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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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순전한 복음
지극히 순전한 복음
짧은 본문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이후 무리의 대표인 유대인들의 반응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모의하던 바리새인들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번째, 많은 무리라 일컫는 유대인들의 반응입니다.
12절 ‘그 이튼날에는’ 이런 시간적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새로운 사건 또는 전환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큰 무리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반응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앞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고, 믿었는데 그들을 9절에 유대인의 큰 무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의 큰 무리가 마침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몰려 들었고 그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에 앞서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공관복음은 ‘무리의 대다수 또는 제자의 온 무리,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라고 기록하는데 요한복음의 ‘큰 무리’와는 차이를 보입니다. 요한은 유대인을 무리의 중심으로 선명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을 해보시면 예수님은 늘 유대인들과 대치점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개인이 등장해서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알고 고백하고 믿음을 보였다면 무리는 이러저러하다는 의도로 요한은 개인과 무리를 대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질문은 이겁니다. 무리와 개인을 요한복음은 왜 대조하는가? 1장 19절 이하에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은 각각의 이름을 기록하며 그 과정을 소개합니다. 또한 12장까지 두 부류의 개인이 등장하는데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께서 직접 부름을 받고 따른 제자가 있고 예수님을 만나서 기적 또는 대화를 경험한 개인들이 있습니다. 다시 이 개인들 중에는 예수를 주님으로 믿은 사람과 본문 상에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개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5장에 38년된 병자와 8장에 간음한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 같은 사람이라면 대조적으로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이나 9장의 태어날 때 부터 맹인이었던 자들의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주님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빌립과 같이 처음부터 부름을 받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이 있는데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에 앞서 예수께서 빌립을 시험하신 경우나 또는 5장 후반부에 미리 배신에 대해 소개된 가룟 유다의 경우는 두 차례나 소개가 되고 나중에는 예수께서 여러번 기회를 준 장면도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무리의 경우는 기적을 경험하고 믿었는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어려워 떠났다고 소개가 됩니다. 무리는 앞서 6장에서도 소개가 되었지만 계속해서 분열하기 시작합니다. 믿는 사람이 늘어나고 9장에서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면 출교하는 상황에서도 그렇고 10장에서 양의 문과 선한 목자의 비유 이후에도 겨울 즘에 성전 안에서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 다른 표현으로 마음 쪼리게 하냐는 것입니다’ 그런 후 하는 말이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라는 표현은 유대인 무리에게 엄청난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던 유대인 일부는 11장의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장면을 직접보고 ‘증인’으로서 역할도 합니다. 그들의 소문으로 인해 예수께서 다시 나사로의 집에 왔다는 소식은 예수와 살아난 사람 나사로를 보기 위해 그리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이제 큰 무리가 형성되었고 이들은 엄청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주동 세력이 됩니다. 반면 마.막.눅은 이런 유대인들인 무리가 설명드린 것처럼 ‘무리의 선동’이라는 의미에서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어질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무리는 또 다시 큰 역할을 합니다.
공관복음은 오히려 나중에 무리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27:23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마가복음 15:13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누가복음 23:18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21절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요한복음 18:40 “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19: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12절에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 가이사를 반역한 것이니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을 믿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구원’은 각자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를 묻고 그러한 길을 가는 개인들을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에게는 성전과 율법이 있다고 자랑하는 대다수의 무리보다 의도적으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쩌면 개인이다 소수다 라고 말하지만 조금 시선을 넓히면 ‘그리스도인’이다는 큰 무리에 속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직장이나 학교에서 오히려 피하는 사람들이 비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아닙니까? 서로 경계하거나 그런 모임에 참여를 요구 받아도 이상하게 우리 마음이 편하지 않는 것은 좋은 의미로야 그들의 모습이 앞뒤가 맞지 않음에 대한 실망일 수 있게지만 부정적으로 본다면 그들만큼이나 ‘나는 그리스도인 입니다’라고 밝히기 보다 숨기려 한다는 것이죠.
