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19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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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속에서도 시작되는 주의 계획
고난 속에서도 시작되는 주의 계획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누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우리 12기 친구들과의 시간이 될 것 같은데요, 어쩌면 누군가는 다들 귀가하는 시기에 남아있어서 마음이 좋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물이 반밖에 없네와 반이나 있네가 다른 것처럼, 생각을 달리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물론 여러분들만 학교에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예배는 여러분들만을 위한 예배가 될 수 있을거에요.
그래서 특별히 오늘은 예배 이후에 조 모임 시간도, 졸업생들과 여러분들간의 원투원 시간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이야기를 못 나눈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고, 이전에도 이야기를 잘 나누었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서 깊게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있다면, 오늘 시간을 통해 그 필요들을 충족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 전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의 시간이니까, 말씀을 늘 하듯 잘 들어주시고, 이후의 시간에도 함께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사도행전의 말씀을 나눌텐데요, 오늘은 아마 주일학교에 다닌 친구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인물이 등장을 합니다.
바로 스데반이라는 인물이죠. 뭐 스데반을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아마 그의 이름은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거에요. 바로 스티븐이라는 영어 이름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죠.
혹시 이 스데반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것들이 있나요? 가장 유명하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첫 순교를 한 인물입니다. 그 외로는 교회가 세워진 후 처음으로 세워진 일곱 집사 중 한사람이 바로 이 스데반입니다.
결국 교회의 큰 일꾼이자 리더의 역할을 했던 사람이 이 스데반이라는 사람인데요, 그는 왜 첫번째 순교를 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말씀 앞에, 6장부터의 내용을 살펴보아야 하는데요, 간단히 설명을 드리면, 스데반이 집사로 안수받은 이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셔서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달되고 큰 능력이 이루어진 거에요.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이렇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율법만을 부르짖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스데반은 매우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 증인을 세워 스데반을 공회에 고발합니다. 그가 율법을 거슬러 말하고 잘못된 것들을 선포한다고 말한 것이죠.
그래서 스데반은 재판에 끌려옵니다. 하지만 지난주에 우리가 보았던 베드로와 요한의 예처럼, 스데반 역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히려 재판장에서 설교를 합니다.
그래서 7장 대부분에 그 설교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주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구약의 말씀으로부터 예언이 된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다윗 같은 이들도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한 자라고 말한 것이죠.
그러면서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오신 예수를 너희는 박해하고 죽였다! 라고 선포합니다.
그러자 오늘 읽은 첫 구절에 나온 것처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마음에 찔려 분노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스데반이 기름을 부어버리죠. 55절에 나온 것처럼 성령에 충만하여 하늘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 우편에 예수께서 서신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는 말을 해버립니다.
스데반의 이 발언은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의미였냐면, 너희가 못박은 예수가 지금 하늘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예수는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그 자신이시다! 너희는 하나님을 죽게 만든 것이다! 라는 의미였어요.
결국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마치 신성모독과 같이 여겨지는 스데반의 말에 큰 분노로 그에게 달려들어 스데반을 돌로 치는 사형 의식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여러 의견이 있기는 합니다. 충동적으로 선고가 내려지기도 전에 사람들이 가서 죽인것이냐, 아니면 사형 선고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한 것이냐.
제가 생각했을 때에는 아마도 스데반이 그 말을 한 이후 재판장의 분위기가 매우 좋지 않았을 것이고, 제사장들도 그 분위기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스데반을 죽이라고 선포했거나 그렇지 않았더라도 굳이 그것을 막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결국 그 자리의 모두가 사형에 동의한 셈인 것이죠.
결국 스데반은 돌에 맞는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여기서 돌에 맞는다는 것은 신성모독을 행한 자에게 처해지는 형벌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자들에게 둘러쌓여 돌을 맞는 정말 비참한 형벌을 스데반이 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비참함 속에서도 스데반은 예수님께 부르짖습니다. ‘주 예수여 내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마도 그는 방금 자신이 본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긴 것이라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추가적으로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이들을 향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하며 숨을 거두게 됩니다.
스데반의 이 순교 장면을 듣게 되면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죠.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직접 말씀하셨던 내용과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결국 스데반이라는 인물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했음을, 또한 그리스도를 곧 하나님과 동일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또다른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울이라는 청년이었죠. 그는 다른 이들이 스데반을 죽이기 위해 겉옷을 벗어던질 때, 그 옆에서 옷을 맡아주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기죠. 아마도 8장 1절에서 등장한 예루살렘 교회에 이루어지는 큰 박해에도 상당부분 참여했을 것이라 보여집니다.
바로 3절과 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옥에 넘겨버린 것이죠.
이 사울이라는 청년은 자신의 그런 모든 행동들을 마땅히 행했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예루살렘에서 더 나아가 저 멀리 다메섹에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향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일생일대의 대 격변을 마주하게 되죠. 환상중에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이전까지의 삶을 모두 버리고 또 다른 사도로서 그가 그렇게 증오했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입니다.
