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할 때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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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회
금요기도회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사랑합니다! 금요기도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막장 드라마’에 대해서 아는가? 막장 드라마의 공통된 이야기 주제는 무엇인가? 그렇다. 남편 또는 아내가 바람을 피울 때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막장드라마이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보통 사람의 상식과 도덕적 기준으로는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의 드라마이다. 억지스러운 상황 설정, 얽히고설킨 인물 관계, 불륜, 출생의 비밀 등 자극적인 소재로 구성되는 것이 막장드라마의 사전적인 뜻이다. 이러한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현실에서 또는 주변에서 평생 겪을까 말까한 에피소드가 수십 분에 한 번씩 벌어지곤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런 드라마를 보고 뛰어난 연기자의 연기로 피해를 당한 주인공이 마치 자신의 상황처럼 답답해하고, 분노를 표출하게 만든다. 아내가 남편만을 사랑하겠다고 고백했는데 계속해서 바람이 나는 상황이 사사기의 전체적인 흐름이다. 사사가 등장할 때의 시기를 보면 그들이 섬겼던 신들은 바알과 아세라 또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등 대사사와 소사사들이 전쟁을 통해 우상을 파괴하고 평화를 얻게 하는 내용들로 반복되었다.
그러나 오늘 등장하는 사사 입다가 등장한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앞전에 소사사 돌라와 야일의 통치로 인해 이스라엘은 평화를 45년 동안 누렸다. 오히려 이렇게나 평화로운 기간이 나태하고 안일한 기간이 되어버렸다. 그 이유는 바로 6절에 “여호와의 목전에 이스라엘이 다시 악을 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 이스라엘은 아주 최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이 범한 악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이스라엘 주위의 모든 신이 다 나오는 것이다. 무려 일곱 가지의 우상들이 나타난다.
바알들과 아스다롯(가나안 신들)
아람의 신들(시리아의 신들로서 하닷, 바알, 못, 아낫)
시돈의 신들(바알과 아스다롯)
모압의 신들(그모스)
암몬 자손의 신들(몰렉 등)
블레셋 사람의 신들(다곤, 바알 등)
이스라엘은 단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정도가 아니라 접촉 가능한 모든 주변 국가의 신들을 섬기는 우상 숭배로 엄청나게 확장된 것이다. 실제로 내 친구의 지인은 결혼하기로 약혼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때 남편될 분은 아주 성실하게 일도 잘하고, 주변사람들에게 깍듯하게 잘하고 자기에게 다정하고 스윗하게 대해주는 분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출장을 자주 나가는 것이다. 그것도 2주 씩이나 연락도 되지 않고 말이다. 그러다가 여권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는데, 해외에 자주 나간 것을 확인했다. 그때 이게 무엇이냐고 따지자 해외출장이 많아져서 그랬던 것이라고 답한 것이다. 안그래도 이런 일 때문에 마음이 이미 크게 상심한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예비 남편의 친구가 이실직고를 하게 되었다. 사실 해외출장이라고 하면서 각 나라의 여자들과 음탕한 생활을 했었고, 마약중독자라고 말하게 되었다. 충격에 파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으나, 최근에 돌이키고 그분과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치 이스라엘의 모습이 이런 상황이다.
여호와 한 분만 사랑하겠다고 출애굽 때 모압에서 언약을 맺은 백성이 여호와를 버리고 해외로 출장간다고 말하며 다른 나라 사람들과 바람난 부부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반응은 진노하게 되시는 것이다. 사사기 서론에 웃니엘 이야기에만 나타났지만 입다의 상황 속에서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악행에 염증을 느끼셨고, 마침내 진노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이스라엘 백성을 넘기셨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은 버림 받은 남편 신세가 되어 버리셨다. 그러면서 18년 동안 블레셋과 암몬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동쪽 요단 강 쪽에 사는 사람들을 괴롭히다가 요단강을 건너 서쪽에 있는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을 괴로움을 계속해서 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9절 마지막에 이스라엘의 상황을 정확히 말해준다.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늘 지금까지 그랬듯이 이스라엘은 점점 삶이 힘들고 괴로워지니까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부르짖음이 이전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그냥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10절에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표현은 사사기에서 처음으로 나온 것 뿐만 아니라 입다의 스토리에서 무려 2번이나 등장한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면서도 범죄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나 범죄를 고백하면서 이스라엘이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오히려 우상들에게 가서 구원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조롱하신다.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찾는 이스라엘에게 이용당하고 버림받으신 쓰디쓴 경험을 근거하여 이제는 그런 식으로 당하지는 않겠다고 토로해 내고 계시는 것이다. 버림받은 남편, 배신당한 남자의 신세를 생각보시라. 그것도 한 번도 아니라 여러 번 배신당했다고 생각해보라.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심각하게 나쁜 상황이 되었다. 그전에는 부르짖으면 사사를 세우시든 선지자를 보내시든 그래도 도와주시던 하나님이 이제는 다른 신들에게 알아보라고 분위기가 심각하게 싸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이 섬겼던 이방 신들에게 부르짖지 않았다. 삿 10:15-16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이스라엘은 또 다시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반복해서 죄를 고백하면서 당장에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스라엘은 죽을힘을 다해 ‘주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하시라고 모든 상황을 고백하고 맡겨드린다. 