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게 하시는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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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길

예수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셔요. 모르는 것을 깨닫게 하셔요.
빌립은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주님께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았고, 가고 싶은 데로 가지 않았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오랜 세월 순회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종이다. 주님의 종은 주님께 얽매인 사람이다. 우리는 주님의 세밀한 인도를 받으며, 주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
주의 종은 주님의 이끌림으로 살아야한다. 주의 종은 주님에게 순종하며 살아야한다.
2.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빌립이 나타나 그 글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가르쳐 주는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날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장치가 충분히 마련되어야 한다. 목사들과 교사들은 더욱 성경을 잘 공부하여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교인들은 성경을 함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훈련된 선생으로부터 잘 배워야 한다.
3. 우리는 빌립이 이사야 53장을 해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친 것을 통하여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와 가치를 깨닫는다.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은 예수님의 오심과 그분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단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교훈집으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성경을 구속사적(계시역사적,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4장)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3장)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
틴데일 신약주석 사도행전 7. 한 에디오피아 사람의 회심(8:26–40)

이사야서 53:7f는 다른 사람들의 죄의 결과를 지고 모든 종류의 수치를 고난으로 감당해야 하는 하나님의 종을 가리키는 예언적 본문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종은 그들의 죄를 위하여 어떤 종류의 대속을 행할 것이며 마침내 하나님에 의해 높이 올려질 것이다.

틴데일 신약주석 사도행전 7. 한 에디오피아 사람의 회심(8:26–40)

빌립은 남쪽으로 향하여 가도록 지시받았다(RSV 본문). 그러나 그 헬라어 어구는 또한 ‘정오에’(at noon)로 번역될 수 있다.비록 최근의 번역본들 중 어느 것도 자신들의 본문에서 이 번역을 채택하지 않을지라도, 그 해석은 바른 번역이 될 수 있는데, 그 번역은 빌립을 향한 명령을 더더욱 이상하고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정오에 그 길은 열기로 말미암아 여행자들이 움직이지 않는 노선이었다. 논의되고 있는 그 길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헤브론에 이어지는 길이었고, 서쪽 길로는 가자(Gaza)에 있는 해안에 닿는 길이었다. 그 길은 광야는 그 명령의 이상함을 강조하는 누가의 논평이다.

틴데일 신약주석 사도행전 7. 한 에디오피아 사람의 회심(8:26–40)

내시라는 용어는 평상시에는 거세된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한 사람들은(비록 이사야 56:3–8이 그들에 대해 미래에는 더 나은 대우를 제공할지라도) 유대 율법에 의하여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신 23:1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

15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 가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두려워 떨며 칠 일을 지내니라

파수꾼 에스겔 (겔 33:1–9)

