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연결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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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히브리서 9:11–14 (NKRV)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브리서 4:14–16 (NKRV)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사랑합니다! 드림인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공감’이라는 단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요즘 SNS나 카카오톡을 보게 되면 공감 표시로 하트나 좋아요 표시를 하는 것을 본다. 사실 이런 것을 보면 진짜 공감보다는 재밌어서, 마음에 들어서, 관심이 있어서, 갖고 싶어서, 멋지고 예뻐서, 귀여워서 등등 이런 감정이 들 때 ‘좋아요’ 표시를 누른다. 이런 것들은 진짜 공감이 아니다. “너의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지 공감이 아니다. 공감의 뜻은 이렇다. ‘만약에 내가 너라면~’으로 시작하여 상대방의 상황이 나의 상황이라면 어떨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100% 공감을 하려면 그 상황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는 이상 완벽하게 공감할 수 없다. 내가 출산의 경험이 있는 집사님들 앞에서 “제가 만약에 임신했다면 진짜 아팠을 것 같아요”라고 말해봤자 누가 100% 공감해준다고 생각하시겠는가? 출산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출산의 고통을 가장 잘 알 수가 있다. 그저 눈빛만으로 통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도, 나의 상황과 형편을 알지 못하기에 완벽하게 공감 받기는 쉽지 않다. 거의 불가능의 일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서 여기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아시고 공감해주시는 분이 계신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지난주에는 ‘선지자이신 예수님’에 대해 나누었다. 기억나는가?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를 가지고 오는 사람이다. 오늘은 여러분과 ‘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해 나누려고 한다. 제사장은 어떤 일을 하는가? 제사장은 인간에게서 하나님께로 가는 사람,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다. 죄로 인해서 어둠과 무지 있는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연결고리가 되어 중보할 제사장이 필요한 것이다. 제사장은 구약에서 아론의 후손, 레위 지파 사람들이 제사장의 일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레위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셨다. 예수님은 아론의 혈통에 따른 제사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계통과 족보에 속한 대제사장으로 이 땅의 제사장들이 했던 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역할을 감당하신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하늘로 승천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본문 9장 11절에서는 그 위대하신 예수님이 앞으로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셨다고 말하며 시작한다. 구약 시대에 이 땅의 대제사장은 대속죄일이 되면 동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었다. 만약 지금이 구약이라면 항상 예배를 드리기 전에 여러분들이 제사장에게 동물의 피를 가지고 나올 때마다 피비린내가 이곳에 온통 가득하게 될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도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인지라 죄가 있었고, 제사장 역시 자신의 죄를 동물의 피로 속죄를 해야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면 어떻게 되는가? 그 자리에서 죽게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빛이 어둠을 만나면 사라지는 것처럼 죄를 가진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면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구약의 제사는 한번 동물을 제물로 바쳤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았거나 죄를 지었을 때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장막도 아니고 이 세상에 없는 완벽한 장막에 들어가셔서 우리가 감히 갈 수 없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이루어진 구약의 속죄제물과는 완전히 급이 다른 성격의 제사이다. 속죄제물은 죄 사함을 받으려면 피를 흘려야만 한다. 그러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자신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직접 죄 사함의 제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구약의 소와 양의 피로 드린 제사는 죄를 없애는 능력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한 제사가 앞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보여주는 일이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피가 앞으로 오실 완전한 피, 즉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미리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죄 사함을 위해서 피 흘림이 필요하다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피보다 더 귀한 피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귀하신 피를, 보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주님이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속죄는 고대에서 보통 죄를 지은 사람이나 노예를 자유롭게 해방시키기 위해 지불하는 가격이다. 그렇기에 영원한 속죄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에서 죽음은 “영원한 속죄”이며 “단번에” 이루어진 일이다. 구약 시대에는 짐승으로 번제를 드려 제사를 드려서 속죄를 받았다. 그러나 짐승으로 드려지는 제사의 문제는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 해마다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야만 했다. 짐승의 피는 사람의 죄를 씻기에 불완전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룬다. 완전하게 죄를 씻어주신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제사처럼 자주 고난을 당할 필요가 없다. 두 번도, 세 번도 아닌 오직 단 한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이로 인해 주님이 우리를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해주셨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가 인간의 속에 양심, 마음, 생각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도록 하기 위해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할 것이다.
히브리서 4:15 (NKRV)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난을 겪으셨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사람이 겪는 시험을 당하셨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시다. ‘동정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마음으로 공감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도울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단순히 공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의 ‘연약’은 우리의 죄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는 없으시다’ 왜냐하면 100%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100%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원래 죄가 없으신 분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40일 광야에서 금식을 하신 상태에서 사탄의 강력한 시험을 경험하셨다. 보통의 인간들이 하듯이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굴복하는 것과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과 권세에 끝까지 복종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와는 무관하시지만, 완전한 인간으로서도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사셨다. 이런 예수님의 죄 없으심은 이 땅에 대제사장과 다른 뛰어난 하늘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자질이시다.
히브리서 4:16 (NKRV)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기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라는 말을 유대인들이 들었다면 화들짝 놀랄 것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할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제사였을 것이다. 제사는 제사장들이 해야하는 것이었고, 제사장들의 경우에도 하나님이 계신 곳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제사장 일들을 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들어가서 일을 했고, 가장 거룩한 공간인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갈 때는 벌벌 떨면서 들어갔다. 그러나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자고 한다. 자신있게, 숨김없이 말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긍휼하심과 은혜이다. 긍휼은 과거에 대한 일들 말하고, 은혜는 지금 현재와 미래와 관련이 있다. 긍휼하심은 과거의 실패와 잘못에 대해서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기꺼이 돕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도는 그리스도를 힘입어 시기적절한 도움을 날마다 구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도전은 기도와 예배를 배경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시련과 아픔과 슬픔과 어려움 앞에서도 긍휼하심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히브리서 7:24–25 (NKRV)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우리 예수님은 중보자가 되신다. 우리의 중보자로서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예수님이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서 끊임없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시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위해 대속 제물이 되신 것이 아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 죽으셨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부르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굳건히 붙들기 소망한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기도 생활을 돌아보자.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자. 그저 습관대로 주일에 나와서 대충 예배드리는 안타까운 신앙생활을 하지말고 새로운 언약 백성으로 엄청난 약속을 삶에서 누리며 살아가길 소망한다. 우리 죄가 하나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과 모든 수치심을 당하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당하는 모든 아픔과 수치스러움과 연약함을 모두 아시고 100% 공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편들어주시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붙드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날마다 나아가는 드림인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