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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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행3:1-10
제목: 내게 있는 것
우리는 교회가 세상에 의해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신랄하게 비판을 받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그러한 비판 중 상당한 부분이 타당한 내용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비판에 대해서 오늘날의 교회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 이상한 점은 세상은 교회를 싫어하고 비판하면서도 교회를 바라보고 또 교회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사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교회를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이웃들을 위해서는 정말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사실 한국의 구제사업의 대부분이 기독교기관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의존하고 있음도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구의 급속한 팽창으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구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더욱더 많은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의 현실 앞에서 교회는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을 어떻게 주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갈등하게 됩니다.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 우리가 그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 그리고 주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본문 사도행전 3장 1-10절을 통해서 묵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오늘 본문에는 장애인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어날때부터 못 걷게 된 것도 억울한데, 이 사람은 돈도 없는 가나안 집에 태어나 구걸을 해서 먹고 사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쩌면 이 장애인의 모습은 오늘날 복음을 필요로하고 있는 모든 인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적어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나 능력으로는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군가를 그리고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걷는 일이겠죠. 그러나 그는 나면서부터 못 걷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불가능한 기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대는 이미 포기한 오랜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삶에 어떻게 근본적인 변화가 같은 것이 가능하겠는가?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느끼게 되는 삶에 대한 짙은 절망과 허무를 근본적으로 그 밑바닥에서부터 변화시키는 일이 정말 가능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런 기적같은 가능성은 이 장애인이 포기한지 오래된 옛날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적을 포기한 이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본문에 보면, 이 사람이 믿음이나 소망이나 사랑과 같은 것을 구한 흔적이 없습니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 상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전입구에 앉아서 구걸 하면서도 그는 성전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배부르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저 성전 안에 들어가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믿음을 말하고 소망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는 것이지, 하루 먹고 살기도 빠듯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믿음이니 소망이니 사랑이니 하는 말들이 들릴 턱이 없나”
이 본문에 나타난 이 사람의 필요는 생존을 위한 필요였습니다. 오늘 하루 이 땅에서 묵숨을 유지할 수 있는 돈이나 빵조각이 필요한 것이지 믿음, 소망,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생존을 위한 고민은 심각하게 하지 않지만 여전히 살 집이나 먹을 양식에 대해서 계속 관심을 쏟아야 할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적어도 이런 사람들의 빵의 문제에 대해서, 양식의 필요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나가다 보면 초대교회가 얼마나 구제의 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 가면 구제의 문제를 둘러싸고 교회 안에서 의견이 갈라져 다툼이 날 정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구제를 했으면 그 구제의 문제를 둘러싸고 누구를 구제할 것인가?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싸움이 벌이지겠습니까? 사도행전 9장 36절에 아주 구제를 많이 했던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다비다’입니다. 이름 외우기가 아주 쉽습니다. 얼마나 구제를 열심히 했는지 다 주어 버리고 자기는 아무것도 없이 다 비어 버렸습니다. ‘다빕다’는 선행과 구제에 힘썼던 여인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선교의 사역을 사도들과 더불어 분답을 하는데, 2장 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2:10)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초대 교인들의 마음의 밑바탕에 있었던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관심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는 이웃을 구체적으로 돕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4-17절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참된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야고보 사도는 아주 구체적인 믿음의 실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오늘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혹은 가난한 이웃들이 참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이러한 물질이었을까요? 본문의 메시지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빵도 주고 사랑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정말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세상이 자기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 비극입니다. 이것을 각성시켜야 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중요한 책임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나면서 장애인이된 이 사람을 바라보았던 초대교회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3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3-6절)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줄 것인지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것인가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교회봉사도 전도사역 혹은 이웃을 사랑하는 구제의 사역 등을 이야기할 때 교우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자주 오가는 것을 봅니다.
