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의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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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사무엘상 (4. 사무엘의 소명 (삼상 3:1–4:1a))
사무엘의 소명
삼상 3:1–4:1a
사무엘상 2장이 엘리 가문의 타락과 몰락을 사무엘의 영적, 신체적 성장과 대조해 보여 준다면, 3장은 사무엘의 영적 성장에 집중하여 “아이” 사무엘이 “선지자” 사무엘로 변해 가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설명한다. 이 변화의 핵심에 위치한 사건이 성전에서의 신현 체험이다. 3장은 하나님께서 직접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사건을 기록한다. 이 사건을 통해 엘리의 도제(“소년”)였던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우뚝 설 뿐 아니라, 엘리의 리더십 아래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도 말씀의 새 시대를 맞게 된다. 즉 하나님이 실로의 사무엘을 통해 백성에게 말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본 장의 첫 절과 마지막 절을 비교해 보면 쉽게 확인된다.
【신현Theophany】 신현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이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4세기 역사가 유세비우스였다. 그는 창 18:1–5, 25; 32:28–30; 출 3:4–6; 수 5:13–15의 사건을 신현(헬라어 theophaneia)의 예로 거론했다. 신현은 하나님의 구원을 집약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늘 구원이나 심판이 발생한다. 결정적인 신현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 것이다.
해설
아이에서 선지자로 3:1, 21; 4:1a
A 1a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B 1b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C 1c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C′ 21a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B′ 21b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A′ 4:1a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1절이 묘사하는 상황이 이야기의 마지막(21절과 4:1a절)에서 완전히 역전된다. 이것은 A-B-C-C′-B′-A′의 대구 교차 구조를 통해 강화된다. 먼저, “아이 사무엘”(하나아르 슈무엘, hannaʿar šǝmûēl, 1a)이라는 표현은 사무엘이 엘리의 감독 아래에 있는 훈련생에 불과함을 보여 준다(A). 이렇게 엘리의 도제에 불과했던 사무엘이
4:1a에서는 이스라엘 온 백성을 향해 권위 있게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된다(A′). 1b, 1c절은 엘리가 백성의 영적 지도자일 때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묘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고(B), 이상이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C).
“말씀”과 “이상”은 하나님이 백성과 소통하는 중요한 두 방법이므로 1b, 1c절이 보여 주는 것은 엘리가 영적 리더십을 행사할 때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소통의 통로가 막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무엘이 영적인 리더로 세워지자 상황이 완전히 변한다.
21a, 21b절은 사무엘이 선지자로 부름 받은 후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묘사한다. 이전에는 이스라엘에 말씀이 희귀했지만(B), 사무엘이 선지자로 부름 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주 들리기 시작한다(B′). 또한 이전에는 이스라엘에 이상이 없었지만(C) 지금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빈번하게 되었다(C′). 이 모든 변화의 핵심에는 영적 리더십의 변화가 있다.
죄악에 빠진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의 통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그 악한 지도자들이 제거되었을 때, 다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말씀이 들려지고 이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엘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사무엘】 존 싱글턴 코플리(1738~1815)작.
1a절의 “엘리 앞에서”는 사무엘이 엘리의 감독 아래 있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3장에 묘사될 신현 체험에 엘리가 긍정적으로 역할을 담당할 것을 암시해 준다. 사무엘이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과정에 엘리의 가르침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나 이야기에서 엘리의 축복이 한나의 문제 해결에 긍정적 역할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엘리의 지도력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희귀하다”(1b)와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1c)라는 말의 이중적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희귀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카르(yāqār)는 본래 상인들의 용어로 ‘비싸다’라는 의미다. 사무엘서 저자가 이 상업 용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칭한 것은 개역개정의 번역대로 말씀이 “희귀했다”는 의미를 표현하는 동시에 엘리의 시대에는 말씀이 상품화되었음을 암시한다. 즉 말씀을 전하는 제사장이 목자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도구로 백성을 이용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 말씀이 시장에서 소비되는 상품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을 중간에서 도적질한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도 장사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사욕을 채웠을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한편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니프라츠(niprāṣ)도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문맥상 개역개정처럼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니프라츠의 뉘앙스는 스스로 돌파해 나가려 하나 잘되지 않는 모습을 표현한다. 즉 하나님의 “이상”이 무엇인가에 막혀 이스라엘에게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을 표현한다.
