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3:14-22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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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마지막 교회, 라오디게아를 향한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에서 동남쪽으로 약 7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이며, 무역과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되는 양모는 그 질이 아주 좋아서 이를 통해 큰 부를 축척했습니다. 일찍부터 금융업이 발달해서 마치 미국의 월스트리트 같은 소아이사의 금융의 중심지였습니다.
아쉬울 것 하나 없는 부자 도시 라오디게아의 유일한 약점이 있다면, 생활용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쪽으로 약 9킬로 미터 떨어진 히에라폴리스와 동쪽으로 16킬로 떨어진 골로새에서 물을 끌어왔습니다. 히에라 폴리스는 온천도시라서 뜨거운 물을 가져왔고, 골로새에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가져왔어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다른 도시 교인들처럼 외부로부터 핍박도 받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한 편이어서 사데교회와 같이 아주 흡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핍박도 없으니까 신앙생활 잘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영적 긴장감이 떨어져서 교회는 다니지만, 세상에서 즐길 것은 다 즐기는 양다리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예배시간은 진부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습니다.
교회가 훈련이나 사역으로 교인들을 도전하지 않았으므로, 교회 다니기도 별 부담 없었고, 교인 숫자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마치 영화 관람을 위해 극장에 모였다가 흩어지는 의미 없는 대중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유하고 독립심 강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기들이 괜찮은 교인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 보다 그들을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그들을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일곱 교회 중 유일하게 칭찬 하나도 못받고 야단만 실컷 맞은 교회가 될 정도로, 최악의 영적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자기 평가는 이렇습니다. 17절 상반절입니다.
요한계시록 3:17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부했기 때문에, 주일예배만 드려도 헌금도 많았고, 영적으로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자기평가를 내린 것입니다.
이상하게 물질적으로 풍요한 교인들이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현상 유지식의 사고방식은 영적 야성을 죽이기 마련입니다. 그때부터 영적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적 평가나 진단은는 자기 자신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보고 평가내리는 것은 보통 단편적입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정말 객관적으로 진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줄 믿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적표는 어땠을까요? 17절 하반절,
17절 하반절입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곤고하다는 말은 영적으로 보잘 것 없다는 것입니다. 가련하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영적으로 불쌍하고 천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에 약할 때 강함 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과 다른 말입니다. 그들이 물질적으로는 부자이지만, 주님께 의지하여 누릴 수 있는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므로 영적으로 가난하다 궁핍하다는 뜻입니다.
눈 멀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세상의 유행과 돈의 흐름, 정세 판단은 밝았지만, 영적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눈이 멀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성경에서 수치를 그대로 들어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의의 옷으로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기 마련입니다. 그저 자신의 노력과 열심으로 살고, 교회 사역도 그런 식으로 합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도다라는 것은 무서운 책망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문제의 핵심은 ‘자신의 문제의 심각성’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이 자기 성찰력을 마비시켜서 자만심에 빠지게 한 것 입니다.
자기자신은 문제 없다고 하지만, 주님은 잘못된 자아도취를 날카롭게 흔들고 깨뜨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주님 보시기에 우리의 신앙에 변화가 필요한 부분은 없을까요?
이만한면 됐지라는 ‘영적 자만심’을 경계하고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가를 살피는 겸손한 자기 성찰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시라도 주님이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쓰러지고 만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 라오디게아 교회의 핵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15–16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이 표현은 당시 생활용수를 주변 도시들에게 끌어오던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도록 한 말입니다. 1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돌로 된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여야 했는데, 처음에는 뜨거웠던 온천수가 라오디게아에 도착할 무렵에는 늘 미지근해져 버렸습니다. 이런 미지근한 물이 얼마나 역겨운가를 잘 알고 있었던 라오디게아 사람들에게 이 비유법은 확실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차든지 덥든지 하라’에서 차다는 것은 전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 즉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의 상태를 말합니다. 덥다는 것은 주님을 적당히 믿는것이 아니라 뜨겁게 열정을 가지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세상과 교회에 적당히 양다리 걸치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전적으로 세상을 사랑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라고 하십니다.
