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1-11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0 viewsNotes
Transcript
지극히 순전한 믿음
지극히 순전한 믿음
오늘부터 시작되는 12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마지막 1주일을 조명합니다. 1절을 시작하며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는 베다니 즉 나사로를 살리신 곳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예루살렘과는 꽤 가까운 거리이고 9절에 유대인의 큰 무리도 예수께서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찾아올 만 한 거리인 것이죠. 그리고 이곳에서 2절에 ‘예수를 위하여 잔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12장의 이야기는 11장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과 이를 위해 준비한 잔치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나사로에 대한 누이들의 감사의 잔치가 표면상 드러난 이야기라면 예수의 죽음은 보이지 않는 면이지만 그 어느때보다 가까이 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삶과 죽음 그리고 생명에 대한 잔치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벌어진 고통은 예수 없음에 대한 제자들의 현실도 보이는 것입니다.
잔치의 극적인 반전은 마리아의 행동에서 나타납니다. 3절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렇게 쏟은 향유 냄새는 집에 가득 퍼지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냥 읽겠지만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예외가 있다면 어린 아이가 하는 행동과 것입니다. 이렇게 당시에 식사 도중 몰래 왔든 알아차리게 왔든 여성이 가장 높은 손님 그것도 남성에게 다가오는 것부터 불가능합니다. 비슷한 표현으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 했을 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상종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사마리아 인에 대한 상종하지 않음도 있지만 그에 더해서 ‘여자인 나에게’라는 표현에 더 강조가 있듯 식사 도중에 이런 행동은 그저 예의 없는 행동이라기 보다 누구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예수의 어떤 행동을 함께 떠올리셨다면 설교 후반부 소개될 그것과 일치하는지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이 사건은 마태26:6-13 막14:3-9 그리고 눅7:36-50 에 같은 면과 또 다른 설명으로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어떤 여자’라고 하는 반면 누가는 ‘죄인인 어떤 여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가는 그 여인의 행동에 주목합니다 ‘그의 뒤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여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라고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반면 마.막은 머리에 부었다. 라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발을 적셨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머리에 부었다고 보입니다. 학자들 간에 논쟁은 있습니다만 요한의 말처럼 발을 적셨다고 보고 마.막은 주님이야 말로 진정 높으신 분 즉 이스라엘의 왕에게 머리에 기름을 붓던 의식을 통해 ‘예수께서 왕이심’을 드러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반면 누가는 데오빌로라는 당시의 높은 사람에게 ‘왕’이라는 높은 신분보다 여인의 깊은 마음과 겸손을 부각함으로 불필요한 ‘왕’에 대한 오해를 피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마태는 ‘제자들이’, 마가는 ‘어떤 사람들이’ 요한은 그 사람이 배신할 ‘가룟 유다’라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누가는 여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드러난 ‘그들이’ 또는 ‘가룟 유다’가 여인의 행동 중에서도 눈에 들어온 것은 ‘아까운 항유’라는 것입니다. 즉 ‘비싸게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 주는 것’ 특히 마가와 요한은 삼 백데나리온이라고 어림잡은 가치가 광야에서 5천명을 먹일 때 필요한 이 백 데나리온과 비교를 한다면 얼마나 비싼 향유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가룟 유다라고 밝히지 않는 대신에 ‘이렇게 버리는가?’라고 여인의 행동을 평가한 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며 ‘그 여자를 꾸짖었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요한의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도둑이었고 돈자루를 맡았다가 들어 있는 것들을 꺼내가곤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마태와 마가, 요한은 ‘나를 장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누가는 예수께서 비유로 여자의 행동은 자신을 많이 사랑한 것, 즉 소개했던 것처럼 ‘죄 많은 어떤 여자’로서 많은 죄를 용서 받은 지극한 표현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여인이 한 행동을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여자를 기억하도록 행한 일을 이야기하라고’ 하셨고 우리는 4복음서 모두에서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혹시 스스로를 여자에 빗대어 비록 삼 백 데나리온의 가치 있는 것을 드리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무엇인가를 드린 기억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오히려 당시에는 여인이 식사를 하는 자리를 지나가는 전혀 생각지 못한 행동에 대해 그리고 그녀가 가져온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붓는 마태와 마가의 표현처럼 ‘성내며’ ‘꾸짖거나’ 요한의 기록처럼 말은 번지르게 하면서도 속내는 전혀 다른 자들의 모습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죠.