16 칠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20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주의 말씀을 전하는 파수꾼으로 세우신다. 성령의 이끌림대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
주님 사랑하시는 영혼을 지키는 파수꾼들로 우리를 세우셨다. 주인이 지키라고 명령하시는 영혼을 지켜낸다. 보호한다.
2016 사도행전 8 강 말씀/사도행전 8:1-40 요절/사도행전 8:34 누구를 가리킨 것입니까? 본문은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을 통한 하나님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마리아에 일어난 일이요, 다음은 광야에서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첫째, 시몬의 능력, 빌립의 능력(8:1-13).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을 때 사울이 거기 있었는데, 그는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다 여겼습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었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없애기 시작했습니다.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런 박해는 복음의 말씀을 더 널리 퍼뜨리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박해가 없었다면 사마리아에 그리스도가 전해지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예루살렘에 박해가 있었고, 그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빌립은 박해를 피해서 나갔고 사마리아로 가게 되어 거기서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빌립이 전한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이름, 오히려 박해를 받는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 때문에 빌립도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빌립이 사마이아에서도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것은 그가 전한 그리스도가 사마리아 사람들의 그리스도 되심을 발립이 믿었다는 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이방인 취급하던 사람, 곧 더러운 사람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이요, 적대시하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같이 앉아서 음식도 먹지 않았으며, 그릇도 같이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런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서는 박해 받는 이름이었는데, 사마리아에서는 어떠했습니까?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이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졌습니다. 사도행전 3 장에서 베드로가 나면서 앉은뱅이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러자 그 사람이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의 이런 일이 사마리아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의 이런 일이 지금 우리 가운데서도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였는데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시몬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신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 시몬 자신이 능력을 행하던 마술사였습니다. 그런 그가 빌립이 행하는 능력을 보고 시몬을 따라다녔습니다. 그것도 건성으로 따라다닌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따라다녔습니다. 시몬은 빌립이 행하는 능력에서 자신의 능력과는 다른 무언가를 본 것입니까? 혹 시몬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을 빌립에게서 본 것입니까? 시몬의 능력과 빌립의 능력이 어떻게 다를까요? 시몬은 마술사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마술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빌립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마술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시몬의 능력을 보고 놀라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시몬이라는 사람 자체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시몬을 높였습니다. 시몬의 능력은 시몬 자신을 크게 하고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한편 빌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더러운 사람을 깨끗하게 했습니다.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을 낫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반면 시몬의 능력이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주지 못했고 기쁨을 주지도 못했습니다. 마술의 능력도 분명 큰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더러운 사람을 깨끗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중풍병자, 곧 손과 발이 마비된 사람의 마비를 풀어주지는 못합니다. 못 걷는 사람을 걷게 하지는 못합니다. 한국 초대교회 시절 길선주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도를 닦던 도사였습니다. 그는 공중부양도 했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특별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이 길선주를 유명하게는 했지만 마비된 사람을 풀어주지는 못했습니다. 사람을 돕거나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 중에 마술에 버금가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래에 정말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악기 연주자가 있고, 춤꾼도 있습니다. 공부의 천재가 있어서 초등학생 때 이미 대학 공부를 한 이도 있습니다. 사업에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돈길을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그런 능력을 갖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이라도 마비된 사람을 풀어주지는 못합니다. 내면이 더러운 사람의 내면을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 능력이 그 능력 가진 사람을 높여주기는 하지만,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런 능력이 사람들을 놀라게는 하지만 기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런 능력이 때로는 걷는 사람을 걷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한 여자아이가 있는데, 어릴 때 책도 많이 읽고 총명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때 그룹 동방신기에 노래에 빠져서 쫓아다니느라고 시간과 돈을 쓰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여자아이가 어디 그 하나뿐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못 걷는 사람을 걷게 합니다. 힘없던 사람을 힘 있게 합니다. 내면이 더러운 사람의 내면에서 더러움을 몰아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마비된 사람의 마비를 풀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5 장에서 38 년 병자에게 “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셨을 때,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마술의 능력, 사람의 능력과 다른 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목자들도 능력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능력으로 혹시라도 내 이름을 높이기를 원하고 내가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내가 원하는 능력은 마술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바라야 할 능력은 이런 마술의 능력이 아닙니다. 못 걷는 사람을 걷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바라야 할 능력입니다. 둘째, 사마리아 사람도 성령을 받았습니다(8:14-17).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니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해 성령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런 그들이 성령 받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도가 안수하니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성령 받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먼저, 앞으로 성령의 구체적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구태여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사도들에게 성령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령은 거룩한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을 가장 잘 압니다. 성령은 사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성령은 사도들을 실제 삶의 과정에서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사도행전 2 장에서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큰 일을 알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의 신자들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 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는 것, 그들이 삶의 여정 가운데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새로운 시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들은 성령의 나타내 보이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데서 자라가야 합니다. 