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으로 교회를 세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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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제에 참여. — 친밀한 관계를 누리거나 그룹에 속하는 특권이나 활동에 참여하는 행위. 특히 혼인과 교회에서 사용. 관련 주제: 교우; 친목.

행 2:42 καὶ τῇ κοινωνίᾳ, τῇ κλάσει τοῦ ἄρτου

고전 10:16 εὐλογοῦμεν, οὐχὶ κοινωνία ἐστὶν

빌 1:5 ἐπὶ τῇ κοινωνίᾳ ὑμῶν εἰς τὸ εὐαγγέλιον

몬 6 ἡ κοινωνία τῆς πίστεώς σου

요일 1:3 ἵνα καὶ ὑμεῖς κοινωνίαν ἔχητε μεθʼ ἡμῶν·

2. 참여 — 특히 집단이나 제휴하는 가운데 어떤 것을 가지고, 주고, 받는 행위.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μετάλημψις, μετοχή, μέτοχος. 관련 주제: 친목.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누가는 사도행전 2장을 초기 신자들의 교회 생활을 묘사함으로 끝낸다. 사도행전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모습이 세 번에 걸쳐 묘사되어 있는데(참고. 2:42–47; 4:32–35; 5:12–16), 본문이 첫 번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놀랄 만한 신적인 공동체를 경험했다. 실로 그들의 모습은 놀랍고 역동적이다.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임함을 보여준다. 필시 이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신 결과이지, 사람이 인위적으로 노력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 교인들이 힘썼던 일(2:42)

초대교회 교인들의 삶은 “힘쓰니라”(프로스카르테레오, προσκαρτερέω)라는 단어에 집약되어 있다. 이 단어는 1:14에서 사도들과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기도에 힘쓴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10번 나오는데, 사도행전에 6번 나온다(예. 1:14; 2:42; 2:46; 6:4; 8:13; 10:7). 이 단어는 글자 그대로 ‘어떤 일에 계속해서 전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락에서 이 단어는 42절과 46절에 두 번 사용되어 초대교회가 힘을 많이 기울인 공동체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단어는 6:4에서 사도들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

누가는 초대교회에 대하여 묘사하기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라고 한다(42절). 한글성경 개역개정판에는 “힘쓰니라”가 문장의 제일 끝에 위치해 있고 그 앞에 기도가 언급되어 있어서, 언뜻 보면 마치 초대교회가 기도에만 힘쓴 것 같다(참고. 1:14). 그러나 헬라어 본문에는 이 단어가 문장 첫머리에 분사 형태로 있어서 대격으로 언급된 일들 모두에 연결된다. 즉 “힘쓰니라”(프로스카르테룬테스, προσκαρτεροῦντες)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 ‘서로 교제하는 것’, ‘떡을 떼는 것’, ‘기도하는 것’을 모두 지배한다. 그리고 이 일들에는 모두 관사가 붙어 있어서 특별함을 드러낸다.

첫째로,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데 힘썼다. 사도의 말씀은 초대교회 부흥의 가장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는데, 제자들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말씀을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듯이(참고. 1:3), 제자들 역시 교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쳤다. 사도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가장 정성을 기울였으며, 사람들은 말씀을 받는 데 가장 힘을 썼다. 이후 사도들의 교훈은 이방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었다(참고. 11:25–26; 18:11; 19:9–10; 20:7–12, 20–21, 28–32; 28:30–31).

둘째로,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교제하는 데 힘썼다. “교제”는 헬라어로 테 코이노니아(τῇ κοινωνία)라고 되어 있어서 관사(테, τῇ)를 포함한다. 이것은 초대교인들의 교제가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임이나 사교활동이 아니라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모임임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가 된 신성한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과 같이 서로를 사랑했다. 더욱이 그들의 교제에는 실천적인 행위가 수반되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사랑으로 교제했으며, 그러한 사랑에는 재산과 소유의 공유와 통용이라는 실제적인 행위가 있었다. 이렇게 사랑이 동반된 교제의 모습은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상세히 언급된다.