그러나 얄궂게도 오랜 시간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는 제자들 처럼 순간 눈에 보인 것으로 평가합니다. 자기 맘에 안드는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런 마음을 숨기면서 겉으로 누구나 동의할 것 같은 얼평, 옷평, 먹평 등 온갖 평가를 하는 것이죠. 마가의 지적처럼 ‘자기들끼리’ 그렇게 당연한 듯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께서 앞으로 엿새 후면 십자가에 죽으심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의 죽으심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준비되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요한의 기록처럼 죽었던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 난 감사는 삼 백 데나리온이라도 아깝지 않은 마리아의 모습을 흔한 시선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마리아는 지극히 순전하면서도 비싼 것을 ‘생명’ 즉 오라버니의 생명의 가치를 더 크게 보았기 때문에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발전 할 수록 안타깝게도 생명 조차도 돈과 시간으로 따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말은 생명과 삶을 고귀한 것, 최고의 가치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처럼, 가룟 유다처럼 돈과 물질과 대비될 때에 마리아의 행동은 결코 이해 될 수 없는 것이죠.
요한에 의하면 ‘예수의 발에 붓는’ 행동은 순전한 나드 한근의 가치보다 자신을 예수의 발 즉 가장 낮은 곳에 자신을 더 낮게 두는 행동을 합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지극히 순전하면서도 비싼 항유가 삼 백 데나리온의 가치인데도 불구하고 예수의 발에 붓는 행동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쩌면 ‘이 정도의 가치 있는 것을 드리는 나의 모습’ 좀 당당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군가 사진이라도 찍어서 올려주면 얼마나 폼이 나겠습니까? 그러나 함께 이어지는 그녀의 행동은 부자연스러움을 넘어서는 황당하기 까지한 모습입니다. 지극히 순전한 겸손으로 낮아짐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다른 해석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우를 범하고 이해되지 않을 때 마치 농담거리로 치부하며 위기를 넘어가는 것이 매우 센스있어 보이는 시대입니다. 이미 그 방은 순전한 향유의 냄새가 가득하듯 그녀의 지극한 겸손은 시대를 넘어 지금도 우리에게 ‘너라면 그럴 수 있니’라고 묻고 있는 ‘지극한 겸손’의 실체를 보녀주고 있습니다.
지금 누군가에게 허리를 굽히는 일은 그런 장면을 보는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장면입니다. 반면 갑질하는 사람들이 상대를 하대하고 강제로 무릎을 꿇리거나 할 때 치욕감을 느끼는 것 아닙니까?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여인의 행동은 종이나 가능한 행동입니다. 특히 무릎을 꿇고 여인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머리털로 남성의 발을 딱는 장면은 쉽게 이해될 장면이 아님에는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이해가 필요한대 저는 이 장면을 푸는 열쇠는 두 개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하나는 ‘지극히 순전한’입니다. 식탁의 자리에서 여인이 행할 수 없는 무례함 그러면서도 그녀가 드린 '지극히 순전한’ 향유는 생명이라는 최고의 가치와 비교 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씻음으로 생명을 주신 ‘예수의 존귀함’을 향해 한 인간으로 드러낼 수 있는 그녀의 마음 상태가 ‘지극히 순전한’ 것입니다. 자신의 오라비의 생명을 다시 공급해주신 감사와 예수께서 생명보다 더 귀한 분, 지극히 높으신 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마음의 변화와 태도가 예수 앞에서 ‘지극히 순전한’ 믿음의 상태를 보여 준 것입니다.
