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려로 세워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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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로 세워진 교회
양화진이 어떤 곳인지 아시나요?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때 선교활동을 하셨던 선교사님들이 묻힌 묘역입니다.
그곳에 가면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비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 가장 많은 가족이 묻힌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바로 제임스 윌리엄 홀입니다.
그는 캐나다에서 온 선교사이자 의사였습니다.
1891년 12월 우리나라에 와서 겨우 2년 11개월 선교활동을 하고 35살의 젊은 나이로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로제타 홀이라는 사람인데 역시 의사였습니다.
그녀는 결혼하자마자 2년도 안돼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되었지만 남편이 못다한 선교를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평양에 최초의 서양식 병원을 세워 10개월에 2500명의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더 나아가 여자의사들을 많이 길러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여성들이 남자의사들에게 몸을 보여주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여자의사가 꼭 필요했습니다.
그 중 그녀가 길러낸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의사가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최초의 서양식 남자의사 박서양을 소개했는데 이번에는 최초의 서양식 여자의사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김점동, 나중에는 박에스더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의사가 되었습니다.
로제타 홀은 장애인, 어린이 교육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어린이 병원을 세우셨고, 장애인들을 위해 점자교육과 청각장애인 학교도 세우셨습니다.
참 놀라운 분입니다.
그런데 사실 로제타 홀 선교사님에게는 큰 시련들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만 이 땅에 묻은게 아닙니다.
남편이 죽을때 임신 7개월중인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5살때 풍토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남기고 간 사랑하는 딸까지 보냈으니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의 제자였던 박에스더를 미국으로 보내 서양의학을 더 배워오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함께 의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 역시 10년동안 함께 사역하다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남편도 보내고, 딸도 보내고, 제자도 보냈습니다.
이쯤되면 실망감에 그냥 돌아갈법한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선교는 계속되었고, 선교사를 은퇴할때까지 43년동안 선교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오늘 말씀에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본론]
오늘 말씀이 펼쳐지는 장소는 수리아 지방의 안디옥이라는 도시입니다.
그 당시 수리아 안디옥은 약 50만명이 살고 있는 로마에서 세번째로 큰 대도시입니다.
바다와 가까이 있다보니 경제,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도시가 매우 종교적인 도시라는 점입니다.
수많은 신들의 도시로 알려져 있었고, 종교적 매춘도 일어나고 있던 곳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음란이 판치고 종교적인 제사로 연기와 냄새가 뒤덮은 그런 도시입니다.
과연 이 도시에 복음이 전파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19절입니다.
새번역성경에서는 19절 앞부분에 아무런 표현이 없지만 역개정에 보면 ‘그 때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앞의 사건과 오늘 말씀이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앞의 사건은 베드로가 로마 군사인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장면입니다.
유대인에게만 복음이 전해졌지만 고넬료를 시작으로 이제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과연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일은 어떤 파급효과가 일어날까요?
스데반 박해사건이 등장한 것은 사도행전 6장입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향한 유대인들의 심한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 살던 성도들은 여러 지방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페니키아, 키프로스, 안디옥으로 이동합니다.
아마도 자신들이 태어난 곳이라든지 친척이나 지인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좋은 소식인 복음을 전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박해를 피해 도망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입을 벌려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들의 처음 전도대상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베드로의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20절에 보시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이들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단지 키프로스 사람, 구레네 사람일 뿐입니다.
유명한 자들이 아니고 평범한 성도들인 것입니다.
무명의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전도에는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도할때 성령의 능력이 드러난 것입니다.
치유같은 기적일수도 있고, 마음을 감동시키는 말과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한 그들의 전도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그 결과 탄생한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사도행전에서 매우 중요한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이 1,2,3차 전도여행을 할때 항상 시작점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가 아니었다면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루살렘 교회는 박해를 받아 많은 성도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엊그제까지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던 형제, 자매들의 얼굴을 볼수 없게 되었으니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박해가 아니었다면 안디옥 교회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때론 살면서 우리에게도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어떤 일일지라도 그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면 그 어떤 일도 결국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순간으로 변할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믿음의 태도입니다.
