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17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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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른 복음은 없나니
여러분 오늘도 함께 말씀을 나누게 되어 반갑습니다.
지난번에 고린도후서 십삼장 말씀을 나누면서 고린도전후서 말씀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잠깐 그 말씀을 되짚어보자면, 고린도 교회 안에 존재하던 교회 안의 분쟁, 그리고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못하던 것에 대한 바울의 권면과 변호가 그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지난주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았었죠. 우리가 어떠한 신앙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혹여나 나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지는 않았나. 또는 우리가 사람에 대한 신뢰를 넘어선 신앙을 하고 있지는 않았나 살펴보았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신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고린도교회를 지나서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로 갈라디아서이죠.
이 편지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편지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의 마음상태가 이전 고린도교회의 때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디서 느낄 수 있냐면, 처음 인사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통 바울의 서신들에는 어떤 형식이 존재합니다. 처음 인사를 하고, 감사기도를 드리고, 교회에 대한 칭찬이나 이런 내용을 전한 이후 본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당시 그리스 로마 시기의 기본적인 편지형식이었기에 로마 시민으로서 그 문화의 영향을 받은 바울 역시도 이를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이번 갈라디아서를 보면 간단한 인사와 기도 이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바울이 이렇게 기록을 했다는 것은 특정한 이유가 있겠죠.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도 보통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특히 공식적인 자리이거나 한다면 이러저러 근황도 묻고 다른 이야기도 하다가 어느정도 진전이 되면 본론을 꺼내죠.
그런데 그렇지 않고 바로 본론부터 시작하게 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어떤때일까요? 그 본론에 대한 이야기가 시급할 때일 것입니다.
당장 시간은 없는데, 빠르게 이야기를 해야 하거나, 아니면 정말 그 이야기를 빠르게 듣고 싶어서 각설하고 본론부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바울 역시도 그러했습니다. 바울에게 갈라디아서의 본문은 시급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마음 상태 역시도 다급했고, 심지어는 분노도 차있었습니다.
그러면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바울이 이리 급하게 편지를 기록해야 했던 것일까요.
오늘 말씀 6절부터 살펴봅시다.
6절을 보면, 상당히 튀는 단어가 한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이상하게라는 단어인데요, 원어로는 Thaumazo라는 단어로, 그 뜻은 깜짝 놀라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조금 더 알기쉽게 영어로 보자면, astonished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역시도 깜짝 놀라다라는 단어인데요, 한글로 조금 의역을 섞어서 표현하자면, 경악하다, 기겁하다라도 표현이 가능할겁니다.
그만큼 바울이 어떤 소식을 듣고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인데요, 어떤 소식이 갈라디아교회에서 바울에게로 전해져온 것이죠?
바로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이 가르친 복음에서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이란 대체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사실 다른 복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색합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원래는 하나밖에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마치 복음이 두가지 이상 존재한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 바울이 복음이 사실 다른 것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겠죠.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다른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나아가서 소위 ‘제대로 된 복음’이라는 식으로 잘못된 가르침을 했다는 것을 바울이 가리켰다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7절에서 바로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어떤 거짓 교사들이 너희에게 와서 거짓말로 그리스도의 순전한 복음을 변질시키려 한 것이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대체 갈라디아교회를 변질시키는 다른 복음, 바울이 그 소식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던 다른 복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일전에 우리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번졌던 거짓 가르침과 비슷합니다. 바로 유대인 교사들에게서 비롯된 가르침, 율법 준수에 대한 내용이 바로 그 가르침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구원얻으려면, 너희가 율법을 지켜야 한다. 라는 주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간단합니다.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진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부어주셔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 바로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유대 교사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다른 어떤 것이 구원에 더 필요한 것처럼 여기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홀랑 넘어가게 되었을까요? 분명히 바울 사도가 잘 전하고 갔을텐데 말이죠.
아마도 그들은 이런 식으로 성도들을 꾀어냈을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구원하신다고 하셨고, 그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뭘 해야한다고 하셨죠? 할례를 해야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분명히 말씀에 내 말을 따르는 자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벌을 내리신다고 하셨잖아요. 여러분들 말씀을 따르셔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말씀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도 할례하셨어요. 예수님께서 먼저 모범적으로 할례를 하셨는데, 예수님을 따른다는 우리가 당연히 그 길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 사도가 할례가 필요없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지지를 얻으려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겁니다. 여러분, 바울이 누구에요? 얼마전만 해도 우리를 잡아넣으려던 사람 아닙니까? 여러분 속지마세요. 저 이상한 사람 믿다가는 여러분들 구원은 커녕 끝없는 벌을 받게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구약 율법에 정통한 교사들이 논리를 내세우면서 율법 준수가 필수적인 것처럼 말을 하니, 성도들도 쉽게 넘어가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 논리가 탄탄했더라도, 그것에 넘어가 율법에 또다시 갇혀버린다면, 그들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구약시대처럼 스스로를 옥죄는 삶 속에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어렵게 선물한 자유로운 복음에서 성도들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분노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분노의 감정과 함께 8절과 9절의 내용을 기록합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늘로부터 온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우리가 전한 복음, 즉 예수께서 이루신 진정한 자유의 복음을 말하지 않고, 다른 것들을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바울은 성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확실히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랬기에 하늘의 천사까지도 등장시켜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사실 당시에 천사의 존재는 성도들에게 매우 귀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전한 것도 천사였고, 부활의 소식을 전한 것도 천사였습니다.