또 하나의 열쇠는 얼마 후의 이야기인 요한복음 13:4–6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서 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행동에 ‘절대로 내 발은 안된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은 부자연스러웠고 이를 ‘절대로’ 거절하는 베드로는 자연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지금은 모르지만 좀 있으면 알게 된다’고 하시면서 여전히 예수의 죽으심을 예고했고 그러나 요한은 이런 깨달음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불 같은 열정의 사나이, 옆구리에 칼을 갖고 다니던 열심당원인 그가, 결국 예수를 배신하는 치욕스러운 자기 붕괴를 경험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31–3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리고 마치 마리아가 했던 것처럼 스승으로 제자의 발을 씻기는 충격적인 행동이 제자를 향한 ‘지극히 순전한’ 사랑의 행동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지극히 순전한’ 믿음이 있을까요? 먼저는 있고 없음을 생각하기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어지는 부정적으로 가룟 유다를 보세요. 비록 그가 궤에서 돈을 꺼내 쓰는 도둑일지라도 그의 눈에 비친 마리아의 행동은 이해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런 겁니다. ‘여기 사람들 미쳤구만’ 내가 이런 곳에서 3년을 있었다니 그동안 내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잘 됐어 저런 꼴을 보니 내 잘못이 아니라 예수가 잘못된 것이고 저런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이 문제였어,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으니 다행이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동에 대한 잘못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곳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자기 절망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신자들 사이에도 주일에 오는 시간이 아까워서, 교회의 시간에 그저 최소한의 시간 만을 허비 하지 않는 것처럼 말합니다. 돌아보면 한 두시간 잡일하면서, 게임이나 핸드폰을 보며 보내는 것은 한 번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도 주일에 한 두시간도 철저하게 분 단위를 따져가는 신자들의 모습이 그런 것입니다. 내가 훔쳐 쓴 것/ 그것에 대한 자기 위로는 늘 넘쳐나지만 주님을 향해 쓴 한 시간은 마치 빼앗긴듯, 어떤 알바보다도 더 비싼 시간인냥 스스로 더 비싼 가치 더 나아가 아까운 시간이라고 치부하는 그 순간이 가룟 유다의 시각으로 본 자연스러운 자기 절망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 스스로를 마리아와 비교할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처럼 보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하면서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누가는 그녀의 행동을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의 기쁨처럼 죄 많은 여인이 사함을 받은 큰 은혜를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주변에 어떤 이가 알바해서 번 돈을 너무도 비싸고 좋은 것으로 부모에게 대접하려고 했던 마음은 부모의 눈에 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주신 사랑을 우리가 올바로 깨닫고 알아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로 세우고자 합니다. 가장 귀한 것을 주신 분, 생명으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시며 마르다처럼 지극히 온전한 것으로 경배받으심이 마땅하신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가난한 자’를 위한 삶도 필요합니다. 제자들에 눈에 보인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결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우리의 삶 가운데 가난한 자를 돌보는 삶의 모습을 구분하지는 않지만 구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가장 낮은 자세로 우리의 귀한 것을 드리고자 하는 자세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쌓아 갈 때 비로소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시작됩니다.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가난한 자들이 항상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 유다의 말처럼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면 됩니다. 마지 한 장면을 보고 위대한 발견이라도 한 듯 옳은 말을 한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는 겸손한 자세를 배워 위대한 발견을 매일 우리 삶에서 행하며 살면 됩니다.
9절에 유대인의 큰 무리가 찾아왔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예수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보기 위함입니다. 나사로는 조작될 수 없는 증거이자 증인입니다. 나면서 맹인이었던 사람에게는 그 여부의 맞고 틀림을 부모에게 확인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죽어 냄새까지 났던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 부정될 수 없었고 이들은 10절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늘 세상의 방식은 매우 합리적인 것 같아도 그 끝에는 폭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갸룟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숨기려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부정하고 배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사로를 보고 ‘믿었다’고 기록하지만 이러한 믿음이 과연 ‘지극히 순전한’ 믿음과 같은지 여러분은 이미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내가 산 새 차가 안전하리라는 믿음, 내가 타는 차가 안전하리라는 믿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적어도 인간다울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 살아가는데 얼마나 믿음이 필요한지 알게 합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런 믿음이 하나같이 깨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고립되고 있습니다. 가족들 조차도 서로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지 못할 때 그렇게 살아야만 살 맛나는 세상의 시작은 결국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진짜 맛을 어디에서 경험하겠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교회가 저와 여러분의 빛이어야 하고 교회에서 전해지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믿음의 출발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면서 믿음으로 보는 눈을 뜨도록 주와 가까이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