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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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4:13-17
오늘 본문의 말씀인 에스더서는 페르시아의 와스디 왕비가 폐위되면서 유대출신의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왕의 사랑을 받아 왕후가 된 후에 일어난 일로 페르시아에 포로로 끌려간 후에 고향으로 귀환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게 됩니다. 이때 하만이라는 페르시아의 신하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비롯한 모든 유대 민족을 말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지만, 모르드개와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하며 왕 앞에 나가 에스더의 지혜로 하만은 결국 처형이 되고 유대인들이 보존하게 되는 내용인데요.
저는 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민족의 위기 앞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왕 앞에 나아감으로 민족을 살린 왕후 에스더와 그의 삼촌인 모르드개의 대화 속에서 우리 어른들이 깊이 간직해야 할 신앙의 모범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왕후가 된 에스더의 일생이 지혜롭고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그 배후에 모르드개가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이 에스더서는 에스더가 주인공인 것 같지만, 이 에스더 배후에 있는 모르드개가 없는 에스더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두 인물의 관계를 보면서 만남의 축복. 에스더가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모르드개라는 좋은 만남의 축복을 누렸기 때문에 이런 훌륭한 여인이 될 수 있었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모르드개와 같은 만남의 축복을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에스더 뿐만 아니라, 평범한 농부에 불과했던 엘리사가 엘리야라는 위대한 선지자를 만나는 그 만남의 순간이 그 평범한 농부가 위대한 선지자로 탈바꿈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디모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전후서를 보면 먼저 그 길을 걸어갔던 멘토였던 바울이 얼마나 주옥같은 말씀으로 그 젊은 목회자 디모데를 잘 권면하고 있는지 디모데에게 바울이라는 그 만남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삶이 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짧은 목회경력 속에서도 제가 부교역자 시절에 두 차례나 걸쳐 모셨던 목익수 목사님이나 몇몇 목사님들 심지어 교회학교 시절에 저를 가르쳐주셨던 그 많은 선생님들과의 만남의 축복이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제 인생에 가장 큰 감사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5월 가정의 달을 지나면서 우리 자녀들을 위해 손주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 아이들에게 만남의 축복을 주시길 원합니다.” 이 만남의 축복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하나님, 우리 자녀손들이 에스더에게 있어서 모르드개와 같은 인물, 엘리사에게 있어서 엘리야 선지자와 같은 스승, 디모데에게 있어서 바울과 같은 멘토를 만나게 해 주시길 원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이렇게 끝내셔서는 안 되고요. 이 기도 후에 반드시 구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는데요. “하나님, 그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손들이 그 누군가에게 에스더에게 모르드개와 같은 존재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아이가 그 누군가에게 엘리사에게 있어서 엘리야와 같은 스승, 디모데에게 있어서 바울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해주시길 원합니다.”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사실 이런 기도가 우리 아이들 축복할 때만 하는 기도가 아니고요.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도 저는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 제가 누군가에는 좋은 멘토가 되길 원합니다. 누군가가 이 심 훈 목사라는 사람을 만난 것이 그 인생을 뒤집어 놓고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되길 원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누군가에게 이런 만남의 축복을 제공하는 그런 인물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이 시대는 어른이 없다고 탄식하는 시대 아닙니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자체가 모든 권위를 무시하는 그런 시대이다 보니 제가 가장 아쉬운 점이 예전에 든든한 버팀목과 같으셨던 어른들이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이 참 아쉽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어른이 드문 이 시대에 은혜받고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그 어른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오늘 저는 본문에 나오는 모르드개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함께 3가지 조건으로 살펴보고자 하는데요.
우리가 모르드개와 같은 어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 바로 ‘중심축 역할 감당하기’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 삶을 아우를 수 있는 중심축이 있어야 하는데요. 우리는 자녀손들을 두고 크게 쓰임 받는 큰 그릇이 되라고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심축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서는 어떤 사람은 한 나라를 좌지우지할 만한 큰 원을 그릴 수 있도록 크게 쓰임 받는 인생이 있고 또 어떤 분은 소박하게 작은 원이 되어 내 삶 주변에서 작은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는 인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우리 인생은 얼마나 큰 원을 그리고 있느냐? 이것을 목말라해서는 안 되고요. 원의 크고 작음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고 중심축을 잘 잡는 그런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 컴퍼스를 가지고 원을 그리는 그런 중심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처럼 모든 인생은 중심축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만, 이 중심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잘 안되는 게 우리 인생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모르드개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 아닙니까?
