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26 주일오후예배: 고린도전서 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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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8:1-13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시며 이곳에 지금 임재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번 시간에 이어 벌써 한 달이 지나 이렇게 저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부족하지만 이 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살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서론 - 1. 인권과 권리를 중요시하는 현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인 우리에게 개인의 인권과 권리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권리는 굉장히 익숙한 것이며 당연히 보장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개인의 선택과 존중보다는 어떤 한 단체나 공동체의 결정이 중요하였고, 그 안에 속한 한 개인의 생각이나 의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한 개인의 권리는 존중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것이 점차 문제의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현대인 2024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각 개인이 억압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되었고, 마땅히 보장받아야 하는 부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좋은 영향을 끼친 것도 있지만, 한 개인의 권리를 굉장히 중요시하다보니 독단적이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게도 되는 이기주의의 행태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보통 어른 분들이 엠지, 또는 엠제트 세대를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실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2. 그리고 현대와 아주 비슷한 고린도교회의 상황(문화적 상황과 이에 따른 문제)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교회도 이와 비슷한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아니,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각기 개인들이 가지고 있던 권한과 권리, 그리고 자유로 인해 교회 안에 있는 성도가 실족하게 되었고, 그 문제는 단순히 성도가 상처를 받았다는 정도를 넘어서 그 성도가 믿음을 잃고 멸망의 길로 갈 수 있는 정도로 아주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 문제는 바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지방은 상업적으로 아주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지금의 터키가 있는 소아시아와 그리스가 있는 발칸반도, 그리고 이탈리아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왕래가 많았고, 이를 통해 상업이 매우 극도로 발전되어 고린도는 매우 부유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또한 고린도는 로마 정부로부터 굉장한 특혜를 받는 곳이었기 때문에 로마 정부에 충성하는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이곳 주민들은 이 고린도에게 막대한 부를 가질 수 있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자신들이 신을 예배하고 섬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신을 잘 섬기고 예배하기에 고린도가 부유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고린도에는 많은 신전들이 있었고, 이 신들에게 바친 제물들을 함께 나눠먹으며 축제를 벌이는 것이 고린도의 문화였습니다. 이러한 고린도라는 지역적 특성은 당연히 고린도교회에도 영향을 미쳤고, 오늘 본문에서는 특히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지금부터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3가지를 통해 살펴볼텐데요. 첫번째로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바울, 두 번째로는 그 권리를 형제를 위해 포기할 것을 말하는 바울,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는 우리가 어떻게 그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지를 “자유, 포기,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1
첫째로,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자유 또는 권리가 있음을 바울도 인정했다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라며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한 설명을 시작합니다. 이 말에서 특징적인 것은 “지식”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고린도교회 안에서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어떤 “지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은 4-6절을 통해서 살펴봤을 때 우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이며 오직 우리가 믿는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된 신이시라는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다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지식”, 헬라어로는 “그노시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고린도교회 안에 팽배했고, 이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곧 힘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린도는 지금의 그리스에 있는 도시이며, 그리스, 특히 그리스 안에 있는 아테네는 철학으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그리하여 무엇인가를 아는 “지식”이 굉장히 중요했고, 이러한 가치가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고, 이러한 바탕 속에서 우리가 오직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는 “지식”만 가지고 있다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주장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만연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이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고린도 도시 안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가하여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과 함께 제물을 먹었을 겁니다. 이것은 마치 완전히 동일시 할 순 없겠지만, 유교 문화가 있는 우리나라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 조상에게 절하진 않더라도 그 조상에게 바친 제사 음식은 기독교인이 함께 먹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중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자들을 향해 바울은 어떻게 이야기할가요? 바울은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바로 바울은 이들의 주장이나 생각 자체는 틀리지 않고, 맞는 것임을 인정합니다. 바울도 우상은 실존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 한 분 밖에 없기에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자유와 권리가 있음을 바울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바울이 5절에서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라고 말하고 6절에서는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과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라고 말하는 부분인데요. 바울이 마치 기독교의 하나님 외에 “신”과 “주”가 있음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그리스-로마 신화에는 제우스와 헤라, 포세이돈과 아테나 등 다양한 신들이 등장하며 그리스의 도시인 고린도에도 당연히 이 신들을 믿는 다신교의 지방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마치 이 신들이 실제로 존재함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신들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7절을 통해 살펴보겠지만,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믿는다는 측면과 기독교로 개종한지 얼마 안된 신자들은 이전에 자기가 믿던 종교의 힘을 알고 있으니 신이 “존재한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문학적 방법으로 바울은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이와 대조적으로 6절에서 “한 하나님, 한 주가 계신다.”라고 말함으로 기독교의 하나님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튼지 간에 바울도 고린도교회 안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을 1절에서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라고 말하는 것처럼 인정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1절 하반절부터 2절까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며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라며 문제를 제기하는데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인정하는데, 왜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면서 지식보다는 사랑을 말하며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들을 통해 실족하게 된 형제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론 2