그랬기에 성도들은 마치 천사의 존재가 하나님 그 자체인 것처럼 여기는 경우들이 많았죠.
하지만 그러한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들도 어떤 이야기를 듣고 할 때, 그 사람의 모습에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흔히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의 3요소를 이야기할 때,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를 말하죠. 여기서 에토스, 즉 말하는 사람의 성품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죠. 같은 이야기를 해도 이 사람이 할 때와, 저 사람이 할 때가 다르다.
제가 어떤 인물의 발언을 들려드릴게요. 한번 평가를 해 보시죠.
우리의 사회복지제도는 그저 단순한 자선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자들에게 "제발 가난한 사람들에게 뭔가 주시죠"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국민 여러분 서로 도우십시오. 모두가 도와야 합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항상 당신보다 더 불행한 상황에 빠진 국민이 있었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국민으로써 같은 동포인 그 사람을 돕고 싶어해야 합니다."
어떤가요? 이 내용 중에 나쁜 것들이 있나요? 부자들한테 굳이 빼앗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서로 도울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대체 누가 했을까요? 바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요 인물 중 한사람인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어떤가요? 같은 이야기를 해도 인물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는 것이 느껴지실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쉽게 본인이 인물에 대해 생각하는 내용들을 그 발언에까지 일치시키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내가 좋게 여긴다면 저 사람이 이상한 이야기를 해도 좋게 받아드리려고 한다는 것이죠.
우리나라 정치만 봐도 그러한 경우들이 자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정치뿐만이 아니라 종교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 문제가 되겠죠.
내가 좋아하는 목사님, 혹은 좋아하는 찬양 인도자, 좋아하는 단체에서 이야기를 하면, 그게 다 옳은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죠.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복음의 내용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요.
하늘고에서 요즘 교사 책나눔으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하고 있는데, 다들 잘 아시겠지만, 사탄이 사람들을 꾀어내는 전략을 그 내용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책의 내용이 진리는 아니겠지만, 그곳에서 나타나는 사탄의 전략은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비틈을 통해 빈 공간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언제든 그 모습을 바꾸어 우리 앞에서 마치 천사의 모습처럼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말씀에도 등장합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우리가 얼마전 보았던 말씀이죠. 사탄도 충분히 자신을 천사처럼 가장하여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를 꾀어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사람을 따라가는가? 아니면 말씀을 따라가는가.
이어서 마지막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10절에서 자신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기 위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냐면, 앞서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비판하면서 했던 이야기중에 바울 자신이 교회를 장악하려고 듣기 좋은 이야기들만을 한다는 정치사도 의혹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점수를 따고 영향력을 크게 세우기 위해 이신칭의의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영향력을 따지는 정치적인 사람이었다면, 회심을 하지 않았겠죠. 어차피 회심 이전에도 인정받고 대표 박해자로서 파견을 당하던 사람이었는데, 오히려 그곳에 그대로 있어야 영향력을 더 퍼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고난의 길을 택했고, 고난을 자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이신칭의의 복음을 전한 것도, 그가 예수님을 통해 얻은 복음의 자유함이 너무나도 놀라워서 그 자유함을 모든 성도들이 알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을 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이후에 그 내용이 등장하는데요, 11절과 12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자신이 전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도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즉 인간적인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 그리스도의 계시, 즉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복음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전 고린도후서에서도 보았듯, 바울은 정말 진리에 바보이고 진리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어떤 것이 중요하지 않았고, 오로지 복음의 자유함이라는 진리를 전하는 것만이 중요했습니다.
그랬기에 만약 자신이 정말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좋기 위해 모든 것을 했다면,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즉 사도가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그정도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진리임을 굳게 믿었고, 우리에게는 오직 그 길만이 유일하며, 다른 것들은 복음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에게는 오로지 복음만이 유일한 길이었기에, 오로지 그것만을 외치며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회는 어떤가요? 하나의 길만을 외치면서 다니면 어떤 이야기를 듣죠?
오 대단하다 정말 저 길만이 진리인가봐 라고 말하나요? 아마 대부분 그 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겠죠.
왜 그래야만 돼? 그건 너무 고지식한 것 같지 않아? 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해?
이런 반응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에 진입했기 때문이죠.
모두가 잘 알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틀은 진리의 다원화입니다. 진리가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가지라는 것이죠.
이는 결과적으로 어떤 내용으로 이어질까요? 진리라는 말 자체가 오직 한가지라는 말인데, 그렇지 않고 여러개라는 말은 결국 뭐에요? 진리란 없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지죠.
