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17 새벽기도회: 욥기 1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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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하시겠습니다. 384장 찬송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벽기도회로 저희를 부르시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하심 감사합니다. 한 주를 마무리하는 오늘 지난 한 주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한 부분들을 돌아보게 하시고, 회개하며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하나님 앞에 올바른 모습으로 설 수 있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1:5-12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한 주를 마무리하는 오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계속해서 욥기를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데요. 오늘은 욥의 세 친구 중 소발이 첫 번째로 말하는 부분을 함께 살펴보고 기도제목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읽은 건 5-12절이지만, 11장 전체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엘리바스와 빌닷이 이야기한 것에 욥이 대답을 하자, 욥이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소발도 이제 한 마디를 얹습니다. 소발은 앞의 두 친구보다 더 강하게 공개적으로 욥을 모욕하며 욥을 몰아넣습니다. 소발은 2-3절에서 앞에서 욥이 다 받아치자 욥의 말은 길지만 공허하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말이 많냐는 뜻이죠. 그래서 3절에서 어리석은 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 그 어리석은 자가 자신을 의롭게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에 소발 자신이 대답해야겠다면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4절부터 욥을 비난하기 시작하는데요.
먼저 소발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다고 주장하는 욥을 향해 4절에서 “너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라며 욥의 말을 비꼬면서 욥을 비난합니다. 욥이 결코 깨끗하지 않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뜻입니다. 8장에서 빌닷 또한 욥이 지금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은 정결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복을 다시 얻으려면 삶에서 “정결”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욥은 앞에서 어디서도 정결함, 깨끗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다고는 말하였습니다. 욥이 소발의 말대로 하나님 앞에서 결코 깨끗하지 않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온전하다고 말하는 욥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욥기 도입부인 1-2장을 살펴봤듯이 하나님께서도 사탄에게 말씀하실 때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라며 욥의 온전함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욥에게 고난이 찾아왔을 때에도 욥은 2장 10절에서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욥에게 하나님의 모든 복이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욥은 아내와 다르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자였습니다. 소발은 이런 자세한 내막도 모른 채 그저 자신이 보고 느낀대로만 해석하여 욥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지 못하다며 비난만 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발은 5-6절에서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 직접 욥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소발이 하나님을 이 대화에 끌고 온 이유는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편을 들어 욥의 부정함을 드러내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까지 끌고 와서 욥을 더욱 괴롭힙니다. 심지어 어떻게까지 말하냐면 6절 끝에서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욥의 죄를 잊게 만들어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욥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해 하나 하나씩 모두 조치를 취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소발이 왜 하냐면 소발은 지금 욥이 그가 받고 있는 것보다 더 고난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너는 지금 하나님께 고난을 더 받아도 싼데, 감사한 줄 알아라”라며 엄청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욥은 지금 자신이 합당하지 않은 고난을 받고 있다고 말하지만, 소발은 “너는 지금 하나님의 벌을 받아도 싸다, 아니 오히려 너는 지금 너가 받아야 될 지보다 더 수월하게 받고 있다. 그러니 너희 죄의 심각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라”라고 욥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냐며 하나님 앞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하나님의 놀라움을 찬양해야 함을 소발은 말해고 있습니다. 소발은 이것을 말하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네 가지를 떠올리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8-9절에서 소발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높은 하늘보다 더 높으시고, 가장 깊숙한 스올보다 더 깊으시며,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신 분입니다. 이것은 소발의 말대로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신비로우시며, 그분의 생각을 우리는 다 헤아릴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발의 문제점은 이 진리를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에 사용하기 보다, 욥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에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소발은 진리를 수호하거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났을 때 그것을 경탄하며 찬송하는 목적으로 이것을 말하고 있지 않고 욥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폭력적인 모습입니다. 소발의 말 그 자체만을 보면 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가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지혜를 연약한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화에 하나님을 끌고 와 자신의 주장의 올바름에 사용하여, 대화하는 상대가 절대로 방어할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더욱이 소발의 말과는 달리 욥은 자기 죄 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당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1-2장을 통해 보았습니다. 소발은 자신의 지식을 오용하며 남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발의 모습은 신학을 배우는 신학생이나 신학생이 아니더라도 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자신이 배운 지식을 가져와 사람들을 정죄하고 공격하여 자신이 옳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를 찍어눌러야 자기의 말과 행동이 옳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면, 이러한 폭력을 당한 성도는 굉장한 큰 상처를 입습니다. 