다음으로 두 번째는 바울은 “지식”이 있는 자들이 형제를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것을 명령한다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그노시스, 즉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이 문제 없음을 인정하지만, 이들의 문제는 이들을 통해 실족하게 된 형제들이 교회 내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마 고린도교회 내에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들을 향해 “너희가 이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이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마치 자신이 더 우위에 있는 신자처럼 여긴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들을 향해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라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덕을 세우지 못하고 교만하게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이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바울의 관심사는 이 지식을 공유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이 지식이 공유되지 못한 자들을 사랑하지 못한 고린도 성도들의 실패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2절에서 참된 ‘그노시스’, 즉 참된 ‘지식’은 많은 정보를 축적하거나 누군가의 신학을 교정하는 것에 있지 않고, 모두를 향한 사랑으로 서로를 안아주고 감싸주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3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참된 지식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알려진”, 즉 “인정받은” 사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참된 지식은 사랑과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 장이라고 불리는 13장에서도 바울은 아무리 뛰어난 은사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쓸모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어떠한 성경 지식이나 신학을 배울 때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과 어떤 통찰이 생긴 것에 대한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는 위험 요소는 이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깔보거나 낮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지점은 보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지나친 사랑을 강조하는 진보 신학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들은 보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를 향해 “시대착오적인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며 우리를 깔보거나 옛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며 해묵은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이라고 여깁니다. 심하게는 우리를 경멸하기도 합니다. 바로 어떠한 지식을 가지게 될 때 인간은 남을 위해 그 지식을 쓰지 않고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 사용하는 자기중심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지적하는 고린도교회 내의 이러한 문제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바울은 “그것은 참된 지식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참된 지식은 어떠한 앎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그 앎이 항상 형제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이것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7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을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지식이 있는 자들로 인해 고린도 교회 내에서 이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실족하게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기독교를 믿기 이전에 “신”과 “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주관적으로 경험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지금은 과거에 자신들이 믿은 산이 존재하지 않고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존재하신다고 알고 있더라도, 이전에 그 신과 자신이 연합한 그 경험이 여전히 그들 안에 어느정도 내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머리로는 이 우상들이 가짜 신이며 실체가 없다고는 알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지나온 삶의 방식이 여전히 그들을 얽매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지식이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이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동시에 이방신과 교제해도 되나?”라며 우상숭배를 해도 되는 것으로 여기게 된 겁니다. 그래서 바울도 10절에서 이러한 현상의 결과로 “지식 있는 너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라며 여기서는 단순히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된다고 표현하였지만, 믿음이 약한 자가 다시 우상숭배로 돌아갈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리하여 11절에서 “그러면 너의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라며 우상숭배로 인해 그 믿음이 연약한 자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을 엄중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단순히 먹어도 된다 안된다는 이분법적인 논리가 아닙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우상의 제물을 먹음으로써 일어나는 하나님을 향한 형제의 믿음이 사라지게 될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제기하는 오늘 본문의 문제점입니다. 단순히 먹어라 먹지 말아라 라고만 말한다면 정말 쉽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보다 더 고차원적으로 먹어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심각한 문제인데, 바울은 더 나아가서 형제를 실족하게 함으로 12절에서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믿음이 연약한 자들도 11절 끝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속 사역을 통해 얻으신 소중한 형제인데, 우상의 제물을 먹고 우상숭배를 하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너무나도 심각한 범죄임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소위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 8-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바울은 8절에서 음식을 먹고 안 먹고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며 권리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9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자유로 인해 믿음이 약한 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말합니다. 아마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자신들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을 겁니다. 그들에게 지식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오용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권리를 통해 형제를 실족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결국 먹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를 향해 먹으면 된다는 주장과 먹으면 안된다는 주장이 있으니 이 중에서 너희가 선택하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형제와 그리스도를 연결시킴으로 이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이며 진리의 문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도 이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느냐?”라고 하지 않으시고,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 여기심으로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이 고린도교회와의 논쟁이며 그들을 향한 바울의 강력한 호소이지 분위기 좋은 상태에서 하는 친근하게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식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문제가 안다는 차원의 지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임을 아주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도 어떻게 합니까? 바울도 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끝절인 13절에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라고 말합니다. 바로 형제를 잃지 않고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심지어 자신은 사도임에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 뒷부분인 9장에서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의 권리가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9장 12절과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복음을 통해 형제를 얻기 위해 자신의 사도적 권리를 쓰지 않을 것이 선언합니다. 사도인 바울 자신이 먼저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원칙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이루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내 형제가 실족하지 않게 만들기 위한 사랑에 의해 제한시키는 자유입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내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말처럼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바울이 인정했듯이 이것은 적법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0장 23-24절에서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바로 남의 유익을 구하는 성도가 될 것을 권면합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우리에게는 이것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내 것을 결코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죄된 본성이 있습니다. 말씀을 시작할 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자신의 권리를 보장하려고 하는 현대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권리를 주장함으로 형제를 실족하게 만들더라도 우리는 모른채 하거나 실족한 형제가 아직 믿음이 부족하다면서 형제의 능력을 탓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 형제를 보고 “너도 그렇게 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포기하면 포기했지, 절대로 내 것을 내어주거나 포기하려고 들지 않는 본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교회처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서 명령하는 바울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명령을 결코 지킬 수 없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는 지킬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으나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게 만들고 형제를 위해 권리를 포기할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옵니다.
