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45-57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 viewNotes
Transcript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과 현실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과 현실
11장에서 우리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그 보다 앞서 제자들과 나사로가 병에 걸린 소식을 전해들으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11장의 문맥으로 보면 소식을 들은 예수께서 바로 가지 않으시고 죽을 것을 아시고 실제로 죽은 후에 가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함께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에는 예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죠. 4절에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자신이 영광을 받게’하려 한다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렇게 하는 이유가 ‘너희를 믿게 하려 한다’는 것이죠. 여기에 빠진 ‘죽을 병이 아닌’ 그렇다면 죽지 않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 결과적으로 죽을 병이 아닌 예수의 의도와 주변의 이해가 완전히 다른 구조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맥은 읽어 이해를 한다면 보이지 않는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삶과 죽음을 아셨다’ 그래서 늦게 가신 것이 아니라 영광이 드러나는 ‘때’에 맞춰 가셨다 하지만 제자와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을 죽은 후에나 도착하신 원망스러운 현실의 고통에 빠진 그녀들에게 서로 다른 존재가 공존하면서 믿음으로만 다른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다. 또는 믿음으로만 예수님의 시간에 참여할 수 있다. 또는 믿음으로만 예수님의 길을 이해하고 받아 들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존재의 공존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기적을 통해 믿게도 하시지만 오히려 ‘대화’를 통해서 가르치시고 ‘내 말을 믿으면’이라는 표현을 통해 가장 중요한 믿음인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이심을 믿는 것, 그래서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한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어떻게 들어오시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에 나사로의 다시 살리신 사건은 매우 중요한 것이죠.
앞서 등장한 도마에게 예수님은 부활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29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광경에 도마 역시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 중에도 ‘나는 보지 못해서 못 믿겠다. 또는 그렇게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여준다면 안 믿을 사람이 어디있겠느냐’와 같은 반문의 위험성을 아셔야 합니다.
왜 그런가요? 13절 하반절에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니 제자들은 ‘잠들다를 쉰다’로 생각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생각에 따른 행동은 도마와 같이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식으로 나타났고 마르다와 마리아 역시 ‘당신이 여기 계셨더라면’하는 말은 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그럼에도 아는 것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라고 말하고, 다시 살아난다는 예수의 말에 ‘마지막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 내가 안다’라고 말함으로 생각, 그에 따른 행동, 그리고 들어서 아는 지식이 모두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노골적으로 묻고 계십니다. 엄연하게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차이가 있는 것이죠.
여러분! 많은 사람들에 예수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행동과 말을 보니 선지다 하는 말이 제일 많았고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미 6장에서 ‘살린다’, ‘영이다’, ‘생명이다’(요 6:60-66 ) 등 어려운 말씀하실 때 제자라 자청했던 많은 사람이 떠나갔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서 룟 유다가 예수를 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 둔적이 있습니다. 즉 시간이 한 두해를 흘렀지만 가룟 유다의 아는 것은 믿음으로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고 그런 상태의 가룟 유다에게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마귀는 예수를 팔 마음을 심게 됩니다. 요한복음 13:27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설교가 조금만 깊이 있는 설명을 하자면 어렵다고, 모르겠다고 판단하고 귀를 닫고 눈 거풀을 내리며 나사로보다 깊은 잠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지 않습니까?
이해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믿음에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생각하는지라’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몇가지 살펴볼 것이 있는데 첫째, 예수님은 경고와 근심으로 말씀하신다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를 사랑한다고 5절에 말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 개는 훌륭하다의 예를 기억하시나요? 강 훈련사가 보호자에게 사랑이 없다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방식에 잘못이 있다고 그렇게 키우면 안된다고 경고하고 그런 모습에 지적한다는 것입니다. 신청한 사람들도 사랑으로 키우려 했지만 어긋나는 반려견을 보면서 ‘아 내가 잘못 키우고 있구나’ 그래서 혼날 각오로 신청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두 번째, 잘못된 것을 교정하고 올바르게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 더 유사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국가대표 코치가 있는데 선수가 실력이 늘지 않거나 계속해서 실수를 하는 선수에게 ‘그럴 수 있어’, ‘좀 쉬면서 해’라고 한 두 번은 말 할수 있겠지만 계속해서 그런다면 그런 사람은 코치가 아니다고 누구나 말 할 것입니다. 코치는 잘못을 교정하고 지적해서 성장하도록 하는 역할인거죠.