이것은 당시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영적 소통을 가로막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말씀과 이상이 희귀해졌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찾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과 소통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들과 만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중보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제사장들이 오히려 소통을 방해하고 있다.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는 구절에는 이런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한 노력과 그 소통에 걸림돌이 되는 제사장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선택하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소통을 방해하는 제사장이 제거된다는 주제가 바로 3장의 주된 가르침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신적 계시의 투명한 통로가 될 것이다.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었음을 묘사하는 21절에서 “실로”가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소명을 받은 사무엘이 당시 실로의 제사장들을 대체할 것임을 암시한다.
하나님이 “실로에서”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기 시작했다면, 실로 성소의 영적 권위는 엘리에서 사무엘로 이동한 것이다.
당시 실로가 전국적 예배 중심지였음을 고려하면 사무엘이 실로에서은 그가 전국적인 권위자가 되었음도 암시한다.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과 계시의 통로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약속받은 유업마저 빼앗길 것이다.
과거의 신앙 고백이 현재도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는 명령을 무효화시키지 못한다.
예수를 따른다고 고백하면서 세상과 똑같은 냄새가 나고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우리도 엘리 가문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까 두려워해야 한다.
사무엘이 성전에 누움 3:2–3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본 단락은 사무엘의 신현 체험 직전의 상황을 설명한다.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운 반면 사무엘은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다. 물론 눕는 행위(샤카브, šākab)에는 일차적으로 잠을 자려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잠을 청하는 행위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사무엘이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다고 할 때, 그 여호와의 전에 “여호와의 궤”가 있었음을 굳이 언급하는데, 이것은 사무엘의 “눕는 행위”가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리는 행위임을 암시한다. 고대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근동에서 문제를 가진 개인이 신으로부터 응답을 얻기 위해 신전에서 잠을 자는 풍습(인큐베이션 참고)이 있었다. 이방인들은 신상 곁에 눕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궤 곁, 즉 성소에 누워 말씀을 기다렸다. 사무엘이 여호와의 궤가 있는 성전에 누웠을 때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 그것은 “소년” 사무엘이 아니라 대제사장 엘리의 일이었다. 엘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리며 성전에서 잠을 청해야 정상이다. 엘리와 사무엘이 살던 시대는 사람들이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어둠의 시대였고,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이 희귀한 시대였다. 이런 때일수록 대제사장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고 노력하고 성전에서 잠을 청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엘리는 도제 사무엘을 성전에서 자게 하고 자신은 침실에서 잠을 청한다.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엘리는 말씀 받기를 포기한 것 같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조차 믿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형식적인 성전 철야를 맡겼을 것이다. 형식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엘리가 사무엘에게 “하나님 음성을 듣는 법”을 지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사무엘에게 일렀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는 그러지 않았다.
【인큐베이션incubation】 주전 5세기부터 헬레니즘 세계에 질병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신전들이 생겨났다. 이 신전들은 대개 아스클레피우스에게 봉헌된 것으로, 병자들은 이 신전에서 잠을 자면 꿈속에 아스클레피우스가 나타나 병을 치료해 준다고 믿었다. 실제로 이 신전의 영내는 고침받은 환자들의 간증을 새긴 비석들로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주후 3세기경까지 아스클레피우스 신전과 기독교 교회가 ‘환자 유치’를 위해 경쟁했다고 한다. 성경 시대의 근동에도 이 관습이 행해졌다. 그러나 신전에서 꿈을 청하는 이유는 치료 목적에 국한되지 않았다. 다양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신전에 와 잠을 잠으로써 신의 도움을 얻으려 했다. 특히 왕들은 전쟁과 같은 중대사를 앞두고, 혹은 역병과 같은 대재난의 원인을 알기 위해 신전에 누워 꿈을 청했다. 그러면 신들이 꿈에 나타나 왕들에게 신탁을 주곤 했다. 성경에도 이 관습의 영향이 엿보인다. 사무엘이 성전에서 계시를 받은 일이나 솔로몬이 꿈을 통해 지혜를 얻은 것 등은 인큐베이션 관습과 관련해 많이 논의된다.