셋째로,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떡을 떼는 데 힘썼다. 그런데 헬라어 본문에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과 ‘교제’ 사이에는 접속사 카이(καί)가 있고, ‘떡을 떼는 것’과 ‘기도’ 사이에도 카이가 있지만, ‘교제’와 ‘떡을 떼는 것’ 사이에는 카이가 없다. 그래서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카이) 교제, 떡을 뗌과(카이) 기도에 힘썼다’가 된다. 그렇다면 교제와 떡을 떼는 것 사이에 카이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 둘이 하나의 범주에 속한다는 뜻이다. 즉 초대교회 교인들이 교제를 나누었는데, 떡을 떼면서 교제를 나누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초대 교회가 힘쓴 것은 네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곧 사도들의 가르침, 교제(떡을 떼면서 교제함), 기도가 된다. 떡을 떼는 것은 음식을 먹는 것을 나타내는 유대식 표현이다(참고. 27:35; 눅 9:16; 24:30, 35). 따라서 그들은 교제를 하면서 음식을 함께 먹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형성된 가족(식구)임을 확인했다.

여기서 떡을 떼는 것을 ‘애찬’(단순한 식사)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성찬’(성례)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이 문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적인 상황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처음에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애찬과 성찬이 함께 행해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의 규모가 커지고, 또한 애찬의 정신이 훼손되면서 애찬은 사라지고 성찬만 남게 되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참고할 때, 고린도 교회에서는 음식을 먹는 것과 성찬을 행하는 것이 처음에는 구분되어 있지 않다가 나중에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 역시 처음에는 음식을 먹는 것과 성찬을 행하는 것이 구분되지 않았다가, 나중에 교회의 예전이 발전하면서 음식을 먹는 것과 성찬을 행하는 것이 구분되었을 것이다.

넷째로(혹은 ‘셋째로’),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기도하기를 힘썼다. 그들은 다락방에서 성령의 강림을 위하여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는데(참고. 1:14), 이제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에도 기도하기를 힘쓴다. 사도행전에는 기도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참고. 1:14, 24; 4:24–31; 6:4, 6; 9:40; 10:2, 4, 9, 31; 11:5; 12:5; 13:3; 14:23; 16:25; 22:17; 28:8). 여기서 기도에 대하여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복수형인 프로슈카이스(προσευχαῖς)인 것은 그들이 구약적인(유대적인) 기도와 신약적인(기독교적인) 기도를 혼합하여 기도했음을 시사한다. 이는 그들이 오랫동안 유대의 관습에 젖어 있던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구약의 기도 관습이 신약의 복음과 모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전의 기도 시간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참고. 3:1; 22:17), 그들 나름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참고. 1:24; 4:24; 12:12 등).

2) 교회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2:43–47)