그래서 40절에도 ‘내 말이 네가 믿으면’이라고 한 것입니다. 생각이 매우 중요합니다. 생각해야 행동할 수 있는데 생각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죠. 지난 주 마르다는 지금 현실이 ‘썩어서 냄새’가 난다는 것이죠. 현실 앞에 서 있는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아까 그렇게 말했지 않니. 그리고 너는 나를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지 않았니’ 그런데 왜 현실을 넘어서지 못하고 ‘우는’ 너의 동생과 주변 사람들처럼 똑 같이 이러고 있니?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마치 코치의 말을 믿고 자신의 몫인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선수가 메달을 목에 걸고 지나간 자신의 수고와 가르친 코치의 모든 과정을 담아 ‘영광스러운 메달을 ‘ 목에 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성경의 말씀은 지금도 디모데후서 3:16–17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 합니다. 때론 심하게 가르치는 이들을 볼 때 훈련 받는 입장에서는 서운합니다. 부모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하고 좋은 것을 주려해도 자녀에게는 지금이 고통스럽고 힘든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25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이 말씀이 여러분의 위로가 되시길 바랍니다.
최근 모 프로그램에서도 어느 감독이 선수를 연구하고 이러저러한 자세에 대해 먼저 파악하고 가르칠 때 그것을 교정해줄 뿐만 아니라 상태 팀의 선수가 처한 상황도 잘 알고 있는 장면을 보여줄 때 뭉클한 이유가 예수께서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 저와 여러분을 이리저리로 뚝뚝 몰아 가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는 말씀이계속해서 위로가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부르실 때 보십시오. ‘부르신다’ 는 단어는 명령이 아니라 ‘부사’로 표현했는데 ‘명령과 함께 감탄하는 취지’가 포함된 의미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권한 (다 읽지 말고) 요한복음 5:22–29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못된 코치가 ‘넌 그러니 쓸모가 없어’, ‘그렇게 할 바에 나가’를 외치며 인격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 보내신 이를 믿고 영생을 얻어 심판에 이르지 않는 생명을 얻는 이들이기에 그런 이들은 ‘음성을 들을 줄 알기 때문에’ 명령보다 감탄하시는 음성은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앞서 5절에 이미 사랑받는 존재로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교정을 받고 때론 혼나는 것 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을 의심하지 마시고 그 사랑 안에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교정받고 훈련에 동참하셔서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죽었던 자’ 즉 이미 죽음이 완료된 상태의 나사로에게도 ‘부르시는’ 음성은 들립니다. 아니 들려집니다. 5장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8절에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라는 말씀이 무덤에서 듣는 나사로를 통해 성취될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유효한 약속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5절에 많은 유대인들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기적을 보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어떤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에게 알렸다는 표현은 ‘일러 바쳤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들은 유대인의 지도자 그룹은 ‘공회’를 모았는데 최고 의결 기관에 이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죠. 그들은 이대로 두면 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믿게 될 것이고 점차 늘어 세력화 되면 48절 후반절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고 겁이 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오시기전 1-2백년 사이에 성전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일부 파괴되거나 더 심한 것은 이방신전으로 쓰이는 치욕을 경험한 민족입니다. 그리고 헤롯 대왕에 의해 증축된 어마무시한 거대한 성전과 매일 올려지는 제사는 늘 자부심으로 여기며 살았고 로마도 어느 정도 자치권을 주면서 대제사장과 같은 높은 자리를 돈으로 팔면서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로마라도 큰 행사가 있으면 가이샤라 빌립보에 주둔한 로마의 정식 부대를 이동시켜 감시했습니다. 단적으로 그 넓은 성전보다 더 높이 쌓은 것이 안토니오 요새인데 이는 로마군이 주둔하면서 늘 감시하던 높은 망대가 성전에 붙어 항상 감치체계를 구축한 것입니다. (사진)
이런 고민에 답을 낸 이가 대제사장인 ‘가야바’라는 인물입니다. ‘그 해’ 즉 예수께서 죽으시던 해에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몇 번이나 언급합니다. 그런 가야바는 모인 다른 이들의 두려움을 49절에 ‘너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런 아둔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하려는 말은 51절에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라고 하는 표현은 겉으로는 ‘정치적으로 명민함’을 보이는 말이지만 속으로는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을 이용해 나름대로 예언자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는다면 51절 이어지는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라고 예수의 죽음을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53:11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구약의 예언을 이렇게 끼워 맞추기 하는 것이죠.
