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저래?(골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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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5월 29일 수요일
제목 :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저래?
본문 : 골로새서 2장 3-7절
1. 기독교인이 이래도 되는 건가요?
1) 교회 밖에서의 외침 :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래도 되요?
한 청년을 심방하다 이런 대화를 주고 받았습니다. “회사 일도 제게 잘 맞고 동료들과 관계도 좋고 다 좋은데, 과장님의 덕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저도 다른 동료들도 다 힘들어 해요.”
사회 초년생으로 살아가는 많은 청년들이 안고 있는 고민이기에 심방 하는 동안 공감해주고 또 현실적 대안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런 말 하나를 덧붙였습니다. “과장님, 크리스천이에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이래도 되는건가요?”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다들 같은 생각을 하실 겁니다. 저 역시 “그러면 안 된다.”고 답한 후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뉴스를 볼 때면 아쉬운 소식들을 정말 자주 접하게 됩니다. 결국 기독교인의 범죄, 목사의 타락 등 절대 나와서는 안되는 모습들이 계속해서 들려올 때면, “크리스천이 저래도 되냐?”는 외침과 함께 “역시 개독교”라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2) 교회 안에서의 거짓말 : 믿음은 좋은데, 왜 저래?
그럼 교회 안에서는요? 교회에 그 누구보다 열심인 우리 남편, 아내. 교회에서 훈련 받으라 하면 훈련 받고, 봉사자 모집한다고 하면 또 봉사하러 가지만 정작 가정 내에서의 삶의 태도는 바뀌지 않는 현실. 그럼 우리는 말할 겁니다. “그렇게 교회가 좋으면 교회 가서 살아! 믿음은 좋은데, 왜 저래?”
또는 이런 상황도 있을 수 있겠죠. 저는 안수집사님의 아들이자 권사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성도님들로부터 비춰지는 시각이 있습니다. 당연히 성실해야 하고, 당연히 봉사 열심히 해야 하고, 당연히 성경을 잘 알아야 한다는 시각입니다.
애석하게도 저는 그 분들의 시각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저의 행실은 조금 아쉬웠고, 저의 봉사는 조금 부족했고, 저의 성경 지식은 넓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들려오는 소문은 “안수집사 아들인데 성실하지가 않아~” “권사 아들인데 성경을 너무 몰라~”
그 소문을 들었을 적 사실이기에 할 말은 없지만,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답답함과 억울함이 동시에 묻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며 그 날을 떠올려보니,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결국 믿음을 평가하는 기준이 곧 외부적 태도나 행동이라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2. 믿음에 대한 오해 아닌 오해
1)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면 믿음이 좋은가?
그럼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교회 활동 열심히 하면 믿음이 좋은 겁니까? 교회 안에서 봉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겁니까?’
매주 헌금하고 십일조 하는 사람은 특별히 믿음이 더 좋은 편에 속하는 겁니까? 그냥 기도도 아니고 금식 기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믿음이 아주 큰 사람이 되는 겁니까?
물론 매주 헌금 하고 금식 기도하는 것을 믿음이 좋아보이려 하는 행동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에 감동으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행동을 보며 믿음을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결국 교회 안이나 밖이나 믿음을 평가하는 기준이 행동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을 말로 고백하면 믿음이 좋은가?
그럼 이건 어떠실까요? 행동이 아니라 ‘믿음을 말로 고백’할 때 우리는 믿음을 좋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른 이들 앞에 말로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우리의 신앙 고백에 증인이 되어주기도 하며, 흔들리지 않도록 지지대가 되어주기도 하며,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고백을 통해 다시금 결단하고 다짐할 수 있기에 중요하지 않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을 고백했기 때문에 “이 사람의 믿음은 크다!” 라고 확증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때가 되었기 때문에 신앙을 고백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무리의 분위기에 고민의 흔적 없이 답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3. 건강한 믿음은 성장한 크리스천을 만든다
1) 익숙함의 영역에서 중요한 영역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건강한 믿음, 좋은 믿음을 어떤 기준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습니까? 골로새서 2장 6절과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로새 교회는 이단의 침투로 꽤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좋은 믿음’을 받았으니 믿음에 굳게 서라 선포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좋은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6절에 기록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아주 짧은 내용이지만, 이는 굉장히 중요하죠.
