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19. 청년: 비전을 보는 자들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3 viewsNotes
Transcript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서론
서론
청년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청년답다는 것이 무엇일까? 분명 많은 이들이 노래하며 그리워하는 청년다움이 무엇인지 알기는 알지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말로 표현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노래가 떠올랐다. 적재의 “별 보러 가자”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상상해보니 청년다움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겠더라. 사랑에 빠져 늘 여자를 생각하게 되는 한 남자의 모습, 뭐라도 구실을 삼아서 말을 걸어보고 함께하고 싶다고 마음을 표현하는 한 남자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너무 풋풋하고 좋더라. 가사 중에 이 대목이 계속 맴돌았다. “너와 나의 걸음이 향해 가는 그곳이 어디 일진 모르겠지만, 혼자였던 밤 하늘 너와 함께 걸으면 그거면 돼” 나는 너만 있으면 된다고, 남녀 사이에 사랑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모습, 이게 청년다움이더라. 순수함이랄까 낭만이랄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그런 것들을 꿈꾸며 살아가는 그게 청년다움이더라.
청년이란 단어의 청 자는 푸를 청이다. 살 생자에 붉은 단자를 합쳐서 푸를 청자가 되는데, 이게 땅 위에 돋아나는 새싹의 모습을 가리키는 한자라고 한다. 겨울 내내 꽁꽁 얼어붙었던 땅 위로 돋아나는 새싹을 보았을 때 그 봄을 알려오는 생기 가득한 모습이 얼마나 반갑고 감격스러웠겠는가?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굴하지 않고 순수한 꿈을 키워가는 생기 가득한 모습, 이게 청년다움이다. 늘 청년들이 뿌리 내려 싹을 틔워내야 하는 삶의 자리는 겨울 내내 얼어붙어 있었던 땅과 같이 거칠고 냉혹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꿈을 키워가야만 청년이라 불릴 수 있다.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그렇다면 성경은 청년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하나님께서도 어떤 원하시는 청년다운 모습이 있을까?
사도행전의 말씀을 한 번 보자.
연구 1
연구 1
사도행전 2장 17절 본문 중,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에서 사용된 동사 ὄψονται는 중간태로 쓰였다. 왜 능동태나 수동태가 아닌 중간태인가? 누가는 중간태를 사용하여 어떤 뉘앙스를 전하려고 했던 것인가?
수동태가 아니다 :
비전은 그저 가만히 있는 자에게 어느날 문득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비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적극적으로 찾고 구하는 것이다. 중간태는 이렇듯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이 그 행동에 대해서 열정과 진심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능동태가 아니다:
비전은 그저 한 번 보고 아무일 없이 지나쳐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전은 한 번 보게 되면 내가 그것에 사로잡혀 내 인생의 목표와 목적이 변화되는 것이다. 중간태는 이렇듯 어떤 행동이 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깊이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우리말로서 좋은 표현
“비전을 품는다”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단순히 수동태적이거나 능동태적인 것을 피해 중간태로서의 의미를 잘 살리는 표현이라 생각된다.
문제 제기 1
문제 제기 1
사도행전 본문이 청년에 대해 분명히 정의하고 있다. 즉, 청년이란 비전을 품는 자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청년은 비전을 품는 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처한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 비전을 품고 싹을 틔워내야 청년답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탄은 청년들이 비전을 품지 못하도록 끝없이 방해한다. 고단한 세상 살이에 마음이 꺾이게 만들어 꿈, 소망, 목적, 비전 같은 것들을 감히 생각하지도 못하게 만들던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너무나도 낮은 수준의, 비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것들을 부추겨 품도록 만든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르고 계시는 청년들은 달라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청년들이 비전을 품고 달려나가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수많은 갈등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기어이 비전을 품고 힘차게 일어나는 청년들이 나타나야 한다. 그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기뻐하셨으면 그런 날이 반드시 올거라고 말씀에 못박아두셨겠는가?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비전을 품고 즐겁게 헌신하는 청년들, 이런 청년들이 곧 하나님께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감격하게 하는 자.
그렇다면 청년은 어떤 비전을 품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비전은 분명 세속적인 비전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비전을 품어보기 위해 큰 열정과 진심을 쏟아냈었다 할지라도, 쏟아낸 열정과 진심 자체가 비전의 정당함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그 비전이 내 삶을 송두리째 쏟아낼만큼 매력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의 매력이나 거창함 자체가 비전의 정당함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한 번 뿐인 인생, 제대로 된 비전을 품고 그 비전을 좇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기준이 필요하고 분별이 필요하다.