결과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해체주의로 이어지게 됩니다. 옳음, 정의란 없으니 너희들이 좋을대로 살아가렴 이라는 결론이 맺어지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문화적으로 고립에 처하게 됩니다. 왜냐,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는 그들의 시선에서는 모더니즘의 산물, 구식의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진리라는 것이 어떤 시대의 산물일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해석이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그 진리의 핵심 가치는 절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를 닮은 사람을 만드셨기에,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로 소중하다.
하지만 그 인간이 죄에 물들었기에 인간 사회에는 악이 존재하고, 그것을 제어할 수단들이 필요하다. 국가와 법, 결과적으로 그 모태가 된 말씀이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국가와 법체제로는 부족함이 있다. 그렇기에 그것보다 더한 신적인 체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체제를 위해 신이 직접 인간으로 강림하사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인간에게 구원을 주셨다.
그리고 그 신적 체제에 많은 사람, 한명의 귀한 생명이 더 들어갈 수 있도록 체제를 알려야 한다.
이 기본적인 기독교의 가치는 말씀이 나타난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한번도 변한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 이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 진리의 가치를 구시대적 산물 취급하며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이것이 어떻게 보이시나요? 시간이 흐를 수록 옛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필요하니 이 진리도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온전한 진리에 광명한 천사같이 사탄이 우리 속으로 파고든 것일까요?
저에게는 그 답이 명확이 보입니다.
하지만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교회를 꾀어내듯, 세상의 수많은 거짓 교사들은 지속적으로 우리를 꾀어내고자 합니다.
기독교만 진리라니, 너무 배타적인 것 아냐? 저기 스님들도, 힌두교 신자들도, 이슬람 신자들도 착한 사람 많던데, 그들도 천국에 갈 수 있지는 않을까?
동성애 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나쁘진 않던데, 어쩌면 동성애도 한가지 취향인 것이 아닐까? 우리가 너무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아닐까?
마치 우리를 시대에 뒤쳐진 사람으로 여기고, 우리의 진리를,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죠.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대놓고 들어온다면 어떻게든 막아낼 수는 있겠지만, 아까 뭐라고 했죠? 사탄의 공격은 대놓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 뒤를 슬며시 노리며 찾아옵니다.
지금으로는 어떨까요? 세상의 문화를 사용하여 찾아오는 것이죠.
현대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의 문화는 너무도 빠르고 광범위하게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어떤 챌린지 하나가 유행을 타면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막론하고 영상들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바로 이시대입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 문화 속 우리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잘못된 복음은 우리 속으로 파고들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내고, 그 생각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적용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늘 이야기하듯, 항상 말씀에 비추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 어떤 사람의 이야기, 어떤 집단의 논리에 잠식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진리로 믿는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하는 것들도 말씀에 비추어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어우, 그렇게 맨날 성경만 쳐다보면 어떻게 현생을 사나요. 당장 현생이 바쁜데.
그렇죠. 하지만 여러분, 누군가가 말했듯, 밥먹는 시간, 화장실 갈 시간, 이런 시간들도 없을 정도로 바쁜가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저기 어디 이스라엘 신학생들이 하듯이 하루 종일 성경만 쳐다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여러분들 그렇게 못보잖아요. 저도 그렇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10분이라도 좋습니다. 보기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조금이라도 말씀을 보고 하나님 뜻을 알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충분한 말씀의 은혜를 주실 것이고, 그 조금의 시간들이 쌓여간다면, 우리는 충분히 말씀의 전신갑주로 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들을 무너뜨리고 꾀어내려는 시도 가운데 무너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온전히 우리가 진리로 믿는 말씀만을 붙잡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저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저 집단을 만족시키기 위해 조금씩 허용하고 허용하고 한다면, 우리의 진리는 변질되어질 것입니다. 저기 로마 카톨릭 처럼 말이죠.
10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진리에 있어서는 철저히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온전히 말씀의 진리만을 붙잡고 삶속에서 말씀으로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통해 이 불가능해보이는, 개선의 여지가 없어보이는 세상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을 통해 그 비젼을 세우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그 비젼을 향해 열심히 달음질해나가는 우리 모든 하임공동체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다시 한번
말씀을 놓고 - 변하지 않는 말씀의 진리를 붙잡고 세상 속의 공격들을 이겨나가게 해달라고.
우리가 말씀안에 거하게 해달라고. 그래서 사단의 교활한 공격에도 속지 아니하고 온전하게 서있을 수 있도록
예배 공동체와 재학생들을 위해. 어쩌면 가장 민감할 수 있는 우리 재학생들이 세상의 논리에 속아넘어가지 않고, 우리 예배공동체 속에서 바른 신앙을 가지고 이겨낼 수 있도록
곧있을 캠프를 놓고 - 캠프의 순간들을 통해 지친 우리의 심령이 주님으로 깨어날 수 있도록, 세상의 논리에서 벗어나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도록
각자의 기도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