이 사실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기본이 됩니다. 그러나 이는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하며 절대 변하지 않는 절대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주로 받아들이는 사건’을 너무나 당연해 익숙함으로 여기는 태도에서 삶의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옮겨 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삶의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옮겨올 때 반드시 변화를 느끼게 될 것이며, 그 변화의 가장 큰 변화는 곧 ‘관계의 회복’ 입니다.
2) 관계가 회복되야 문제의 본질이 해결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것이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옮겨졌다면 이제 우리는 관계가 회복되고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제가 친구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럼 이 문제를 저는 제 친구와 다뤄야 합니다. 이 문제를 제가 아내와 나눈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제 친구와 나눠야 관계 속에서 문제를 다루고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부부간 문제가 생겼다면 저는 제 아내와 그 문제를 다뤄야 합니다. 이 문제를 성도님들과 나눈다면 조언을 받을 수는 있지만, 아내와 직접적인 소통없이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결국 아내와의 관계 속에서 문제는 해결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그 문제를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 문제를 논할 때, 그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3) 문제가 해결 된다면 이제 성장할 때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해결될 때, 해결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성장케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성장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겁니다.
물론 성장의 속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만큼의 변화가 한순간에 이뤄질 수 있지만, 누군가는 요만큼의 변화가 몇 개월에 걸쳐 이뤄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 견주어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눈 앞에 놓인 내 삶의 변화와 성장에 더 큰 기쁨을 누릴 뿐 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로 받아들이는 좋은 터 위에서 성장해 간다면, 더딤도 반드시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밑바닥에서 앞을 본다면 밑바닥에서 보이는 시야가 전부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 계단을 올라 앞을 본다면 한 계단 만큼의 시야가 더 보이게 됩니다. 또 한 계단을 오르게 된다면 그 한 계단 만큼의 시야가 더 확보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성장하는 겁니다. 한 계단씩, 한 계단씩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고, 견주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으로 성장해 가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은 ‘내가 뭘 해야지’ 해서 되는게 아닙니다. 주를 받아들여 관계가 회복되고 성장하는 이 과정은 ‘내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뤄지게 됩니다.
그렇게 살 때,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저래?” 라는 말을 듣게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삶을 살게 될 때 “믿음은 좋은데, 왜 저래?” 라는 말은 절대 성립될 수 없는 말이 될 것입니다.
4. 건강한 믿음 심기
1) 어제의 예수, 오늘도 예수
건강한 믿음을 지닌다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크리스천의 삶이 됩니다. 그런데, 이 건강한 믿음을 우리는 어떻게 심을 수 있습니까? 예수를 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어떻게 우리 마음밭에 심기겠습니까?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겁니다. 어제 안 예수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예수를 알아가기에 힘쓰는 겁니다.
김형국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문제 중 하나로써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 라고 말합니다.
한 번 고민해 보셔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나는 매일 예수를 알아가기 위해 힘쓰고 있는가? 또 나는 종교인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인가? 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얼마나 말씀을 읽고 묵상하십니까? 또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정말 끊임없이 우리는 고민하고 싸워야 합니다. 식기도 세 번으로 내 기도의 할당량을 채우고 만족하는 자인지, 아니면 한 번의 기도에도 모든 걸 다 내어드리는 자인지. 매일 하루 하루 점검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매일 예수를 알아가고자 힘써야 우리 안에 건강한 믿음을 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좋은 것 주기 위해 몇 개의 제품을 몇 번이고 찾아보는 것처럼 건강한 믿음을 심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예수를 알아가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를 알아가고자 힘쓸 때 우리는 이제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예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어디서나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성령님을 비로소 보게 될 것입니다.