에스더는 처음부터 중심이 있던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자기 동족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 이랬던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왕후라도 페르시아 왕의 허락이 없이는 왕 앞에 나오질 못했습니다. 왕이 암살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죠. 이러한 상황에서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는 데에 주저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가 있는데요. 모르드개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에스더가 30일이나 왕에게 나가는 것을 주저하거든요. 30일씩이나 왕후가 왕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아하수에로왕이 에스더에 대한 사랑이 식었음을 보여주는 대목 아닙니까? 따라서 에스더는 비록 왕후였지만, 다른 신하들처럼 왕이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왕후가 된 초기 때라면 에스더가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을텐데 오늘 본문의 상황이 그러질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더가 계속 주저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난 못한다고, 난 안 된다고, 난 그런 일 할 수 없다고” 그 중심축이 없던 에스더에게 모르드개라는 좋은 인물을 하나님께서 붙여 주심으로 중심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지난 5월 5일 국민일보에 실린 기사인데요. 제목이 <‘노래하는 장애인딸 넘어지지 않게’ 네티즌을 울린 엄마>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개그맨이자, 가수인 이정규 씨라는 분이 5년 전 장애인날 노래자랑 행사장에서 찍은 사진과 그 사연을 소개한 글인데요. 장애가 있는 어린 딸이 노래하는 동안 쓰러지지 않게 뒤에서 무릎을 꿇고 받쳐준 어머니의 모습에 너무 감동을 받았는데, 이 아이가 그런 엄마의 헌신에 힘입어 최근까지 가수의 꿈을 잃지 않은 채 성장했고, 5년 후에 또 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무대 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사진)
저렇게 어린 딸이 가수의 꿈을 갖고 무대 위에 올랐는데, 아무리 보조기구가 있다지만, 혼자 힘으로 서지 못하니까 아이의 엄마가 쓰러지지 않게 뒤에서 두 무릎을 꿇고 꼬옥 잡아주시면서 아이를 지탱해 주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그런 엄마의 지지에 용기를 얻어 이 아이가 5년이 지나서 여전히 가수라는 꿈을 잃지 않고 이번에는 지지대도 없이 무대에 올랐는데 여전히 엄마가 아이 뒤에서 안고 함께 노래를 불러주며 중심축 역할을 해 주고 있는 모습에 많은 네티즌들이 “좋아요”를 엄청나게 누르고, 심지어 “보컬 트레이닝을 돕고 싶다”고 선한 도움을 내미는 손길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손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가 스스로 일어서기 얼마나 어려운 시대입니까? 우리도 이렇게 넘어지기 쉬운 자녀손들을 위해 중심축이 되어 주고 용기를 주는 어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장애인 아이의 엄마가 “너는 할 수 있어” 말로만 그러질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많은 그 무대 위에서 아이가 작을 때는 두 무릎을 꿇고 아이를 지지해주고, 아이가 컸을 때는 직접 뒤에서 아이를 안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가수의 꿈을 도왔다는 거예요. 저 한 번의 오디션을 위해 집에서 얼마나 많이 연습을 함께 했겠습니까?
에스더도 모르드개의 말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닙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여러가지 말로 권면을 하지만, 사실 그런 권면의 말씀 이전에 이미 여호수아가 지도자로서의 모세와 수없이 많은 세월을 함께 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같은 목사들은 그 누구보다도 말을 많이 하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주일날 우리 교회에서 가장 말 많은 사람이 아마 저일 거예요. 또 평일에는 심방도 하고 부교역자들에게 이런저런 얘기들도 많이 하죠. 어느 때는 부교역자들에게 격려도 하지만 지적도 하고 충고도 하지 않습니까? 집에 가면 또 말을 하게 되잖아요?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제 말로 영향을 받는 게 아니더라는 거예요. 목회자는 설교나 말로 가르치기 이전에 그의 존재 자체가 말이 되고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제가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대상이 바로 저희 집 애들하고 우리 교회 부교역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이야 저를 주일에 한 번 그것도 이렇게 떨어진 관계로 저를 보니까 크게 저에게 영향을 받는 것이 없으실 거예요. 하지만 저희 집 애들이나 부목사님은 다르잖아요. 평일에도 저를 가까이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까?
