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9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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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제37문 “고난을 받아” 라는 말의 의미는?

그분은 땅에서 사신 전 생애 동안, 특히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전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영.육에 짊어지셨다는 사실을 이해 합니다.

유일한 화목제물이신 그분은 자신의 고난으로써 영원한 저주로부터 우리의 영.육을 구속하시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을 얻으셨습니다.

제38문 왜 예수님은 “재판장인 본 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그분은 죄가 없으나 세상의 재판장에게 정죄 받으셨으니,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극한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입니다.

제39문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다른 방식으로 죽으신 것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네, 그로 인해 나는 내게 놓인 저주를 그분이 자신에게 옮기셨음을 확신하게 되는데,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이기 때문 입니다.

해설

제35-36문 통해,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께서 참 사람이자 참 하나님으로서 모든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뤄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구세주임을 배웠습니다.
37-39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순간에 집중하여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
왜 빌라도에게 심판을 받아야 했는지
왜 십자가여야 했는지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1.”고난을 받아…”(…He suffered…)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하셨다
전 생애를 하나님의 율법과 뜻에 따라 사셨다.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 하셨다.
승천 하셨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뜻가운데 율법을 지키며 선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범죄 하여 선하게 살지 못한 것을 예수님이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대신 사신 것입니다.
아담이 지은 죄를 해결 하기 위해 직접 사망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습니다.
인간이 야기 시킨 모든 문제를 다 해결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심으로 죄를 대신 지시고 인간에게 영생을 누리는 삶을 선물 하셨습니다. 원래 받았던 영화로움을 되찾아 주심
그러기 위해 이 고난은 필수 였습니다.
마태복음 16:21–23 KRV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의 전 생애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해 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정으로 주님을 대하려 했던 베드로는 책망을 받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에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정으로 했던 말과 행동이 때론 사탄을 돕는 일이 될 때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면서 실천해야 하는 이유 입니다.
대속물로 죽으시는 것은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분을 단지 내가 따르는 스승정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디모데전서 2:6 KRV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자신의 죄값으로 징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53:4 KRV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고난을 당하심의 의미는
우리를 대신 하여 고난을 대신 당하셔야 했고
하나님이 주신 사역을 가장 옳은 방법으로 수행 하셨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2. 고난은 화목제물이 되기 위함 이다

이방종교에서도 진노한 신을 달래기 위해 굿을 벌이고 푸짐한 음식을 차립니다.
우리가 잘아는 심청전에도 심청이는 공양미 삼백석을 받고 처녀 제물로 인당수에 뛰어듭니다.
용황신의 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 입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화목제물이 되신 것일까?
대답은 “네”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는 속된 이방신들의 분노와 다릅니다.
이방신들의 진노는 합리적인 이유가 없습니다.
신들마다 들쭉날쭉 제멋대로이고 인간들도 정확한 뜻을 몰라 제멋대로 해석합니다.
어떻게 화를 풀어야 할지 몰라 두렵고 불안해서 지레 주눅이 들어 처녀를 받치기도 하고 자녀를 불로 지나게도 하는 등 이성적으로 말도 안되는 일들을 행했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즈텍의 인신공양
군주의 생일이라든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거나, 국경일로 삼을 만한 기념일에도 수많은 사람이 제단을 지났다. 특히 테노치티틀란에 처음으로 신전을 세운 날에는 그날 당일에만 30,000명을 제물로 바쳤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이나 디에고 두란 수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티소크 황제의 20,000명 처형이나 1487년 피라미드 완공 기념식에서의 80,000명 연속 처형도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훼손에 대한 징벌이며 하나님의 법에 대한 징벌의 의미가 있다.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하나님은 먼저 인간의 죄를 다루시기 전에 인간과 교통 하실 수 없다.
죄는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파괴한다. 죄는 피조물이 창조자에 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그의 죄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하지만 할 수가 없다. 하나님 그분은 보상을 해야할 의무가 없다”
인간의 비참과 죽음은 모두 죄, 즉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결과 이지 비이성적 분노의 결과가 아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것은 인간인데, 그 죄를 해결하러 오신 것도 하나님 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 가운데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며 살지만 인간 그 누구도 그 죄를 해결하거나 해결 방법을 제시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시고 화목의 방법까지 제시 하신 것입니다.