본론 3
마지막 세 번째로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우리는 나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6절에서 지식있는 그리스도인의 주장이 맞음을 말하였습니다. 바로 우리가 믿고 예배하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첫째로는 지식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적용되는 것은 이들뿐만 아니라 믿음이 약한 나머지 형제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6절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지 그 근간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시면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바울은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다는 것에 대조적으로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와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말합니다.” 바로 우리가 믿는 분이 누구이신지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이며 그분은 한 하나님, 한 주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마치 두 존재의 신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듯이 보이지만, 바울은 “하나”라는 문구를 통해 유일신이지만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위격으로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 삼위일체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진 않지만 이렇게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만물이 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세상에 있는 만물의 원천이자 창조주시라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다고 함께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만물의 시작이자 목적이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6절을 통해 고린도교회에서 지식있는 자들이 믿음이 약한 형제를 사랑하면서 그들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써 은연 중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처음 시작할 때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까? 1장 2절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라고 말하면서 고린도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말하였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이렇게 되었고, 오늘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이 된 존재가 바로 고린도교회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바탕으로 “고린도교회 내의 지식있는 자들아.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너희가 한 하나님, 한 주님이신 분을 위해 있으며 그분에게 속하게 되었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가 가진 권리로 인해 형제를 실족하게 만들지 말고 형제를 위하여 너의 권리를 포기하라”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권리를 포기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유일하신 참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하면서 고린도교회가 가질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바로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통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신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오전예배 때마다 살펴보고 있는 빌립보서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2:5-8 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으로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며 권리가 있으신 분이시지만, 그것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심으로 자기를 낮추셔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의 길, 오늘 본문에 따르면 우리가 멸망의 길로 가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성께께서도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신의 하나뿐인 아드님을 보호하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어둠의 권세에 내어주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심으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고 권리를 포기하셨기 때문에 바울 자신도 어떻게 합니까? 아까 언급한 고린도전서 9:1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로 자신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움에도 스스로 자신을 낮춰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뒤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되어 형제를 섬기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줄 아는 자유를 실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을 위해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이것을 읽고 듣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잡으러 온 자들에게 베드로가 칼로 귀를 베자 주님께서는 그를 향해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속 사역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셨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신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고 그 그리스도께서 나만이 아니라 동일하게 구속하신 나의 형제가 실족하지 않기 위해 나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나의 권리를 형제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 예배드리고 있는 옆에 있는 형제들과 나의 사이에는 지금도 살아계시며 이 자리에 함께하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셨고, 포기하신 그 권리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이 이 편지를 쓴 당시, 그리고 먼 옛날 이야기에만 있던 분이 아니라 지금도 이 자리에 현존해 계신 분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나의 권리를 주장하며, 이 권리를 사용함으로 형제를 실족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범죄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범죄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식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는 옆에 있는 형제보다 더 나은 것을 가질 때가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은 오늘 본문의 지식있는 성도들처럼 교리나 신학적 지식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럴 때 신앙 생활을 한지 얼마 안되었거나 믿음이 약한 형제의 모습을 보고 말을 들으며 우월감이 들거나 그 형제를 낮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에게 자유가 있는 문제 예를 들면 술이나 제사 음식과 같은 것에 우리에게 자유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 마음껏 해야지”라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만일 그것이 형제로 하여금 실족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그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울과 같이 나의 권리를 포기해아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한 명령이며 그리스도 자신이 먼저 보여주신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가능합니다. 나와 나의 형제를 이어주는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이 자리에 현존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며, 그 형제를 위하여 나의 권리를 포기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으로서 권리를 포기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나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새순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 교회를 향하여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기도하시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형제를 위해 나의 권리, 나의 자유를 포기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먼저 그리스도께 실천하셨습니다. 이 시간 같이 기도합시다.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도 형제 자매가 실족하지 않기 위해 나의 권리, 나의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나의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참된 자유를 누림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되는 자가 되게 고달라고 기도합시다. 이 시간 이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시고, 이 그리스도를 통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심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형제를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이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 주변에 있는 형제를 위해 나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저희를 사랑하시는지 깨닫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번 한 주도 형제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 한 주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