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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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12–13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오늘은 로마서를 이어서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2장은 11절까지 교회학교 및 다른 부서에서 배웠습니다.
오늘은 12절부터 배우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율법이 없이 범죄한 자와 율법이 있고 범죄한자 이렇게 두분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쪽이 갈라지듯이 두 분류로 나누어져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율법이 없이 범죄한 자는 누구일까요? 이방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있고 범죄한자는 유대인을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럼 성경에 이렇게 두분류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것들이 여러곳이 있는데 한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창세기1장에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고, 낮과 밤을 둘로 나누셨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고 바다와 육지를 둘로 나누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않은자가 구별이 됨을 상징할수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로마서 5:12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죄가 들어왔습니까? 그것은 바로 선악과의 시험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시험들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시험이 있고 구원받지 않은 이에게도 시험이 있습니다. 잠깐 그것을 알아보겠습니다.
구원받은 이에게 시험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구원 받은 이에게 반드시 시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알고 있는 창세기2장에 나오는 선악과 따먹는 것으로 어떠한 시험이 나에게 오는 지 알수 있지 않습니까?
요한1서 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에게 오는 시험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시험이 나에게 옵니다. 반드시 나에게 이러한 시험거리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4:1–4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태복음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은 대목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받았던 시험 그대로 받았던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시험을 같은 방법으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반드시 이러한 시험들이 찾아 올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험들 4가지로 알아 볼수 있는데요 한번 살펴 보도록하겠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시험의 과정으로 연단의 과정으로 4가지의 시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연단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한 연단과 시험을 받았습니까 사람시험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7:2–4 “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우르에서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까? 하란땅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왜 가지 못했습니까? 아버지가 가기를 거절한것을 보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때는 나아가지 못했다고 방금 읽은 말씀에 적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으니깐 다시 하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땅으로 가라고요..
우리같으면 가라고 했을때 첫번째는 호기로 갔다고 합시다.. 지금 있는땅 하란도 큰 도시입니다. 그 먼거리 한번도 가지 못한 길을 갈려고 하면 고민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나아갔습니다.
지체된것은 아버지때문에 지체가 되었습니다. 우리여기 앉아 있는 형제 자매님 누구든지 사람시험을 받을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인정을 극복하고 말씀대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의 시험을 받지 않았을까요? 사도바울 또한 사람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6 “26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거짓형제의 위협을 받았다고.. 그리고 같이 동역했던 분들과 대립관계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러한 모든것들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사람의 시험을 받을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34–36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가족이 원수다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나서 제일 처음 찾아오는 시험이 바로 사람의 대한 시험인것 같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가족들의 핍박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이겨내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그 시험에서 넘어져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신 분들도 보곤 합니다. 그런데 다들 이기고 나오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겼을까요?
그러한 시험을 받을때마다 아브라함, 사도바울은 주님이 항상 먼저였습니다. 주님이 항상 먼저였던 이유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았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내가 받은 복음의 크기 내가 받은 사랑을 알면 항상 주님이 1번이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깐 이길수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기근시험이었습니다. 경제적 시험입니다.
창세기 12:10 “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기근문제가 옵니다. 먹을것 입을것 경제적으로 시험들이 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말씀대로 순종하여 가나안땅까지 왔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기근이 왠말입니까? 주님이 가라고 한 그땅에 왔는데 주님이 주신것은 바로 연단인것입니다.
기근입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가나안을 올라오게 되었으며 신앙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나오미 가정을 볼수 있습니다. 룻기 보면 나오미 가정이 나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땅에 무엇이 찾아 왔습니까?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땅에 찾아 왔다는것은 거기에 있는 많은 사람이 같이 느끼는 기근인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만 떠나고 있습니다. 나오미 가정만 떠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압땅으로 떠나가고 있는것입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저주 받은 그 땅으로 이주 한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편이 죽고 아들 둘이 죽는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주신 시험은 피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라고 주신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경제적인 시험이 올수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경제적인 시험이 왔습니다.
고린도후서 11:27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경제적인 시험이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근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사도바울은 배고푸고 춥고 헐벗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포기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도 넘어 섰습니다. 그 산을 넘어간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순교 당하기 전에 적은 편지가 바로 디모데 전후서입니다.
디모데 전서에 디모데에게 이러한 편지의 글을 남깁니다. 지족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6–8 “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그리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까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경제적인 시험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우리에게 오는 시험은 기다림의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우리가 많이 주어지는 시험 중 하나이지 않습니까?
