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로 부터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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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4:34-5:2

Notes
Transcript

서론

오늘 본문은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로 언제나 회자 되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까지는 성령의 역사와 복음의 전파 그리고 지난 시간 부터 박해의 시작을 살펴 보았다면
오늘은 실질적인 초대교회의 신앙과 공동체의 모습을 몇 가지 사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은 예수복음에 가장 가까운 모습일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배울 수 있다면 아마도 주님의 뜻에 더 가까이 나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이라는 책의 이름 안에는 사도들의 열전이 담겨 있는 동시에 그들과 동역하며 헌신하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이야기도 담겨 있습니다.
강력한 사회제도와 신분질서 그리고 약육강식 물질주의와 세속주의 그리고 우상숭배가 최대 절정에 이르렀던 로마제국에서 놀라운 부흥을 이루고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변화 시켰던 초대교회 교인들의 단면을 살펴 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것을 누리고,
어떤 도전에 직면하며 또 그 도전을 통해 어떤 성장을 경험했는지 살펴 보면서
우리는 이 시대에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지 생각해보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1.소유로 부터의 자유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가 갖고 있던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 중에서
물질로 부터 자유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좋은 예로서 바나바를 보여주고 이어서 나쁜 예인 아나니아 부부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먼저 초대교회가 당시 로마시대를 관통하고 있던 물질주의에 대한 입장을 살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4:32 NKRV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고 합니다.
조금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이들이 믿는 사람들로서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통용하고 나누는 문화가 주류 였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 통용 이라는 단어는 정감 있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불편한 단어 입니다.
내것 네것 없이 통용 하는 것은 물자가 부족하여서 나누는 경우가 있고 나누는 기쁨을 위해서 행하는 경우로 나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통용은 아마도 후자에 가깝습니다.
서양권에서는 Potluck meal 이라는 문화가 있습니다. 파티에 초대를 받아 가면서 각 집마다 음식 하나씩 해오는 것입니다.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파티를 주최한 사람의 부담을 덜어 줍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더 자주 모일 수 있습니다.
그 누구 하나그 나눔의 문화를 반대 하지 않고 누구랄 것도 없이 나누고 내것을 주장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친한 사이일수록 내것과 나눌 수 있는 것의 경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우리는 익히 압니다.
맞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분란은 상대의 허락 없이 타인의 것을 무단으로 취하거나 욕심을 부릴 때 생깁니다.
현대 사회가 되고 개인주의가 자리 잡고 핵가족에서 이제 일인 가정이 많아진 시대에는 서로의 명확한 경계는 좋은 관계를 위한 필수 개념으로 자리 잡혔습니다.
서로 각자 앞가림 하면서 살면 아주 깔끔하고 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시대에는 요즘 시대와 달랐습니다.
지금 보다 신분의 격차, 부의 격차가 심했을 것입니다. 한번 귀족, 왕족은 대대로 왕족, 귀족 이었습니다.
한번 어부는 대대로 어부일 가능성이 높았고 가난은 대물림 되는 경향이 지금 보다 더 심했을 것입니다.
당시 교회에는 귀족과 노예,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한데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세속적인 신분이나 부의 차이가 교회에서도 적용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흑인은 백인 교회에 가지 못하고 귀족이나 부자는 앞자리에 지정석이 있었던 오래전 우리 기독교의 부끄러운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네것 내것 없이 서로 통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초대교회에서는 당연한 일이 되었을까요? 어떻게 이런 물질로 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을까요?
그 질문에 답해주는 구절이 바로 33절 입니다.
사도행전 4:33 (NKRV)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복음의 힘 입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부활의 증언을 듣고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았을 뿐입니다. 헌금을 하라는 강요나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가르침도 없었습니다.
그저 복음이 들어갔을 뿐이고 은혜를 받았을 뿐입니다.
복음주의 설교자인 존 파이퍼는 이 현상에 대해 “예수를 믿게 되면 나타나는 효과” 라고 진단 합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나타나는 두 가지 효과” Two of the effects of believing Jesus
물질에 대한 관계가 느슨(loosened) 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견고(tightened)해진다. -존 파이퍼-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소유양식 vs 존재양식
대학시절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요즘 다시 읽고 있습니다.
그 책 중에 <소유냐 존재냐> 라는 책이 있습니다.
프롬은 소유양식으로 살아 가는 사람과 존재양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소유 양식은 말그대로 더 많은 물질이나 명성 혹은 지위와 같은 외적인 것을 소유하는데 삶의 의미와 행복이 있다
반면, 지혜와 사랑 같은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을 실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완성하는 데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는 삶의 방식을 존재양식 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들었고 그 복음이 그 안에 역사하여 은혜를 체험 하게 되었을 뿐인데,
그들의 생각과 삶은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존 파이퍼의 말처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관계의 변화를 갖게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마침내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던 물질적인 것들에서 자유하게 되는 힘은 결국 복음으로 부터 나옵니다.
