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장 13절~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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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편지의 서론을 통해 여러가지 시험으로 신음하고 근심하고 있는 교회의 반전스러운 영광의 실체를 밝히는데 힘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로마를 신앙하는 세상 속에서 트렌드에 좀처럼 맞지 않고, 유별나고 불편할 뿐만 아니라 종종 사회적 위험인물들로 비춰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교회를 비방합니다(벧전2:12,3:16,4:4). 교회는 트렌드에 맞춰 로마를 함께 찬양함으로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거나, 타협하지 않고 반문화적인 고백으로 사는 것을 회색지대 없이 선택해야 했습니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가 걸어가는 길은 참 협착하고 좁은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깊은 근심과 함께 하는 좁은 길을 자원하여 걸을 수 있는, 심지어 기뻐하며 걸을 수 있는(벧전1:6) 넉넉하고 풍성한 이유에 대해서 밝혀준 것입니다.
베드로는 구원의 영광스러운 실체에 대해서 설명해고(3~9절), 10~12절을 통해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등장시키며 이 시대의 허망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도 고난을 통과하셔서 이제 영광 중에 계신 것과 같이(벧전3:22), 교회의 고난의 길도 이 발자취를 따라 영광에 이르는 여정임을 밝힌 것입니다.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뵙고 수종드는 천사들도 강력하게 들여다보기 원하는 것은 로마의 부요함이 아니라 고난받는 교회의 길임을 밝히며 베드로는 고난의 여정을 자원하며 걸을 수 있는 풍성한 이유를 밝힌 것입니다.
이제 그는 왕의 길(고난을 통해 영광으로 이르는 여정)에 부르심을 받은 교회에게 실천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허망한 세상에서부터 택하심을 받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정의 유의사항을 당부합니다.
은혜를 온전히 소망하십시오!(13절)
은혜를 온전히 소망하십시오!(13절)
13절은 '그러므로(διό)'라는 접속사를 통해 앞선 구원의 영광스러운 실체를 밝히며 제시하고 싶었던 본론을 말하고자 합니다. 본론의 내용은 '소망(ἐλπίζω)'에 대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강력하게 “소망하십시오!(ἐλπίσατε)”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온전히 바랄지어다”, 새번역에서는 “끝까지 바라고 있으십시오” 등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다른 불순물 없이 가득히, 끝까지 붙들고 소망해야 하는 바에 대해서 밝혀줍니다. 이 땅의 교회가 베드로의 요청대로 강력하게 바라고 소망해야 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우리가 온전히 받게 될 은혜를 바래야 합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편지의 인사말로 “은혜와 평강”이 교회에 넘치기를 바라고(1:2), 받은 구원이 “은혜”의 구원(1:1)임을 밝힙니다. 또한 교회가 고난을 통과해 영광에 들어가기까지 온전하고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고 터를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5:10).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 “은혜”임을 밝힙니다(4:10,5:5)
정리하자면 교회는 은혜로 태어났고, 지금도 은혜를 통해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에 이르기까지 도우시고 공급하시는 모든 하나님의 손길이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고난을 통과해 영광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모든 것, 유일한 것이 오직 은혜임을 베드로는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도 그러했듯 오늘 교회에 필요한 유일무이한 것은 바로 은혜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강력한 요청에 기대어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온 마음을 쏟고 관심을 두고, 얻기 위해 민첩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은 세상의 트렌드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더라, 연봉 얼마 이상의 직장을 가질 수 있더라, 이 주식이 좋다더라, 이러면 성공한다더라와 같은 소식들에 우리의 온 마음이 가있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서 사랑하고 바라며 기다려야 하는 것은 은혜에 대한 소식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새 생명을 가지게 한 은혜, 오늘도 능력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성장시키는 은혜, 내일도 이전과 같이 동일하게 함께 해주시는 은혜, 우리의 두 눈을 감기까지 온전히 빚어나가시고 비로소 완성될 은혜에 대해 모든 소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은혜를 바라고 소망해야 합니다’와 같은 명제는 특별하지 않고 모든 성도들이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내용이기는 하나, 동시에 이 개념이 모호하고 실천으로 옮기기 어렵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은혜의 선물에 모든 소망을 두십시오!”라고 강력히 요청하며 당부하고 있는 2가지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먼저 마음을 가다듬으라(ἀναζωσάμενοι τὰς ὀσφύας τῆς διανοίας)고 당부합니다. 이 쉬운성경의 번역을 그리스어로 옮기면, 개역개정과 같이 “허리를 동이다(ἀναζωσάμενοι)”라는 뜻입니다. 이는 민첩함을 요구하는 그림언어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때 요구되었던 모습입니다(출12:11). 당시 그들이 입었던 긴 옷이 신속하게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출애굽이라는 여정을 위해 민첩하고 재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 긴 옷을 허리띠 안으로 집어넣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종노릇하던 애굽의 부요함을 뒤로 한채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향해 여행하는 길을 서둘러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에게 사명을 위해 허리를 동이라고 명령하시기도 했습니다(왕상18:46,렘1:17). 혹은 베드로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밝혀라! 주인이 다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자지 않고 깨어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눅12:35-36)던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드로가 특별히 당부하는 것이 ‘가치관, 사고방식, 판단’을 뜻하는 “마음(διάνοια)의 허리를 동이라”는 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는 허망한 세상으로부터 택함을 받아 건짐을 받고 이제는 허리 띠를 띠고 출애굽의 여정을 시작하는 이스라엘과 같이, 주인을 기다리며 깨어 등불을 들고 허리에 띠를 띤 종과 같이 준비해야합니다. 이 준비를 위해 그들은 무엇이 더 나은지 가치판단을 요구받는 것입니다. 애굽 안에서 종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인으로 사는 것 중에 무엇이 더 나은지 마음을 정해야 합니다. 주인의 부재에 자신을 주인으로 추대하고 싶은 욕구를 은닉하는 것과 주인에게 충성되어 주인의 대접을 받는 것 중에 무엇이 더 나은지 마음을 정해야 합니다.
