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지 말고, 하나 되기를 힘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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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스톱 기도회
논스톱 기도회
사사기 12:1–7 (NKRV)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사랑합니다! 논스톱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한국 사람이 언제 가장 단합이 잘되는 것 같은가? 월드컵이나 아시안컵 같은 세계 축구대회 중 한일전에서 이길 때, 모든 한국 사람들이 짜릿해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일전에 출전하는 선수들도 한일전에서 승리하면 10번 이긴 거나 마찬가지라는 농담도 하고, 한일전에서 대패하게 될 때 다른 경기에서 하지 않지만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직접 나서서 공개적으로 머리를 숙이고 사과한다고 한다. 아무리 성적이 부진하던 선수라도 한일전에서 좋은 성과를 내면 나라의 영웅과 대스타가 되지만, 실수하거나 패배할 때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라고 불릴 만큼 아주 예민하다. 그래서 모든 팀에 다 이겨도 일본에 지면 전패고, 다른 나라에 다 져도 일본에 이기면 전승이고, 한일전은 가위바위보도 져선 안된다고 말할 정도이다. 왜냐하면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등 과거에 대한 무수히 많은 부정적인 기억들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한일전은 이겨야한다고 강하게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다. 아주 가까운 이웃 나라인 점과 역사적인 감정이 가장 큰 요소긴 하지만, 그 외에도 한일이 서로를 라이벌 관계로 만드는 요소에는 자유로운 왕래를 통한 물적, 문화적 교류가 많은 점, 가까운 인종적 거리, 인기 스포츠 종목들이 거의 같다는 점, 차이점도 많지만 비슷한 문화도 상당히 공유한다는 점 등도 있다. 먼 나라도 아니고 가까운 나라인 일본과의 관계가 자주 나타난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게 되면 지난주에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당연히 자연스럽게 길르앗의 군대 장관이 되었다. 입다가 이렇게 승리로 이끌어서 요단강 동쪽 지역 사람들은 그의 리더쉽을 인정하지만, 요단강 서쪽에 사는 사람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외부의 적이었던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난 후, 이제는 이스라엘 안에서 서로 시기심이 불타게 된 것이다. 서쪽에 살던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입다에게 몰려와서 암몬 사람들과 싸울 떄 왜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냐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재밌는 것은 이전에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에게도 똑같이 시비를 걸었었다. 에브라임은 입다가 승리의 전쟁에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12:1)”라고 협박한다. 기드온 때도 그렇고 입다 때도 마찬가지로 이렇게나 불평을 늘어놓은 것을 보면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권력욕, 자신들이 승리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한 지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학교에서 축구대회 결승전에 이기고 왔는데, 옆 반에 일진들이 왜 자기들을 용병으로 안불렀냐고 옥상으로 따라오라는 협박하는 모습과 같다.
그러나 입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에브라임에게 도움을 요청했었지만 그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갔고,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갑자기 자기들과 전쟁하자고 덤비자는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입다에게 개인적으로 걸었던 전쟁이 에브라임 사람과 길르앗 사람들의 전면전으로 점점 커지게 되었다.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두 지파 사이의 뿌리 깊은 이야기가 있는데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을 자기 지파에서 도망나온 도피자들로 보는 것으로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길르앗 사람들은 므낫세 반 지파와 갓 지파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므낫세 지파는 에브라임과 함께 요셉 가문의 구성원으로서 요셉 지파라는 큰 그룹의 하위 그룹으로 볼 수 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요셉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이유로 에브라임 사람들은 길르앗 사람들을 자기네에서 도망친 자들이라고 깔보며 무시했던 것 같다. 형제로 인해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자 길르앗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내전이 일어나게 되고,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쳐서 죽이기로 한다. 이 때문에 반대로 ‘길르앗 사람들은 원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사람’라고 놀리며 비방하던 에브라임 사람들이 이제는 도망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길르앗 사람들이 도망가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가려내기 위해 사용한 시험이 있다. 바로 ‘발음 시험’이다. 길르앗 사람들은 요단강을 건너려는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인지 물어봐서 아니라고 하면 꼭 ‘십볼렛’을 발음하게 했다. 마치 경상도 사람들이 ‘쌀’ 발음을 못하고 ‘살’이라고 하는 것처럼, 에브라임 사람들은 ‘십볼렛’이라고 발음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고 발음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스라엘 영토가 커지면서 각 지파마다 방언이 생겼고, 이로 인해서 발음상의 차이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에브라임 사람을 구별해서 요단강에서 다 죽여버렸다. 발음 하나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가 4만 2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하나로 연합하기에도 모자라 이 얼마나 큰 힘의 손실을 얻게 되었는가? 