제가 목익수 목사님 밑에서 6년을 넘게 함께 동역했거든요. 전도사 시절에는 제주도에서 목사 안수받고 한참 지나서 새밭교회에서 한 번 더 동역을 했는데요. 사실 목사님과 제가 다른 점도 많은데요. 어느 때는 제가 그 목사님을 닮아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똑같이 하는 행동들이 있어요. 그래서 가끔 놀랍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목목사님의 부교역자 시절에 존재로 목회하는 것을 제가 봤기 때문입니다.
저는요. 우리 교회 부교역자들에게도 제가 부족한 게 많지만, 그런 존재로 목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말로 하는 것 말고 삶으로 보여주고 싶어요. 시편 18:29
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저는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의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관계에서, 여호수아를 향한 모세를 보면서 이 시편 18편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여기 계시는 우리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이 꾸어야 할 꿈은 이 시편 18편 29절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는 이 땅에서 소멸하고 하나님 나라로 가고 없을 때, 우리 자녀손들이 우리를 추억하면서 “우리 아빠는, 우리 할아버지는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위기의 담을 뛰어넘으신 분이야.”
오늘 우리 이 자리에 모든 부모님들이 이 꿈을 품게 되시길 바랍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그렇고 지금까지 그렇게 못했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우리가 지금부터 하면 됩니다. 이 꿈을 꾼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제가 우리 자녀손들 앞에서 이 시편 18편 29절의 말씀이 존재로 전달되는 그런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 아버지들이 저를 따라 선포해 주시는데, 어머니들도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쉽게 말하면 모두 다 선포하자는 거예요. “내가 주를 의뢰하고 / 내 하나님을 의지하며 / 담을 뛰어 넘나이다” “담을 뛰어 넘나이다” 아멘 이시죠?
그런가하면 모르드개와 같은 어른이 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책망할 수 있는 권위 회복하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위기를 만난 동족을 위해 페르시아의 왕에게 가서 “탄원을 해라” 그렇게 요청을 했더니 에스더가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못합니다” 그러질 않습니까? 그랬더니 그냥 벼락같은 호통을 치는데요. 에스더 4장 13절과 14절을 통해 그 분위기를 한번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에스더 4:13-14
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14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이거 등골이 오싹한 말 아닙니까? 그러고보면 모르드개도 굉장히 다혈질인 것 같아요. 잘못 들으면 상처받기 딱 좋은 이야기입니다. 저에게 누가 이런 식으로 호통을 치면 상처받았을 것 같아요. 반대로 제가 어느 집사님을 “집사님과 집사님 아버지 집이 멸망할 겁니다.”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정말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뭐 이런 목사가 다 있어?’ 하면서 교회 떠나실 걸요.)