누가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고 말한다(43절a).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2:37에 묘사된 현상과 유사한데,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때 나타난다(참고. 눅 1:12, 65; 2:9; 5:26; 7:16; 8:37). ‘두려움’(포보스, φόβος)이라는 용어는 신약성경에 47번 나오는데, 누가-행전에 12번 나온다. 누가는 이어서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라고 말한다(43절b). “기사와 표적”(테라타 카이 세메이아, τέρατα καὶ σημεῖα, wonders and signs)은 사도행전에 대단히 빈번하게 나오는 용어이다(예. 4:16, 22, 30; 5:12; 6:8; 8:6, 13; 14:3; 15:12). 이 구절에서 “기사”와 “표적”의 의미를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이 단어들은 같은 뜻을 가진다. 기사와 표적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인정하신다는 수단, 즉 사도들의 권위와 자격을 증명하신다는 표식이 된다. “나타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에기네토(ἐγίνετο)는 미완료형(imperfect)인데, 이는 기사와 표적이 계속해서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특징은 물건을 통용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44–45절).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단어들의 시상이 미완료형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미완료형 시상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일이 단회적이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일어났음을 시사한다. 고대 문헌을 참고할 때 이러한 모습은 초대교회에 잠시 있다가 없어지지 않고 비교적 오래 지속하였다(참고. Didache 4.7–8; 바나바 서신 19.8). 더욱이 여기서 미완료 시상이 사용된 것은 자신의 재산을 파는 일이 강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것은 공동체에 어떤 필요가 있을 때마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내놓은 것을 암시한다. 즉 그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다. 따라서 초대교인들이 물건을 공유한 것은 근대 공산주의 체제에서 사람들이 강제로 재산을 공유한 것과 다르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날마다” 모였다. “날마다”(카뜨 헤메란, καθʼ ἡμέραν)라는 표현은 문장 전체에 영향을 미쳐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에게까지 연결된다. 그들에게는 두 종류의 모임이 있었다. 그것은 성전에서의 모임과 집에서의 모임이다(46절). 성전에서의 모임은 큰 모임으로 이방인의 뜰 동쪽 끝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서의 모임으로 보인다(참고. 3:11; 5:12). 그들은 성전에서 모여 말씀을 듣고 기도했을 것이다. 집에서의 모임은 작은 모임으로 ‘집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매 집마다’로 번역되는 카트 오이콘(κατʼ οἶκον)인 것을 볼 때 여러 집을 돌아가면서 모인 것으로 보인다(참고. 5:42; 10:24–48). 실로 초대교회 교인들은 성전과 집에서 모이기를 힘썼으며, 모일 때마다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한 가족인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들었다(47절a). 따라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모두 기쁘게 하였다. 여기서 “온 백성”(홀론 톤 라온, ὅλον τὸν λαόν)이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후에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었지만,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다. 초대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은 처음에 유대의 의식과 관습을 잘 지켰기 때문에 유대인 불신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칭송을 들었다. 그 결과로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47절b). 여기서 누가는 구원을 받는 사람이 더해진 것을 주님의 역사로 언급한다. 즉 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사람의 인위적인 노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훈과 적용

1. 우리는 이 단락에서 교회의 이상을 볼 수 있다. 교회가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 문제들의 상당수는 잘못된 교회관에서 비롯되었다. 교회가 바로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건강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배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는 사도의 가르침과 그들이 목회했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바른 교회관을 정립할 수 있다.

2. 초대교회는 세 가지(혹은 네 가지) 일에 힘썼다. 즉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일, 서로 교제하는 일(떡을 떼는 일), 기도하는 일에 힘썼다. 이 일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교회는 이 일에 힘써야 한다. 교회는 이 일을 하면서 혹은 이 일을 위해서 다른 일을 해야 한다. 특히 이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다. 말씀이 근본이며 우선이다. 말씀 위에 모든 것이 세워져야 한다.