중요한 일이나 사건 때마다, 필요할 때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때마다 진리 가운데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자기들의 감정이나 판단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일하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그 말씀대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렇게 하면 말씀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다음으로, 사마리아를 유대와 동일시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 받기를 기도했는데, 사도행전 2 장에서 성령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임했습니다. 사도행전 2:38 절에서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 사도행전 10 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랬을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습니다(10:44).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랐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사도행전 11:17) 그들은 그 때까지는 성령은 유대인들에게만 임하는 것으로 생각했지 이방인에게 내려온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에게 성령이 내려온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베드로가 먼저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시도록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8 장 본문에서는 베드로, 요한 자신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 사람들을 유대인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한 것이 아닙니까? 두 사도는 전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다가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서 하신 일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수가 성의 그 여자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기억했을 것이요, 또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하는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빌립을 통해서 사마리아에 일어난 일을 보고서 이제 사마리아도 유대인과 똑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도 분명 유대인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조상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다만 북 이스라엘이 남 유다와 분리하여 나라를 세우고, 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한 이후로부터 유다와 달라졌고 단절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유대와 사마리아가 같은 뿌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제 사마리아도 다시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국민이 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같은 뿌리로 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의 국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간 과정에서는 많이 달랐다 하더라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선물, 돈(8:18-25).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리며 말했습니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함께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용서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이 말에서 우선 볼 수 있는 것은 성령을 줄 수 있는 능력, 또한 성령을 받는 것은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물이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람의 행위나 돈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그냥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몬은 돈을 주고 그런 능력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시몬은 그런 능력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마술의 능력을 가진 사람인데, 아마도 그는 그 능력을 선배 마술사로부터 돈으로 산 것 같습니다. 김해경이라는 유명한 박수가 있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박수나 무당이 능력을 받으려면 선배 박수나 무당에게 많은 돈을 주고 그 능력을 사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문의 시몬도 그런 세계에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에게 돈을 주면서 “이 능력을 내게도 주십시오.”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돈을 받고 성령을 파는 그런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요, 이는 또한 하나님을 시몬이나 그 부류들이 믿고 있는 신 중 하나와 똑 같이 여기는 것이 됩니다. 앞에서 사람들은 시몬을 가리켜 “크다 일컫는 신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시몬에게 주어진 능력은 신의 능력이었고, 시몬은 그 신의 능력을 돈 주고 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시몬에 베드로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면, 시몬은 베드로가 믿는 하나님을 자기가 믿는 신 중 하나로 여기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가 믿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돈 받고 팔지 않으십니다. 시몬이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한 것도 악하지만, 그보다 더 악한 것은 하나님을 신들 중 하나로 여긴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시몬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길 될 것도 없느니라.” 지금도 자기들 신의 이름으로 복을 파는 사람들, 곧 돈을 받고 복을 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액수가 많은 만큼 받는 복도 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돈을 주고 복을 사려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 돈을 주고 하나님의 복을 팔려고 하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신 중 하나로 여깁니다. 하나님을 돈 주고 복을 파는 분으로 만듭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을 하려면 돈을 투자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돈을 투자해야 돈을 법니다. 하나님의 일에서도 그런 생각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돈을 드린 만큼 하나님의 성령이 주어지고 성령의 일하심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실제로 교회를 개척할 때도 돈을 많이 드려서 좋은 건물을 얻거나 짓고 좋은 기구들을 들여놓고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야 성령이 일하시고 개척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돈이 있어야 성령의 일하심이 있지 돈이 없으면 성령의 일하심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생각을 악하다고 말합니까?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함께 네가 망할지어다.”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그러면 돈 없이도 성령이 주어지고 성령의 일하심이 나타날 수 있습니까?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성령은 일하십니까? 넷째, 누구에 관한 것입니까?(8:26-40) 8: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일은 광야라.” 그 때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일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의 복음역사가 활발하고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활발한 사역은 빌립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빌립은 계속 사마리아에 남아서 그 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빌립이 시작한 그 일을 빌립이 끝까지 해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복음 역사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는 그런 빌립을 광야로 보냅니다. 그 광야에는 마침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고국으로 가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환관이었습니다. 주의 사자는 빌립을 그 한 사람에게로 보내셨습니다. 그 한 사람이 사마리아의 활발한 복음사역,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보다 이 환관이 더 소중합니까? 이 한 사람이 사마리아의 활발한 복음사역보다 더 무게가 나갑니까? 그 환관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주의 사자는 빌립을 그 사람에게로 보내셨습니까? 그는 “이 선지자는 누구에 대해 말했습니까?“ 라고 물은 사람입니다. 