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허심자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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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심자복의-마음이 가난한자
허심자복의-마음이 가난한자
마태복음 5:3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오늘은 첫번째 복인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입니다.
누가복음 6:20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에서는 그냥 가난한 사람들은 이라고 했다.
오늘 제목처럼 허심자의, 이것은 한문성경에 기록된 표현이다. 마음을 비운 사람은 복이 있다.
개정개역번역에는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 라고 번역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이 말의 의미는 마음, 영적인 상태, 실제적인 가난, 경제적인 가난의 상태 등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예수님은 영적이든 실제적이든 가난한 자의 대한 관심이 많으셨다.
쿰란 공동체에서 기록한 자료에 예수님의 대해 이렇게 써 놓았다.
“그는 미천한 자들을 냉대하지 않으셨고, 곤경에 빠진 어려운 자들을 못 본체하지 않으셨다.
그는 약한 자들을 계속 지켜보시고, 고아들의 도움 요청에 관심을 기울이셨다. 그는 그들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셨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기에 온유한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셨다.
그는 그들의 눈을 열어 그의 길을 보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듣게 하셨다.”
예수님은 실제적인 가난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을 알 수 있다.
헬라어로 된 성경에서 이 가난하다는 단어를 프토코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아주 일반적인 가난의 의미하고 조금 다르게 “절대적 빈곤”을 말한다.
우리가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가난이다. 우리스스로 사는데 지장없지만 비교해보니 가난하다는 것이다. 조금 충분히 못가지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것이다. .
그러나 프토코스의 가난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살 수 없는 가난이다. 물질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냥 완전히 밑바닥인 상태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완전히 무기력한 상황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지금 만나고 계신것이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은 기적을 보여주셨다. 절대빈곤인생들이 병고침을 받고 나음을 받고 죄용서를 받고 구원의 은혜를 누렸다.
이사야 61:1–3 “1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2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3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이런 가난한 자들에게 메시아의 예언의 사역을 이루어 가셨다.
절대적인 가난에 놓이게 되면 어떤 상태일까. 회생이 불가능한 파산에 이르게 되면 어떻게 될까?
마지막 희망하던 것 까지 다 날아갔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오히려 불안하고 허무함이 가득해지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마음의 상태를 찾고 그 마음의 상태에서 믿음을 시작하신다.
우리에게는 그런 상태가 절망이지만 하나님께는 그 상태가 오히려 희망의 상태가 된다.
초기 기독교사상가 유영모 선생은 빈탕이란 말을 썼다. 없이 있는 하나님. 없는데 계신 하나님, 우리에게는 없을 때 계시는 하나님이 된다.
오늘 우리가 완전히 소멸하고 없다라고 여겨질때 하나님은 그때 계시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마음의 상태는 어떠한가?
아직은 의지할 것이 많다. 소유, 돈, 사람 등 여전히 의지해 볼만한 것들이 조금은 남아 있다.
또한 정말 가난하지만 들끊고 있는 욕심과 돈과 물질의 대한 탐심을 쫓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마음이 가난한 상태가 아니다.
반대로 많이 가지고 있으나 더 많은 것을 쫓고 있어도 가난한 상태가 아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이 가난한 마음을 요구한단 말인가.
탕자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탕자는 자기가 누릴 유산을 미리 땡겨서 마음에 더 많은 것을 쫓고 싶어 나갔지만 결국 탕진하여서 비참한 인생의 가장 바닥을 경험했다.
그리고 빈손, 텅빈 마음이 되어 아버지가 어떻게라도 하시던지 간에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바로 이 마음이다. 내 마음이 텅 빈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이 들어와 내 마음에 집을 지으시는 것이다.
내 마음은 더이상 쫓을 만한 힘도 없도 여력도 없고, 가능성도 모두 버린 마음이다. 그럴 때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일하신다. 풍족하게 일하신.
오늘 우리에게 이런 마음의 상태가 필요하다.
유다의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과 동맹해서 모압과 전행을 한 후 모압이 복수를 하기 위해 암몬과 동맹을 하여 유다를 쳐들어 온다. 동맹을 맺었던 북이스라엘이 모른처 돕지도 않는다. 엔게디에서 유다 혼자서 모압과 암몬 동맹군을 맞이해야 한다.
얼마나 막막하겠는가. 어디에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가지고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있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역대하 20:12 “12 우리 편을 드시는 하나님, 그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시렵니까? 우리를 치러 온 저 큰 대군을 대적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고, 어찌할 바도 알지 못하고, 이렇게 주님만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다. 마음의 빈자리에 다른 것을 자꾸 채우려하기 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채워나가야 한다.
일제시절 독립협회 활동을 하던 이상재선생을 알고 있다. 이상재가 이완용의 매국행위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악한자들의 자리가 더욱 견고해지고
독립운동가들은 감옥에 계속 들어온다. 이상재가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할 때 당시 언더우더 선교사 등이 감옥에 갖혀 있는 정치범들에게 종교서적을 넣어주었다. 성경을 포함해서 다양한 기독서적들을 감옥에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 감옥오기 전에 두번이나 성경을 읽을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는데 감옥와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경을 보게 된 것이다. 갑자기 감옥에 있던 정치범들이 이상재를 비롯해 여러사람들이 개종을 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감옥에서 개종한 이야기를 쓴 사람이 ㅇ있었는데 책 제목ㅇ이 ‘지옥즉천당” 지옥이 천당으로 바뀌었다 라는 제목이었다.
절망과 포기,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서 만난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점검할 차례이다.
어느 연구에 의하면 sns를 오래하면 할 수록 육적 정신적 삶의 만족이 떨어진다는 결과가 있다. 진트웬지라는 심리학자가 sns를 통해 포장된 일상들을 자신과 비교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에 빠질 위험이 높다고 했다. 포장하기 위한 가짜 이미지를 내 삶과 비교하면서 실망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내 마음속에 화려하고 꾸며진 모습들을 동경하는 마음이 가득해서이다.
헛된 것을 동경하는 마음을 빼버리고 그곳에 하나님 나라를 동경하는 마음으로 채워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자, 심령이 가난한자, 허기지고 배고픈 마음을 가진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채울 수 있는 복이 있다.
빈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채우길 원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 마음의 상태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헛된것에 마음을 쫓기보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간절한 소망을 품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이 되길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