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하나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Notes
Transcript
평생 하나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담당했던 친구중에 사진 작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사진전을 열었다며 초대하길래 한번 갔었습니다.
꽤 유명한 중앙대 사진학과를 나와서 내심 많이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진을 보니 어리둥절해 졌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진은 훌륭한 인물사진이나 풍경사진이 아니었습니다.
남들이 버린 책상, 의자들같은 고물 덩어리들을 사진으로 찍어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이런 것을 찍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자신의 과거를 제게 알려줬습니다.
아버지가 목사님이라서 그 친구는 어려서부터 예배를 빼먹은 적이 없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이 친구는 자신이 살아도 산것 같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재미없고,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로만 여겨졌는데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새로운 삶이 주어진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처럼 쓸모없어져 버려진 물건들에게 새 생명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그것들을 가져갔더라면 버려지고 말았을 텐데 그 친구 손에 붙들려 쓰레기가 작품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참 감동받았습니다.
오늘 이야기도 누군가의 손에 붙들려 삶이 변화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본론]
첫째, 인생에 중요한 것은 시계보다는 나침반입니다.
1-2절입니다.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
사울은 유대식 이름이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름인 바울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는 가말리엘이라는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의 제자입니다.
서울대 박사를 졸업한 사람정도로 볼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로마시민입니다.
유대인이자 로마시민이기에 아무래도 아버지가 뭔가 상을 얻어 로마시민이 된 거 같습니다.
로마시민은 지금으로 따지면 미국시민권자라고 볼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시민은 여러가지 특권을 가진 최상위 계층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울은 누구보다 앞서가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인생을 참 열심히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열렬히 믿었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저주받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제거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위협하며 살기를 띠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종교인 유대교를 지키고, 율법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그가 이 일에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알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을 찾아가 그의 허가증을 받아서 다마스쿠스로 향합니다.
다마스쿠스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고 그들을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의 소신과 신념 그에 대한 열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뿐입니다.
흔히들 우리의 인생을 광야에 비유하곤 합니다.
광야처럼 우리 인생도 외로운 곳이고, 변화무쌍한 불확실한 곳입니다.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도 알기 힘든 황량한 곳입니다.
이런 광야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시간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아남을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시계보다 중요한 게 바로 나침반 입니다.
광야같은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 말은 흔히 듣는 말이지만 곱씹어봐야할 진리가 아닐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빨리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어하는 젊은 시절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는데 마차를 만납니다.
너무나 다리가 아파서 태워달라고 부탁합니다.
마부는 기꺼이 그를 태워줍니다.
나그네가 마부에게 묻습니다.
"예루살렘까지 여기서 얼마나 먼가요?"
마부가 대답합니다.
"이 정도 속도라면 30분 정도 걸리지요."
나그네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잠시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30분 정도 지난 것 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다 왔나요?" 하고 마부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마부는 “여기서 1시간 거리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화가난 그는 “아니 아까 30분 거리라고 했고 그새 30분이 지났잖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마부가 대답합니다.
"이 마차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마차인데요."
운좋게 마차를 얻어 탔지만 방향을 잘못잡아 결국 더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방향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효율성과 성과주의 입니다.
무엇이든지 시간걸리고, 기다리게 하고, 지루하게 하는 것은 참기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성과를 내지 않으면 자신이 무능해지고 도태될거 같은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가치가 우대받는 세상속에서 우리 역시 속도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어떻게든 빨리 일만 되면 되고, 성공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이런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니까 모두 그냥 따라갑니다.
돈에 질주하고, 권력에 질주하고, 쾌락에 질주합니다.
방향을 잃은채 맹목적인 열심만 남아 스스로를 경주마처럼 몰아 붙입니다.
스스로를 채찍질만 하는 자기 학대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결국 내가 제대로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에 질주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올바른 방향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수 있을까요?
둘째, 눈과 귀가 열리면 깨닫게 됩니다.
3-6절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사진을 보십시오.
하늘에서 환한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춥니다.
사울의 다른 간증을 보면 이 때를 정오쯤이라고 말합니다.