사도행전 4:34 NKRV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초대교회의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선한 실천의 행렬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놀라운 결과를 이루게 됩니다.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가난을 초대교회는 구제해낸 것입니다.
결국은 초대교회 내에서 가난으로 고통 받는 형제를 그저 방치 하는 일은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더 자세하게 들여다 봐야 할 부분은 나누는 방식 입니다.
사도행전 4:35 NKRV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사도들의 발 앞에…” 라는 표현이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의 체계를 표현한 말로 이해 하시면 됩니다.
“사도”가 아니라 “사도들 이라는 말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발 앞에 두매…” 라는 것은 교회의 권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일을 사도들에게 맡긴다는 의미 입니다.
공식적인 절차로 교회의 권위와 교회의 이름으로 공정하고 적절하게 구제사역을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누는 방식이 왜 중요하냐면,
교회의 이름으로 구제를 하는 이유가 교회가 힘을 모아 구제를 해야 더 큰 사역을 할 수 있고 작은 힘이나마 참여 할 수 있게 하는 목적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이름으로 해야 개인의 이름으로 하는 것보다 복음전파의 목표를 더 들어 낼 수 있기 때문 입니다.
만약에 누가 재력이 있다고 하여 교회에서 그 사람 이름을 걸고 구제사역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주체자가 의도를 하던 안하던 그 사람의 이름이 더 들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자신의 이름 보다 복음이 전파 되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고 한 마음 한뜻으로 연합하여 열심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아 구원의 기쁨을 체험한 사람들은 자신을 얽메이고 있던 물질에서 명예욕에서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가난에 얽메어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하루 하루 먹고 살아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서로 돕고 나누는 선한 사람들이 있는 따뜻한 세상임을 경험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로 지난 이주간의 붉은 방패 모금을 마감 합니다.
어떤 분들은 동전을 나누고 어떤 이는 매년 꽤 큰 돈을 구세군에 기부 하십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군생활 할 때, 구세군 응급서비스트럭에서 나눠준 따뜻한 스프 한 그릇을 못잊겠다던 분들도 있었고
어떤 이들은 과거 노숙자 생활을 할 때, 요긴한 도움을 받았노라 하며 모금을 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나누는 자는 나의 가진 것을 놓으므로서 자유를 체험 하는 것입니다.
또한 도움을 받는 이들은 가난의 얽메임에서 벗어나 세상을 밝게 보는 자유를 경험 하는 것입니다.
고갑게 보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마치 집팔고 땅팔아 교회에 바쳐야 한다는 말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2.진정한 자유

바나바와 아나니아 부부
이 초대교회의 나눔의 기록 전반에 흐르는 중요한 메세지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롭게 자원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초대교회의 이 나눔의 물결 중에 한 사례를 소개 합니다.
사도행전 4:36–37 NKRV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바나바는 레위 족속 입니다. 율법상 레위지파는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없습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고 더 이상 제사장 지파가 제사장이 되는 시대도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출신지인 사이프러스 섬에 있던 밭을 팔고 예루살렘으로 이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밭 판 값을 사도들의 발아래 가져 온 것입니다.
아마도 그 밭이 전재산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회심한 바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한 인물 입니다.
또한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가 되는 안디옥 으로 바울을 인도 한 사람도 바나바 이며
바울의 첫 선교 여행의 동역자가 바로 바나바 였습니다.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이 별명으로 부를 정도로 친근하고 사도들에게 큰 신망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위로의 아들” 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있듯이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에게 밭을 판 돈을 헌금 하는 것은 그가 하는 헌신과 사역 중의 일부 였습니다.
그것 하나로 우쭐 거리거나 이름을 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 교회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고 마침 자신이 밭이 있어 처분하여 교회의 구제 사역에 동참 한 것입니다.
바나바의 사례는 그 밭을 팔아 헌금 했다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도 교회의 일원으로 기거이 한 마음 한뜻이 되길 원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밭을 판돈이 얼마인지 모르나
복음의 선한 사업에 동참하기를 기뻐했음을 보여줍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 나눔의 행렬은 광풍이나 비이성적인 경쟁이 아니었습니다.
강요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사도들 누구도 무리 해서 헌금 하도록 부추긴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그야말로 자발적으로 또한 자유롭게 또 기쁜 마음으로 참여 했을 것입니다.
재산이 있어도 자신이 내키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 였다는 것은 이어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이런 선한 일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사도행전 5:1 NKRV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도행전 5:2 NKRV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오기는 했는데, 다 가져 온 것이 아니라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이 부부는 초대교회에서 불고 있는 선한 움직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도 이들의 행동이 의야 했습니다.