그들 역시 현실적인 고민에 빠졌고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 로마의 눈 아래 피할 수 없죠. 그리고 로마가 마음만 먹으면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죠. 사실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완전히 초토화 되고 성전은 지금의 통곡의 벽만 남기고 완전히 파괴 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요? 여러분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해석하고 끼워 맞추는 일은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서 아주 흔한 일입니다. 2주전부터 한국 교계를 혼란스럽게 만든 차--이라는 목사는 스스로를 선교사로 칭하면서 지금이 마지막 시대이며 곧 종말에 이를 것이라고 하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다양한 재해 등을 성경 말씀에 끼워 맞춰 많은 사람을 모으고 돈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다른 여성과 불륜을 저지르거나 돈으로 주식을 투자한다든지 고가의 집을 산다든지 해서 엄청난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딱 가야바 같은 파렴치한으로 엄청난 사건을 터트리고는 이제는 도리어 법적으로 재판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먼저 읽었던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했고 디모데에게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고’ 성경을 부지런히 배우라고 했지만 가야바와 같은 오늘 날에 여러 부류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경을 사사로히 해석하고 자신만이 엄청난 비밀을 해석하는 것처럼 꾸며 교회를 멍들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으며 교회에 대해 적대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제사장의 신분과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예수의 죽음을 ‘마땅한 것처럼’ 만드는 것, 이것은 세상이 운영하는 방식입니다. 결과 53절은 ‘이 날부터 예수를 죽이려는 모의는 공회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해 모두에게 선포된 것입니다. 9장에서 맹인이 눈을 뜬 사건에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출교시키기로 결정한 것보다 더 강압적이고 정교해졌습니다.
예루살렘의 공의회는 대제사장의 이런 해석과 결정으로 예수를 정당하게 죽일 법을 결정한 것입니다. 57절에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한 가지 문제는 직접 죽일 수 있는 권한이 로마에 있기 때문에 실제로 죽일 수는 없는 현실이 있었는데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오늘은 그 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 각자가 가진 지식은 그때의 최고 엘리트 그룹보다 더 많이 알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런 정보를 찾을 수 있을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살아가다보면 앞 길을 잘 아는 사람, 나에게 도움을 주는 능력자, 좋은 배우자나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이젠 뭉뚱거려 ‘돈 만 있으면’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돈 만능주의’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살아지지 않습니다. 때론 아프고, 사랑하는 사람이 불의 교통사고나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고 멀쩡히 나갔던 자녀가 인파 속에서 어이없게 목숨을 잃는 일도, 안전해야 할 수학 여행에도 돈을 최고로 여기며 안전을 속인 결과가 어떤지 벌써 잊은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지휘관의 욕심 즉 출세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거친 물 살에 휩쓸려 죽은 안타까운 사건은 이제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는가에 따라 조만간 우리나라는 거대한 정치적 싸움을 앞두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무섭게 발전한 쳇 gtp는 사람과의 일상적 대화가 가능할 뿐 아니라 우리가 아는 모든 정보를 갖고 있는 ‘전능함’이라는 도전이 바로 눈 앞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도 현실이 어렵다 라고 각각의 처한 상황에 느끼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가운데 가장 강력한 도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버리게 합니다. 아니라고요. 아닙니다. 턱 앞에까지 와 있습니다.
주일 아침 눈을 뜰 때, 첫 마음이 ‘와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는 날이다’는 첫 마음의 시금석이 없다면 그렇습니다. 누구나 다 그런다구요. 글쎄요. 소풍을 앞둔 아이가 그런가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약속을 앞둔 사람이 그런가요? 거보세요 아니잖아요? 예수께서 우리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고 인도하시는 이유가 이 모든 것에서 완전한 해방, 구원, 생명을 주기 위함임을 기억하시고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으로 교정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