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17 금요기도회: 욥기 12: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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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 금요기도회 자리로 부르시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하심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희는 너무나도 연약한 자들입니다. 저희에게 자그마한 고난이 찾아와도 저희는 하나님께 불평하며 하나님께 따지는 자들입니다. 이런 저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그리스도를 닮아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지혜에 복종하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그런 저희가 되기 위해 나아왔습니다. 이 시간도 함께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2:13-25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욥기 12:13–25 NKRV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 그가 물을 막으신즉 곧 마르고 물을 보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 모사를 벌거벗겨 끌어 가시며 재판장을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왕들이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 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충성된 사람들의 말을 물리치시며 늙은 자들의 판단을 빼앗으시며 귀인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민족들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민족들을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다시 끌려가게도 하시며 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금요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시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욥의 고난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임에도 그에게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셨던 복인 재물들과 자녀들이 다 사라지고, 심지어 신체에도 병이 생겨 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는 지경의 고통까지 겪게 됩니다. 이런 외적인 고통만 있다면 참 다행이겠지만, 욥은 내적인 고난도 겪게 됩니다. 바로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고, 또 곁에 있지만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참소하는 세 친구들로 인해 마음 둘 곳 어디 하나 없는 고난을 겪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이런 고난으로 인해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아 불평과 불만을 터트리는 욥에 대한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시는지,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는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함께 살펴보고 기도제목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읽은 것은 13-25절이지만, 12장 전체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앞장인 11장에서 소발이 욥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에 욥은 엘리바스와 빌닷과 마찬가지로 소발의 말에 대답합니다. 먼저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욥은 자신에게 모욕을 주는 친구들에게 맞대응을 하기 위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묘욕적인 말로 시작합니다. 자신이 지혜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죽으면 지혜도 같이 죽겠구나 라고 비꼬면서 말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자신들이 지혜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오만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향한 이들의 주장을 약화시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향해 3절에서 “나도 너희 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라고 하면서 자신이 이들보다 우월하진 않아도 동일한 지혜가 있음을 주장합니다. 바로 자신에게도 이들과 똑같은 지혜가 있기에 자신을 허망한 자 또는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죠.
지금 욥과 세 친구들이 말하고 있는 지혜는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는 복을 주시고, 악인에게는 벌을 주신다는 지혜입니다. 다른 말로 보응 신학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보응 신학을 이들이 동등하게 가졌지만, 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그리하여 자신도 동등한 지혜를 가지고 있으나 그걸 누가 모르겠냐면서 이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지혜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혜를 가지고 있는 욥은 4-6절에서 자신이 어떤 처지가 되었는지를 말합니다. 바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겁니다. 4절에서 욥은 자신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지만, 이제는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였으나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친구들은 욥이 의롭고 온전한 자가 아니라 죄인이라고 하였지만, 욥은 여전히 자신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없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의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라 맞는 주장입니다.
이전에 이러한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많은 자녀들과 재물과 건강으로 욥에게 복을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욥은 친구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셨으나 이제는 침묵하고 계십니다.
친구들 사이에 웃음거리가 됐다는 것을 욥이 깨닫자 5-6절에서 욥은 하나님은 공의가 없으신 분이라고 말하며 질서가 없는 세상을 만드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악인은 형통한데, 자신과 같은 의인은 고난을 겪는 세상이 부조리하며 이런 세상을 가만히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이를 통해 자신이 경험한 이 세상이 세 친구들이 마땅히 생각하고 있는 보응 신학과는 반대로 세상이 작용한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벌 받아야 할 악인들은 벌을 받지 않고, 온전한 자들이 보상을 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욥은 이렇게 보응 신학과는 맞지 않은 세상 속에서 자신은 결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증인들을 소환하는데요. 크게 두 부류의 증인들을 소환합니다. 먼저는 동물과 자연 세계를 증인으로 소환하고, 나이 든 사람들을 증인으로 소환합니다.
욥은 먼저 7-10절에서 동물과 자연을 증인으로 소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바로 욥은 자연 이 자체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친구들은 자신을 꺾으려면 이 자연에게 먼저 문의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히나 이 자연에게 자신의 주장의 증거를 호소하는 가장 큰 이유는 9절의 “여호와의 손”입니다. 이 자연 세계 모든 만물은 창조 질서에 따라 여호와의 손에 있으니 자신에게 이러한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에게 자신의 주장에 대한 증거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욥은 두 번째 증인 무리를 소환하는데요. 바로 나이 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혜라고 하면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관찰과 경험의 토대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관찰과 경험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지혜가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시작하거나 처음 경험하는 것이 있을 때 이미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질문도 하고, 도움을 요청하듯이 말입니다. 그리하여 욥 또한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라고 12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런 삶의 지혜가 있는 노인들이 자신을 두둔해줄 수 있는 자들임을 말합니다.