물론 진짜로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설마 하나님이 ‘너 그러려면 아예 차가워져라. 아예 예수 믿지 말아라’ 버럭 화내시는 분은 아닐 것입니다. 핵심은 ‘뜨거워져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utter devotion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믿으려면 제대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맛이 없거나 역겨운 것을 먹으면, 인간은 대개 토해버립니다. 설렁탕이 나왔는데, 미근한게 나오면 맛이있습니까? 보글보글 김이 모락모락나야 맛있죠?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앙만큼이나 가증스러운 것은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를 견디지 못하십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결혼한 남자와 여자로 비유해보면 이해하기 쉬운데요, 몸은 결혼해서 나와 함께 살면서, 마음은 다른 남자에게 가 있는 아내를 어느 남편이 좋아하겠습니까?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너무나 열심히 바라보고 소망을 두고 있는 교인들, 양쪽에서 자기 편한 대로 좋은 것만 취하려는 성도들은 주님은 견디지 못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책망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은혜로운 주님은 해법도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3:18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음을 잡지 못하는 사람을 우린 흔히 ‘음치’라고 합니다. 운동신경이 둔한 사람을 ‘몸치’라고 해요. 그러니까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영적 자기 진단이 불가능한 사람을 ‘영치’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영치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해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원래 금은 그 어떤 광물보다 더 뜨거운 온도의 풀무불에서 제련됩니다. 금은 영적 보물을 상징하는데, 불로 연단한다는 말은 시련을 통과한다는 것을 뜻해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물질적 부요함이 진짜 부가 아님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살 수는 없습니다. 진짜 보물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보물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걸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누릴 것 다 누리면서, 믿음도 지킨다는 것은 욕심입니다. 진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선 세상에서 값을 치를 각오가 되어야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을 가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십자가라고 생각하며 견뎌내는 것이 오히려 유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적 풍요함을 주시곤 하지만 그것에 취해서 믿음이 타락하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으세요. 반드시 어려움을 통해 세상적 타락의 때를 벗겨내십니다.
말라기 3:2–3 “2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둘째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가 모직물의 명산지였는데,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소아시아에서 소문난 멋쟁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다녀도, 진짜 필요한 옷을 입고 있지는 않는구나. 너희가 그리스도 보혈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의를 의지하고 있으니, 영적으로 발가벗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탄이 영의 세계에서 비웃고 있다. 창피한 줄 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의 옷을 입어라.
마지막으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의 의학 분야, 특히 안약의 생산지로 유명한 곳임을 알때 이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세상의 유행과 돈의 흐름을 읽는 육신의 눈을 발달했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것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은 없는 장님이구나. 너희들은 자신이 얼마나 잘난지 바라보고 세상을 열심히 바라보지만, 정작 영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는구나. 영적인 눈을 떠라. 기도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아라.
주님은 18절에서 내게서 사라는 말은 세 번 반복하십니다. 연단한 금을 사라, 힌 옷을 사라, 안약도 사라. 셋 다 영적인 것인데 정말로 주님께 와서 돈 주로 사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말은 결단하고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댓가를 치르라. 소중한 것일 수록 댓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말씀마무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진주를 반견한 다음에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진주를 산 상인처럼 보배로우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적 가치관과 유혹을 포기하는 결단을 보이라. 오늘 주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자식을 책망하시듯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그리고 이시대 풍요의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주님은 우리가 세상도 주님도 다 좋다라는 적당주의를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양 다리 걸치는 미지근한 신앙에서, 분명하고 뜨꺼운 신앙을 가지라 결단을 하라고 하십니다. 은혜를 향한 간절한 목마음을 가지고, 이만하면 됐지라는 현실에 대한 안주하는 믿음이 아니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주님을 가장 먼저 사랑하겠다는 각오로 주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