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은 단호하게, 다른 것은 유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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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단호하게, 다른 것은 유연하게
오늘도 한국교회 선교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초기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님들은 전도와 교육과 의료분야에서 큰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전 설교에서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이 하신 또다른 업적 중에는 사회를 변혁시킨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분차별타파, 여성의 인권신장, 여성 교육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나라의 문화와 체질을 바꾸는 것들입니다.
또한 당시 우리나라는 수많은 악습, 구습들이 있었습니다.
예를들면, 술, 담배, 아편, 미신, 제사, 첩을 두는 일, 노름도 큰 문제였습니다.
생각해보시면 우리 아버지 세대만해도 술이나 노름으로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은 악습과 구습들을 끊어내고자 하셨습니다.
그 중 술과 담배는 특이하게도 처음부터 금지한 것은 아닙니다.
선교사님들 중에도 초기에 술과 담배를 하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제가 예전에 사진에서 본 한 선교사님은 한복을 입고 곰방대를 물고계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패가망신, 즉 집이 망하고, 몸도 망가뜨리는 것이 술과 담배인 것을 알자 금주, 금연을 권면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가 술과 담배를 금하는 운동을 펼친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매일 술에 찌들어 살던 사람, 담배를 입에 달고 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안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보다 먼저 친구들이 알아차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금주, 금연은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변화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사람을 바꾸는 종교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렇지만 술과 담배가 결코 구원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과는 크게 관련이 없습니다.
유럽에 가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중에도 가끔 맥주를 드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금연, 금주는 좋은 기독교의 문화일 뿐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초기 한국교회에 큰 문제가 된 이슈가 있습니다.
바로 제사입니다.
제사는 많은 토론과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조선의 문화로 봐야할지, 우상숭배로 봐야할지 말입니다.
지금도 제사는 기독교인들에게 큰 이슈이니 당시는 얼마나 심각했을까요?
유교문화로 인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제사를 금지하는 일은 선교에 있어 큰 장벽이었습니다.
제사를 금지하는 것 때문에 기독교를 못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는 죽은 사람을 숭배하는 우상숭배라고 여겨 금지했습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 역시 일본황제를 태양신으로 숭배한다는 것때문에 금지했습니다.
물론 신사참배는 나중에 일제의 압박으로 타협한 교회들이 있었지만, 이 일로 인해 해방이후 공개적으로 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제사는 절대로 타협할수 없는 일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공동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로 수용할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문제에 관한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그 문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론]
14장까지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하는데 있어 유대인들의 심한 박해를 경험했습니다.
죽을 고비를 몇차례 넘기기도 했습니다.
위기의 순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공동체 내부에서 오는 혼란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은 외부의 박해가 아니라 내부의 혼란입니다.
외부의 박해는 똘똘 뭉치면 이겨낼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부의 혼란은 서로 분열시켜 힘을 잃게 만듭니다.
과연 안디옥 교회 내부에서 어떤 혼란이 일어났을까요?
1절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에 있을때의 일입니다.
어느날 유대지역에서 온 몇몇 사람들이 성도들에게 이상한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구원을 얻으려면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포경수술과 비슷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유대지역에서 온 것으로 볼때 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안디옥에 온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자신들처럼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게 되면 곧바로 율법도 지켜야 합니다.
할례와 율법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지켜야할 대표적인 의무입니다.
그들의 주장의 핵심은 이방인에서 곧바로 그리스도인이 될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처럼 할례를 통해 유대인이 된 후에 그리스도인이 될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그들의 주장은 예수님을 믿는것 만으로는 구원받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참 얼토당토 않은 말입니다.
그러나 당시 안디옥 교회는 그들의 가르침을 쉽게 무시할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유대에서 왔기 때문에 혹시 예수님의 직계 제자인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아닐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했을수도 있구요.
그러니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혼란스러울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구원받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모독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복음은 예수님 더하기 무엇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 한분만으로 구원을 얻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말고 그 어떤 것을 첨가해도 그것은 더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신천지가 왜 이단 사이비입니까?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 말고도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도 열심히 해서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십사만 사천명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사람들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 말고 무엇인가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면 모두 이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쉽게 속을까요?
구원받는게 너무 쉽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으려면 뭔가 자신이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려면 특별한 헌신이나 행위가 필요하거든요.
불교도 이슬람교도 많은 규율들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그렇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전에 이방종교를 믿었었던 안디옥 교회 성도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2절입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안디옥 교회가 많이 혼란해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담임목사인 바울과 바나바가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그들에게 화를 내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논쟁이 벌어집니다.