이렇게 욥은 자연과 노인들을 증인들로 내세우며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으며, 친구들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지혜가 있음을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욥은 시선을 하나님께로 옮기게 되는데요. 욥은 이제 자신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은 부조리한 세상을 내버려두시는 부당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욥은 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보응 신학, 바로 악인은 벌을 받고 의인은 보상을 받게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운용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이러한 생각은 결코 틀리지 않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뒤에서 읽게 되겠지만 잠언에서도 말씀하시듯이 창조 원리에 따라 악인은 심판하시고, 의인에게는 상을 주시는 분이심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 원리가 항상 드러맞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욥과 세 친구들은 이러한 원리가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운용하시는 유일한 원칙이라 생각하였고, 욥은 자신의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에게 행하시는 처우는 부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13절에서 지혜와 권능, 그리고 계략과 명철이 다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허실 때 그것은 다시 세워질 수 없고,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가두신다면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음을 말하는데요. 이것은 지혜와 권능, 그리고 계략과 명철이 하나님께 있으나 이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굉장히 파괴적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욥의 논증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때에 따라 적절하게 물을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1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물을 막으심으로 마실 물을 없애시며 땅에 가뭄이 임하게 하시고, 물을 보내시지만 적절하게 보내시지 않고 땅이 뒤집힐 만큼 통제되지 않은 많은 양의 물로 홍수라는 재앙을 야기시키신다고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지혜는 자연을 파괴시키는 재앙임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훌륭한 지도자들에게는 어떠합니까? 16절에서는 능력과 지혜가 하나님께 있어 하나님께서 마땅히 속이는 자는 통제하시고 속은 자에게는 보상을 하셔야 하나 속은 자와 속이는 자 모두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17절에서는 모사를 벌거벗겨 끌어 가시며 재판장을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사와 재판장은 우리가 주일 사무엘하 설교를 통해 살펴봤듯이 다윗 때의 아히도벨처럼 한 나라의 머리가 비상한 장관입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벌거벗겨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은 모사, 재판장과 같이 지혜자들에게 해를 끼치시는 분으로 욥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18절에서는 왕들이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겉옷을 함께 묶고 속옷을 팽팽하게 하던 것을 느슨하게 하심으로 존귀를 드러내는 왕의 옷을 흩뜨리신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욥은 19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거룩하게 부름받은 제사장들을 하나님께서 벌거벗겨 끌어 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보상하지 않으시고 부당하게 대우하시는 아주 파괴적인 분으로 욥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에서는 충성된 자들의 말을 물리치시며 지혜가 있는 늙은 자들의 판단을 빼앗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정말 악독한 왕이라고 말하는 뜻입니다. 마치 우리가 앞에 살펴본 이스라엘과 유다의 악한 왕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충성스러운 선지자들의 말은 전혀 듣지 않았고, 특히 르호보암은 장로들의 말을 듣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욥에게 지금 하나님은 마치 악한 왕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욥에게 하나님은 좋은 조언을 할 수 있는 신뢰받는 자들에게서 말을 제거하시며 지혜로운 늙은 자들에게서 결정할 때 도움을 주는 능력을 앗아가시는 분입니다.
또한 21절에서는 귀인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18절의 왕들과 같이 강한 자의 허리띠를 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들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22절에서 하나님은 “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악과 혼란을 질서 잡힌 세계에 들여온다는 뜻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악인은 심판받고 의인은 상을 받는 질서의 세계에 악과 혼란을 가져다주시는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에게 하나님의 지혜는 질서가 아니라 무질서를 불러오는 지혜이며 빛이 아니라 어둠과 혼란을 비추어 지도자들이 영원히 영원히 암흑 가운데 헤매게 하는 지혜입니다.
