하나님은 축복의 계승자로 삼지 않으십니다. 영적인 것의 가치를 모르고, 망령되게 살아가는 자는 결코 언약의 계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생각했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유산을 이어받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장차는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를 탄생시키는 가문으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특권이기도 하지만 그 그릇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책임도 따랐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함께 자라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자신의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으로 부름 받고,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된 것,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게 된 것, 뭇별의 환상을 보여 주시고 열국의 아비로 세우신 언약, 부모님이 어떻게 믿음의 가정을 이루었고, 20년 동안 자식이 없었지만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들 쌍둥이를 낳게 해 주신 것, 그리고 흉년의 때에 말씀에 순종해서 그랄에 거했을 때 100배의 수확을 얻게 된 것 등등. 믿음의 역사에 대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이런 가정에 태어난 것을 무한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찌하든지 이 귀한 역사를 계승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에서가 주로 내일은 무슨 짐승을 사냥할까? 고민할 때, 야곱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형 에서가 말씀공부 시간에 주로 졸고, 스마트 폰만 만지고 있을 때 야곱은 큰 감동을 받고 밤을 새워 소감을 썼습니다. “나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믿음을 계승하여 믿음의 가문을 일으키리라” 하나님은 이처럼 영적인 가치관이 있는 야곱을 언약의 계승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외모가 얼마나 멋있는가? 사냥 실력이 얼마나 좋은가? 이런 것을 중요시 하지 않으십니다. 성격이 좀 소심하고 남자다운 매력이 부족해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사람, 믿음을 귀히 여기는 사람을 언약의 계승자로 선택하십니다. 메시야의 족보를 기록한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맨 첫 페이지, 메시야의 족보에 야곱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기록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18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했습니다. 팥죽 한 그릇이 먹을 때는 맛있지만 먹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장자의 직분은 영원히 남습니다.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선지자 엘리사가 선배 선지자 엘리야를 열심히 따라 다니며 배우고자 애를 씁니다. 엘리야가 승천하기 직전에 소원을 물어 보자 뭐라고 답합니까? “당신의 성령의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왕하2:9)” 갑절의 영감을 구합니다. 사실 엘리야의 사역을 계승해서 섬긴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북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달리 바알선지자들이 득세합니다. 엘리야를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쳤던 이세벨 여사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도 없이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엘리야가 살아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며 사명을 감당했지만 엘리야가 승천하고 나면 슬그머니 보따리 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북이스라엘의 영적 각성운동을 일으키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하는 열정이 넘치는 엘리사를 엘리야의 계승자로 세우시고 구원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에게 직분을 맡겨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가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1:12-14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과거 무지와 교만으로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신을 구원하신 것만도 감사한데 그를 충성되게 여겨, 사도의 직분을 주셨으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는 이 직분을 감당하느라 누구보다 많이 수고했지만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15:10).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도의 직분을 귀히 여긴 바울을 세계선교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곽아브라함 목자님은 힘든 의대공부를 하면서도 캠퍼스 목자라는 명분을 귀히 여기고 시험기간에도 매주 요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졸업후 결혼할 때도 건설회사 사장이 병원차려 준다며 사위 삼고자 했지만 한 눈 팔지 않고 믿음의 결혼을 했습니다. 강진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며 주말부부로 살면서도, 토요일이면 광주에 올라와 주니어 학사팀 말씀공부를 인도했습니다. 주일 새벽기도를 절대적으로 감당했습니다. 이로서 의대 가운데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 영향력 때문에 손다니엘, 곽모세, 유다니엘 목자님도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사명중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뭇별파트로 장가간 박현민 목자님도 지난 여름 수양회때 맹장 수술한 다음날, 피주머니를 달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지난 여름수양회때 다들 바쁜 스케줄이 있지만 메시지와 장기자랑, 드라마, 특송 등을 섬기고, 양들을 초청하느라 많은 시간과 물질을 희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진심을 받으시고 전무한 수양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다윗 목자님은 학교에서 유럽여행을 가도록 지원해 주지만, 여름수양회와 겹쳐서 이를 반납하고 양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때 최필훈 형제가 수양회에 참석해서 큰 은혜를 받고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시대에 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명분을 귀히 여기고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를 생명구원역사에 귀하게 들어 쓰실 것을 믿습니다.
셋째로, 에서와 야곱의 가치관은 결혼하는데서도 나타났습니다. 26:34,3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언약의 계승자로서 결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후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혼시킬 때도 가나안 여자가 아닌 믿음있는 사람과 결혼 하도록 하란으로 보냈습니다. 에서도 자라면서 분명히 부모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부모님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40세에 가나안 사람인 헷 족속의 딸들과 결혼해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삭과 리브가는 마음에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어떻게 결혼했습니까? 28:1-5절에 보면 이삭이 야곱이 불러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지 말고 밧단아람으로 가서 외삼촌 라반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말합니다. 이에 야곱은 순종해서 밧단아람으로 가서 믿음있는 라반의 딸들과 결혼을 합니다. 이로서 12명의 믿음의 아들들을 낳아서 이스라엘 민족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에 기초해서 결혼한 에서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결혼한 야곱은 전혀 다른 열매를 맺게 됩니다.