또한 여기서 잊지 말아야할 것이 한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안디옥 교회의 탄생의 배경에는 무명의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름도 나오지 않는 평범한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방인에게도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자 안디옥 교회가 탄생할수 있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이처럼 이름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기도 하십니다.
그럼 이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성장했을까요?
22절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자 사람을 파송합니다.
그의 이름은 바나바 입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안디옥에 와서 교회를 보고 너무 은혜가 넘치자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잘 어울려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들의 제사가 넘쳐나는 악취나는 도시에서 그들의 신앙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났습니다.
바나바는 교회 성도들이 이런 종교적인 도시 속에서 산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압니다.
그래서 그들이 굳센 마음을 먹고 주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합니다.
박해와 유혹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굳게 붙잡으라고 격려합니다.
이런 바나바를 성경은’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주목할 부분은 ‘착한 사람’입니다.
‘성령과 믿음’은 스데반이나 일곱 집사들에게도 붙은 수식어 입니다.
그런데 바나바에게만 유일하게 ‘착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왜 일까요?
저는 바나바가 격려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는 남을 잘 세워주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이름의 의미 그대로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에 있을때의 일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왔는데 그가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에이, 바울이 우리를 잡아 죽이려고 얼마나 안달난 사람인데 그가 변했다구?’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바나바가 나타나 바울을 변호하며 그를 믿어주고 세워줍니다.
이로 인해 바울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받아들여 질수 있었습니다.
바나바같이 믿을만한 사람이 보증해주지 않았다면 바울은 스스로를 입증하는데 많은 애를 먹었을 것입니다.
여기 안디옥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성도들을 잘 격려하고 믿음으로 세워 나갑니다.
거대한 도시인 안디옥에서의 삶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바나바는 옆에서 성도들을 잘 격려합니다.
세워줍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옵니다.
또한 바나바는 자신이 이끌어가는 안디옥 교회에 동역자로서 바울을 불러 옵니다.
성도들을 혼자서 감당하기보다 함께 동역하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성경교사가 바울임을 알고 있기에 그를 불러온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자신의 고향 다소에 가 있었습니다.
안디옥에서 다소까지의 거리는 219킬로미터입니다.
갔다 돌아오는 길까지 따지면 왕복 약 440킬로미터입니다.
평지도 아니고 중간에 높은 산을 넘어가야 하는 고된 여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바나바는 바울을 데리러 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나바는 남을 세우기 위해 자신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탁월한 성경교사인 바울을 데려와 함께 성도들을 신앙으로 반듯이 세웁니다.
물론 이 계기를 통해 바울도 지도자로 세워질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그를 유독 ‘착한 사람’이라고 언급하게 된 이유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사람은 바로 이런 바나바같은 격려자입니다.
애써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 다른 형제,자매를 세워주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빌립보서 2장 3절이 말하는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남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주는 태도를 의미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치열하게 경쟁하고 끊임없이 서로를 비교하며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외로운 사람들도 많은 세상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를 많이 움츠려들게 하는 세상입니다.
기껏 격려라고 해봤자 카톡으로 응원 문자나 인스타그램에 좋아요 뿐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누군가를 격려하는 사람은 뻘밭의 진주처럼 빛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시대를 향한 교회의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는 격려자를 길러내서 세상에 파송해야 합니다.
물론 훌륭한 격려자가 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내 시간과 돈,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입니다.
이기적인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나를 죽이고 부인하는 과정이 수반되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귀하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죽어가는 세상에서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불어넣는 고귀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입니다.
이제 격려자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1년 동안 성도들을 열심히 가르칩니다.
그러자 성도들은 성경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며 잘 성장해 나갑니다.
안디옥이라는 신들의 도시 속에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을 산 것입니다.