엘리가 자기 처소에서 잔 것이 영적 태만의 결과임을 보여 주는 힌트는 엘리의 시력이다. 저자는 엘리의 시력이 나빠져 잘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엘리가 성전이 아닌 사택에서 잠을 청한 사실과 병치시킴으로써(2절), 후자가 영적 태만의 결과임을 암시한다. 엘리의 나이가 많다는 사실은 2장 22절에 언급되었지만 엘리의 노안이 언급되는 것은 3장이 처음이다. 이것은 2장 22절과 마찬가지로 엘리가 분별력을 잃어 간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한편 사무엘이 성전에서 잠을 청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다”는 구절과 함께 등장한다(3절).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 ‘테렘 이크베’(ṭerem yikbeh)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의미 이외에 ‘거의 꺼져 간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여기서 본문의 문자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먼저, 본문이 ‘하나님의 등불이 거의 꺼져 가고 있다’라고 번역된다면, 이때가 새벽임을 알 수 있다. 제사장들은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휘장 앞에 설치된 “여호와의 등불”을 매일 저녁부터 아침까지 밝힐 의무가 있었다(출 27:20–21, 레 24:1–3 참조). 그 등불이 꺼져 간다는 말은 새벽이 가까워 옴을 보여 준다. 고대 세계에서 새벽은 신의 출현이 가장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따라서 이 언급은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곧 일어나리라는 기대를 안긴다. 둘째, 본문을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로 번역한다면, 그것은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의미다. 그 희망의 빛을 더 큰 횃불로 지피기 위해 여호와의 궤가 있는 성전에 사무엘이 누워 있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이스라엘을 인도해야 한다. 각자의 소견이 아니라 “말씀”이 필요하다. 사무엘은 시대를 깨울 하나님의 말씀을 고대하며 지금 성전에 누워 있다. 3절에서 사무엘이 눕는다는 내용과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다”는 구절이 나란히 등장한 것은 이 드러누움이 단순히 잠을 청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고대하는 행위임을 알린다.
사무엘을 세 번 부르심 3:4–9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여호와의 등불】 이것은 성막과 성전에 설치된 등잔대(메노라, mǝnōrāh)를 가리킨다. 출애굽기 25:31–39에 따르면 등잔대는 좌우로 세 개의 가지를 가진 나무 모양이다. 이것은 성전 내부를 밝히기 위한 충분한 화력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에덴 동산을 상징적으로 연상시킨다. 등잔대에는 기름을 담을 수 있는 받침대가 있어 몇시간 동안 불을 밝힐 수 있었다. 잠언 31:18에 따르면 밤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돌보는 여자를 부지런한 자로 칭찬한다. 성경에서 등불은 종종 생명에 비유된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그가 생명을 주는 분이라는 뜻이다(요 8:12; 9:5). 예수님의 비유에서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생명 되신 신랑을 영접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생명을 살리는 선한 행실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의미이다(마 5:14–16).