어쩌면 에브라임 지파가 점점 힘을 잃어가면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이후에 가나안 땅에서 세력을 점점 키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입다는 강하고 유능하면서 탁월한 지도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결국 형제간의 다툼으로 이스라엘의 힘이 점점 약하게 만드는 일들을 자초하고 말았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긴 시간을 사사로 다스리지 못하고 불과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하나 밖에 없는 외동딸을 잃고 형제들을 4만 2천 명이나 죽인 그의 마음은어떠할까? 입다는 현란한 말솜씨로 국가적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으나, 입만 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협상하고 하나님마저 서원으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다가 그만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스라엘 지파들은 모두 평등하다. 지파들 사이에 서열이 있어서 어느 지파가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지파간에 서로 높고 낮음을 따지는 순간, 지파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안타까운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여호수아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있을 때에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에서 ‘섬김’이라는 단어는 노예가 상전에게, 신하가 왕에게 섬김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섬김과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42절에서는 이방인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지배하려고 하고 높은 사람들도 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부려먹으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생각이었다. 또 그 원리로 자신의 힘을 써서 얼마나 강하고 영향력 있는지 자랑하고 싶어한다. 세상 사람들의 SNS에 봐도 그렇다. 자신이 얼마나 잘 사는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자신의 인생이 행복해 보이려고 자랑하는 곳이다. 우리가 그런 기준과 눈으로 사람들을 교회에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는 세상의 힘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다. 예수님처럼 낮은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서 1등이라는 것이다. 노예가 주인 앞에서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자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주인 앞에서 어느 노예도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인이 오히려 콧방귀를 뀔 것이다.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급을 나누고 자신과 생각이 맞는 사람만 친해지려고 하고,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얼굴이 예쁜지 못생겼는지, 매력이 있는지 없는지, 신앙이 강한지 약한지 등등 여러 가지로 교회 공동체에서 파를 나누는 모습은 마치 같은 형제 안에서 십볼렛파와 씹볼렛파로 나누어 서로 자기들이 하는 식으로 발음을 따라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고 방언의 차이로 형제를 살해하는 무기로 사용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마가복음, 10장 44절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왜 노예처럼 섬겨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누구의 통치를 받기 때문인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의 주인, 교회의 머리를 예수님이라고 때문이다. 그 예수님이 섬김의 표본이 되셔서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으로 오셨고, 그 주님은 우리를 위해 대신 죄의 값을 치루신 대속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완전한 섬김의 모습, 종의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죄가 있으셔서 죽으셨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 우리를 살리려고 모든 수치와 죄악을 거두어가셨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를 따라가야 하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한다.
나는 이효리 남편 이상순이 ‘효리네 민박’에서 했던 말이 참 인상 깊었다. 이상순씨가 자꾸 의자 밑을 열심히 닦는 것을 우연히 본 효리가 “왜 오빠는 아무도 안보는 곳을 청소해?”라고 물어보자. 이상순은 “내가 알잖아”라고 쿨하게 답한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낮은 마음으로 섬겨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상황을 누가 아시는가? 주님이 함께 보고 계시고 그 상황을 가장 잘 아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장에 버려야하는 생각과 마음은 무엇인가? “너 따위가? 나한테? 감히?”이다. 이러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면 절대로 예수님처럼 섬길 수 없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옆에 사람 바라보라. 내가 예수님처럼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인가? 내가 정말 사랑할 수 없는, 섬기기 싫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의지로는 마음으로는 한계가 있다. 오늘 이 밤 이렇게 기도하기 원한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 해달라고, 나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으니 성령의 충만함을 달라고 기도하기 원한다. 그리하여 교회와 가정과 학교와 직장 등등 여러분이 속한 곳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서로 연합하는 공동체가 되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