최초 아브람에게 가나안땅으로 가라고 했을때 언약을 했죠. 큰 민족을 주겠다고 언약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25년만에 이삭이 태어난것입니다.
25년의 기다림 속에서 아브람함은 기다리지 못하고 이스마엘도 출산하게 되었죠.. 하지만 이스마엘이 탄생이후 14년 후에 이삭이 탄생했습니다.
결국은 25년을 기다림속에서 이삭이 탄생한것입니다. 아브람함 100세때였습니다.
이 창세기의 내용을 읽다보면 아브라함은 인내가 없고 경제의 시험도 이기지 못했네.. 그렇게 평가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답이 로마서 4:19–21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제 완전해 진것입니까?
창세기 17:1 “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99세 완전해 지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 99세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완전해 지니깐 몇세에 이삭이 태어난것입니까?
100세에 이삭이 태어난것입니다.
사실은 연약한 부분도 있고 여러가지 어떤 불신적인 요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모든것을 걷어 내신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름도 99세에 바꾸어 주시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신앙의 여정의 길에서 터닝포인트가 되는 시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다림속에서 주님이 주신것 아니겠어요!
우리는 기다림속에서 여러가지 일들을 겪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완전하라고 하실때 그 말에 순종하여 완전해질수 있는 신앙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겁니다.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고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의 더욱더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끝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욱더 굳건해 졌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기다림의 시험을 보면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성경 찾겠습니다.
로마서 5:3–4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가 환난중에 즐거워 할수 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주신 여러가지 시험.. 환란들이 인내를 만들어 냈고 그리고 그 인내가 아브라함의 신앙을 연단하게 만들었고 결국은 소망.. 이삭을 갖게 되는 웃음을 갖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보지 않았습니까?
이런것을 보고 우리도 기다림의 시험을 잘 이겨야 겠다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이길수 있습니다. 기다릴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주는 기다림의 시험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도바울은 어디로 가길 원했습니까? 로마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억지로 가려고 노력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기다렸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인내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36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약속을 받기 위해서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약속입니까? 저 천국의 상급일것입니다. 우리의 인내함으로 형제자매님을 건지고 또한 한 영혼을 건진다면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우리는 기다림의 시험, 인내의 시험을 넘어가야 할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다림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도 기다리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있으면 반드시 이삭이라는 아들을 주어 웃음이 된것처럼 우리에게도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기다림 속의 끝은 무엇이 기다립니까? 웃음이 기다릴것입니다.
야고보서 5:11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인내하는 자가 복있다 웃음이 있다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포기하는 시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완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고 완전해지니 1년만에 이삭이 탄생되는 것을 경험한 뒤로는 성경은 또다른 시험을 주십니다.
어떠한 시험을 주십니까? 그것은 바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이삭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머뭇거리지 않고 즉각 시행했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시험이 포기하는 시험일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아직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것이 많을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8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나의 목숨도 내어 던질수 있겠습니까?
가끔 나에게 물어 봅니다. 나의 목숨을 내어 던질수 있을까? 쉽게 답이 나오지 못함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포기할것 또한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 단련하시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엄청난 상급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1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자 된 것같이 너희도 나 사도바울을 본받는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7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시련을 주는 것은 결국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고 주신것이라는것을 마음에 새겨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바라보고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소망도 아주 큰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그러한 소망을 가진 분들은 작은 환란.. 역경.. 찾아와도 이겨낼수 있을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필리핀 마닐라 중앙교회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저도 가볼기회가 있어서 다녀오게 되었는데요 그곳에 선교사님과 청년들과 교제를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요..
청년들에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 해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본인이 대학생때 대학생 수련회를 가면 이러한 구호를 외쳤다고 합니다. 캠퍼스복음화는 세계복음화다라는 구호를 외쳤고 기회가 된다면 선교사로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다라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여러가지 근심 걱정, 환련 역경이 찾아 올때 나는 선교사로 갈 사람인데 이러한 근심 걱정 환란이 무슨 소용이지 이러한 마음 가지면서 넘길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청년형제 자매님들도 꿈을 크게 가진다면 아무리 힘든상황이 오더라도 넉넉히 이길수 있을것입니다. 그러한 간증을 해주셨습니다.
정말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형제 자매님도 지금 힘든상황이 있습니다. 이길수 없는 상황까지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수 있습니다.
