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31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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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시는 자유함
주님이 주시는 자유함
여러분 오늘도 함께 이자리에서 말씀을 나누게 되어 반갑습니다. 요즘 아마 우리 대학생들은 과제다 뭐다 바쁜 시기일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은혜를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주님께서 크신 말씀의 은혜를 부어주시리라 소망합니다.
오늘도 지난번 말씀에 이어서 갈라디아서를 함께 보도록 할텐데요, 갈라디아서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지 기억하시나요?
아마 2주가 지났기에 기억 못하시는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다른 서신서와는 다르게 긴급하게, 또한 어느정도 감정이 있는 상황에서 기록을 하게 되었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교회 가운데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기본 진리가 위협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지난주에도 1장 말씀을 나누면서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함께 나누었었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에 이어지는 2장 말씀인데요, 오늘의 말씀에서는 어떤 한가지 사건이 등장을 합니다. 바로 안디옥 사건이라고 명명된 사건인데요, 어떤 내용이냐, 본문 11절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게바, 즉 사도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 신도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찾아온거에요.
말씀에서는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라고 그들을 표현하고 있는데, 당시 예루살렘 교회를 담당하던 사도가 야고보 사도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야고보 사도를 따르던 이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자 베드로가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이방인들과의 식탁 자리를 떠나 물러납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다른 유대인들도 베드로의 행동에 동요하게 되고, 결국 바나바까지도 베드로를 따르게 됩니다.
왜 베드로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을 피했던 것일까요?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이들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만으로 바울이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말씀에 정확하게 표현되어있지는 않지만, 학자들에 따르면, 이들의 정체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견된 조사단과 같은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즉, 베드로가 이방 지역의 교회에서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과 교제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놀랐고, 그것을 확인코자 그들을 보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교제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을까요? 구약 율법에 따르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그렇기에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과 교제하게 되면, 그 죄악이 택함받는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줄 것이라 여겼습니다.
대표적으로 가나안에서 이방 백성들을 남겨두자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을 전파했던 일들이 있었죠.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꺼렸습니다.
그런데 사도, 그 중에서도 베드로 사도가 그러한 교제를 한다는 이야기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잘못된 일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그렇게 교제했던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늘고 교사들은 들었겠지만, 사도행전 십장을 보면, 베드로와 고넬료라는 로마장군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 등장합니다. 고넬료는 기본적으로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이 있었고, 그랬기에 하나님께서 그가 베드로와 만나게 하시고,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난 자리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머리에 역사하신 것을 경험한 것이죠.
그렇기에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까지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받아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놀라운 일은 아직까지 당시 그리스도 공동체의 주류였던 예루살렘의 유대 그리스도인에게는 전달되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몇명을 파견하여 확인하게 했던 것이죠.
관련된 사도행전 말씀을 보면 야고보가 자신이 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자체적으로 무리들이 그들에게 나아갔던 것으로도 보입니다.
뭐 여기까지는 그래도 옳지는 않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여겨지죠.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이들이 많았으니까요.
문제는 베드로입니다. 그렇게 진상 조사단이 베드로에게 온다고 한들, 베드로는 그냥 그들에게 잘 알려주면 되는 것이었어요. 이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그의 공동체로 구원 받도록 허락하셨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되는 것이죠.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를 않았죠. 오히려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눈총을 받을 것을 염려한 나머지 그 자리를 뜨게 됩니다. 쉽게 말해 도망한 것이죠.
어떻게 보면 교회의 리더격의 자리에 있는 자가 그러한 모습을 보이니, 옆에 있는 다른 이들이 영향을 당연히 받게 되었겠죠. 또 다른 유대인들, 우리가 잘 아는 바나바까지도 그 유혹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이 베드로를 만나 책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망은 공개적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책망했다는 사실 자체를 편지에 기록할 정도이니 아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베드로를 향해 14절의 말씀처럼 ‘당신은 유대인처럼 살지 않으면서 왜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고 하느냐’고 책망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15절과 16절을 향해 다시한번 하나님의 복음, 그 중에서도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진다는 ‘칭의’의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우리는 원래 유대인이라 구원을 받는 자들이라 여겨졌겠지만, 우리가 알듯이 사람이 의롭게 여겨지는 것, 즉 구원을 받는 것은 어떤 자격과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이지 않겠느냐. 그리스도가 아닌 율법의 행위로는 절대로 의롭다고 여겨질 수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정말 잘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말씀의 주관자이자 말씀을 이루신 주님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러한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이방인과의 식사교제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은, 마치 율법의 준수도 중요한 것처럼 비춰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결국 교제하는 자리에 있던 이방인들의 구원을 거절하는 이야기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너희는 구원 못받는 죄인이야!’라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죠.