27장을 보면 이삭이 야곱을 계승자로 세우고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27:1절에 보면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서 영적인 분별력이 희미해졌습니다. 이삭은 사냥한 별미를 좋아했기에 에서가 짐승을 잡아 오면 그것을 먹고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리브가가 야곱을 에서로 변장시켜 이삭에게 보냅니다. 어찌하든지 야곱이 축복을 계승하도록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음이 약한 야곱은 주저했습니다. 그렇게 했다가 들키면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13)” 이렇게 해서 결국 야곱이 축복을 받도록 합니다. 리브가의 행동이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또 에서인체 하고 이삭에게 가서 축복을 받은 야곱도 꼭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 때문에 후에 댓가를 치룹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 밑에서 사기를 당하며 20년 동안 죽도록 고생합니다. 리브가는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허물도 쓰셔서 축복이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계승되게 하셨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어떻게 축복합니까? 28,2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삭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풍성한 곡식의 축복을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중동지방은 비가 잘 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슬을 많이 내려 주셔서 곡식이 잘 자라도록 축복해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이삭은 야곱이 복의 근원이 되어서 만민이 그를 섬기고 열국이 그에게 굴복하도록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는 장차 야곱의 후손이 모든 민족위에 뛰어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을 의미합니다(출19:5,6). 또 그 후손 가운데서 인류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 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서 죄와 죽음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모든 만민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빌2:10). 이 예수님을 탄생하는 메시야의 혈통으로 택함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어, 이삭을 거쳐, 야곱을 지나 그 후손들에게 흘러 갑니다. 야곱은 그 축복의 main stream에 서게 됩니다.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살면서 인류 구속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는 것,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허물진 저희를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하시고 이 시대에 복의 근원이요, history maker로 불러 주셨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맡겨 주시고 죄로 병든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이런 영적인 역사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기를 쓰고 이 역사에 계승자가 되고자 합니다. 좀 고생을 하고 시련이 있을지라도 기꺼이 이 길을 가고자 합니다.
김요나단 목자님은 군대를 장교로 갔다 와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만 바라보고 계신 부모님을 생각할 때 하루 빨리 시험에 패스해서 안정된 자리를 잡는 것이 능사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센타 사정을 보니 건축역사는 시작되었고 풀타임으로 복음역사 섬길 일군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계획을 내려놓고 풀타임 목자로 자원했습니다. 장교생활하며 번 물질도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김승리 목자님과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가난한 인턴목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양들이 감동을 받고 바로 열매가 맺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수 년 동안 양들이 밥만 얻어먹고 떠나갔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때의 선택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충성을 받으시고 시온성 중건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많은 실패를 경험했지만 참고 인내했을 때 올해 많은 소망스런 양들을 파트가운데 보내 주고 계십니다. 장차 수많은 목자들을 세계 각국에 선교사로 파송하는 열방의 선지자로 귀하게 쓰시리라 믿습니다.
30절을 봅시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후에 에서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께 드리고 축복 받기를 원했습니다.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그러나 이삭은 이미 야곱에게 축복을 해 버렸기 때문에 에서에게 줄 복이 없었습니다. “아니, 내가 축복한 아들이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었단 말이냐. 그러나 이미 그를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33)” 이때 에서는 슬피 울며 부르짖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34)”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36)”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그리하소서(38)” 에서는 소리 높여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영적인 축복은 아버지인 이삭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복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야곱이 자신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빼앗았다고 분통해 했습니다. 그러나 실은 자신이 이미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삭은 에서의 미래에 대해 말씀해 주었습니다. 39,40절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 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과는 거리가 먼 자가 되고 맙니다. 사막의 도적떼가 되어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먹고 사는 신세가 됩니다.
우리는 축복을 빼앗기고 소리 높여 우는 에서의 모습에서 마지막 날 구원을 받지 못해 애통해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 13장 좁은 문 비유 에서 구원의 문이 닫힌 후에 어떤 사람들이 울부짖습니다. “주여 열어주소서.”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자들아 떠나가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눅13:27,28)” 신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산 자들은 마지막 날 밖에 던져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복을 사모하며 영적인 가치관을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깨닫게 됩니다. 요즘 세상은 갈수록 물질적이고, 감각적이고, 찰라적인 것에 최고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다. 에서와 같이 당장 맛있고 재밌고 풍요로운 것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자신의 영혼을 팔아 버립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12:17절에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육신적인 삶을 살다가 나중에 눈물을 흘리며 사정해도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지금 빨리 회개하고, 지금 영적인 가치관을 따라 살아야합니다. 방학동안에 말씀 특공대를 하고, 로마서를 암송하고, 양들을 섬기고, 하나님 역사에 헌신하는 것이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장차 영광스러운 축복의 계승자로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8:18절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하늘 영광을 소망 하며 기쁨으로 제자의 길, 사명인의 길을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