안 그레도 고난 때문에 힘든데, 이 가운데서 하나님을 끌고 와 자신을 정죄하고 공격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나 큰 상처를 입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를 떠나게 되는 너무나 안타까운 현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소발과 같이 욥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가 신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정죄하게 된다면 얼마나 이것이 폭력적인 것으로 사용이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발의 모습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소발은 7-9절에 자신이 말한 하나님의 속성을 근거로 10-11절에서 욥에게 결론을 제시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재판하시면 누가 하나님께 저항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런 비인격적인 가설로 소발은 욥을 공격하고 있고, 소발은 하나님이 욥을 죄수로서 재판을 하고 죄가 있음을 발견하셔서 지금처럼 징벌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허망한 사람이 누구인지 다 아시고, 악한 일을 상관하지 않으시는듯 하나 다 보신다면서 자신의 주장을 더욱 강화합니다. 그러면서 더욱 가시가 돋친 말을 욥에게 내뱉는데요. 바로 12절에서 소발은 욥에게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욥기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신랄한 모욕으로 이 말의 뜻은 욥과 같은 사람이 정확한 통찰력을 내놓는 것보다 들나귀가 사람 아이를 낳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말입니까? 소발은 욥이 자신의 친구임에도 이런 끔찍한 말을 서스럼 없이 내뱉습니다. 욥이 정말 이 말을 듣고 제 정신으로 버틸 수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 폭력적인 말입니다. 소발은 이 말을 통해 욥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그의 생각 또한 어리석음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정말 욥이 허망한 사람일까요? 그가 나귀보다 못한 자일까요?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렇지 않습니다. 욥이 지금 고뇌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이러한 고통이 찾아온 것에 대한 뉘우침이 아니라,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찾아온 고난에 대한 의문점입니다.
그리하여 소발은 이제 이 모든 것을 토대로 욥에게 이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까지 이릅니다. 13-20절에서 소발이 말하는 방법은 바로 죄를 회개하여 회복되라는 겁니다. 소발에게 욥의 문제는 죄이며, 이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욥을 벌하고 계신다고 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발이 보기에 욥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회개’만이 정답입니다. 그리고 만일 욥이 회개한다면 소발은 15-19절에서 욥이 회복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회복은 물질적인 면보다는 마음이 회복될 것을 말합니다. 두려움이 없어지고, 환난을 잊게 되고,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되며, 안전하게 되고 평안히 쉬게 되며, 그리고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게 되는 회복이 임할 것을 소발이 말합니다. 만일 욥에게 내린 소발의 판단과 그에 따른 처방이 맞다면 욥은 회개함으로 회복을 누리게 될 겁니다. 그래서 소발은 마지막 20절에서 회개한 죄인은 좋은 결말을 맞이하고, 그렇지 않은 악인은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을 말함으로 욥이 회개하도록 자극합니다.
이상 소발이 말한 것들 그 자체만으로는 사실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께 회개해야 하며 죄에 대한 옳은 반응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를 통해 우리의 마음은 회복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회개하지 않은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소발의 처방은 오진이었습니다. 소발이 생각한 문제가 욥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욥의 고난이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과 욥이 회복되려면 회개가 그에게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고난을 겪는 한 성도의 실제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단적인 신학적 지식을 무분별하게 휘두루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소발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때론 우리가 범죄했을 때 돌이키게 만드시기 위해 벌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범죄한 것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 주변에 그러한 사람이 항상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저 사람이 하나님께 무슨 잘못을 해서 저렇게 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자세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고난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소발의 말처럼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 주변에 그 고난을 겪는 자가 있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감히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소발은 하나님의 입장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간 것일뿐 하나님을 대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욥을 멋대로 판단하고, 정죄하였습니다. 심지어 나귀가 사람을 낳는 것이 더 가능성이 있다는 아주 모욕적인 말까지 함으로써 말입니다.
다시 말해 소발은 사탄의 자리에 있었던 겁니다. 욥이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하나님께 고발하였고, 그 고발은 욥을 향한 사랑의 고발이 아니라 사탄과 같은 참소이며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 때에도 사탄은 하나님은 틀렸고 자신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를 고발합니다. 바로 소발은 사탄과 같은 자였습니다.
더 나아가 만일 소발의 논리가 맞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으신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이 죄를 지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소발의 논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소발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바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와 함께 울고 같이 있어주는 겁니다. 바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우는 겁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지, 참소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닮아 긍휼과 자비를 베풀고 함께 아파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소발과 같이 참소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 고난 가운데에 있는 성도를 보살피고 함께 아파해주면서 기도해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교회는 서로를 세워주며 고난을 함께 돌파해 나가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가 될 겁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새순교회가 고난을 함께 이겨내는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벽기도회로 저희를 부르시고 말씀을 듣고 기도할 수 있게 하심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희가 소발과 같이 참소하는 자가 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와 함께 우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 안에서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또한 지금도 이유 모를 고난을 겪고 있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저희가 날마다 기도하게 하시고, 이들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고난 가운데서도 저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날마다 저희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