3.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들었다. 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삶을 살았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대단히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삶으로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말로만 복음을 전할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불신자들에게 칭찬을 듣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ἀφελότης (aphelotēs), 명사. 단순, 소박. 명사 용법 1. 단순함† — 단순함이나 단일함을 특징으로 하는 상태(복합적이거나 복잡하거나 난해하지 않은 상태).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하나의 마음, 순전한 마음----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드리는 마음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는 하나의 마음으로 교제를 나누어요. 갈라진 마음이 아니예요. 나를 위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마음으로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셔요. 예수님의의 이름이이 높여지는는 하나의의 마음으로로 교회를를 세워요요. 순전한한 마음으로로 섞이지지 않는는 마음으로로, 섞이지지 않는는 오직직 예수의의 이름을을 높이는는 기쁨으로로 모이는거예요요.
헌담을을 위해해 모이지지 않아요요. 누구를를 낮추고고 내가가 높아지려고고 자리리 싸움을을 위해해 모이지지 않아요요.
내내 먹을을 것을을 더더 챙기려고고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바라지 않고 베풀고 나누어주고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된 우리를 보고 주님은 칭찬하셔요. 자비를 베풀어주는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칭찬해요. 교회된 우리를 보고 그들도 교회안으로 들어와요. 예수님을 믿고 배우고 따르려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되어요.
우리도 그런 교회된 자가 되라고 하셔요.
스피릿교회 생일을 맞이하였어요. 교회는 건물만이 아니예요. 교회건물안에 있는 사람을 말해요. 교회된 우리를 보고 선한 영향력이 뻗어가기를 소망해요.
우리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려고 모여들기를 소망해요. 우리끼리만 재미나게 놀고 싶은데요? 더 많이 모이면 섬기고 나누어주고 힘만 들잖아요?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의 마음으로 모인곳이예요. 하나의 마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마음에 나도 너도 기뻐하는거예요.
하나님의 마음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얼마나 사랑하냐면~~~~ 자기를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신 사랑이래요. 죽기까지 저 친구를 사랑하신데요. 죽기까지 교회주변을 맴도는 저 친구를 사랑하신데요. 주님의 마음을 모른척 할건가요? 나만 구원받고 나만 잘 먹고 나만 사랑받고 나만 기쁘면 다인가요?
우리 하나의 마음,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교회를 세워갑시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세워갑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어쨌든 사도 베드로의 말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싫어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주요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 모임의 주인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이 나라의 주인이시며, 땅의 모든 나라의 주인이 되십니다. 땅의 나라들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예수님이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악하게 보이고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이면에는 선하심이 있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생각하면 사람의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찌할까 하거늘”
그들은 주요 그리스도를 거부했다는 것이 마음에 찔렸습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주인이고자 한 것이 마음에 찔렸습니다.
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예수님이 주요 그리스도이심을 거부하고 내가 주인이 되고자 한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 아닌 다른 것을 주로 알았던 것이 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주요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면, 그 죄가 용서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각 사람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각 사람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셔서 살리고자 하시며 선을 이루고자 하시며 축복하고자 하십니다.
2:40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패역한 세대란 예수님이 주요 그리스도임을 부인하고 내가 나에게 주인이 되고자 하는 세대입니다. 이 세대에 속해 있으면 계속해서 내가 주인이고자 합니다. 내가 주인이면 모든 짐을 내가 져야 합니다. 모든 스트레스를 받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믿고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아 예수님이 주요 그리스도임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구원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나누어줍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빵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 모든 일은 그들이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믿은 데서 비롯했습니다.
[출처] 2023 사도행전 2 강(2장)|작성자 이바울
2023 사도행전 11
말씀/사도행전 11:19-30
요절/사도행전 11:21
안디옥 교회
11:19 “그때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이 말은 “유대인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 유대인 외에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도 헬라인을 만났을 것이요, 유대인 아닌 다른 종족 사람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다른 사람에게는 말씀(로고스)을 전하지 않고 유대인에게만 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대인 아닌 다른 사람은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안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유대인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씀이 너무 낯설 것으로 생각했습니까? 말씀에 대해서 아는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면, 말씀이 받아들여질 것으로 생각했습니까? 유대인에게 말씀을 전해야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유대인 아닌 사람에게 말씀을 전해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11:20 “그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박해로 흩어져서 안디옥까지 온 사람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구브로는 그리스(헬라)의 지배를 받았던 곳이어서, 헬라 문화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 구브로 사람이 헬라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주 예수의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구브로 사람에게 헬라인이 접촉하기에 쉬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헬라 말을 썼을 수 있습니다. 구브로 사람에게는 유대인보다 헬라인이 더 친근했을 수 있습니다.