그러나 제발 이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서 건져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진지한 회개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이 곧바로 이방 신들을 제거했다. 16절 하반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니라”라는 이 문장을 흔히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후회하신 것으로 본다. ‘곤고’라고 번역된 명사는 구약에서 ‘힘든 일, 고난, 고통’을 가리킨다. 게다가 ‘근심하다’는 후회가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견디지 못하는 심정’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다시 풀어서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을 보고 마음이 아파 견디지 못하셨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렇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늘 자신을 이용하였으며, 지금 회개하는 것처럼 보여도 잠시 잠깐이었고,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더이상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근심하다’를 그저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마음을 돌리신 것으로 보면 또다시 이스라엘이 범죄할 것을 아시면서도 이들의 고통을 보시고 마음의 괴로움을 느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는 여호와의 마음을 담은 심오하면서 복잡하면서도, 동시에 강렬하고 극적인 감정과 긴장감이 사라지게 된다. 결국 이제 사사기의 후반에 들어가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회개에 달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긍휼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버린 이스라엘을 블레셋과 암몬을 통해 힘들게 하셨으면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하셨을까? 나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나의 여동생이 떠올랐다. 동생은 결혼하기 전에 준비하면서 엄마와 참 많은 갈등이 많았다. 엄마가 원하는 자녀의 결혼 모습이 있었고, 동생은 동생 나름의 원하는 결혼식의 모습이 있었다. 그때 동생이 엄마에게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한 것이다. “엄마보다 예비 시어머니가 훨씬 더 잘해주더라!” 그러면서 동생이 원하는 결혼식대로 진행했고, 결혼을 한 후에 시어머니의 실체를 알게 되어 너무 힘들다고 징징대며 오히려 지금은 엄마에게 가장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엄마의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을 했던 동생을 받아주고 그럼에도 안아주는 엄마를 보면서 사랑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시집생활 꽤나 어려운 일이고, 한번 미운털이 박히게 되면 괴롭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안쓰러운 마음으로 딸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다.
왜 이스라엘은 자꾸만 범죄하고 우상숭배하고 여호와를 버리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 이렇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은 달콤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자신에게 좋은 말만 해주는 사람의 이야기를 재밌어하고 즐거워한다. 그리하여 설교도 내가 듣기 좋았던 말씀에만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고, 듣기 불편한 설교를 들으면 은혜를 못받았다고 말한다. 은혜를 받냐, 못받냐의 기준이 자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또 신앙생활도 자신이 취사선택하듯이 힘든 것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편한 것만 하거나 아예 섬기고자 하는 마음도 없이 주일성수만 잠깐하기 위해, 순모임 조차 귀찮아하며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있다. 이스라엘이 왜 우상숭배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면, 율법대로 산다는 것은 지켜야할 것이 너무나 많고 힘들다. 어쩌면 거룩한 삶을 위해 힘겹게 제사도 드리면서 시간도 많이 드려야한다. 그러나 우상숭배는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취사선택하면서 하고싶을 때하고 하기 싫을 때 안해도 그만이다. 또 딱히 지킬 것도 없기 때문에 힘들고 거룩함과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여호와를 섬기는 것보다 우상숭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죄인된 내 자신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이 배신한 베드로에게 찾아오셨던 주님을 계속해서 묵상하게 된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했지만, 베드로에게 질문했던 것은 ‘너 회개했냐?’가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시는 것이다. 사랑하면 닮고 싶어지는 것이고, 사랑하면 나의 삶의 이유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 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면서 사랑한다는 것과 나의 모든 삶을 다 바쳐서 너를 위해서 살아가고 사랑하겠다는 말 중에 어떤 것이 사랑이라고 느껴지는가? 그렇다. 많은 사람이 결혼식에서 너를 위해 평생 살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서 자신을 위해 살아갈 때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만큼 우리를 사랑한다고 십자가에서 몸소 보여주셨고 확실한 증거로 보여주셨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여전히 내가 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른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어떤 모습으로 보시는가? 아주 작고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갓난아기와 같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그러한 아기에게 부모가 필요하지 않는 순간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순간이 아기에게는 부모가 필요하다. 그래서 요즘 세대의 부모들은 방에 CCTV를 설치해서 우리 아이가 문제가 없는지 출근하며 확인한다. 우리 주님도 그 마음의 상상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라.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다 아시는 주님, 그 연약함을 안타까워서 함께 동행하고자 하시는 그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이 밤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