2) 어제의 사랑, 오늘의 행동
두 번째로는 예수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만큼 행동 하라는 겁니다. 사랑이 있다면 행동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대부분이 결혼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해볼까요? 서로 사랑하십니까? 사랑이 있기 때문에 밥도 차려주고, 같이 놀러 가기도 하는 것 아닙니까? 사랑이 없다면 밥을 차려줄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같이 놀러갈 이유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겁니다.
그 분은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게 된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 목사님을 따라 새벽을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관계도 없지만,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행동으로 따라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알아가다 사랑하게 되면 흠모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흠모하게 되면 예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배하게 되면 삶의 예배가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구별된 행동을 억지로 하는게 아닙니다. 예수를 알면, 그렇게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게 되면 삶의 현장이 바뀌게 됩니다.
3) 어제를 살게한 어제의 은혜, 오늘을 살게 할 오늘의 은혜
마지막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어제의 은혜는 어제에 그치며, 오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믿음은 ‘현재’의 일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 날의 영광으로 오늘을 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저희 교회 3층에 메뚜기 때가 산다는 사실 아십니까? 뭐 사실 때라고 하기엔 메뚜기 둘 입니다. 평상시에는 찾아볼 수 없는데, 금요일만 되면 아이들 먹으라 사 놓은 목양실의 간식들이 사라지는 겁니다. 교역자의 존엄성 때문에 실명을 거론할 수는 없지만 최모 전도사님과 윤모 전도사님은 매주 금요일 메뚜기 때처럼 1층 간식들을 휩쓸고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번 주의 간식으로 이번 주의 배부름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번 주에도 간식을 휩쓸어 갈 가능성이 큽니다. 왜요? 저번 주의 간식이 돌아오는 금요일까지 배부름을 책임져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도 그렇습니다. 어제의 은혜에 만족하여 오늘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헛된 배부름에 속아 궁핍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오늘을 살아 내는 것이고, 이것이 모여서 우리 삶이 되는 겁니다.
5. 정리하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뛰어난 사람이 되어 이 땅을 이끌어 가는 탁월한 리더를 만들고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 세상을 회복하고 치유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게 생명을 주기 위해 목숨을 거셨습니다. 그런 주님 앞에 우리 또한 목숨 걸고 믿음의 단을 쌓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건강하게 쌓여 간다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저래’ 라는 말이나, ‘믿음은 좋은데 왜 저래’ 라는 말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바라옵기로는 더욱 예수를 알아 가기에 힘쓰고, 더욱 사랑하시고, 사랑한 만큼 또 살아내어 예수님 닮아 가는 자의 삶을 살아내시는, 그런 삶 되도록 끊임없이 싸워내시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결단찬양 및 기도]
1. 주님 곁으로 + 주께 가까이(후렴)
- 주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내 삶의 주관자 되시며 전부 되시는 주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겸손히 내려 놓길 소망합니다. 내 안에 내가 아닌 예수가 충만하도록, 날마다 깨어 주님을 더욱 생각하고 알아가는 우리 되게 하소서.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심을 다하여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 이 세상의 빛과 소금 되길 원합니다. 진리가 무너져 가고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희미해져가는 이 시대에 주저앉기 보다 세상을 살리는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우리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 학업과 우리가 서 있는 곳곳에서 바꿀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내가 되게 하소서.
2. 주께 가까이(후렴)
- 날마다 갈급함 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구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지금의 신앙에 안주하기보다 더 주님을 알아가려는 열심을 입게 하소서. 목숨 걸고 나를 살리신 예수 앞에 우리도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 예수 닮아가는 삶, 예수 따라가는 삶 살아내게 하소서. 그렇게 우리 안에 예수의 향기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세상 곳곳에 또 동행 다락방을 통하여 흘러가게 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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