이렇게 오늘의 말씀은 충실한 예수님의 일꾼 스데반이 죽고, 새로운 인물 사울이 등장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어떤 것을 느끼나요? 아마 주일학교에서 이 말씀을 들은 분들은 이러한 생각과 적용을 했을지도 몰라요.
스데반과 같이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 목숨을 위협하는 엄청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 모든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적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되나요? 나는 저렇게 못할 것 같은데.... 라는 생각만 듭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대단하다고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는 죄책감만을 느끼면서 이 말씀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정도의 적용으로 끝난다면 이 말씀은 너무나도 아쉽게 소비되고 말 것입니다.
물론 순교라는 것의 가치는 너무나도 큽니다.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선포했던 이들의 담대함은 너무나도 거룩한 모습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순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순교를 해야만 거룩한 신앙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이처럼 순교라는 것 자체에만 너무 몰두해서 그것에 고귀한 가치를 적용시키고 그것을 숭상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바로 극단 이슬람 신자들처럼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들이 발생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숨을 내맘대로 쉽게 버리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옳은 길이었다면, 사도 요한은 그렇게 오래 살도록 두지 않으셨겠죠.
그리고 주님을 위한 신앙으로 자신의 목숨을 드리는 순교라는 것은 너무나도 대단한 일이기 때문에 주님은 아무에게나 그 일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일들이 그렇듯 감당 가능한 이들에게만 그 일을 허락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스데반처럼 못하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죠.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잠시만 스데반의 죽음 그 자체에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자세히 돌아봅시다. 여러분들은 스데반이 어떻게 순교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원래 목숨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역시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소중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걸어나가다가 삶의 위기를 겪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당하게 되죠. 어쩌면 그 역시도 그 순간 두려움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순간 스데반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여주셨나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셨죠. 성부 하나님 우편에 서신 성자 예수님의 모습은 스데반에게 어떤 것을 떠올리도록 하였을까요?
바로 하늘나라의 모습,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심판대의 모습을 떠올리도록 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아마 스데반은 그 모습을 보면서 느꼈을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세상에서는 잘못된 판결로 사형선고를 받지만, 하늘 아버지께는 자신이 선하다고 여겨질 것을 말이죠.
그랬기에 스데반은 담대히 이땅에서의 자신의 일들을 마치고 주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사람들의 죄를 돌리지 말아달라는 이야기까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은 이 스데반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도 힘을 주시고자 하시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의 생명이 위기에 달해있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와 비슷한 삶의 어려움들을 겪는지도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하기에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세상으로부터 돌을 맞는 것처럼 수많은 이야기들과 시선들이 존재하고, 그 때문에 죽을 것 같은 어려움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비록 우리를 그렇게 대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주님은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고, 곧 다가올 재림의 때까지 우리를 견디게 하시고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스데반을 통해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판단과는 다른 하늘나라의 의로움을 선사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의로움을 누리는 때는 언제인가요? 이 모든 세상이 끝날 우리가 그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는 것은 반대로 그때까지는 우리가 어쩌면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그러면 우리는 계속 세상의 돌을 던지는 것 같은 시선 속에서 계속 버텨야만 하는 것일까요?
사실 오늘 말씀에서 교회들도 마찬가지의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 지속적인 교회를 향한 박해가 쉴새없이 이어집니다. 우리가 지난번에도 보았듯 사도들이 고발당하고, 옥에도 갇히고, 매를 맞고, 또다른 성도들이 목숨을 잃는 일들이 계속 발생합니다.
그렇기에 초대교회의 성도들로서는 계속적인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 그들의 신앙의 삶 가운데 이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그저 두고 보시지는 않습니다. 그의 크신 계획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신다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도 그 모습이 나타납니다. 비록 7장을 마지막으로 교회의 대단한 일꾼 스데반은 사라지고 맙니다. 하지만 8장부터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울, 아니 사도 바울이 등장하는 것이죠.
그리고 자신이 박해하여 죽게 만들었던 스데반의 빈자리를 이어 회심한 사도 바울은 어쩌면 교회가 스데반에게 기대했던 일들을 사도 바울이 행하게 되죠. 아니 더 많은 일들을 사도 바울은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교회를 세우는 것에 앞장서고, 다수의 서신서를 작성하고, 초기 기독교 신학을 만드는 일까지. 정말 많은 일들을 바울 사도가 해내게 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박해에 앞장섰던 사울은 이제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일꾼 사도 바울로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거에요. 여러분들이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삼국지를 보면 중간에 이런 내용이 등장합니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유비의 일행에 초기에는 책사역할을 맡을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즉, 지능캐가 없었던 거에요.
동양의 역사소설 내에서 이 책사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아무리 힘이 세고 통솔을 잘한다 해도, 뛰어난 전략이 없다면 전쟁에서 이기기 힘들죠.