바울은 늘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말 진리밖에 모르는 바보였습니다. 그랬기에 그 진리를 거스르는 것들에 대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베드로에 대해서도 그러한 진리를 거스르는 행동을 책망하고 그러한 외식에서 벗어나도록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우리도 한번 생각해보자구요. 베드로가 누군가요. 사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빠르게 만났고, 믿고 따랐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겠죠.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왜 그렇게 눈치를 보고 잘못된 행동을 했던 것일까요.
물론 당시 문제가 되었던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해 발생할 수 있는 분쟁들을 두려워했던 것일수도 있겠죠.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일련의 일들로 인해 예루살렘 총회에서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에 대한 것들이 새롭게 정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에 있어서 가장 큰 부분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베드로의 마음 속에 ‘자유함’이라는 것이 부족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 즉 ‘이신칭의’라는 개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은혜는 바로 ‘자유함’입니다.
이전까지 유대인들은 율법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정말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겠지만, 안식일에 일하지 않기 위해 걸음조차도 걷지 않았던 모습들이 존재했죠.
그들이 그렇게 행했던 것은 그래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래야만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결국 유대인들 스스로를 옭아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하셨던 사마리아인 비유도 이에 대한 예수님의 조소였죠. 유대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제사장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강도당해 정말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형제를 ‘시체에 손을 대면 부정해진다’는 율법 조항을 들어 전혀 돕지 않았죠.
하지만 오히려 사마리아인은 그러한 율법에 매여있지 않았고, 자신들을 무시하던 유대인을 도와 생명을 건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율법주의의 끝은 이러한 기괴한 모습, ‘의를 얻기 위해 불의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복음은 그러한 잘못된 율법주의에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루지 못하는 율법의 행동을 스스로 다 이루시며 그 죄를 대신 갚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을 통해 그 이루심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셨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는 이전의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죠. 왜? 우리가 이룰 필요가 없으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다 행해주셨으니까.
이러한 복음을 통해 할례를 비롯한 수많은 율법 준수의 두려움으로 말씀 공동체로 나아오길 주저하였던 고넬료와 같은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나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주신 복음의 은혜, 그 중에서도 자유함의 은혜입니다.
그런데요, 우리 한번 돌아봅시다. 우리는 그 자유함을 잘 누리고 있나요? 아마도 그렇지 못한 부분들이 우리 가운데도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방금 이야기한 이신칭의의 진리.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받는다. 그렇기에 믿음만이 필요하다라는 복음의 은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지금도 매번 말씀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말씀을 잘 지킬지 여러가지 방법들을 찾기도 하죠.
그러면 한번 봅시다. 여러분들 자유한 건가요?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 한번 처음부터 돌아가 생각해보자구요. 일단 먼저. ‘자유함’이란 것이 대체 무엇일까.
여러분, ‘자유’라는 것은 어떤 것을 이야기하나요? 어떠한 제한도 없이 언제든 원할 때 하고픈 것들을 할 수 있는 상태를 자유하다라고 말할거에요.
그래서 우리나라 정치에서도 이 표현을 잘 사용합니다. 당장 헌법에만 보아도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등등 수많은 자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뭔가요. ‘여러분들은 자유합니다’라는 것을 헌법이 말하고 있다는거에요.
무슨얘기냐, 헌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구속하기 위한 것인데, 사람을 막는 것이 주 목적인 법이 자유를 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정말 극한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분들은 아나키스트가 되기도 하죠.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헌법에서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아나키스트가 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요?
우리가 보통 말하는 그 자유라는 개념이 정말 말그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겠죠.
인간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기에 다른 이들이 있고, 그렇기에 어떤 한 사람의 자유를 위해 다른 사람이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겠죠.
그랬기에 적절한 제한, 즉 구속을 위한 법이라는 것이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에 모두가 따르는 것이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었고, 더이상 말씀의 행동에 매이지 않을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용인한다면 구원파와 다를 바가 없겠죠.
우리가 구원을 받고 말씀의 매임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기는 했지만, 우리는 또 다른 매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매인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였기 때문이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우리의 죄를 드리고, 우리는 주님이 이루신 것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앞으로의 삶이 온전히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의 앞으로의 삶은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삶이기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기록한 유명한 말씀도 이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씀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수 있지만, 그 삶의 모습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 안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누군가는 또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뭐가 자유로운 것이냐, 이전하고 이후랑 바뀐게 전혀 없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분명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유무입니다.
구약에서 요구되는 말씀의 준수는 어떤 것을 바탕으로 하느냐, 바로 두려움입니다. 지키지 못하면 벌을 받기 때문에, 그 벌주시는 하나님이 두려워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말씀준수는 더욱 철저해야 했던 것입니다. 단 하나의 틈도 허락하지 않아야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신약에서 말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구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하기에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 안에 거해야 하지만, 그것을 하게 하는 바탕이 되는 요인은 바로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선물과 같은 구원에 너무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앞으로의 삶은 주님 것이라는 사랑으로 인한 고백을 통해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 주신 복음은 구약의 율법주의와 다른 것이죠.