놀라운 게 뭐냐면, 저주처럼 퍼붓는 모르드개의 충고 앞에서 에스더가 상처받기는커녕 토 하나 달지를 않습니다.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그 말씀 앞에 순종하면서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책망할 수 있는 권위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한 어른이 되길 원한다면, 이 책망할 수 있는 권위부터 회복되어야 합니다. 디도서 2:15
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이 말씀에서 바울은 책망도 권위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 윗대 목사님들은 학력이 그렇게 높지도 않으셨어요. 신학대학 학부 졸업하시거나 심지어 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목사안수 받고 목회하신 분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 권위 앞에 모든 성도님들이 순종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저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목사님이 한마디 하시면 순종하고 혹시 잘못해서 혼날 때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오늘날은 그런 분위기가 다 사라진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책망할 수 있는 권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디도서 2:15 새번역
15 그대는(목회자들) 권위를 가지고 이것들을 말하고, 사람(표준새번역에는 ‘신도’)들을 권하고 책망하십시오. 아무도 그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한국 교회 강단에서 책망할 수 있는 권위가 다 사라져 버린 것 아닙니까? 왜 사라졌는지 아세요? 책망이 결코 혼을 내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책망을 목회자 자신이 자기감정으로 잘못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가정 가정에 부모님들이 조부모님들이 자녀손들을 향한 이 사랑의 책망, 이 책망의 권위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제자들을 향해 아끼지 않고 이 책망의 권위를 사용합니다. 마가복음 9장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변화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제자들에게 내려와보니까 웅성웅성거리고 있어요. 무슨 일인가 가보니까 제자들이 난감한 일에 빠졌습니다. 마가복음 9:17-19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여러분, 이 장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따뜻하게 하시는 말씀 같으십니까? 추상같이 꾸짖는 목소리 아닙니까? 사람들 많은 데서 “내가 너희에 대해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느냐?”라고 공개적으로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마가복음 9장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향해 “이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하시면서 책망하시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는 것을 우리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선지자 나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하 12장을 보면 성적으로 범죄한 다윗을 나단이 무섭게 책망합니다. 왕이고 뭐고 없어요. 그랬더니 다윗이 비록 왕이지만 그 추상같은 나단의 지적 앞에 아무 소리 못 하고 눈물의 회개의 자리로 나가지 않습니까? 이게 책망의 권위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손흥민 선수 아버지 손웅중씨에 대한 일화를 말씀드렸잖아요? 얼마 전에 한 인터뷰를 보니까 “친구 같은 부모는 있을 수 없다”라고 그렇게 인터뷰를 했더라고요. 그러면서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흔히들 자식에게 친구 같은 부모가 되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것을 직무유기라고 봅니다. 아이가 습관적으로 잘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친구끼리 그걸 고쳐 줄 수 있어요? 못 고칩니다. 친구같이 지적은 할 수 있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끝까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부모뿐이라고요.”
친구 같은 부모, 친구 같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뭘 말하는지 다들 아시죠? 권위주의 내세우지 말고 친구처럼 마음 터놓고 지낼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으로 이분이 강조하는 왜 친구 같은 부모로만 있으면 안 되는지, 그건 직무유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아비로서 후회되는 것이 제 아들에게는 잘 못 한 게 있으면 때로는 엄한 책망도 하고 혼도 내고 했는데, 제가 딸에게는 그러질 못했거든요. 이 아이는 딸이고 막내이고 하니까 다 오냐오냐했어요. 가끔 친구처럼 지적은 했어도 사랑의 책망까지는 못 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렇고 부디 우리 하름의 가정가정마다 하나님께 부여해 주신 영적 권위.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그랬던 것처럼 책망할 수 있는 권위가 회복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가하면 마지막 세 번째로요. 우리도 모르드개와 같은 어른이 되기 위한 세 번째 조건. 바로 ‘아비의 심정 회복하기’입니다.
‘아비’라는 단어를 사전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낮춤말이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심정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제가 왜 모르드개를 생각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아비의 심정이 느껴졌냐 하면은요. 지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독설에 가까운 책망을 듣고도 상처가 없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참 궁금한 거예요. 그렇게 궁금해하다가 문득 발견한 성경구절이 있는데요. 에스더 2장 7절입니다. 이 말씀은 다같이 읽어보셔야 합니다. 에스더 2:7 합독
7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제가 발견한 이 모르드개가 책망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받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더라고요. 어렸을 때 부모가 돌아가시고 고아가 된 에스더를 거두어 준 모르드개가 의무감 때문에 키운 게 아닙니다. 어떻게 키웠다고요?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그래서 잘못 들으면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저주하는 것처럼 들리는 상처받기 쉬운 독설을 듣고도 에스더가 상처를 안 받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평상시에 모르드개가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은 그 마음으로 자신을 대하는 모르드개를 에스더가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를 모르드개처럼 꾸짖어 주는 어른이 안 계시다는 게 정말 아쉬워요. 돌아가신 옥한흠 목사님을 제가 가장 존경한다고 종종 말씀을 드렸는데요. 옥목사님은 자기 교회 부교역자들은 물론이고,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도 “목회자가 이것저것 취미나 만들고 정치하는 목사 되어서 성도들 방치하라 말라”고 천둥처럼 공개적으로 책망을 하셨던 분이거든요.