3. 고난은 영생과 축복의 회복을 위함 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
즉시 하나님을 피한 일이다.
관계의 단절이며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죽음을 의미 한다.
영생은 이제 없어진 것이다.
아담의 창조 당시의 모습은 영화로운 하나님의 형상과 영생과 의로움이 있었다.
만약에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을 누렸을 것이다.
아담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높은 수준의 존재 였다.
그 후손들은 죄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사는 것을 당연한듯 살아가게 되었다.
예수님은 아담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켜서 획득하고 누렸을 영생과 은혜를 고난을 통해 죽으심으로 아담 대신 되찾아 오신 것이다.
“구원은 창조 때의 본래적 상태로의 회복 이다” -안셀름-
구원 받은 자가 불의하게 살 수 없듯, 영생은 의로움과 함께 해야 한다.
예수님은 영생을 되찾아 주심과 동시에 칭의 하여 주신 것이다.
죄를 지을 수도 죄를 안지을 수도 있는 존재로 회복 되었으니, 그리스도인의 삶은 천국소망과 함께 의롭고 영화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4.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의 고난 과정에 빌라도가 언급 되는가?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주동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3:14–15 KRV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더 나아가 세번이나 풀어주려고 시도했습니다.
누가복음 23:22 KRV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그런데, 빌라도는 정치적 생명을 포기하면서까지 예수님을 지켜줄 생각은 없었습니다.
기회주의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입장이었습니다.
빌라도의 판결로 사형에 처해졌다는 것은
그의 판결이 불의한 판결 이라는 것에 주안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징벌을 받은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이사야 53:4–5 KRV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은 자신의 질고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5.왜 십자가여야 했나?

만약에 예수님이 오래도록 이 땅에 살면서 많은 저서를 남기고 제자들을 많이 길러 내시고
많은 교회를 세우시고 때가 되어 자연사 하셨다면 어뗐을까? 어쩌다가 사고사로 죽으셨다면 어뗐을까?
생각만 해도 불경 스럽게 느껴집니다.
주님의 죽음이 보여주는 가장 큰 의미는
죄의 저주 가운데 죽어야만 했던 우리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사실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어야 했던 죄인 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죄가 얼마나 흉악한지를 보여주시는 형태의 징벌이 바로 십자가 입니다.
신명기 21:22–23 KRV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성경적으로 십자가형은 즉, 사람을 나무에 메달아 죽이는 방식의 징벌은 하나님의 저주와 동일시 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과정을 자세하게 인식 하고 계셨지만
예루살렘으로 기꺼이 들어 가십니다.
마태복음 20:18–19 KRV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우연히 사역을 하다가 재수 없게 군중들에게 끌려가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
왜 빌라도에게 심판을 받아야 했는지
왜 십자가여야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구세군 교리서
예수님의 죽은은 우연한 사건도 비극적인 실수도 아니다.
그 생애와 판결과정, 고난과 치욕, 심지어 빌린 무덤에 장사지낸바 된 이 모든 일들은
무의미한 사건들이 결코 아니었다.
죄인들의 행동의 결과로 이런 사건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사건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셨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었고 예수의 생명의 희생은 바로 세상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 처럼 산다는 것은
십자가 뿐 아니라, 그분의 생애 전체를 따르는 것을 의미 합니다.
예수님 처럼 하나님의 뜻가운데 그분과 동행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사랑하며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것과
천국소망하며 죽는 것이 예수님 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제 사소한 것들에 얽메이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그 복된 인생과 영생을 깊히 묵상하고 실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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