“아이 사무엘”(1절)을 하나님께서 부르신다. 그러나 아직 미숙한 도제였기에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한다. 그 음성은 엘리의 평소 목소리와 분명히 달랐지만, 자기를 부를 분은 엘리밖에 없다고 확신한 사무엘은 사택에서 자고 있는 스승에게 달려가 “부르셨습니까”라고 묻는다. 잠에서 깬 엘리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고 간결히 말하고 다시 잠을 청한다. 다시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신다. 마찬가지로 사무엘은 엘리에게 달려가 “부르셨습니까”라고 묻는다. 다시 깬 엘리는 사무엘을 “내 아들아”라고 부르며 “부르지 않았으니 다시 누우라”라고 명한다. 엘리는 두 번이나 잠에서 깬 것이 귀찮았지만 순종적이며 사랑스러운 사무엘을 “내 아들아”라고 호칭한다. 자신의 훈계를 따르지 않는 아들들보다 사무엘이 더욱 “아들”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다. 세 번이나 사무엘이 찾아오자 엘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을 직감하고,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자세히 알려 준다.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여기서 사무엘을 돌려보내는 엘리의 말은 이전과 다르다. “다시 누우라”(5, 6절)가 아니라 “가서 누우라”(9절) 한다. “가서 누우라”는 “다시 누우라”와 다르다. 후자는 “다시” 잠을 청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누우라”는 것이다. 세 번째 “누움”은 듣기 위해 “가서” 눕는 것이다.
왜 성경은 세 번이나 부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기록할까? 세 번 모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서 합당한 응답을 듣지 못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계속 부르신 첫째 이유는 세상이 어둡고 계시가 사라졌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3장의 주인공은 사무엘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역동적으로 참 이스라엘을 부르며 찾고 계신다. 계시가 없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신다. 들을 귀 있는 제사장이 없었기에 이스라엘에 계시도 이상도 없었던 것이다. 이미 설명했듯 하나님의 이상은 계속 돌파(니프라츠, niprāṣ)를 시도하지만, 죄 가운데 있던 제사장이 하나님과 백성의 소통을 가로막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합당한 응답이 없어도 인간을 향한 부르심을 쉬지 않으신다.
둘째 이유는 악한 세대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소통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의미다. 이것은 소통을 가로막은 악한 제사장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무엘처럼 영적으로 순수한 사람도 하나님과 쉽게 소통하지 못한 것은 사무엘도 시대의 영향을 받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분명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제사장이 되는 절차를 다 밟았을 것이다. 엘리 밑에서 좋은 제사장이 되려고 신학 수업을 열심히 이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 수업’을 받았어도 그는 하나님과의 대면적 만남이 준비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음성이 실존적으로 찾아왔을 때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무엘이 속한 시대, 그 사회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했기에 사무엘처럼 영적으로 열린 사람도 막상 음성이 들리자 즉각 반응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7절은 사무엘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진술한다. 오늘날도 그렇다. 신학 과정을 이수한다 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대로 살아 보는 경험을 통해 말씀으로 고난을 이기고,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사랑과 나눔의 동력을 얻은 사람만이 말씀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말씀이 “나에게 나타났다”고 고백할 수 있다.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음 3:10–14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1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2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13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
10–14절은 신현 장면을 묘사한다. 10절에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짧게 대답하고, 11–14절에서는 하나님이 엘리 가문에 심판을 선언하신다.
여기서 사무엘이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만은 아니었다. 10절의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는 이 사건을 ‘이상’ 혹은 ‘비전’으로도 볼 수 있게 한다. ‘임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야보’(wayyābōʾ)는 ‘들어오다’의 의미이며, ‘서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이트야짜브’(wayityaşşēb)는 누워 있는 사람의 머리맡에 서 있는 신의 모습을 지칭한다. 따라서 3절은 여호와께서 사무엘이 자고 있는 처소로 들어오셔서 사무엘의 머리맡에 서 계신 모습을 보여 준다. 이것은 고대 근동 문학의 신현 장면과 일치한다. 신이 신전에 들어와 그곳에 누워 있는 제사장 혹은 신도의 머리맡에 서서 계시를 내리는 장면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무엘이 음성만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까지 체험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15절이 사무엘의 지난밤 경험을 지칭하면서 “이상”(vision, marʾeh)이라는 말을 사용한 점을 보면 확인된다.