악취나는 도시 속에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 도시에서 성도들에게 붙인 별명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별명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 말이 칭찬처럼 들리지만 그 당시에는 욕에 가깝습니다.
마치 ‘예수쟁이’라고 부르는 것 같이 부정적인 뉘앙스의 별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별명을 붙었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뭔가 특이한 사람들에게 별명을 붙이지 않습니까?
과연 무엇이 그들에게 별명을 붙일만큼 달랐던 것일까요?
분명 그들의 말과 행동, 삶의 태도가 달랐을 것입니다.
안디옥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살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달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많이 가지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베푸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남들보다 먼저 희생하고 섬길줄 아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욕과 다툼이 난무한 안디옥에서 그들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27절에 보시면 또다시 교회에 위기가 닥칩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 교회에 예언자 몇 사람이 방문합니다.
그들은 곧 온 세계에 기근이 들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실제로 큰 기근이 발생합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기근이 발생하면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집니다.
식료품 물가가 다 올라 사먹을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농사지어 자급자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기근은 정말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재앙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힘들어질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 도시이다보니 우상과 관련된 직업들이 많고 박해까지 받으니 좋은 직업을 얻기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근까지 생겼으니 말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마찬가지고, 안디옥 교회도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은 없는 형편에서도 더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위해 모금을 합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29절에서 제자들이 각각 자기 형편에 따라 몫을 정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성경에 보면 각각 있는 힘껏 풍성하게 보냈다고 말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안디옥에서 400킬로미터가 넘게 떨어져있는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자기들처럼 이방인 교회도 아니고 자신들을 부정하게 여기던 유대인들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위해 힘껏 모금운동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근은 예루살렘에만 일어난게 아닙니다.
안디옥에서도 일어나 모든 사람들이 힘든 상황인데도 더 힘든 교회를 돕기로 한 것입니다.
그럼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도움을 받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형제, 자매가 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실제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기들도 힘들텐데 우리를 도왔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제 안디옥 교회는 다른 교회를 세우는 교회로 성장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성장했다는 증거는 성도수가 불어난 것만 있는게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희생해서 남을 돕고 세우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도자 바나바도 훌륭한 격려자, 성도들도 훌륭한 격려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수 있을까요?
성경 지식이 많아지는 것?
전도하는 것?
예배와 기도, 묵상을 열심히 하는 것?
물론 그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증거는 삶의 변화에 있습니다.
얼마나 내 마음이 넓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좁디 좁은 이기적인 내 마음이 이제는 남을 돌아보고 품을줄 아는 넓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것을 희생하여 남을 세워줄줄 아는 격려자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으며 닮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얼마나 어울리는 말입니까?
[결론]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처음에 말씀드린 로제타 홀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로제타 홀이 결혼한 첫 해에 낳은 아들 셔우드 홀이 있습니다.
셔우드 홀의 아내는 메리언 홀입니다.
둘다 의사가 되어 한국에 와서 의료선교, 특히 결핵 퇴치에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크리스마스 씰을 만든 분들이 바로 이 분들입니다.
양화진에는 윌리엄홀, 로제타홀, 그의 딸, 그의 손자, 그리고 그의 아들과 며느리 6명이 묻혀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세계 선교를 감당한 안디옥 교회는 갑자기 뚝딱 세워진 게 아닙니다.
이름모를 성도들의 용감한 전도가 있었습니다.
격려자 바나바가 멀리 있던 바울을 모셔와 열심히 성도들을 가르치고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안디옥 교회가 이제는 첫번째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세워주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모든 이들의 헌신과 사랑이 안디옥 교회를 튼튼히 세우는 귀한 벽돌이 된 것입니다.
그럼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얼마나 내 것을 희생하며 남을 세워주는 격려자가 되어가고 있을까요?
우리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사탄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불신앙과 닫힌 마음 그리고 인색한 마음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이런 딱딱한 마음을 만지셔서 안디옥 교회처럼 세워주는 교회, 격려하는 교회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