여기까지 봤을 때 17-22절에서 욥이 경험한 하나님은 지도자들을 존귀히 여기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시는 분입니다. 그들에게 마땅히 하나님께서는 보상하셔야 하지만, 보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억압하고 부당하게 대우하시는 분이 바로 지금 욥이 느끼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욥이 말하는 이런 하나님은 이제 민족들에게도 똑같이 하십니다. 온 나라를 다스리실 때에도 똑같은 방식을 사용하신다고 말합니다. 2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민족들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민족들을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다시 끌려가게도 하신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은 모든 민족들을 철저하게 통제하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바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욥의 이 주장은 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지금 욥에게는 선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통치권으로 의인을 돕거나 악인에게 해를 끼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24-25절을 보시면 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들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욥이 경험한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권으로 질서를 잡으시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럽게 하시는 데에 사용하시는 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건설적인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데 사용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 욥이 자신의 고난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욥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보응 신학에 따라 마땅히 악인은 심판하시고 의인에게는 상을 주셔야 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경험한 하나님은 그 원칙에서 벗어난 하나님이며 부당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묘사를 통해 욥이 지금 얼마나 하나님께 원통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잘 전달되지 않습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지혜로는 도무지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의 이해로는 지금 하나님은 자연에서도 위험하고, 지도자들에게 위험하며, 민족들에게도 위험하고, 특히 자신이 이 세상을 다 파악했고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위험하신 분이십니다. 욥에게 하나님의 지혜는 파괴적인 지혜입니다.
그러나 욥기 전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우리는 진정한 지혜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자신의 지혜에 맞춰 하나님을 생각하려 하였지만, 욥의 지혜보다 하나님은 더 크신 분이셨습니다. 우리의 지혜에 하나님은 도무지 맞춰서 생각하실 수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나중에 침묵하고 계시다가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가 왜 고난 받았는지,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욥에게 너가 이것을 아느냐면서 자신의 지혜를 욥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며 욥의 지혜보다 하나님 자신의 지혜가 더 크심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욥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욥기 42:3 입니다.
욥기 42:3 NKRV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더 나아가 6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욥기 42:6
욥기 42:6 NKRV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바로 하나님의 지혜 앞에 욥은 자신의 지혜가 맞고 하나님이 부당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인정하며 자신이 하나님을 함부로 생각했음을 회개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 탄식해하며 하나님을 부당하다고 여기는 욥의 지혜가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지혜가 욥보다 더 큼을 말하고 있습니다. 욥과 세 친구의 생각대로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와 악을 심판하셔야 하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악의 조성자가 아니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여전히 악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지혜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죄와 악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선하신 분이시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지혜대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으나 하나님에게는 가능합니다.
마치 하나님과 악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현상이 하나님의 지혜에서는 납득이 됩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의 욥과 같이 우리의 지혜대로 하나님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욥의 반응과 같이 하나님의 지혜를 인정하며 그저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욥처럼 경건한 신자에게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이유 모를 고난이 신자에게 찾아옵니다. 더 나아가 욥과 같이 생명이 끊어질 듯한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왜 나에게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셨는지, 하나님이 도대체 선하신 분은 맞는지 의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그러한 순간이 찾아올 때 욥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욥보다 더 복을 받은 것은 바로 욥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욥은 고난 가운데서 답을 찾아야 했지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에 침묵하고 계셔서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느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코 욥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욥에게 자녀와 재산, 그리고 건강이라는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지만, 욥의 생명은 결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또한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생명을 보호하고 계셨으며, 욥의 말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신 것은 바로 욥의 모든 말을 듣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욥보다 더 큰 고난을 겪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욥과 같이 잘못한 것이 없으신데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의 살은 찢기시고 피를 난자하게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욥보다 더 큰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욥은 생명을 잃지 않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생명을 잃으셨습니다. 또한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하나님께 버림받으셨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으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거절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욥은 자신이 받은 처우가 부당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리스도는 욥보다 더 부당한 처우를 받으셨습니다. 끔찍한 살인마인 바라바는 풀려나고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는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것도 죽음이라는 형벌을 말입니다. 이 얼마나 부당한 대우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으셨음에도 욥과 같이 하나님께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가 당해야 하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대신 감당하셨기에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주신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욥과 같은 고난을 겪을지라도 위로를 얻게 되며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됩니다. 욥의 뛰어난 점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말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질문하며 오로지 하나님께 대답을 요구하여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5:11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야고보서 5:11 NKRV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알아 욥보다 더 잘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대신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 우리는 고난을 인내하며 담대히 통과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위로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평안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고난은 그저 절망의 순간일뿐 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에게 고난은 절망과 함께 위로와 평안의 순간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유 모를 고난에 처한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또한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들과 함께 울며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신다는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리고 고난 가운데 자신이 있을 때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기 위해 자신이 버려지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지혜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참된 지혜자이신 하나님을 고난 가운데서 의지함으로 평안과 위로를 받게 되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두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욥이 경험한 하나님은 마땅히 할 것을 하지 않으시는 부당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욥보다 훨씬 크셨으며, 욥이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고난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 시간 같이 기도합시다. 우리의 모자란 지혜로 하나님을 감히 판단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지혜에 복종하며 그리스도를 따라 어떠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저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을 누리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이 시간 이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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