“제가 뭐 가진 것이 있어야야지요. 제가 시간이 있어야지요. 제게 무슨 그럴만한 정신적인 여유가 있어야지요. 아니 제가 무엇인가를 봉사하려 해도 재주가 없어서요”
만일 과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더라면 복음이 전파되었을요?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되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역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요? 기독교가 제구실을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지나온 역사를 아름답게 장식했던 기독교의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이 그러한 사고 방식 속에서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고백첢 지난 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없는 가운데서도 없는 것보다 그들에게 있는 것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물질이 없으면 건강한 몸을 주신 것을 사명으로 알고 몸으로 섬겼습니다. 시간이 없으면 시간을 만들어서 섬겼습니다. 오늘도 악한 영들은 우리를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물질이 있고 시간이 되면 헌신하겠습니다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헌신할 기회는 오지 않습니다. 내가 결단하고 헌신하는 것이 환경이 주어지면 하겠다고 하면 절대 그런 환경은 오지 않습니다. 설령 그런 환경이 오더라도 또 다른 핑계거리가 생깁니다. 그 사람은 헌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이 마귀의 달력은 항상 내일이고 주님의 달력은 항상 오늘이다. 다음에 하겠습니다. 그 다음이라는 것이 그 사람에게 오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보십시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을 주셨을까?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들에게 이는 것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보배로운 이름이 내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재산목력 제 일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고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삶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붙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정말 보배로운 재산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재산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이 장애인를 치료한 기적의 사건 이후에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본문의 사건에서 이 장애인이 체험한 최대의 기적은 자신이 걷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그 장애인 거지가 자기를 치료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3장 14-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베드로는 이 장애인을 치유하신 분이 바로 생명의 주님인 것을 증거합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3장 22-2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여기서 ‘그 선지자’는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멸망과 구원을 결정할 수 있는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3장 마지막 절에 보면 그분을 통해서만 축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의 주, 구원의 주, 영원한 축복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이 장애인에게 있어서 일어나서 걷게 된 것은 생애 최대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6절)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그리스도를 경험을 통해서 아는 사람만이 그리스도 없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정말 세상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구제품 몇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신이 사랑의 주님을, 이 구원의 주님을 그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으로 참으로 이 세상을 향해서 주님을 증거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
베드로와 요한은 이 불쌍한 사람을 돕기 전에 먼저 하기를 원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들은 무엇을 하러 가다가 이 장애인를 만나게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1절)
그들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주목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 대한 열기는 어디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일까요? 전도와 선교의 추진력은 무엇입니까? 이 추진력과 동기가 없으면 목사가 아무리 그러한 일을 하라고 권명해도 할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추진력은 기도에서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무엇 때문에 예배가 필요합니까? 우리가 조금 봉사하다가 좌절하고 멈춰 버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조금 전도하는 척하다가 중단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전도하고 봉사하고 남을 섬기고 구제하는 것처럼 힘든 것도 세상에 없습니다. 조금 하다가 좌절해 버리기 쉽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늘 봅니다. 우리의 자비와 사랑의 실천이 그리고 봉사가 계속되지 못하고 단회성, 이벤트식으로 끝나는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동기가 소멸되고, 욕먹으며 일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정말 감격적인 예배를 한번 드려 보십시오. 설교자의 음성이 아니라 홀연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그 시간,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그 순간, 우리는 일어나서 다시 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와 예배를 통해서 홀연히 내게 임하신 성령님을 힘입어 우리는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나를 위하여 그 목숨을 버려 주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힘입은 나라면 일어나 가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고 예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생활이 바빠도, 기도와 예배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우선순위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하루에 세 번 시간을 작정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의 기도는 목숨을 내 걸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기도하다가 발각되면 목숨이 위태로운 줄 알면서 그것도 감사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 다니엘이 결국 사자굴까지 들어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사 그들을 사자로부터 지켜주고 오히려 다니엘을 모함했던 참모들은 그들이 사자굴에 다리가 닫기 전에 사자가 물어 그 뼈를 으스르뜨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숨 걸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놓아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간섭하십니다.