물론 바울과 바나바가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그들을 강제로 쫓아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안디옥 교회 대표 성도들 몇명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이 굳이 400킬로 넘게 떨어진 예루살렘까지 가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를 간단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신앙의 본질인 구원을 건드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방인 선교를 계속 해야하는데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굉장히 중요한 이슈라고 여긴 것입니다.
어차피 그들을 쫓아낸다고 해도 그들이 다른 교회로 가서 또다시 그런 가르침을 전할게 뻔합니다.
그러면 이미 세워진 수많은 이방인 교회들이 큰 혼돈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 참에 이런 주장을 확실히 뿌리 뽑으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도들, 장로들과 담판을 짓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한 것입니다.
3절입니다.
바울과 바나바 일행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도중 이미 세워진 교회들을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전도여행중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온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그곳 성도들은 모두 너무 기뻐합니다.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방문한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4,5절입니다.
처음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그 곳 사도들과 장로들이 환영해 줍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보고를 하자 분위기가 확 달라집니다.
이방인들이 주님께 돌아온 일들을 보고하자 뭔가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사도들도 쩔쩔매면서 눈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때 몇몇 사람들이 일어나 안디옥 교회를 혼란케한 자들처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쩌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조상대대로 내려온 관습이고, 전통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의 문화를 존중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순히 술, 담배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신앙의 본질을 건드리는 문제입니다.
또한 성도의 교제를 막아버리는 문제입니다.
할례와 율법이 의미하는 바는 정결법도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되면 유대인들은 부정한 이방인들과 식사교제를 할수 없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할례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함께 식사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에 큰 문제가 생길까요?
바로 성만찬을 함께 할수 없습니다.
안디옥 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은 할례 안받았기 때문에 성만찬에서 빠져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신앙의 본질을 뒤흔드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문제를 심도있게 다룹니다.
문제는 많은 논쟁을 했지만 결론이 잘 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도 두 진영 모두 자신들의 입장을 물러설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7-11절입니다.
베드로가 일어나서 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이방인 고넬료 사건을 언급합니다.
성령의 인도로 인해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베드로가 복음을 선포하자 고넬료와 그의 식구들이 모두 성령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때 고넬료와 그의 식구들이 할례를 받았나요? 율법을 지켰나요?
베드로가 율법을 지키려면 부정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찾아가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고넬료의 집에 성령을 내려주셨습니다.
그 일을 경험한 베드로는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임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 가장 큰 증거입니다.
그러니 그 어느 누가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을수 있다고 주장할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11절에서 확실히 못을 박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는다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더이상 덧붙일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여전히 할례받고, 율법을 지켜도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할례와 율법을 주장하는 그들을 책망합니다.
유대인들도 다 지킬수 없는 율법을 가지고 왜 하나님을 시험하느냐고 책망합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보여줬는데 그것을 거부하면 불순종에 불과합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율법은 지키기 힘든 멍에입니다.
멍에란 소들 어깨에 메는 나무로 만든 도구입니다.
율법이 유대인들을 억누르는 멍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방시켜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멍에를 벗기시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멍에를 다시 지게 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대항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무너뜨린 차별의 장벽을 그들이 다시 세운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공동체의 진짜 위기는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옵니다.
아무리 박해해도 핍박해도 교회는 세워지고 성장합니다.
그러나 안에서 싸우면 답이 없습니다.
교회는 무너질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문제없는 교회 없습니다.
문제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가 신앙의 본질에 관한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머나먼 예루살렘까지 가서 토론과 논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의견이 안 받아들여져서 다 떠났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뒷부분을 못봤지만 유대인들의 의견도 일부 수용합니다.
이방인들의 모습중 유대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부분들은 회의에서 수용하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회의입니다.
이처럼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반드시 하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탄 마귀는 본질적이지도 않는 문제가지고 우리 공동체를 분열시키려 합니다.
어떤 교회는 피아노 자리 옮기는 것으로 성도들끼리 싸웠다고 합니다.
수십년동안 피아노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왜 옮기느냐는 것이죠.
제가 필리핀에 있을때에도 이해할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매번 아이들이 예배에 1시간, 2시간씩 늦는 것입니다.
화가 나고 힘이 쭉 빠지는 시간들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문화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아님을 알고 그때부터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때는 예배를 몇시간씩 드렸습니다.
애들을 기다리느라고요.
이처럼 본질과 본질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도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지혜입니다.
그것을 분별하여 본질인 것이라면 단호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넉넉하게 품어주고 수용하면 됩니다.
제가 운동해보니까 겉으로 보이는 근육보다 훨씬 중요한게 속으로 보이는 근육이더라구요.
그게 무너지면 뼈도 무너지고 몸이 망가집니다.
겉으로는 멀쩡해보여도 속이 곯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교회도 속근육이 튼튼하여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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