제가 2008년도에 옥한흠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제자훈련 세미나 아직도 생각나요. 제주도에서 비행기 타고 올라가서 어떻게든 한 말씀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맨 앞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듣는데요. 그때가 옥목사님 건강이 안 좋으실 때였거든요. 어른 목사님인데도 불구하고요. 당신의 연약한 면을 다 고백하시면서 또 어느 때는 천둥 같은 소리로 그 젊은 목사들에게 호되게 나무라시는데요. 옥목사님의 목회 여정과 삶을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저 사람 뭐야?” 이럴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 앞자리에 앉아서 얼마나 눈물이 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지 숙소로 들어가서도 함께 숙박하던 목사님들, 그분들 그날 처음 만났는데, 마가의 다락방처럼 함께 뜨겁게 기도하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다들 한바탕 혼나고들 왔는데, 전혀 상처받은 얼굴들이 아니에요. 왜 그럴까 생각해 봤더니, 후배 목회자들을 향한, 이 한국 교회를 향한 옥목사님의 애정과 사랑, 그 아비와 같은 심정으로 ‘후배 목사님들 제발 엇나가지 마십시오. 내가 이렇게 암으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내 뒤를 이어 한국 교회를 잘 부탁합니다’ 이 아비의 심정으로 저희들을 대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요. 그렇게 저같이 젊고 미숙한 목사를 아비의 심정으로 호되게 책망해 주시는 그런 어른 목사님이 계셨으면 좋겠어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시대는 진정한 어른이 필요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잖아요? 오늘 저는 3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중심축 역할하기, 우리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인생의 중심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부모님들이, 여기 계시는 어른들이 그 역할을 해주셔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책망할 수 있는 권위, 책망받으면 그것이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으로 흐를 수 있는 권위, 이 책망의 권위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아비의 심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 정말 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내가 가르치는 교회학교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내가 섬기는 목장의 목원들을 사랑하는 마음. 이 사랑이 권위를 만들어 낼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여러분, 우리는 누구에 의해서 이 3가지를 전수 받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분을 내 마음에 모셔서 내 삶의 중심축이 되도록 ”주님, 제 삶의 중심축이 되어 주시길 원합니다. 주님,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신 것처럼 제가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할 때, 저를 제발 내버려 두지 마시고 천둥 같이 꾸짖어 주시길 원합니다. 저를 바꾸어 주시고 교정시켜 주시길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가 낙심될 때, 아비의 심정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 그 주님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이런 마음 가지고 이 찬양을 함께 부르길 원합니다.
❙결단찬양 : 아바 아버지
❙합심기도
이 시간 우리 말씀 붙들고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요. 그냥 한 해 한 해 나이만 먹어가는 것 아닐까요? 저는 그런 생각 많이 합니다. 목회 경력만 쌓여가면서 어디 나 좀 알아봐 주는데 없나? 재미있는 일 없나? 이렇게 기웃거리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제게 맡기신 성도들을 방치하는 것 아닌가? 저도 중심축이 필요해요. 호되게 꾸짖어 주는 어른이 필요하고요. 또 제가 옥목사님처럼 그런 중심축이 분명한 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여러분, 우리 아이들, 여러분들 자녀손주들에게 우리가 모르드개와 같은 진정한 어른이 좀 되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혼탁한 시대에 중심축이 되어 주고, 아비의 심정으로 사랑의 책망할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미혼이거나 자녀가 없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제 삶의 중심축이 되어 주시옵소서. 어긋나려고 할 때, 저를 바로 교정시켜 주시길 원합니다.“
우리 이런 마음 가지고 오늘 말씀 기억하시면서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한 해 한 해 지나가면서 우리가 나이만 들고 늙어가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어른이 없다고 탄식하는 이 시대에 저와 우리 성도님들이 모르드개와 같은 어른이 되어서 우리 자녀손들에게 중심축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책망할 수 있는 권위, 아비의 심정이 회복되길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축이 되어 주셔서 어긋나려 할 때, 낙심이 올 때 교정해 주시고 눈물 닦아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결단의 찬양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혼탁한 이 시대에 우리 자녀손들에게 진정한 어른이 되기를 다짐하는 우리 성도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