본론
본론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하나님의 청년들이 품어야 할 마땅한 비전이라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온 세상을 만드신 궁극적인 목적이 있고,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가 사실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음을 안다면 분별이 어렵지 않다. 더군다나 죄를 지어 그 목적을 스스로 벗어던진 우리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회복하셨다는, 그래서 우리가 다시 그 목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위대한 복음의 진리는 가장 확실한 기준이 된다. 말이 조금 어려운가?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시라. 만약 우리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이제 곧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며 남은 생을 살 것인가?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드러내는 하나님의 작품들인 것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셨다.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특히 인간은 가장 귀하게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게 하시려고 무려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비추고 드러내는 일에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 참여하게 하셨다.
이 모습이 아무런 기쁨도 행복도 없이 그저 끝없이 수고하는 종의 모습으로 비춰지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여기에 참 기쁨과 행복이 있었다.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말이다.
(영상1)
영상 통해 무엇을 보았는가? 자신의 모습을 쏙 빼닮은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 보이지 않는가? 부모는 아이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다 쏟아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베푼다. 아이는 부모의 한없는 은혜와 자신의 전부를 다 쏟아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비추고 드러낸다. 아이의 모든 보잘것없어 보이는 행동들이 사실은 우리식으로 말하면 부모의 영광을 위해 한 일로 여겨진다. 은혜와 사랑이 가득 담긴 부모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 온 맘을 다해 부모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것, 최선을 다해 엄마라고 불러보려 애쓰는 것, 이 모두가 다 부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얼마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사람인지를 한치의 꾸며냄도 없이 세상에 비춰내고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아무런 기쁨도 행복도 없어 보이는가? 그저 끝없이 수고하는 종의 모습이 보이는가? 아니다.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다. 사랑과 은혜를 풍성히 받아 누리는 자녀의 모습만이 가득하다.
(영상2)
이 영상을 통해서는 무엇을 보았는가? 여기도 아이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다 쏟는 부모의 은혜와 사랑이 있다. 그리고 부모의 은혜와 사랑을 비추고 드러내는 아이가 있다. 아이가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부모는 아이를 통해 최고의 기쁨을 맛보고 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아이는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으며 부모는 그것으로 자신의 모든 수고와 헌신을 한순간에 잊을 만큼 기쁨을 맛본다. 아이가 무슨 일을 하였는가? “우리 아빠가 최고야!”라는 이 한 마디에 아이가 부모를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 다 담겨있다. 은혜와 사랑이 가득 담긴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 온 맘을 다해 부모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것, 진심을 다해 아빠가 최고라고 온 세상에 자랑하는 것, 이 모두가 다 부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얼마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사람인지를 한치의 꾸며냄도 없이 세상에 비춰내고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받으시는 것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가득 받고, 그 은혜와 사랑을 맘껏 누리며, 이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것인지 또 그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감탄하고 자랑하는 것,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품으셨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그런데 어느샌가 죄라는 것이 세상에 들어와 하나님의 이 목적을 가려버렸다. 사탄이 우리의 눈 앞에 온갖 세상의 것들을 가져다 대며, 하나님 없는 기쁨, 하나님 없는 즐거움, 하나님 없는 행복을 향해 우리를 유혹하자 인간이 속아 넘어갔다.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려 세상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우리를 향해서는 오직 은혜와 사랑만을 베푸시던 분께 우리는 배신으로 보답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보다 하나님께 치욕을 안겨드리는 길을 선택했다. 세상의 것들과 사랑에 빠져 하나님 대신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세상의 것들로 인해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진심을 다해 그것들이 최고라고 온 세상에 자랑하며 살아간다. 하나님 말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랑이 클 수록 배신의 아픔이 깊은 법이고, 은혜가 클 수록 치욕의 슬픔이 더한 법입니다.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은 얼마나 깊고 큰 것이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더 큰 은혜와 사랑으로 모든 인간들을 덮으시기로 작정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망가뜨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더럽히며, 하나님께 배신과 치욕으로 갚아드린 것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인간들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귀한 아들,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신 내리시기로 하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셨지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와 형벌을 대신해서 다 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도 안되는 은혜와 사랑 때문에 용서를 받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이 보게 된 날,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께 끔찍한 짓들을 벌이며 살아왔는지를요. 우리를 향해 오직 사랑만, 은혜만 베푸신 하나님께 우리가 갚은 것이라고는 배신이요 치욕이요 아픔이요 슬픔밖에는 없었다는 것을요. 그리고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넓고, 크고, 높고, 깊음을요.