여러분은 바쁜 하루의 일과 가운데서,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작정된 시간을 갖고 있습니까? 그러면 어떤 뿐이 이렇게 반문하실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기도만 하면 무엇합니까? 기도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니까 별거 아니던데요. 예배만 드리면 무엇합니까? 나보다 못한데요. 목사님, 그 사람들 행실 좀 보십시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주변의 어떤 이웃들의 이런 잘못된 신앙생활의 모습 떄문에 기도나 예배나 성경공부를 경멸하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그들이 바르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바르게 예배하지 않았고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목적을 망각하고 행위에 열중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목적을 망각하고 기도만 합니다. 예배의 목적을 망각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성경공부의 목적을 망각하고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예배나 기도나 성경공부의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사람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정말 성경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결심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바르게 예배했는가, 내가 정말 올바르게 기도했는가, 내가 얼마나 성경공부를 제대로 했는가라는 것은 끝나 보아야 압니다. 예배가 끝난 시간, 기도회가 끝난 시간, 성경공부가 끝난 시간 이후에 이루어지는 삶에서 어떻게 결단하고 적용하면서 살아가는가로 결정된다는 말씀입니다. 바른예배와 바른 기도회와 바른 성경공부에 대한 기준은 그 시간에 어떠한 거룩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떠나는 순간 여러분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기도회가 끝나고 예배가 끝나고 성경공부가 끝나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서는 순간, 내가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내가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내가 성경공부했기 때문에 달라져야 할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고 이웃들을 향하여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자세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레위인과 제사장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배하러 가면서, 제사를 드리러 가면서 자기 곁에 있는 참으로 사랑해야 할 이웃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립니까? 무엇 때문에 성경공부합니까? 성경공부의 결실은 내가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알게 되었고 얼마나 변론을 잘 하게 되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한 후, 하나님을 향한 나의 자세와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할 이웃들을 향한 나의 자세에 얼마나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생명이 있는 반드시 변화됩니다. 변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참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이들은 본래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출신입니다. 이 두 사람이 지금은 함께 기도를 하는 기도의 동지가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함께 기도하기 위해여 성전에 함께 올라가고 있는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삶의 변화를 기다리고 있는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도와 기도의 동역자로 변신한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보십시오.
나면서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 일어선 기적이 일어났던 현장은 어디였습니까? 성전 미문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이 미문은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죄인들과 이방인들이 새로운 삶을 체험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예배와 말씀과 성경공부를 통해서 변화받은 기적을 가지고 나가는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나가는 교회의 문은 얼마나 아름다운 문일까요? 만약 이런 기적과 이런 변화가 우리 속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교회의 문은 위선자들의 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표현으로 하면 성전 마당만 밟을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변화받은 사람들이 이 사랑을 증거하고 나누어 주기 위하여 나가는 그리고 죄인들이 변화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저 아름다운 성전의 미문, 이 문이 과연 우리 교회의 문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숙제요 과제입니다.
“오늘 예배드렸어!”
그것이 여러분의 기독교입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입니까? 여러분은 마음 속에 부조리와 부정직과 시기와 질투와 부정과 부패와 정욕과 욕심과 간음과 미움과 살인의 죄를 품고 있으면서도 예배를 드렸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단순히 만족하기를 원하는 현대의 바리새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생명의 주님, 내 구원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내게 주신 주님을 찬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주님을 증거하시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그리리스도를, 슬퍼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절망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를, 교만한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오만한 사람들에게도 '내게 있는 것 이것 곧 그리스도‘를 주십시오. 그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만 왔다갔다하고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사람들에 교회는 위선자의 장소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아직 그 주님을 만나지 못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주님 당신을 알기 원합니다. 구원의 주님, 생명의 주님, 영광의 주님을 알기 원합니다. 만나기를 원합니다.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큰 감동으로 구원으로 자리로 확신 가운데로 인도하소서. 그래서 내가 체험한 구원의 주님, 생명의 주님, 영광의 주님을 전하게 하소서. 성령께서 이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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