사도행전 5:3–4 NKRV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베드로의 주안점은 땅 값 얼마를 감추는 것이라기 보다는
거짓이었고 또한 위선 이었습니다.
원래 그 땅은 팔기전에도 팔고 난 후에도 그들의 땅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달라 한적도 없고 아름 다운 마음으로 바치기로 마음 먹은 것도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말이 나오는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탐심에게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나바와 이 부부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유한가 아니면 끌려 다니는가?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나 좀 어떻게 해줘봐 하는 태도는 자유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유인은 해야 할 일을 할 자유도 있고 안 해야 할 일을 안 할 자유도 있는 사람
바나바는 복음 안에 참 자유를 소유 한 사람이라면 아나니아 부부는 반대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복음을 통해 내적 변화를 경험한 사람 입니다.
그의 사상과 가치관이 모두 복음적으로 변화 된 것입니다.
소유보다는 존재 더 나아가 사명으로 확립이 된 것입니다.
소유가 늘어나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는 삶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는 단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물론 바나바도 전재산을 다 바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언제든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 라는 것은 바로 지배 당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파도에 이리 저리 휩쓸려 정신을 못차리는 것은 고통이지만
파도를 타고 그 사이를 미끄러지며 서핑을 하는 것은 즐거움 입니다.
물질에 명예에 욕망에 지배 당하는 것이 잠시의 즐거움과 함께 더 갖지 못함에 대한 고통을 줍니다.
물질을 통치 하는 상태가 되면 자유로가 찾아 옵니다.
지역의 어떤 사람이 교회에게 자기 소유의 주차장을 무료로 공개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주차장 주인을 아무리 설득해도 일년 52주 중 51주만 공개를 해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일년의 한 주는 주차 문제로 불편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주차장 주인을 만나 물었습니다.
“왜 하필 한 주만 그렇게 공개를 안해주십니까?” 그 주인은 “다 빌려 주면 내가 주인인걸 모르잖아요”
진정한 자유는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하면 찾아 옵니다.
내것이라고 생각하면 지키려고 전전 긍긍하지만
하나님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눌 수 있습니다.
또한 진정한 자유에는 할 수 있는 자유와 함께 안 할 자유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23 KRV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인이나 다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14:1–3 KRV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믿음이 약한자를 배려해서 안 먹을 수도 있어야 한다.
또한 먹는 사람을 업신 여기거나 비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24 KRV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결국 자유인은 다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그들의 믿음을 위해 나의 자유를 제한할 자유도 있는 더 큰 의미의 자유를 가진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되면 하면 안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선을 위해 거룩한 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도 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위해 믿음 약한 사람이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해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자유 이다.
예를 들어, 나는 성인이니 흡연을 할 수 있지만 내 주변에 비 흠연자와 아이들이 있다면 흡연 구역이라해도 참을 수 있는 사람, 내가 교회 직분자이니, 금연을 하는 것은 흡연으로 부터 자유한 사람 입니다.
끊어야 할 이유가 너무나도 많지만 도저히 끊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인이 백이고 얽메인 사람입니다.
욕망과 탐심에 얽메이지 않고
소유할 자유와 함께 더 큰 가치를 위해 놓을 수 있는 자유도 있어야 진정한 자유 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복음을 들었으나 내적으로 변화를 이루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 대한 경외심과 거룩한 두려움을 갖지 못하고 탐심으로 부터 자유 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사탄이 될 수는 없지만
사람이 사탄의 노예가 될 수는 있습니다.
가롯 유다도 유다 자체가 사탄은 아니었지만 사탄에게 자신을 내어주어 은화 몇닢에 사랑하는 주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영적 허영심과 물질에 대한 탐심이 뒤엉켜 성령을 속이고 귀한 생명을 잃게 됩니다.
성령을 가벼히 여기고 교회의 권위를 하찮게 여긴 결과 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비지니스의 장소로 인간관계의 장소로 목회자를 음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회자들도 평생을 진실되게 살아라 청렴하게 살아라 설교 하고 은퇴 할때는 일반 회사원은 꿈도 못꿀 전별금을 수억식 받아 챙기고 연금 받으며 사는 사람들도 한국교회에는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 세상으로 부터 자유하고 죄로 자유하고 물질로 부터 자유한 사람은
동시에 인해로운 모습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갖고 있습니다.
비록 나의 발은 속된 세상에 딛고 있어도 나의 소망은 천국에 두고 있는 사람은 자유할 수 있습니다.
자유 하되 진리 안에 자유 합니다.
자유 하되 사랑 안에 자유 합니다.
오늘 물질과 욕망에서 자유하게 해달고 기도하시는 복된 주일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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