십자가와 마주서게 된 인간은 이제 다시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아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악의 깊이만큼 더욱 부으신 은혜와 사랑이 마침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더욱 깊은 사랑을 만들어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요, 능력이요,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인간은 이제 은혜와 사랑이 가득 담긴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합니다. 온 맘을 다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기뻐하고 행복해합니다. 진심을 다해 하나님이 최고라고 온 세상에 자랑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며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를 세상에 비춰내고 드러냅니다. 곧 하나님이 내게 가장 소중하신 분, 가장 아름다우신 분, 가장 귀하신 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청년들의ㅡ눈을 열어 자신의 영광의 더 크고 위대하심을 보게 하십니다. 어느날 문득 이 사실을 깨닫게 되죠.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일뿐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라는 것 말입니다. 온 세상을 사랑과 은혜로 품고 계신 하나님이 정말 온 세상을 통해 보답받으셨으면 좋겠다는 불타는 열망을 갖게 됩니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 함께 하나님을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하나님을 자랑하게 되길 꿈꾸게 됩니다. 내게 가장 소중하고 귀하고 아름다우신 분이 온 세상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기고 아름답다 고백하는 분이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품게 됩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청년들에게 마땅히 품게 하시는 비전입니다.
예화
예화
18세기 초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작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스패너와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후 어렸을 때부터 열심이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자라나게 됩니다. 스무살이 되었을 무렵 그는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도중에 한 지방에서 화가 ‘도메니코 페티’가 그린 “에케 호모”라는 그림, 우리말로 하면 “이 사람을 보라”라는 그림을 보고 큰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린 이 그림에는 “내가 너를 위하여 이것을 당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글귀가 함께 쓰여 있었는데요, 진젠도르프는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예수님의 허리에서 피가 막 흘러내리는 것 같은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 때문에 피를 흘리고 죽으셨는데,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그림 앞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 기도를 드렸습니다. 앞으로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드렸고, 이후 그의 삶의 행보가 크게 달라집니다.
2년 뒤 90명의 모라비아 지역에서 살던 성도들이 가톨릭 교회의 탄압을 피해 자신이 다스리는 지방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체코 지역에서 독일 지역으로 옮겨간 셈입니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며 함께 예배하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교회에 큰 부흥을 주셨습니다. 한 청년이
교회가 세워지고 5년쯤 뒤의 일입니다. 1732년에 진젠돌프 백작이 덴마크 코펜하겐 왕실 대관식에 참석했을 때 그곳에 온 노예들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노예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던 진젠돌프는 노예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들으면서 어떻게 한 인생이 태어나서 저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지마음이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노예들을 자신의 교회로 초청하여 서인도제도에서 고통당하는 노예들의 생활을 성도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 당시 서인도제도에는 10만 명의 노예들이 해마다 아프리카에서 팔려 와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진젠돌프가 성도들에게 노예들을 위한 선교사로 삶을 바치기 원하는 사람들을 초청하자 26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노예들을 위한 선교로 드리겠다고 결단하고 헌신하며 손을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라비안 교회는 1732년 8월, 지원한 26명 가운데 우선 두 청년을 파송합니다. 한 사람은 목수인 데이빗 니츠만, 한사람은 옹기장이인 레오날드 도버였죠. 선교지로 가기 위해 두 사람은 배를 타게 되고, 이제 떠나가면 다시 오지 못할 두 사람을 보내면서 성도들은 부둣가에 나와 그들을 배웅합니다. 당시 노예들이 있는 곳에 자유인의 입국이 허용될 수가없었기에 노예가 되지 않고서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을 태운 배가 출항하는 순간 이 두 사람은 서로 팔짱을 끼고 있다가 다시는 만나지 못할 가족들, 점점 멀어져 가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외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께서 그의 희생 합당한 보상을 받으시기를!” 그렇게 두 청년은 노예의 신분으로 크리스마스 두 주 전 1732년 12월 13일 그 섬에 도착했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도착한 섬은 영국 노예상들, 덴마크 농장주들이 흑인노예를 잔혹하게 다루던, 죽음의 섬이었습니다. 노예가 되어 섬에 도착한 백인들은 처음 대한 농장주들은 아마도 적잖게 놀랐으리라 생각됩니다. 두 선교사는 허름하고 보잘 것 없는 거처를 제공받고, 노예들과 함께 농장에서 낮에는 날마다 힘든 노역을 감당하면서 저녁에는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헌신적으로 하게 됩니다. 두 선교사의 희생적인 사랑은 흑인노예들에게 감동을 주어 선교한지 17년 만에 2천명의 성도가 생겼습니다.
