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장 7-12절 “친밀함으로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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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제기
1. 배우자와 가장 친밀했던 때는 언제였나요? 지금과 그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만약 지금이 가장 친밀하다면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3. 친밀함은 서로에 대한 관심과 표현으로 깊어집니다.
배우자가 좋아하는 음식,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지 기록하고 한 주 동안 한 가지 이상 실천해 봅시다.
관계의 핵심은 친밀함
피곤한 인생길입니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피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식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 어떻게 쉴까, 어디서 쉴까? 라는 것이 관심사입니다. 따라서 힘들어도 안식할 곳이 있다면 다시 시작할 힘을 얻습니다.
참된 안식은 천국에 들어가야 주어지지만, 지상의 삶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안식처는 가정과 교회입니다.
“인생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됩니다. 광명교회가 바로 그 교회입니다”
영혼이 방황할 때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회복합니다. 세상에서 지쳤어도 가정으로 돌아가면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은 과연 안식처입니까? 가정에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갈 곳 없는 인생입니다.
오늘날 가정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에덴동산을 만납니다.
에덴동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창세기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본문에서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7절)라고 말씀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순간 선악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서로의 관계가 불편해졌다는 것 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디 그들은 벌거벗었으 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창 2:25).
창세기 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부부의 관계는 참으로 묘합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관계의 핵심은 친밀함입니다. 친밀함이 빠지면 그 관계는 의미가 없습니다.
같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마음을 같이 나누어 감정의 교류가 긴밀해야 합니다.
부부 사이의 건강한 관계는 친밀함에 달렸습니다.
친밀함이 깨어지면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사랑의 다른 이름이 친밀함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친밀함이 없는 관계는 종교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형식적인 제사를 거부하셨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외적인 제사 의식을 반가워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무엘상 15:22b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년, 20년, 30년을 살아오면 그만큼 친밀함이 더 깊어져야 하는데 거리가 규격화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다가 오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의례적 관계입니다.
신앙이 수동적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아도 정작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친밀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예배가 참 중요합니다.
예배란 하나님과 친밀함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감정을 나누고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 영성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있습니다. 그의 고백은 언제나 일인칭이었습니다.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목자’가 아닙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추상적인 신이 아니고 매일 경험하는 일상의 ‘나의 목자’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야기고 하나님의 이야기가 다윗의 이야기가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친밀한 임재 속에 살았습니다.
“나의 목자, 나의 하나님”이십시다.
이처럼 하나님과 친밀함을 유지해야 하지만…
문제는 죄가 그 친밀함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종교적인 열심으로 하나님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도리어 더 멀어졌습니다.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의식적으로 낯을 피해 친밀함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친밀함이 사라지면 재미가 없습니다. 흥미롭지도 않고 자발적이지도 않습니다. 내 안에 어떤 감흥도 없습니다.
친밀도가 높은 가정은 서로의 존재 자체가 편안하고 자연스럽습니 다. 강요나 억압이 없습니다.
자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와의 친밀함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해주어도 친밀감이 없다면 아이는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요즘은 안 그런 것 같지만, 예전에는 부모와 자식 간 스킨십이 많지 않았습니다. 애기 티를 벗으면 부모와의 접촉이 자연스럽게 멀어졌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서로 낯간지럽다며 안 했습니다.
결국 자녀가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고 애정결핍에 시달렸습니다.
가정에서 채워야 할 사랑을 채우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사고가 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채우지 못하여 결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관계 안에서 참된 친밀감을 누리게 디자인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그 순간부터 서로의 관계 안에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창세기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두려움이 친밀함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부부 사이에 다른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이 가까움을 느껴야 진짜입니다.
친밀함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니다.
세월을 두고 조금씩 쌓아 가야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경험을 나눕니다.
함께 바라보고 생각하고, 슬픔과 기쁨의 순간을 경험하고 공유하면서 친밀함이 깊어져 갑니다.
특별히 어려운 시간을 함께할 때 하나가 됩니다.
어머니의 산고의 고통이 자녀와 함께 합니다.
창세기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그리스도의 속량이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합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왜 우리가 주님에게서 친밀함을 느낍니까? 우리를 위해 직접 고난을 겪으시 고 우리가 고난 속에 있을 때 가까이 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무정한 신, 감정 없는 신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고난을 공유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마음이 열립니다.
현대인들은 친밀함을 나누는 대상이 없습니다. 모두가 외로움에 떨고 있습니다.
유능한데 외롭고, 높은 자리에 앉았는데 외롭습니다. 돈은 많은데 외롭고,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데도 외롭습니다. 문제는 결혼해도 외로운 것입니다.
친밀함은 쌍방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친밀해지려면 에너지가 많이 듭니다.
서로에게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배우자의 생일 등 기념일을 기억해 주어야 합니다.
남자들은 아내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때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힘들지만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배우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왜 힘들어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 흐르는 기류를 읽어 내야 합니다. 자칫하면 친밀함이 얼마든지 깨어질 수 있기 때문입 니다.
친밀함이 깨어지면 긴장도가 높아집니다. 심해지면 정서적 죽음이 일어납니다.
한 공간에 같이 있고 법적으로 부부일 뿐이지 정서적으로는 완전히 분리되어 버립니다.