그러면 마지막 질문을 던져볼게요. 그러면 왜 우리는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왜 사랑으로 기꺼이 주님 계신 곳 안에 거하지 못하냐는 것이죠.
그것은 우리 안의 죄성이 우리를 자꾸 넘어뜨리려고 하는 시도들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꾸 세상적인 유혹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통해 우리를 넘어뜨리려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벽하지 못한 우리는 유혹에 넘어갈 때가 많죠. 그럴 때마다 우리의 죄성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 오늘도 실패했네?’ ‘너는 그정도 인간이야’
마치 내가 구원에서 떨어질 것처럼,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사람인 것처럼 여겨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들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집중이 되느냐, ‘말씀을 준수하는 것’으로 나의 신앙을 증명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이것을 행해야 진짜 신앙인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생각의 종착지는 어디일까요? 결국 또다시 도로 율법주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실패한 자로 여기는 그 모습은 지키면 천국, 못지키면 지옥인 율법주의와 다를 바가 없죠.
하나님은 절대로 그러신 분이 아니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죠. 절대로 방종을 바라시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그 행동 자체를 지키시는 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행동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죠.
한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들, 우리가 삶에서 딱 한가지, 공부한다고 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분야가 있습니다. 어딜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흔히 사랑을 책에서 배웠습니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죠.
왜 이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죠? 사랑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알려줘서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한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닌 사랑이 결여된 행동에 그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기뻐하는 것은 비록 그 행동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서툶이 있어도, 그 안에 진심이 담긴 것들을 기뻐합니다. 그 행동은 진정한 사랑이 기반이 된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습니다. 주님도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들, 즉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는 것들이 사랑이 기반이 된 자발적인 행동일 때 기뻐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말씀을 지키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자연스럽게 그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행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완벽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때론 실수하고 무너질 때도 있고 합니다. 하지만 그 무너짐이 우리를 완전히 무너지게 하지 않음을 알기에, 다시 일어나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가지고, 우리가 그 안에서 주님 주신 삶을 즐기며 나아가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 삶의 방향성은 점차점차 주님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대로 형성이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어떠한 제한 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더라도, 주님의 바운더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습들이 우리 안에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뭘까요. 늘 말하는 진리이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삼일교회 예배 때 송태근 목사님께서 말씀해주신 개념이 있었습니다. ‘성도의 견인’.
성도는 삶의 많은 우여곡절 속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시기에 주님이 오실 때가지 견고하게 인내할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마치 이런 것이죠. 어린아이들은 아직 배움이 없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반사회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그 어린시절을 견뎌내고 성장한 것은 무엇 때문이죠?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이죠.
부모님이 우리의 반사회적 행동들을 막아주시고, 사회적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우리가 하고픈 것들을 하면서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 가운데도 주님께서 마치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님처럼 늘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넘어지고 다치더라도 우리를 다시 일으켜세워주시고, 다시 걸어갈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신앙의 삶 가운데서 자유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안전장치가 없는 낭떠러지는 위험할 뿐이지만, 안전장치가 갖춰진 낭떠러지는 번지점프라고 불리듯이, 주님이 함께하시는 우리의 삶은 자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언제든 우리를 물기 위해 도사리는 많은 위험들이 곳곳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지키시고 이끄시는 주님을 믿으며 두려움이 아닌 자유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를 위해 구원을 주신 주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이 기쁜 삶을 더욱 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돌아오는 삶 가운데서도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말씀을 놓고 - 우리의 삶이 주님 주시는 자유함을 누리는 삶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억지로 따르는 율법주의적인 신앙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에 자유롭게 말씀 안에 거하는 자유함을 누리는 신앙이 되게 해달라고
진정한 사랑을 하길 원한다고 - 우리가 자유함을 누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겉치레적인 사랑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이 주시는 사랑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더 나아가 나 자신도 사랑하게 해달라고.
매여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 시험에 매여있는 재학생들, 과제에 매여있는 졸업생들, 사회의 여러 일들에 매여있는 직장인들까지. 세상에 요구하는 가치들에 억지로 끌려다니는, 죄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하시기에 얻는 자유함이 그들 가운데 있게 해달라고, 우리 생각나는 지체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하임 공동체를 위해 기도합시다. - 각 학교 예배공동체 안에서 함께하는 모두가 예배를 통해, 교제를 통해 주님의 자유함을 누리는 공동체가 되게 해달라고. 또한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사역들, 특별히 여름 캠프 가운데 세워질 준장과 준비하는 모든 이들이 그 사역들을 통해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고.
각자의 삶과 개인적인 기도제목을 놓고 - 더이상 세상의 가치속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주님과 함께 자유함과 즐거움을 누리는 나의 삶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