모라비안 공동체를 통해 영향을 받은 청년이 또 한 명 있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와 유명한 찬송가 작곡가 찰스 웨슬리입니다. 1735년 그는 미국의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조지아주에 와서 선교사역을 하였다. 웨슬리는 3년동안 선교사역을 하였으나 열매는 없었고 좌절되고 패배된 마음으로 영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싣었다. 불행히도 그들이 탄 배는 심한 풍랑을 만나 파선 일보직전까지 가면서 배 안의 승객 전원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극심한 공포에 빠졌습니다. 거센 풍랑에 돛대가 부러지면서 돛이 배의 갑판을 덮어버리자 배는 방향을 읽고 무서운 파도 속에 잠겨갑니다. 마침 그 배에는 몇몇 모라비안 가족들이 타고 있었는데, 무서운 풍랑 속에서도 저들은 놀라우리만치 평온함을 보여줍니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상황에서 그 배에 탔던 영국인 신자들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모라비안 형제들은 평온한 상태에서 시편으로 지어진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동생 찰스 웨슬레는 묻습니다. “당신네들은 겁나지도 않나요?” “감사하게도, 우리는 겁나지 않아요”가 모라비안 형제들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면 당신네 아이들과 아내들도 겁나지 않나요?”라고 웨슬레가 묻자, 아주 온유한 모습으로 모라비안 형제들은 대답합니다. “우리 아이들과 아내들은 죽음을 겁내지 않아요.”
무서운 풍랑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이 평온함에 웨슬레 형제는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들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영국에 돌아온 웨슬리는 모라비안교인들의 성경공부에 참석하게 되는데, 1738년 5월 24일 루터의 로마서강해를 들으면서 그 유명한 "알더스게이트" 중생의 체험을 하였다. 그가 이후부터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메시지를 전하게 되면서 영국성공회는 그에게 교회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웨슬리는 야외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이것이 18세기 미국과 영국을 휩쓴 부흥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 복음이 웨슬리라는 한 청년의 심장을 뜨겁게 달궜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감리교가 만들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인도)가 세계 선교의 비전을 가지게 된 것이, 이 모라비안 공동체의 선교 소식 책자를 통해서였습니다. 1792년 봄 캐리는 모라비안 공동체의 선교 이야기를 듣고 세계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되어 “이교도 개종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관한 연구”라는 짧은 책을 저술하였고, 이 책을 통해 서구 교회에 세계 선교에 대한 중요성을 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인도로 선교를 가게 되지요. 모라비안 공동체와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는 윌리엄 캐리라는 한 청년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남겼지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그 결과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해외선교단체인 “침례교 해외 선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선교회를 통해 본격적인 영국 교회의 대선교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수많은 청년들이 세계 선교의 비전을 품고 자신의 삶을 바쳐 선교지로 떠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직 이 놀라운 이야기가 끝나려면 한참 남았습니다. 18세기에 일어난 위대한 부흥의 시대에 태어난 사무엘 밀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밀즈는 17세 때 부흥운동을 통해 큰 은혜를 체험하고 스스로 세계선교에 헌신하게 된다. 이날 이후 세계선교는 그의 평생에 흔들림 없는 목표가 됐다. 23세가 되던 1806년, 밀즈는 예일이나 하버드 보다 등록금이 싼 윌리암스 칼리지에 입학한다. 그는 윌리암스 마을과 대학 안에 영적 부흥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을 갖고 대학 안에서 복음과 부흥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시작했다. 밀즈와 그의 친구들은 매주 정기적으로 모였고, 정기 모임 외에도 자주 따로 모여 학생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회를 가졌다.
그러던 중 1808년 8월 어느 무더운 토요일, 밀즈 그룹 학생 다섯 명이 기도하기 위해 Hoosic 강변에 모였다. 이 때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소나기가 쏟아지자 이들은 소나기와 천둥을 피해 근처 건초더미 속으로 피해 그곳에서 비가 그치기까지 아시아 선교에 대해 나누며 뜨겁게 기도한다. 그 때 성령께서 그곳에 강하게 임하셨다. 밀즈는 “우리가 아무리 해외선교를 위해 기도할지라도 우리 자신이 해외 선교사로 나가지 않는다면 우리 기도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상기시키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우리가 하고자만 한다면 세계복음화를 이룰수 있다!”이라고 도전했다.