3단계에서 우리를 날개로 받아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어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큰 소망을 가져야합니다. 저 천국에서의 상급을 바라보고 산다면 우리는 충분히 넉넉히 이길수 있습니다.
방금 4가지의 시험을 살펴 보았습니다. 가장 큰 시험이 바로 나를 포기하는 시험, 기다리는 시험일것 같습니다. 경제적인 시험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이길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시험 그것또한 이길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포기하는 시험과 기다리는 시험…인내의 시험은 정말 하나님께 매달려야합니다.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믿는 자에게 임한 4가지의 시험을 알아보았고 서두에 3가지의 유혹에 대해서도 알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이러한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기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이 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디모데후서 2:22 “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청년의 정욕은 피해야 합니다. 다른것은 다 이길수 있는데 이 청년의 정욕은 피해야 합니다. 이 정욕에 넘어지 분들이 있습니다. 다윗도 넘어졌죠.. 그리고 삼손도 넘어졌습니다. 그 위대한 사람들도 넘어졌는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우리도 그냥 넘어질수 밖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다른 시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지 않은자의 시험.. 구원받지 않은 자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시험일것입니다.
믿음은 어떻게 생기겠습니까? 믿음은 내가 믿을려고 해야지 믿을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을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가요.. 내가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창세기 12:1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렇게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듣고 끝내버리면 믿음이 있다고 말할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다요 지시할 땅으로 갔나요 가지 않았나요? 몸으로 행동으로 옮겼다는것입니다.
그것은 믿을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우리도 성경 강연회를 듣습니다. 1일차 부터 4일차까지 계속적으로 성경 사실의 부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이 성경은 하나님이 쓰셨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고 믿으라고 충분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서 하신 그 모든 증거, 그것도 믿지 못하거든 그것을 사실인 것을 안다면 하나님을 올바로 알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는것은 예수님또한 알았다는 것이 되는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아야지 구원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구원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1–12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우리 아는것을 말하고 본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익히 예수님의 대해서 알았던 분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으며 유대공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렇기에 밤에 찾아 왔습니다.
니고데모이니깐 성경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장 2절에 보면 난 당신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안다고 말하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은 아무도 사람이라면 못하는 이적이라고 말하며 밤에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가 알고 있는것을 말하고 니고데모가 본것을 증거했는데.. 너는 그 것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받아들이는것이 믿음인것입니다. 니고데모도 사람이 할수 없는것을 행하는 선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선지자로 알고 있는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것을 말할때.. 믿지 않은것입니다.
구약성경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서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 다는것도 알려 주셨고요,
특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연결을 하지 못한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30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러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것은
요한복음 17:3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알아야지 영생을 얻을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으면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가 이루워 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우리의 죄를 없앨수 있을까요? 할수 없죠..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삼위일체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고 성경에 나온 그대로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인물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난 다음부터 니고데모는 [요한복음7장]에는 예수님을 변호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요한복음19장]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모시는 일도 같이 도왔습니다.
향품을 백 근 쯤 가져왔다고 하고 있습니다. 무게를 측정해 보면 약 37kg정도 됩니다. 이런 많은 향품을 가져온 것은 한 사람의 장사를 지내는데 많은 분량입니다.
예수님이 죽을때는 어떻게 죽었습니까? 가장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사람이 받은 형벌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장사 지낼때에는 아주 호화로운 제사를 지낸겁니다. 그렇게 할수 있게 도왔던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그가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성경에는 정확하게 나와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용감하게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니고데모도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할까? 선택하지 않을까? 그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용감하게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12명입니다. 그중에 두명의 제자를 통해서 믿음에 대해서 살펴 볼려고 합니다.
가롯유다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었을까요? 믿지 않았을까요?
가롯유다는 하나의 선지자로만 믿었던 사람인것같습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돈을 훔쳐 가는 일을 했죠.. 돈괘를 맡았거든요!
요한복음 12:6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롯유다를 말할때.. 도적이라. 예수를 판자다.. 결국은 자살했다.. 이것으로 평가가 됩니다. 선지자로만 여기니깐.. 랍비로만 여기니깐. 최후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반면에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요한복음 1장]을 보면 그 형제 안드레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시몬 베드로에게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베드로도 메시야에 대한 이야기를 즉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찾아 오신것입니다. [눅가복음5장] 찾겠습니다 .