성전에 들어와 사무엘의 머리맡에 선 하나님은 사무엘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어두운 세대에 참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간절하고도 긴박한 마음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중요한 시점에 자기 백성을 찾아오셔서, 이름을 두 번 부르곤 하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했을 때, 주의 천사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두 번 이름을 부른다(창 22:11). 야곱이 온 가족의 이민을 앞두고 낯선 땅에서 맞을 미래를 두려워할 때, 하나님은 밤의 이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야곱아, 야곱아” 두 번 불러 주신다(창 46:2). 불타는 가시떨기 나무에서 모세와 대면하실 때도 하나님은 “모세야, 모세야” 부르며 대화를 시작하신다(출 3:4). 이름을 두 번 부르는 행위는 그의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간절함과 연결된다. 사사 시대 말의 절망적 어둠 가운데 하나님은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며 사무엘을 다급히 찾으신다. 사무엘도 그 긴박함 때문에 세 번이나 엘리에게 “달려갔던” 것이다. 그러나 네 번째, 하나님의 음성임을 깨달은 사무엘은 엘리가 지시한 대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한다. “듣겠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메아’(šōmēaʿ)가 사무엘의 이름을 연상시킨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것은 사무엘의 장점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사무엘은 듣는 데 뛰어났다. ‘순종’은 사무엘의 인격과 사역의 특징이다. 지금까지 사무엘은 엘리에게 순종하였지만 앞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들으며 살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대답을 엘리가 가르쳐 주었다는 점이다. 엘리는 사무엘을 통해 주실 계시의 말씀으로 자신이 멸망할 것도 모른 채,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하고 대답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11절부터는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주신 첫 계시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는 말은 그 계시가 충격적일 것임을 암시한다. 사무엘이 그 밤에 받은 메시지는 가장 존경받는 영적 지도자 엘리의 심판이다. 이것은 사무엘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엘리와 그 아들들이 하나님을 저주했다는 내용(아래 13절의 설명을 보라), 엘리 가문의 죄악이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내용(14절)은 경건과 거룩의 모범으로 엘리를 생각했던 사무엘에게 너무나 충격이었을 것이다. 유명 목회자가 추악한 죄를 저지르며 오랜 세월을 살아 왔다는 내용이 드러날 때 주는 충격과 유사할 것이다. 더구나 그 목회자가 평소 존경하던 담임목사라면 그 충격은 더 클 것이다. 사무엘은 스승 엘리의 죄악과 그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직접 듣는다. 사무엘 이외에 어떤 이스라엘 사람도 엘리의 죄악과 하나님이 내린 평가를 알지 못한다. 사무엘이 그 메시지를 듣고 느꼈을 당혹감이 어떠했을까. 어느 목회자의 은밀한 죄를 최초로 알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충격은 물론, 여러 질문이 마음속을 복잡하게 맴돌 것이다. 이 사실을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심판을 선포하기 전,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경고하신 것은 어떤 점에서 사무엘을 준비시키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12절의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해 말한 것”과 13절의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모두 2장 27–36절에서 익명의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을 가리킨다. 그 예언을 알지 못했던 사무엘은 그 말을 듣고 다소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이 엘리의 집에 대해 말한 것이 무엇인가’, ‘분명 엘리 가문의 심판에 관한 것 같은데 왜 그분들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여러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갔을 것이다. 물론 2장 27–36절을 읽은 독자들과 그 선고를 직접 들은 엘리는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해 말한 것”(12절)과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13절)이 가리키는 바를 알 것이다. 12–14절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이 엘리 집안에 왜 심판을 내리셨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먼저 12절의 “처음부터 끝까지”에 주목해 보자. 이 말의 히브리어 원문 ‘하헬 베칼레’(hāhēl wǝkallēh)는 3장 2절의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져 가서”(헤헬루 케홋, hēḥēlû kēhôt)를 연상시킨다. 즉 심판이 철저히 이행될 것임을 지칭하는 “처음부터 끝까지”는 엘리의 영적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과 동일한 히브리어 동사들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엘리 가문의 죄악은 엘리의 영적 분별력 상실에 원인이 있음을 보여 준다. 엘리가 하나님께 선택되었을 때에는 그럴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엘리는 초심을 잃은 것 같다. 둘째, 13절에 주목해 보자. 개역개정의 13절 후반부 번역은 이렇게 고치는 것이 좋겠다.