구브로 사람은 헬라인에게 “주” 예수를 좋은 소식으로 전했습니다. 예수님만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주”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헬라인에게 “주”라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요? 구브로 사람은 헬라인에게 예수님이 말하는 사람 자신의 주요, 듣는 헬라 사람의 “주”라고 말했습니다.
헬라인이 자기에게 “주” 곧 주인이 있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헬라인은 사람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아닙니까? 헬라인은 여러 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 신을 믿기 때문에 신을 “주”라고 생각할 것 같지만, 여러 신을 믿는 사람은 실은 자기가 주인입니다. 믿는 그 사람이 주인이요, 여러 신들은 그 사람을 돕는 신들입니다.
요즘의 각 사람은 누가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주”라고 말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헬라인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브로 사람은 헬라인의 반응은 별로 개의치 않고 “주” 예수가 좋은 소식이라고 전했습니다. 구브로 그 사람은 그 말을 듣는 헬라인이 화를 내며 반발할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앞에서 흩어진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전했을 때는 주의 손이 함께 하지 않은 것입니까? 왜 구브로 사람이 헬라인들에게 전했을 때, 주의 손이 함께 했을까요? 안디옥에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 신자를 중심으로 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주”의 뜻, 주의 계획이었습니까? 유대인 신자가 아닌 이방인 신자가 주축이 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이방인 선교의 거점 교회로 삼고자 하는 것이 주의 뜻, 주의 계획이었습니까?
구브로 그 사람들은 이런 주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할 수 있으니까 아는 헬라인들에게 주 예수의 좋은 소식을 전했을 뿐인데, 주의 손이 함께 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까?
우리 모임도, 한국 캠퍼스 선교, 나아가 세계 캠퍼스 선교를 하는 것이 주의 뜻, 주의 계획이었습니까? 이 사무엘 선교사님, 배사라 선교사님이 당시 대학생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으로 성경을 가르친 그 일이 이런 주의 계획에 맞은 것입니까? 그래서 많은 학생이 주께로 돌아온 것입니까?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는 그 일, 곧 영적 부흥은 사람이 바란다고 해서 되는 일입니까? 지금 우리는 예전과 같은 그런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바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예전과 같은 그런 부흥이 일어날까요?
본문에서 근거해서 본다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일이 주의 뜻, 주의 계획과 맞으면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뜻, 주의 계획이 우리가 바라는 것과 다른 것이라면, 그 다른 것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일방적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을 기도하기보다는 먼저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도행전 본문은 예수님을 “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란 무슨 뜻입니까? 주인, 주도자, 일을 먼저 계획하는 분, 먼저 계획하고 그에 필요한 사람, 재료를 고르고 선택하는 분, 하고자 하는 일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분입니다.
안디옥 교회를 예로 들면, 안디옥 교회를 세우고자 처음 생각하신 분, 그 안디옥 교회에 무슨 일을 맡길 것인지 정하시는 분,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필요한지 아시는 분, 그리고 필요한 사람을 고르고 선택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구브로 몇 사람이 안디옥에 교회를 세울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구브로 몇 사람이 안디옥에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통해서 무슨 일을 할지 생각하고 정하지 않았습니다. 구브로 몇 사람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 아는 헬라인에게 주 예수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그 일만 했을 뿐입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본문은 수많은 사람이 믿은 것만 말하지 않고 주께 돌아온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것과 주께 돌아오는 것은 다른 것입니까? 믿는 것은 무엇이며, 주께 돌아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예수님을 통한 죄 사함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새로워진다는 것을 믿는 것 등입니다.
주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 곧 주인으로 여긴다는 것, 자신은 예수님의 종이라는 것, 이를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이 내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 나는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여기지 않고, 내가 여전히 주인일 수 있습니다. 내 뜻, 내 계획이 있고, 예수님은 내 뜻을 이루어주시는 분, 내 계획을 도와주는 분으로 여긴다면, 내가 주인이요, 예수님은 주인을 돕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내가 주인일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인인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주인으로 여길 수 있습니까?
“주의 손이 함께 하시니 수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오더라.”
여기서 수많은 사람은 분명 헬라인일 것입니다. 헬라인은 자기를 주인으로 여기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여전히 자기를 주인으로 여기고, 자기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자기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손이 그들의 방향을 바꾸어주셨습니다. 주의 손이 자기 길을 가는 그들을 붙잡아 주를 향하도록 방향을 되돌려 주셨습니다. 어쩌면 그들 스스로 방향을 돌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길을 가던 사람이 스스로 방향을 틀어 주께로 향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뜻을 내려놓고 오직 주의 뜻을 따르는 그 일을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길을 가는 사람에게 돌이켜 “주”께로 가라고 말하면, 그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주께로 돌이킨다는 것은 이제 자기 뜻, 자기 생각대로 하지 않고 오직 주의 뜻, 주의 생각대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주의 뜻. 주의 생각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뜻, 자기 생각대로 하기보다는 먼저 주의 뜻, 주의 생각을 알고자 해야 합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한 안디옥 교회는 그런 교회, 곧 주의 뜻, 주의 계획을 실행하는 그런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은 주의 뜻을 알고자 금식하며 기도했으며, 사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는 주의 말씀을 받았을 때, 그대로 했습니다.