이 구호는 이후 건초더미 기도운동의 슬로건이 되었다. 이 기도모임은 그해 여름 내내 그 숲속에서 계속 되었고, 겨울이 다가오자 기도회 장소를 어느 부인의 집으로 옮겨 계속하다가 다시 숲속에서 1807년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이 작은 기도모임이 미국의 대학에서 일어난 최초의 해외선교를 위한 기도회였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청년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시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라도, 언제든지 가겠다고 다짐하고 북미주 최초의 해외 복음전파를 위한 결사대 같은 ‘The Society of Brethren’(형제회)를 조직한다.
그들 5명은 윌리암스대학을 졸업한 후에 주변 신학교와 예일, 프린스턴, 하바드 대학으로 재입학해서 세계선교를 위한 기도모임을 만들고 세계선교 헌신자들을 확보해 나가면서 선교 정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이 1810년 6월에 열린 교단 총회를 찾아가 자신들을 해외선교사로 파송해주기를 요청하며,1810년 미국 최초로 해외선교회가 탄생한다.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미국 해외 선교회)이 만들어진 2년 후 건초더미 기도회원 3명과 아도람 저드슨 등 5명을 인도로 파송한다. 이것이 미국 교회의 대선교 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선교회를 이후 50년간 1,250명의 선교사가 미국에서 해외로 파송되었습니다.
건초더미 기도회가 시작되고 61년 후인 1867년, 기도회 자리에 건초더미 기도회 기념비가 세워지고 이 기도운동은 학생자원 선교운동(SVM)으로 연결됩니다. 1879년, 프린스턴 대학 YMCA 지도책임자인 루터 위셔드는 윌리암스 대학 YMCA 회장인 찰스 오버를 만나 건초더미 기도회 기념비를 찾아갔다. 이 두 청년은 눈 덮힌 기념비 앞에 꿇어 앉아 자신들도 그들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디든지, 언제든지, 어떤 일도 하겠습니다”라며 헌신하였고, 당시 유명한 부흥사 DL 무디를 강사로 모시고 헐몬산 대학생 연합 사경회를 준비하였습니다. 헐몬산 대학생 연합 사경회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청년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셨습니다. 무려 100명의 참석자들이 그 자리에서 선교사 헌신을 하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게 될 학생자원 선교운동(SVM)이 시작되게 된다.
청년들이 가는 곳곳마다 세계 선교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전하며 이 구호를 외쳤습니다. “Finishing the task in our generation!”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뜨겁게 헌신나는 청년들이 대학마다 불길처럼 일어났습니다. 이 학생자원 선교운동을 통해 50년간 20,500명의 선교사들이 해외로 나가게 됨으로 선교의 황금기가 열리게 된다.
당시 학생자원 선교운동을 통해 선교사로 헌신한 자들의 이름이 우리에게는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게일, 스크랜튼, 하디, 헤론… 이들은 다 미지의 땅 조선에 세계 선교의 비전 하나를 가슴에 품고 발을 디딘 선교사들의 이름입니다. 당시 조선에 입국하였던 선교사의 절반이 이 학생자원 선교운동을 통해서 헌신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조선 땅에 복음이 심겨지고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흥의 역사라고 불리는 1907년 평양대부흥을 이 민족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최초로 조선의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참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단기간에 크게 성장한 교회는 교회 역사상 아마 전무후무할 것입니다. 한참 한국교회가 성장의 역사를 써가던 1980년 8월, 여의도에서 집회가 열렸습니다. 세계 복음화 대성회라는 주제로 열린 이 집회에는 백만 명이 모였다고 기록이 되어있는데요, 이 날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청년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 밤 헌신 예배에서 CCC의 창립자인 김준곤 목사가 청년들에게 '보냄을 받은 장단기 선교사'로 헌신하든지, 기도와 물질로 '파송 선교사'를 돕는 '보내는 선교사'가 되든지 결단할 것을 도전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10만 명의 청년들이 선교에 헌신하였습니다. 이날 이후로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를 위해 본격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고,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결론
결론
나에게 가장 귀한 주님이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여겨지기를 바라는 마음. 모든 이들과 함께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만족하며 함께 높이기를 바라는 마음.
눈 열어서보게하소서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