정오에 태양보다 더 강렬한 특이한 빛이 그를 비춘 것입니다.
빛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그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첫마디는 왜 자신을 핍박하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사울이 핍박한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한다고 하신 것일까요?
제자들과 예수님을 동일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기에 그렇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사울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습니다.
지금까지 거짓 메시아로 여기던 분이 직접 자신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자신이 철썩같이 믿고 있던 모든 신념이 산산조각나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질주하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자 멈춘 것입니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8-9절입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떳으나 아무것도 볼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그는 사흘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더이상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게 됩니다.
눈에 살기가 등등하고, 입에는 독설이 가득하던 그였지만 이제 바보가 된 것입니다.
신념에 가득차 자기 주도적 삶을 살던 그가 이제는 눈이 멀어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시력을 잃은 사흘동안 그는 자신의 과거를 복기해 봤을 것입니다.
자신이 붙잡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자아가 산산조각 나서 부서지고, 자신의 세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이제서야 바울은 자신이 칠흑같은 영적 어둠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빛이 비추었기에 그의 어둠이 실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열심을 갖고 살아왔는지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으러 다니던 그가 이제 예수님께 사로잡힌 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때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어느 누구나처럼 돈과 성공을 향해 질주했습니다.
여기 산증인이 계십니다.
당연한듯 전문인 자격증을 준비했고, 열심히 했습니다.
제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고민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냥 열심히 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질주하던 저를 멈춰세우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만나고난 후 제가 얼마나 영적 어둠가운데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는줄도 모르고 질주하던 삶이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저는 제 인생의 의미를 묻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 땅에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묻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바로 제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쁘게 살다보니 정작 중요한 질문을 안하고 살때가 많습니다.
인생에서 왜를 질문해봐야 합니다.
내가 왜 공부하는지, 내가 왜 일하는지
내가 왜 교회를 다니는지 내가 왜 예수님을 믿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질문하지 않는 삶은 운전대가 없이 질주하는 자동차처럼 위험한 삶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셋째, 올바른 방향은 소명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10절입니다.
그런데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야!”하고 부르시니, 아나니아가 “주님,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이제 예수님은 사울의 눈을 띄워줄 한 조력자를 찾아오십니다.
그의 이름은 아나니아 입니다.
예수님은 아나니아의 환상가운데 나타나셔서 사울에게 가서 손을 얹으면 사울의 시력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나니아는 굉장히 의아해 합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교회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줬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사울때문에 죽은 사람이 바로 스데반 입니다.
심지어 지금은 성도들을 잡아가려고 대제사장에게 허가증까지 받은 상태라고 대답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울은 악질 인간인데 왜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주라고 하시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울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그에게 알려주십니다.
15-16절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예수님은 사울을 회개시키는데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사울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그릇, 즉 도구로 사용하시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예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사울은 이제 전 세계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그의 변화된 삶의 증거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고난가운데서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진 그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한 평생 한 목표만을 위해 한 길만 걷다 한 사람을 위해 죽은 그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단순히 구원받아 천국가는 것으로 그치는게 아닙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목표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게 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길을 가게 됩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만나 그에게 손을 얹자 어떻게 됩니까?
18절에 보시면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 시력이 회복됩니다.
그 비늘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가 지금까지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눈이 바뀐 것입니다.
비늘같이 씌워져 있던 자신의 세계관이 벗겨지고 새로운 세계관이 들어온 것입니다.
어떤 색깔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태도는 달라집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다카포 형제, 자매 여러분~
왜 하나님은 사울같은 사람을 사용하실까요?
다른 훌륭한 사람들 두고 왜 사울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사용하셨을까요?
그것은 그의 죄악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인줄 알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악의 깊이를 알수록 거기에 담기는 하나님 사랑은 커집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셔서 그를 자신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때문에 사도바울은 한 가지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한 평생 한 목표만을 위해 한 길을 걷다 한 사람을 위해 죽은 사람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저와 여러분이 이런 바울과 같이 한 길을 걷다 한 사람을 위해 죽을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