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24 새벽기도회: 욥기 3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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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하시겠습니다. 383장 찬송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새벽에 잠을 깨워 새벽기도회로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고 죄를 멀리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더 가까이하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저희는 연약하오니 성령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저희를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금요일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5:1-8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욥기 35:1–8 NKRV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그대는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범죄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지마는 내가 그대와 및 그대와 함께 있는 그대의 친구들에게 대답하리라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도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한 주를 잘 마무리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은 엘리후가 욥에게 하는 연설들 중 하나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의 고난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욥을 훈계하는데요. 이 엘리후의 연설을 살펴보고 오늘 기도제목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33장부터 시작된 엘리후의 연설은 35장에서도 이어집니다. 엘리후는 먼저 2-3절에서 앞에서 욥이 말한 것에 대해서 반박합니다. 욥은 앞에서 “내가 힘을 다해 회개하며 경건하게 산다면, 그리고 내가 덕이 있음에도 이런 끔찍한 고난을 당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적어도 이런 끔찍한 고통 대신에 어느 정도 복이 나에게 마땅히 와야하지 않겠는가?”라는 식의 질문과 반론을 제기하였습니다. 이런 욥의 말에 엘리후는 3절에서 “그대는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범죄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지마는”이라며 자그마한 동정도 없이 거칠게 대답하며 욥을 강하게 꾸짖습니다. 처음에 고난이 찾아왔을 때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은 자신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욥은 자신의 고난이 길어지고, 세 친구들로부터 참소를 당하자 처음 가졌던 그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잘못한 것이 없고, 내가 올바르게 살아도 나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온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했던 겁니다. 욥의 이런 생각은 신자인 우리에게도 찾아올 수 있는 생각입니다. 고난이 찾아오기 전에는 하나님을 마땅히 예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에게 이유 모를 고난이 찾아왔을 때, 그리고 그 고난이 극심할 때 우리는 욥과 같이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이런 고난이 찾아오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라고 따지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잘 해주셨기 때문에 내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라도,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욥과 같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고난을 겪어본 사람들은 욥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욥에게 엘리후는 따끔하게 혼을 냅니다.
그리고 욥이 내린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합니다. 5-8절이 그 대답인데요. 5-8절을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본질상 초월적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엘리후는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는데요. 첫번째로는 6절로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범죄한다고 한들 하나님께 피해가 가거나 그분에게 고통을 안겨드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 고통을 드릴 수도, 어떠한 해를 끼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외부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만, 하나님은 외부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길들여질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시거나 분노하시는 모습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에게서 기원한 것들이지 외부에 의해서 표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엘리후가 두 번째로 말하는 것은 7절로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라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자신을 의롭다고 한들,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게 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우리의 선행이 필요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선행한다고 한들 하나님께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공로주의의 기반에 무엇이 있는지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공로주의는 우리가 선행을 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 빚지게 만들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셔야만 한다는 사상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선행을 하면 마땅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셔야만 한다는 뜻이죠. 그러나 엘리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의와 선행으로 하나님께 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 엘리후는 우리의 범죄와 의는 하나님께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로 내가 의롭게 살아도 소용없다고 말하며 최소한 고난을 당하지 않거나 복을 베풀어는 주셔야 한다고 말하는 욥을 향해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행위로 인해 영향을 전혀 받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엘리후가 꾸짖는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욥이나 그 누구라도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치 하나님께 받아내야 할 것이 있는듯이 말하는 욥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고, 욥과 같이 고난 속에 있을 때에 “내가 죄를 그치면, 당신께서 더 행복해하시고 제게 상을 주시겠죠?”라고 하거나 “제 선행 덕분에 하나님 당신의 하루가 틀림없이 더 나아지셨을테고, 그러니 하나님은 제게 뭔가 보답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이렇게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무언가를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이시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삼위 안에서 완벽함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범죄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라고 질문하는 욥의 질문은 잘못된 것이며, 만일 우리도 욥과 같이 이런 질문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외부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신학 용어로 하나님의 무정성, 또는 하나님의 비감정성이라고 하는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하나님의 불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엘리후는 8절에서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어떠함이 하나님께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인간 서로에게만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욥을 향한 엘리후의 꾸짖음은 정당한 꾸짖음입니다. 나중에 뒤에서 하나님께서도 40장 8절에서 욥을 향해 “너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너의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라며 꾸짖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욥과 같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셔야 하는 분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굳이 고난을 당할 때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어떤 직분에 대한 직무를 행할 때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했으니 받아야 할 것이 있는 것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떤 모습으로 선행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도 공로주의에 빠진 적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사랑해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선행을 하셨습니다. 마치 한 부모의 자녀가 부모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기 위해 자신이 선행한 것을 어필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부모로부터 “잘했어”라는 칭찬을 받고 싶어서, 그리고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 선행하듯이 말입니다. 어버이날에 우리가 부모님을 대접해드리고, 선물을 드리는 이유도 부모로부터 좋은 것을 받기 위해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키워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선행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저 나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욥과 같이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올 때 “내가 최소한 고난에 처하지 않거나 복을 받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봉사하고 선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봉사와 선행을 기쁨으로 누리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두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에서 욥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마치 받아야 할 것이 있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말을 통해 그것은 틀린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께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돌아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봉사하고 선행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언제나 공로주의에 빠질 수 있는 저희를 붙드셔서 저희가 공로주의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선행하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더 나아가 고난 중에도 이러한 생각에 빠지지 않고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께 복종하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오늘 하루도 이렇게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지켜주실 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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