그래서 유비 일행은 그 책사 역할을 찾다가 서서라는 인물을 만나 등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서가 그 책사 역할을 잘 수행하면서 유비 일행은 전과는 다른 강한 힘을 갖게 됩니다.
그러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조조의 세력에서 또다른 계략을 꾀합니다. 서서가 효심이 지극하다는 것을 이용하여 마침 조조의 세력 내에서 거주했던 서서의 어머니를 이용한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쓴 것처럼 편지를 작성하여 서서가 조조의 세력 내에 오도록 만들어버린 것이죠.
그리고 그 계략대로 서서는 결국 유비를 떠나 어머니가 있는 조조에게로 가게 됩니다.
이 사건은 유비 일행으로써는 큰 상실이었습니다. 어렵게 얻은 책사를 또 빼앗기고 만 것이니까요.
하지만 서서가 가고 난 빈자리를 겨우 다른 인물로 채우게 되는데, 그게 누구일까요? 바로 그 유명한 제갈공명입니다.
삼고초려를 통해 겨우 서서의 빈자리를 채우게 된 공명은 서서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에서 더 나아가 유비 일행이 이후 촉나라를 세우기까지 엄청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당장 우리가 보았을 때에는 지금의 순간이 참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순간입니다. 마치 책사를 잃고 방향을 잃은 유비의 일행처럼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위해 그의 계획을 지속적으로 이루어가십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것처럼 교회들에게는 사도 바울이라는 엄청난 일꾼을 얻게 하시고,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큰일을 반드시 이루어내실 겁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늘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그 계획을 이루실 주님을 신뢰하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지지난주 여러분들이 컨퍼주라서 예배가 없을 때, 교사들과 함께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님 설교를 들었는데요, 그때 목사님께서 강조하여 말씀해주신 것이 한가지가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어인데, 바로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하나인 성도의 견인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죠? 설명을 드리자면, 종교개혁 후 오랜 시간이 지나 대표적인 종교개혁자 중 한사람인 존 칼빈의 신학을 후대 사람들이 정리하면서 5가지로 그것을 요약했는데, 첫번째가 전적 타락, 인간이 완전히 부패했다는 것이고, 두번째가 무조건적 선택, 어떤 조건 없이 주님께서 구원할 자들을 택하셨다는 것이고, 세번째가 제한 속죄, 모두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버려지는 자들이 있다. 네번째가 불가항력적 은혜,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저항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번째가 성도의 견인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면, 성도의 삶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는 삶이 될 텐데, 그 재림의 때까지 주님께서 그가 택하신 성도들이 견딜 수 있도록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택함 받은 성도들이라면,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견뎌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인내하도록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님은 당장 우리가 힘들어보이고 견디기 어려울 것 같은 그 순간들 가운데 항상 우리 곁에서 우리를 붙잡아주시고 견뎌낼 수 있도록, 이겨낼 수 있도록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세우신 그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거에요. 여러분들 혹시 PT 해보셨나요? 저도 해본 경험이 있는데, PT의 특징이 뭐냐면, 옆에서 트레이너가 붙어서 운동을 봐준다는 거에요.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운동을 하다보면, 무게를 치다보면 막 죽을 것 같아요. 그래서 평소같으면 벌써 쉬고 했을텐데, 옆에 트레이너가 있으니까 쉬기는 커녕 더 무게를 늘려서 운동을 하게 된다는거에요.
그걸 우리가 할 수 있나요? 사실 못하죠. 역부족이에요. 근데 어떻게 해요? 트레이너가 옆에서 막 붙잡아가면서, 밀고 당기고 하면서 어떻게든 무게를 들게 시킨다는거에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근육이 찢어지고 하면서 결국에는 근육이 커져가게 되겠죠. 그러고 나면 결국에는 우리 스스로도 그 무게를 들 수 있게 된다는거에요.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진맥진하는 것 같고, 우리의 생각에는 끝이라고 여겨지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멱살잡고 끌고 가시는거에요. 그러면 우리 스스로 생각지도 못할 일들을 이미 해낸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고3 친구들, 이제 5월도 중순에 자리했고, 곧 6월, 즉 올해의 절반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여러분들은 근육이 힘을 잃어 그저 바를 잡고만 있는 상태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지금도 그 바벨을 들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 곁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지친 근육을 붙잡고 바벨을 들어올려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포기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함께하셔서 평소였으면 이미 포기했을 그 순간을 근육을 찢고 해서 더 큰 일들을 할 수 있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왔죠? 이제는 그 관성으로 가면 됩니다. 주님께서 이끌어주실 것이고, 여러분들은 달려온 그동안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믿고 달려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그 세우신 비젼을 향해 반드시 완주시키실 것이고, 끝내는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귀하신 일들을 이루어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우리 하임 공동체 한사람 한사람들을 통해 주님의 귀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어쩌면 저 바울보다도 큰 일을 이루어내는 우리 모든 공동체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 하나님의 등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