새생명을 통해 새롭게 되었으니 이제는 믿음의 눈으로 무엇이 더 나은 것이고, 무엇이 더 좋은 것이며, 썩어질 세상에서 소망하던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소망하게 된 것 중에 더 참되고 좋은 것이 무엇인지 가치관을 정립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 가치관에 일관된 행동과 삶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며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허리 띠를 띠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은혜에 소망을 두어야 하는 교회에게 두 번째로 당부하는 것은 “자신을 잘 지키라(νήφω, 술 취하지 않다, 정신을 차리다)”입니다. 그가 이와 같이 당부하는 것은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남아있는 죄의 본성과 이를 부추기는 세상의 물결의 위험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죄의 낙을 향수하는 성도의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에게 일어나는 옛자아와의 충돌과 갈등을 염두한 채, 이전에 육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라고 교훈합니다(2:11-12, 4:2-3). 이 뿐 아니라 원수 마귀가 삼킬 자를 찾기 위해 두루 다니고 있으니 “늘 주의하십시오(νήφω)”라고 당부하기도 합니다(5:8). 그가 세상 속의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는 요구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이 땅을 나그네로 여행하는 교회는 세상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두신 믿음을 사용하여 참된 것이 무엇이고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에 일관한 삶을 살 것을 요구받는 존재입니다. 그러한 삶에는 방해물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잔존해 있는 죄의 본성과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사단이 세상의 풍조를 이용해 교회를 핍박하기도 유혹하기도 합니다. 이상의 내용을 그림으로 만들면, 넘실대는 세상의 물결을 거스르고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은혜를 바라는 것은 분투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14-16절)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14-16절)
이 분투의 주제는 더 발전되어 교회에게 “불러주신 하나님께서 거룩한 것처럼 …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5절)”라는 교훈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베드로는 교회를 순종하는 자녀로 표현하며(14절), “예전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μὴ συσχηματιζόμενοι, 본받지 말라)!”라고 교훈하며 성도들인 우리가 죄 아래 있었을 때를 회상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을 충동질 했던 사단의 요구(창3:5)에 순종해 하나님에게서 끊어진 모든 인생은 결국 사단의 자식이 되어 사단이 시키는 대로 하기를 원하고 죄의 충동을 뿌리칠 수 없는 인생이 되었습니다(요8:44). 그들은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도 없는 시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요1:5,엡2:1). 결국 주체적인 삶을 표방하며 아버지의 품이 아닌 자신의 욕심을 복음으로 삼아 떠났던 둘째 아들이 돼지 쥐엄열매도 주워먹지 못하는 비참한 인생이 된 것처럼(눅15:16), 모든 인생이 죄를 범하고 그 삯으로 사망을 안게 되었지 않습니까. 이것이 세상이 선전하는 복음을 따르고 본받은(συσχηματιζόμενοι) 처참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인생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사 새생명을 주셨습니다. 흑암의 권세 가운데 갇혀있던 자들을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소속을 옮기셔서(골1:13) 아들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엡5:8)”라고 선언했던 것처럼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사단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갈 존재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본받고(συσχηματιζόμενοι) 순종하며 따라야 하는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요청은 매우 명료해집니다. 전에는 몰라서 하고 싶은 대로 살며 사망의 종 노릇하였지만, 그것은 지나간 때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자녀가 되었으니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전에는 사단이 우리를 다스렸지만, 이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거짓됨이 없습니다. 한 번 출발하면 반드시 도착합니다.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런 부르심을 우리가 받았다면, 예전처럼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따라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결국 그 인생 속에 꽃피울 수 밖에 없는 거룩함으로 증명될 것입니다.