그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저주하였으나 그는 그들을 꾸짖지 않았다.
13절 전반부의 “그가 아는 죄악”이 성전 제물을 도적질하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인과 동침한 사건을 가리킨다면, 13절 후반부(위의 번역을 참조)는 그 죄악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저지른 범죄임을 보여 준다. 즉 단순한 도적질과 간음이 아닌, 하나님을 저주한 죄다. 그들의 죄악은 어떤 제사로도 영영히 속함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14절). 모든 죄는 제사로 사함을 받으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는 제사로 사함을 받지 못한다(민 15:30). 신약의 용어로 표현하면 엘리의 아들들은 성령 훼방죄를 범한 것 같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정하면, 그 사역이 거저 주는 사죄의 은혜를 받지 못함)이라면, 엘리의 아들들이 저지른 범죄는 성전 제물과 여인들을 범함으로써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와 그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한편 아들들이 하나님을 모독했건만 엘리가 꾸짖지 않았다는 말은 일견 2장 23–25절의 내용과 상치되는 것 같다. 그곳에서 엘리는 아들들을 꾸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엘리가 아들들을 꾸짖지 않았다고 말씀하실까? 이를 위해 3장의 핵심어인 “말씀”(다바르, dābār)을 저자가 어떻게 사용했는지 살펴보자.
3장은 ‘말씀’이 이스라엘에 어떻게 다시 주어지는지 설명한다. 3장에서 저자는 말씀을 ‘말’과 ‘행위’의 통합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것은 “말씀하옵소서”라고 응답한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준 ‘말씀’(다바르, dābār)이 곧 엘리 가문에 하나님이 행하실 ‘일’(다바르, 11절)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저자는 히브리어 ‘다바르’를 한 번은 ‘말’의 의미로, 한 번은 ‘행위’의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말’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제시한다. 즉 ‘삶에서 성취하지 않는 말’은 ‘말’이 아니다. 아들들을 꾸짖은 말이 아들의 행위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면 아들을 꾸짖은 것이 아니다. 엘리의 말이 아들들에게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이유를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첫째, 엘리는 평소 훈육을 게을리 했을 가능성이 높다. 평소에 사랑과 신앙으로 훈육했다면, 아들들은 2장 23–25절에 기록된 훈계에 순종했을 것이다. 둘째, 엘리도 평소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엘리의 말에 능력이 따르지 않은 것은 그의 말이 인격과 삶으로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리는 자신을 가까이서 관찰한 아들들을 속일 수 없었을 것이다. 엘리와 그 아들들에 관한 하나님의 심판은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이다.