친밀함이 사라진 가정은 불행합니다. 사랑을 회복한다는 것은 친밀함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 주신 모범은 친밀함입니다. 둘로 갈라진 관계를 십자가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관계 맺기의 대가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친밀함을 나누셨습니다.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셨습니다.
강의실에서 제자도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먹고 마시며 삶의 일상을 함께하셨습니다.
특별히 식탁 코이노니아를 매우 즐기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삶을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요한복음 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사실 유대인 남자와 사마리아 여자의 만남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여인은 처음 만난 예수님에게서 친밀함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깊고 아픈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어 놓을 정도로 무장해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탁월한 친밀함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디베랴 바닷가에서 실패한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조반을 먹이시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21: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면하시어 친밀함을 나누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제자들을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불러 주십셨습다.
요한복음 15:14 “너희는…나의 친구라”
주님은 친밀한 관계를 원하셨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친밀함이 무엇인지를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정에서 그 친밀함이 가장 꽃피우길 원하십니다.
남 탓하기 바쁜 아담의 후예들
친밀함이 깨어졌을 때의 증상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이 찾으시자
창세기 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2절)라고 말합니다
.하와 탓도 모자라 하나님 탓까지 합니다. 이것은 친밀함을 깨는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가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아담이었습니다. 하와 역시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로 책임을 넘겨 버립니다.
불행한 가정은 문제가 터질 때마다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불행한 교회는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립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면 답이 없습니다. 이런 태도는 아담의 후예임을 입증하는 것이지요.
부부싸움을 보면 책임 공방이 가장 흔합니다.
“너 때문이야”라면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상대에게 돌리거나 자기합리화합니다. 실수를 인정하면 되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죄를 축소하거나 다른 사람을 정죄해서 자기면피를 하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자기 죄를 은폐하여 도리어 큰소리 칩니다. 자기 의나 노력을 주장하는 꼴이지요.
그러나 건강한 가정은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서로 책임을 지려 합니다.
“내가 부족해서 그랬어” “내가 좀 더 신경 씨야 했는데” “내가 더 기도를 많이 하지 못했어”라며 서로 책임을 지고자 해야 건강한 가정입니다.
책임을 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이 져야 할 책임이 있고 아내가 져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는 에베소서 말씀은 책임의 원리를 말씀하는 것이지 높고 낮음의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힘들다고 자녀를 부양하지 않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립니다. 가족들을 방치합니다. 아내도 남편의 돕는 배필로서 책임이 있습니다.
각자에게 지워진 책임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서로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보다 우선적인 것이 없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오리발의 원조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예들은 남 탓 하는 일에 전문가입니다.
어디든지 가 보십시오. 힘들어지면 내 탓이라 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서로끝없이 손가락질합니다. 그렇게 인간관계가 꼬이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의 책임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숙의 특징은 책임을 지는 태도입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때로는 그 대가가 혹독할수 있습니다.
누군가 결혼적령기가 언제인지 물어본다면 저는 ‘서로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고 하는 태도를 가질 때’라고 말합니다.
문제 해결을 남에게 떠넘기고 어려움이 오면 피해 버리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결혼하면 위험합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주신 책임이 큽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하나님은 하와를 이야기하지 않고 아담의 죄로 따져 책임을 물으십니다. 남편의 역할을 해낸다는 것은 거의 순교적 삶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선포되는 ‘서약’이 핵심입니다. 서약을 잘 들어야 하는데 결혼식의 흥분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남편으로써, 아내로써 그 책임을 다하겠습니까?” “예”라고 답했을 거에요.
책임 질 무언가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책임이 빠진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왜 배우자의 음행이 문제가 됩니까? 한 사람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서로의 성장을 위해 도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학교에서 성숙이라는 과목을 향해 서로 도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모든 사람의 죄를 자신에게로 전가 시키셨습니다.
골로새서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인간의 죄를 당신이 대신 뒤집어쓰셨습니다. 마치 모든 것이 당신 탓인 것 처럼 여기셨습니다.
생명의 역사가 여기에서 일어납니다. 모두 누군가에게 손가락질할 때 주님은 당신 자신에게로 손가락을 가리키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 마지막에 나타난 무지개의 형상이 놀랍습니다. (이미지)
활이 휘어진 방향을 보면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의 화살을 하나님 당신을 향해 겨누고 있습니다. 누구를 탓하기보다 당신이 대신하여 죽으시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가정이 살려면 배우자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고 해야 합니다.
교회가 살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연약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서로 내 탓이라고 하는 공동체는 다시 살아납니다. 반드시 살아납니다. 가정이 살아납니다. 교회가 살아납니다.
힘들 때 일수록 서로 더 많은 책임을 지려 한다면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수 있습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죄를 전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자신에게 전가하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강조)
주님은 우리를 사랑한 다고 말씀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시기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증명 해 보이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가정이 아닌,
상대의 탓으로 끌어 내리는 교회가 아닌,
죽기까지 나를 살리신 그 사랑의 열매가 여러분 가정 가운데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그 사랑으로 힘들 때일수록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서로 세워가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가정을 말하다_ 이규현_ 챕터6과 “탓을 멈추고 친밀함을 회복하십시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