빌립이 그 사람에게로 가까이 보니 그 사람이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읽는 것을 깨닫습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했습니다. 그가 읽고 있던 성경 구절은 이것입니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그가 빌립에게 말했습니다.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입니까? 자기를 가리킵니까? 다른 사람을 가리킵니까?” 이렇게 말하는 이 사람을 보면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사람은 성경을 읽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려고 멀리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에티오피아 사람으로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온 것을 보면 아마도 유대교로 개정한 사람 같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돌아가는 길, 수레 위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이사야 53 장 말씀에 꽂혔습니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않았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그가 왜 이 말씀에 꽂혔을까요? 어쩌면 그는 이 본문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 같습니다. 그는 권세가 있기는 했으나 내시, 곧 고자였습니다. 그는 남자이지만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고자는 마른나무 취급을 당했습니다. 장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다 권력 암투가 심한 궁중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시로서 무시를 많이 당했을 것입니다. 권력자들 앞에서 잠잠해야 했습니다. 굴욕을 당할 때라도 공정한 판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여왕의 살림을 맡은 사람으로 힘이 있기는 했지만, 내적으로는 내시, 곧 고자로서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수치를 많이 당했을 것입니다. 당한 수치에 대해 복수할 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조용히 견딜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이 말씀이 그의 마음에 깊이 꽂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문에서 말하는 이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다음으로, 그는 물었습니다. “누구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까?” 이를 간략하게 말하면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본문이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그 사람 자체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이 말하는 이 사람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한다면, 결국 이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누구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까?” 라고 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조금 확대해석하면 이 내시는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 하되 이론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자기 존재와 직결된 분으로서 알고 싶어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이 내시로 살면서 굴욕을 당해야 했고, 공정한 판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 그는 마음에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물론 분노를 그대로 폭발할 수는 없었습니다. 왕에게 그런 분노를 폭발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자기 밑의 사람들에게 그런 분노를 쏟아냈을 수 있습니다. 그는 결코 잠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읽고 있는 성경 속의 이 인물은 잠잠했습니다. 모든 굴욕을 잠잠하게 겪어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이 인물이 정말 누구인지, 이런 인물이 실존하고 있는지, 아니면 지어낸 가상의 인물인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인물이 정말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지, 이런 인물이 구약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인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주의 사자는 이런 이 사람을 위해서 빌립을 보내셨습니다. 이 사람이 빌립을 보고 물었습니다.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킵니까? 자기를 가리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가리킵니까?” 이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습니까?” 이에 명령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오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갔고,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니 그를 다시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 한 사람을 위해 성령은 빌립을 보내셨습니다. 빌립은 한창 일어나고 있는 사마리아 복음 사역을 제쳐두고 이 한 사람에게로 왔습니다. 성령께서 보실 때 그만큼 이 한 사람이 소중했습니다. 이 사람은 삶의 깊은 아픔을 가진 사람입니다. 비록 권력을 가지기는 했지만 사람으로서는 보통 사람이 알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사람입니다. 굴욕을 당했을 때 정당한 판결을 받지 못한 아픔,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입을 열지 않고 말없이 견뎌내야 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픔 가운데서 이사야가 말하는 ‘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의 이런 물음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삶에서 나온 살아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결국 “이런 일을 겪으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 질문 또한 지적인 질문이 아니라, 자신의 전 삶과 연결된 질문입니다. 그는 성경 속에서, 또한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 질문을 할 때 그는 광야에 있었습니다. 사람이 없는 곳에 혼자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에게서 인생의 답을 찾지 않고 성경 안에서 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런 한 사람을 위해서 빌립을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한창 일어나는 사마리아 사역을 제쳐두고서라도 빌립을 그에게로 보내셨습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성령은 그 사람에게로 빌립을 보내십니까? “선지자가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킵니까?” 라고 물은 한 내시를 위해서 주의 사자는 빌립을 그에게로 보내셨습니다. 빌립은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사마리아 사역을 떠나서 광야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광야에 있었습니다. 세상 아무도 광야에 있는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는 그의 존재를 아셨습니다. 그 한 사람을 위해 광야까지 빌립을 보내셨습니다. “선지자가 말할 것이 누구를 가리킵니까?” 라고 물으며 그리스도 자체를 알고자 하는 그런 사람은 그가 어디에 있든지, 비록 아무도 없는 광야에 있다 하더라도 주의 사자는 그를 알아보시고 그를 위해 사람을 보내주십니다.
사마리아에 대 부흥이 일어났어요. 교회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 이제 이곳에 대형 교회를 세울거예요. 함께 교회를 신나게 세워질 사람들이 생겨나요. 찬양제도 하고 함께 식사도 하고 놀기도 하고 이야기꽃이 피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빌립을 광야로 혼자 가라고 하시네요.
대낮에 햇볓이 쨍쨍 내리쬐는 힘든 길을 걸어가래요. 한 영혼을 만나러 가라고 하세요. 한국의 대형교회를 배려놓고 우간다에 배고푼 한 아이를 만나러가래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데요. 누구도 함께 해주지 않는데요. 나도 힘에 겹고 나도 외로운데요. 왜 맨날 저만 가라고 하세요? 저도 외로워요. 저도 힘에 겨워요. 딴 사람을 보내면 안되나요?
빌립아 딴 사람들은 안가도 너는 갈줄 내가 알았단다.
너만은 한영혼을 위해 울어줄주는 알았단다. 너만은 투덜대도 그 길을 걸어줄주를 알았단다.
예수님의 길, 도살장에 끌려가서 잠잠히 입을 열지 않았던 그 길을 빌립은 걸었어요.
내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기쁨이 가득하여 길을 나섰어요. 그도 예수님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어요.
빌립도 기뻤어요. 어떤 기쁨이요? 누구도 없지만 누구도 모르지만 예수님이 고마워~ 너가 나의 양을 먹여주어서 고마워~ 예수님의 사랑의 속삭임을 들었거든요.
무리들중에서 들을수 없는 음성을 들었거든요. 나를 뽐내려고 으시댈때에는 들을수없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울음을 들을수 없거든요. 한영혼을 위해 우시는 그 음성은 들을수 없거든요. 빌립은 그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의 길을 걷고 있어요.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며 오늘도 그 길을 걷고 있어요.
그들은 다시 만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길을 걸었어요. 성령님의 이끌림에 의해 내가 걸어가야하는 예수님의 길을 걸어갔어요. 성령님의 속삭임을 들으며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을 품으며 걸어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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