한편 베드로는 15절에서 위와 같은 주제를 더욱 강화합니다. “불러 주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동에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생명의 부르심을 입은 교회는 이제 새로운 달음질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γενήθητε, 되어 가라)!”라는 권면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베드로는 구원받고 일어난 과거의 놀라운 변화를 상기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갈 미래의 사실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한 두번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갈 것을 요구하면서 모든 행동(πάσῃ ἀναστροφῇ, 모든 생활 양식)이 그러해야 한다고 교훈하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거듭난 교회가 그 부르심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에서만 거룩한 행실을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잘 정리된 정장 아래 더럽고 저급한 우리의 욕망을 숨긴 채 나이스한 사람으로 평가받으면 되었다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정말 나이스한 사람이 되어가라.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라! 교회 안과 밖이 다르지 않는 사람, 혼자서나 둘이서나 변함없는 진실된 사람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에 대해 너무 이상적인 요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교회에게 요구되는 “거룩함”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또 다르리라 생각됩니다. “거룩함(קָדוֹשׁ 카다쉬)”은 구약에 여러가지 형태로 700회 이상 나타나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하나님의 침범할 수 없고 창조세계와 현저히 구별되는 신성함을 나타냅니다(출3:5,출15:11,사6:3). 창세기6장에서는 죄악이 만연해진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납니다. 하지만 그 이후 이 땅에 다시 찾아오시고 만나고 교제하고자 하실 때 어떤 매개를 거룩하심을 통해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만나시기 위해 모세를 찾아오셔서 떨기나무의 불로 임재하시고그 땅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출3:5). 이스라엘을 이 땅과 하나님 사이의 제사장 나라로 삼고자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나라”라고 칭하셨습니다(출19:6). 이스라엘 진영 중에 거하시기 위해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출40:9). 성막 안에 있는 성소(מִקְדָּשׁ 미크다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구별되고 분리하기 위함이 아닌 이스라엘과 만나기 위한 거룩하게 하신 장소입니다. 다윗이 짓고자 했던 거룩한 궁전, 성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진술과 같이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서 거하시는 집을 짓고자 했습니다(삼하7:5).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한 모든 매개는 거룩하게 유지되어야 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귐의 의지에 순종을 요구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해야 했던 하나님의 법인 레위기는 시내산에서 받은 것이지만, 그 내용은 훗날 미지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하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요구하시는 삶의 규례였습니다. 그 중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레위기 11장 44-45절은 삶의 기본 요소 중 식생활에 관련한 내용으로, 이스라엘이 먹지 않아야 할 부정한 음식에 대해서 열거하고 있는 문맥 속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뿐 아니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인간관계(레19:2), 가나안 땅의 더러운 문화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생활(레20:7,26) 등 삶의 다양한 영역 속에 요구되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에 순종하며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는 이스라엘을 매개로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감당하여 이 땅을 향한 복의 통로로 세워지길 의도하셨던 것입니다(출19:6). 그러므로 "거룩하라”는 명령은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외부로부터 자신을 “구별”함으로 지켜 하나님과의 화목한 사귐의 관계를 유지하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열어주는 선교적 역할을 감당하라는 요청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 또한 2장 9절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는 교회가 “왕 같은 제사장”임을 밝히며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찬양의 노래가 될 것을 말하고 난 다음, 교회의 거룩한 생활이 그것을 매개로 일어날 하나님의 선교적 역사의 복선임을 말해줍니다.(2:12,18-25,3:1,3:9).
살펴본 것과 같이 “거룩함”은 하나님의 신성함을 나타내기도 하고, 하나님의 사귐의 의지를 암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거룩하라고 강력히 요구하는 것은 그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 이들과 사귀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귐의 요청에 순종으로 답한다면 반드시 거룩함이라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함께 사는 자녀가 자라가는 중에 부모를 닮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거룩한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 거룩해지지 않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행동에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라!”라는 말은 모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귐의 요청에 반응하며 시시로 그와 함께 사귀며 그 열매인 거룩한 사람이 되어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적 역사의 통로인 생명의 씨앗으로 사용되는 영광스러운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17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17절)
이제 베드로는 순종하는 자녀로 살아가는 교회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 교훈합니다. 그는 15절에서 교회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며 기도한다고 진술합니다. 이는 곧 교회가 더 이상 마귀를 아비로 두고 그에게 복종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로 살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이 삶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되어지고, 순탄하지 않은 길이라는 것은 이미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당시의 로마를 찬양하고 신봉하는 물결에 함께하지 않는 것은 여간 외롭고, 불편하며,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문화적인 고백으로 살아가는 교회는 간헐적인 핍박과 비방, 소속되지 못한 소외감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