사무엘이 말씀을 엘리에게 전함 3:15–18
15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16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이르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17 이르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8 사무엘이 그것을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15절)라는 구절이 흥미롭다. 이 구절은 문맥상 신현 장면을 공식적으로 종결하는데, 보통 신현 장면을 종결하는 구절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뱌야쉬키무, wayyaškimû, 1:19 참조)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신현 장면을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로 종결하고 있을까?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는 구절은 신현 체험 이후 주인공이 다시 잠들었음을 암시하지만,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는 말은 사무엘이 신현 체험 후 밤을 지새웠음을 의미한다. 존경하는 스승에 관한 엄청난 예언을 들은 사무엘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이 사실을 처리해야 하는지 밤새 고민하며,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말씀의 준엄함 사이에서 사무엘은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 같다.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했다”는 말이 이것을 확인해 준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엘리 가문에게는 비극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기쁜 소식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타락한 제사장들 때문에 말씀과 이상의 빈곤에 시달렸다. 영적 어둠 속에서 이스라엘은 방향을 보여 줄 빛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날 밤 이후 이스라엘에는 새 영적 지도자가 세워졌다.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이 다시 계시하시기 시작했다. 이런 희망의 분위기가 15절의 “사무엘이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다”는 구절에서 전달된다. 이 문장의 문자적 의미는 사무엘이 도제로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는 말이다. 사무엘은 성전 문을 열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2절의 “눈이 어두워지다”와 3절의 “여호와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가 상징적 의미를 가지듯이,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다”도 상징적 의미가 있다. 여호와의 집 문이 열려 새로운 빛과 공기가 성전 내부로 유입되듯이 이제 이스라엘에 새로운 빛이 깃들고,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제 새 빛과 새 바람(성령)이 성전과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에 임하게 된다.
16–18절에서는 엘리와 사무엘의 역할이 역전되어 나타난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도제 사무엘이 제사장이자 스승인 엘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지만, 지금은 스승 엘리가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묻는다. 사무엘이 엘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사무엘이 엘리에게 전한 내용은 엘리에게 새롭지 않다.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 찾아와 말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볼 때도 사무엘이 받은 계시는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엘리가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묻는 장면에서 이제 사무엘이 선지자라는 사실이 새롭게 제시된다. 이제부터 하나님은 엘리가 아닌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실 것이다. 엘리 개인에게는 비극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복이다. 한편 사무엘을 통해 전해진 심판의 메시지에 엘리는 위엄 있게 반응한다.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은 충격적인 소식이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위엄 있는 제사장이었다.
사무엘이 선지자로 인정받음 3:19–20
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지금까지의 서술이 결정적이고 단회적인 사건을 다루었다면, 19–20절은 오랜 시간에 걸친 과정을 서술한다. 성전에서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 최초로 말씀하신 사건은 이후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는 과정의 시발점이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즉 이스라엘 전 영토에 사무엘의 이름은 하루아침에 알려지지 않는다. 오늘날처럼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쉽게 설득당하는 것도 아니다. 사무엘은 “자라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명해야 했다. 당시 참 선지자의 표징은 예언의 성취 여부다. ‘공포탄’을 쏘아 대는 선지자는 (엘리의 경우처럼) 결국 그 권위를 잃는다. 선지자의 말이 “성취되는 말”이 될 때, 그 선지자는 여호와의 선지자로 인정받는다. 사무엘이 전 이스라엘에서 권위를 획득한 것도 상당 기간의 성공적 사역을 통해서다.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함께 계셔서, 그가 하는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19절). 사무엘이 3장의 신현 체험 직후 바로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된 것은 아니다. 이는 기브아에 사는 사울이 사무엘의 존재를 몰랐다는 사실(9장)에서도 확인된다. 비슷한 패턴이 사울과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에 나타난다. 기름을 붓는 순간 왕위가 실제로 확정되지 않기에 사울이나 다윗이나 삶으로 신적 소명의 진위를 증명해야 했다.
질문
1. 엘리의 눈이 어두워 간다는 말과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말의 상징적 의미를 설명해 봅시다.
2. 하나님의 궤가 있는 성전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3. 하나님이 사무엘을 세 번이나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사무엘이 하나님께 들은 메시지는 자기가 존경하는 엘리 제사장의 죄악과 심판입니다. 여러분이 사무엘이었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야기해 봅시다.