누가복음 5:8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물고기 잡는것을 마무리하고 그물을 씻고 있는데 예수님이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시니깐. 순전히 베드로는 그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진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고.. 동무들까지 오라고 해서 같이 물고기 그물을 건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8절에 주여 나를 떠나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러한 말을 남긴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은거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것을 본 베드로의 행동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나오는 말이 나는 죄인입니다. 그말뿐이 없는것입니다.
우리가 방금 살펴본 가롯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에 초래가 된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방금까지 믿음에 대해서 믿는 자와 믿지 않은자를 통해서 여러가지를 알아 보았습니다.
그 분류의 차이점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믿는자는 천국, 믿지 않은 자는 지옥, 그리고 가롯유다는 자살, 베드로는 순교.. 이렇게 극명한 차이점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차이점을 레위기에서 찾아 볼수 있습니다.
레위기 10:10 “10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부정한 것과 정한것의 구별이 있습니다.
부정한 것은 어떠한 것들이 부정한것입니까?
[레위기11 장] 정한 짐승은 무엇이 있습니까? 3절에 보면 굽이 달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 하는 동물은 정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 지느러미와 비닐이 있는 것을 정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에 발에 뛰는 다리가 있는 곤충은 정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반대되는 것이 다 부정한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교훈을 받을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정한 것들은 굽이 갈라져있다.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해서 갈라진 사람.. 주님편인지 아니면 세상 편인지 쪽을 가르는 사람을 정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15–16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미지근 하면 부정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어중간한 것을 부정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둔병을 정하다고 할때가 있는데 어떨때 정하다고 하십니까? 레위기 13:13 “13 그가 진찰할 것이요 문둥병이 과연 그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찌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그 전신에 퍼졌으면 정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어중간하게 퍼져 있으면 부정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깨끗함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의 행실을 바르게 하고 깨끗해야 할것입니다. 어중간한 신앙생활을 주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김질 하는 동물을 정하다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새김질 해야합니까? 말씀입니까? 나를 비난하는 목소리입니까?
우리는 새김질 해야 할것은 말씀일것입니다.
말씀이 나의 곤란중의 위로가 될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내 양식이 되어야지 내가 힘차게 세상을 뛰는 다리도 도약을 할수 있을것입니다. 그렇기에 새김질하고 뛰는 다리가 있는 것이 정한 것입니다.
뛰는 다리들을 여기 앉아 있는 분들은 다 갖고 계시죠..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뛰어야 합니다.
어중간한 신앙생활은 뛰지 않고 어떻게 할까요? 걷든지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버리겠죠.. 우리는 뛰어야 합니다. 정말 주님이 오실날이 남지 않았음을 더 깨닫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더욱더 도약 해야 할것입니다.
그것이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느러미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방향입니다. 우리의 방향은 어디로 향한 삶일까요? 좌우 앞뒤입니까? 저 하늘입니까?
모세가 죄를 지었을때 어디만 보았을까요! 사람을 죽일때 어디만 향해 있을까요?
출애굽기 2:12 “12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어디만 살펴 보았습니까? 좌우만 살펴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디를 살펴 봐야 하냐면..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주께 있는것입니다.
하늘 소망입니다. 우리의 방향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방향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할 몫이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빚져 있습니까??
우리는 복음에 빚진자입니다.
우리의 방향은 하늘이며, 십자가 이며, 복음 전하는것에 방향을 잡고 살아야 할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것을 얻게 될것입니다.
정한 것 마지막으로 비닐입니다. 비닐은 보호입니다. 우리는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어디서 보호를 받습니까?? 우리는 교회에서.. 구별된 무리안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구별된 무리안에서 우리는 성령의 검을 가지고 믿음의 방패를 가져야합니다.
성경 에베소서 6:11–17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전신갑주를 입고 마귀와 대적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비닐입니다. 이것을 가진자가 바로 정한것입니다.
이렇게 부정한것과 정한것을 나누어 볼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나누어지지 않습니까?
이 두가지로 나누어 지는것들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바로 선택입니다. 우리는 청년들입니다. 우리가 선택할수 있는 나이가 되는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선택할련지.. 그것에 따른 책임도 누가 지는 것입니까? 성인인 본인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에 대해서, 정한것에 대해서 우리는 선택 해야합니다. 한번의 선택이 엄청난 것을 경험할수 있을것입니다.
히브리서 11:1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믿음의 증거는 행동으로 결과로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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