큰 무리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13절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라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 장면을 공관복음은 어린 나귀를 구하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무리들이 예수를 열광적으로 환영할 뿐만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표현합니다. 지금 상황은 일종의 ‘왕의 대관식’을 위해 입성을 상징하고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진짜 대관식은 어떻습니까? 빌라도의 재판장에서 그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는 가장 치욕스러운 모습이야 말로 로마가 준비한 왕이라고 하는 자에 대한 우스갯거리인 대관식인 것이죠.
큰 무리 역시 상징적 말과 행동을 통해 왕을 맞이 하듯 상징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행동 속에는 ‘당신은 왕입니다. 지금 로마의 압제 속에 있는 우리를 정치적으로 구원 시켜주실 분입니다. 라는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동’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무서운 것입니다. 반면 난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안할 거야라고 중도 입장이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런 이들은 잘못된 선동으로 잘못된 곳으로 휩쓸려 떠내려갈 우려가 더 크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지금 무리들은 앞서 각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은 모습이 아니라 중도적 입장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본 기적은 스스로 정치적인 욕망에 선동되고 있습니다.
이제 무리가 부르짖는 구호를 살펴보겠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이스라엘의 왕’인데 권위의 상징을 나타내는 종려나무를 흔들었다 할지라도 리더에게 알맞는 ‘칭호’가 있어야 합니다. 그냥 만들어 내는 말이 아니라 의미를 구약의 내용인 시편 118:25–26 “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에 기인한 것입니다. 시편 118편의 주제는 하나님의 왕권과 인간 왕이 하나님의 왕권을 대리하는 역활을 잘 드러내는 시편입니다. ‘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의 헬라어 음역이 ‘호산나’입니다. 호산나는 이제 ‘환호’의 대상으로 외치는 구호가 되었습니다. 어쩌 오늘 한국교회가 외치는 ‘아멘’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역시 시편 118:26 “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 의 표현을 직접적으로 가져옴으로 구원을 위해 ‘오시는 이’야 말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외칩니다. 예수님께 지극히 높은 칭호를 붙이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의 늬앙스는 그들은 왕이 오시는 상징적인 ‘종려나무’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학수고대하던 ‘그리스도, 메시아’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는 구약을 말씀을 바탕으로 그분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고 (온 성이 소동하여, 누구냐’ 사람들은 선지자 예수라고 답’) 누가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이라고 함으로 요한은 이 둘을 합친듯 말합니다.
큰 무리는 비록 나중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자들이지만 요한은 이들의 외침을 통해 예수께서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역설적으로 완전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죠. 그럼에도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구약의 성취,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분 그분은 하나님의 권능을 갖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시자 이스라엘의 왕이심도 함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동전의 양면은 늘 함께 있는데 항상 앞면이든 뒷면이든 한쪽만 나온다고 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동전은 항상 앞면만 나와 그래서 이 동전은 앞면만 있는 동전이야’라고 말이죠. 물론 말장난에 불과한 비유이기에 충분히 비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의 인생을 돌아보면 마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나에게는 고통만 주시는 분, 대답이 없으신 분 등 각자의 해석만으로 예수님을 규정 지으려고 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전은 앞과 뒤가 함께 있음으로 동전의 본래의 가치가 있듯, 예수님의 두 본성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이신 두 본성이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왕이시며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믿음 가운데 새겨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교회가 작아도 사람의 수가 적어도 괜찮은 것이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을 가지신 분, 왕이신 분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때 왕으로서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예루살렘 입성과 나귀에 대한 기사가 서로다른데 공관복음서는 입성 전 베다니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제자들이 행한 것이라면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직접 나귀를 보셨는데 의미는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공관복음서는 모두 ‘주님께서 쓰실 것’이라는 말씀이 ‘성취’의 사건으로 마태는 말하고 마가와 누가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그 즉시 성취되는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각자의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서 예수께서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 결국 ‘성취’의 길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선택지도 없이 꼭 그길로 가겠다는 굳은 의지와 같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간혹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감정적이며 의지적인 문제로 해석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처럼 그런 의지를 가져야 한다거나 갖도록 기도하자는 방향으로 전할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은 말 그대로 이해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제자들에게 나귀를 구해오는 사건 속에서도 스가랴 9:9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말씀의 성취입니다. 