5. 사무엘의 영적 권위가 오랜 세월에 걸친 사역의 결과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묵상
1. 사사 시대 말의 영적 혼란에 대한 책임은 제사장에게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말씀의 통로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제사장들 때문에 하나님과 백성이 소통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이 희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도 사사 시대 말과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 말씀의 방해꾼이 아니라 통로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평신도는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 시대가 어두워도 하나님은 주무시지 않습니다. 말씀이 안 들려도 하나님은 침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향하여 외치십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말하면서 복음을 살지 못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을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구조
1-10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엘리 제사장이 실로의 성막을 지키던 당시의 상황은 “말씀이 희귀하며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은 “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이유는, 사람ㅁ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애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영적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때에는
‘는’에서 볼 수 있듯이 한시적인 제약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상황으로 사무엘의 상태는 아이입니다. 즉 엘리가 대제사장으로 있는 그 상황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엘리가 점점 노화가 이루어져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리적 현상만을 말함이 아닙니다. 이는 사사시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영적 타락과 어두움을 의미합니다. 상징적인 그 시대의 제사장의 역할이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영적 어두움이 짙어 가고 있음을 대제사장의 영적인 저하를 시대적 배경에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때에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10.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드겠나이다
사무엘은 비록 어린 아이였지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겉으로 보기에 자실을 갖춘 어른 후보자인 엘리나 그의 아들들을 부르지 않으시고 어린아이를 부르신 것은 크게 놀랄 일입니다. 경험이 있고 교육을 많이 받고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것이라는 뿌리 깊은 인식을 흔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겉으로 보기에 자질을 갖춘 모든 유형의 사람들은 여호와의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매우 우스워 보이는 도구ㅡ 곧 아이 사무엘을 선택하셔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4:1.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인데 하나님은 장남인 에서가 아닌 차남인 야곱을 택하셨고, 부유하고 힘 있는 애굽이 아닌 정치적, 경제적으로 약하 이스라엘을 택하시어 그들의 편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하신데 하물명 우리가 어찌 소외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멀리하겠습니까!
11-18 엘리 집안에 대한 심판
하나님께서는 밤중에 사무엘을 부르셨고 사무엘에게 엘리 집안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사용하셔거 엘리 집안에게 경고를 주시며 회개하고 돌아오길 원하셨습니다.
18절 놀라운 통찰력이 발휘되어서 엘리의 분별력이 잠깐 동안 뜨였는데 그는 여호와의 심판이 자신에게 임할 줄 알았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방황한다고 해도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늦는 법은 없다는 것을 엘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방황을 이야기 하고 있는 신명기적 역사서(여호수아, 열왕기하)는 엘리가 당시에 보여준 신학적 표류의 대변하며, 공동체가 올바른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통찰력을 깨우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모델이기도 합니다.
19-21 말씀 속에 나타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지속적으로 말씀해 주셨고 선포할 때마다 그 말들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헛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주제
9 순종하는 사무엘
사무엘은 엘리에게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침대로 다시 돌아가 누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경험도 많고 교육도 더 많이 받은 사람을 택하시지 않으시고, 왜 어린 사무엘을 택하셨을까요? 그리고 자신의 일을 그에게 맡기셨을까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고 순종하는 그 자세를 받으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무엘의 이 순종을 삶을 통해 드러내심으로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그 한 사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1-10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던 암울한 시대에 , 사무엘은 성막에 거주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으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지만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며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누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자신의 목소리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입니까? 우리는 사무엘이 고백한 바와 같이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15-21절 ,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고 엘리 집안에 주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엘리 제사장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사무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엇지만 ,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슴을 그대로 전합니다. 주께서 말씀해 주시는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로서 사명을 사무엘이 감당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사무엘을 통하여 다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미해지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오늘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선포할 종이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우리가, 내가 그 종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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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의 희귀성: 이 장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이는 엘리 가문의 영적 어둠과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어둠을 반영하며,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삼상 3:3).
사무엘의 부름: 사무엘은 아직 어려운 나이에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엘리에게 부르심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새 시대의 시작: 이 장은 하나님께서 새 시대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소망의 빛을 드러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교회와 그들의 타락을 지적하고 경고하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