그런 안디옥 교회는 사람이 많아져도 사람이 많은 것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내에 재정 문제, 권위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교회 재정을 어려운 교회 돕는 데 썼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또한 이방인 선교의 거점 교회가 되었고, 여러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지원하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헬라인이 주축이었기 때문에, 헬라인 교회를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교회를 잘 도울 수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또 사람의 능력과 권세, 사람의 이름이 드러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11:22,23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어라 권하니.”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많은 헬라인이 주께로 돌아온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안디옥 교회 신자들도 그 점을 알고 있었습니까?
그래서 안디옥 교회에서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 사람의 열심보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났습니다. 안디옥 교회 신자들은 마음과 몸이 평안하고 기쁨에 찼으며, 사람들이 부담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풍성해 보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23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어라 권하니.”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어라.”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마음의 목적, 의도에서 “주”에게 굳게 머물러 있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각자 자기 목적, 자기 의도를 주장하지 말고, 주의 목적, 주의 의도를 알고자 해라. 주께 굳게 붙어 있으면서 주의 뜻, 주의 계획을 알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잘 알았습니까? 주의 손이 함께 하심으로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까? 그래서 말한 것입니까? “마음의 목적, 의도에서 주께 굳게 속해 있어라.”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바나바 자신이 예수님을 자기의 주로 인정하고, 바나바 마음의 계획과 의도는 항상 주의 뜻을 따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자기 이익,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나바의 말과 행동의 동기는 언제나 순수했습니다. 마음과 얼굴이 언제나 평안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바나바에게서 주가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그런 그를 보고 많은 사람이 주께 더해졌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주로 인정했으며, 자신을 주께 맡겼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사람이 많아졌는데도 여전히 예수님이 주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시며, 모든 일의 주관자이심이 드러났습니다.
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서 일 년 간 모여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바나바는 사울을 생각해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사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나바는 왜 자기 혼자서 안디옥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요, 바나바 덕분에 교회가 더 커졌습니다. 그러면 자기 힘으로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가 사울이 안디옥 교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사울의 어떤 점을 생각했을까요?
바나바는 예수님이 각 사람의 주요, 교회의 주이심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바나바 생각에 교회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은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까? 주인을 잘 알고 주인의 생각을 잘 알아야 교회가 할 일을 제대로 알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생각을 잘 알아야 주인의 생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해낼 수 있습니다.
바나바 생각에 사울은 예수님의 그릇으로서 주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 주 예수님의 생각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까? 또한 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 사울이었습니까? 또한 바나바가 볼 때 사울은 성경을 잘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습니까? 그래서 바나바는 다소로 가서 사울을 찾아 데리고 안디옥으로 온 것입니까?
둘이 모여 일 년 간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했는데, 그런 것을 가르쳤다고 할 수 있습니까? 주 예수를 가르쳤습니까? 주 예수님의 하신 일, 가르치신 말씀, 그리고 예수님의 생각을 가르쳤습니까? 그랬을 때 교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1:26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유대인, 헬라인, 로마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인종이 태어난 것입니까?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다는 것은 제자들의 삶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 모습, 말씀이 드러났다는 말일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인의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의 모습, 사람의 욕심, 감정 등이 나타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특성이 나타났다는 것인데, 그만큼 제자들이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고, 주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이 실제로 나타난 일이 있습니다.
11: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안디옥 교회 제자들은 주의 이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출처] 2023 사도행전 11 강(11:19-30) 안디옥 교회|작성자 이바울
주께로 돌아오는 교회,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주되시는 예수님을 아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예수님을 가르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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