마가와 누가는 즉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의 사건으로 기록한다면, 요한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성취하시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5절 ‘기록된 바’ 예수께서 하시는 행동이 말씀의 근거다라고 자기 해석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앞서 5장 8장 10장에서 하나님과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말씀하신 예수님 즉 하나님의 아들만이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말을 덧붙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환호에 취해서 그렇게 따라 가면서 예수께서 받으시는 영광이 앞으로 돌변하여 죽음을 요구하는 ‘선동’에도 불구하고 나귀를 발견하시고 이것을 향하여 ‘성취’해가시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지 못했다고 저자는 ‘해설자’처럼 등장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6절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깨닫게 된다고 해설합니다. 큰 무리의 환호와 의미있는 구호 속에서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영광에 취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예수님의 길을 올바로 볼 시각이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 삶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부모가 자녀의 길에 보편적으로 보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시대가 다르고 특별한 경우도 많지만 보고 있습니다. 반대로 자녀의 눈에도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좁은 시야로 세상과 부모가 지내온 시간을 보긴 하지만 다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하는 말에 ‘너도 커보면 알거야’, ‘너도 시집 장가가서 자녀를 낳으면 부모의 마음을 알거야’라고 말이죠.
‘나중에 알게 됨’ 얼마나 힘든 겁입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보이는 코치가 필요합니다. 이런 말이 있는데 엄청난 실력을 갖춘 스타급 선수들은 오히려 유능한 코치가 못되고 반대로 선수 시절 실력이 없던 사람이 더 좋은 코치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고급진 기술도 스타급 선수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힘든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서로 답답해 하는 것이죠. 반면 많은 실패 속에서 경험하고 이해해서 가르쳐 주는 코치가 더 좋다는 의미이듯 여러분에게 능력 있는 부모가 대신해서 다 해주면 좋을 것 같아도 어쩌면 그렇지 않고 평범함 속에서 실패도 경험하면서 살아온 부모가 부족한 코치처럼 오히려 삶이라는 긴 시간을 견디며 성장하기에 더 좋은 코치 일수 있다는 역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가지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사람의 선동 그리고 이어지는 배신과 또 다른 선동 속에서 하나님의 성취를 이루시고자 십자가로 걸어 가신 분이십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생각났더라’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수동태 형태로 ‘생각나게 된 것’이죠. 오늘의 부족함 속에 여러분도 앞으로 겪을 좋은 일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날 때 성장하게 될 것이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바리새인들의 반응입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것을 본 적은 무리는 증인이었습니다. 그들의 증언으로 많은 무리가 예수를 맞이했습니다. 먼저 말씀 중에 이것도 저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동된 자들에 의해 움직인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비록 그들이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을 증언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선동에 많은 무리가 동참했고 얼마지나지 않아 예수가 로마의 반역자라는 선동에 입장을 바꾸어 예수를 죽이라고 동참하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많은 무리의 지지를 받는 예수께서 구약의 성취이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으로 불리며 호산나 구원해달라는 인파의 소리가 맞는 것 같아도 더군다나 이런 모습을 보며 바리새인들은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는 것은 그들의 뜻을 따르던 무리가 이제는 예수를 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를 죽일 수 없는 것처럼 포기 하는 듯 보여도 오히려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많은 무리가 있는 곳, 그런 것이 대세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그런 대세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예수를 만나고 예수께서 누구이신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변화의 삶을 살아내는가 하는 것이야 말로 저자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복음의 진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