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담쟁이가 되어주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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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담쟁이가 되어주는 삶
먼저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를 소개하려 합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함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과학, 의학기술이 더 발전할수록 믿음의 영역은 점점 더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대는 계속 변하는데 고리타분한 성경적 가치를 고수하며 살아가도 되는 걸까 고민되기도 합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 속에서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게 귀찮고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 정도는 어쩔수 없어’라며 세상과 은밀히 타협할때도 있습니다.
사람들 눈치보고 싶지 않아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가나안 성도가 되기도 합니다.
현실이라는 절망의 벽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고 야뉴스처럼 교회와 세상에서 두가지 얼굴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는 시 속의 담쟁이처럼 이 세상의 거대한 벽을 어떻게 넘어갈수 있을까요?
[본론]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이동합니다.
아테네에서 바울의 전도는 그리 많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아테네에서 한 전도는 실패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전도에 실패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도의 열매가 적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아테네에서 전도의 열매가 적었기에 어쩌면 조금은 의기소침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홀로 아테네에서 약 80킬로 떨어진 고린도로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지도를 보시죠.
아테네가 당시 그리스에서 제 1의 도시라면 고린도는 제 2의 도시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고린도는 주전 146년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지만 주전 44년 로마황제 시저에 의해 재건된 도시입니다.
이제 100년쯤 된 도시라서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고, 돈과 사람이 몰려드는 풍요로운 무역도시입니다.
당시 인구는 자유인이 25만명, 노예들이 훨씬더 많은 40만명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큰 유대인 공동체도 있었구요.
올림픽처럼 격년으로 열리는 체육대회가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고린도는 다양한 종교들이 혼재하여 각종 신전들과 조각상들이 즐비한 곳입니다.
고린도에서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는 사랑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신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신에게 드리는 의식의 일종으로 음란한 성행위가 일어나곤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같다’는 표현이 성생활이 문란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이런 탐욕스럽고 음란한 도시에 바울은 홀로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도시를 둘러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서울 강남의 밤거리를 바라보는 기분이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바울은 아테네에서 전도열매가 적었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약간 위축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고린도는 아테네와 좀 달랐습니다.
무엇이 달랐을까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평생의 동역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2절에 나오는 아굴라와 그의 아내인 브리스길라입니다.
나중에는 성경에서 아내인 브리스길라가 먼저 나오고 아굴라가 뒤에 나옵니다.
그만큼 브리스길라가 바울의 사역을 돕는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바울처럼 로마시민이자 유대인 그리스도인입니다.
또한 그들의 직업도 바울같이 천막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집에 머물며 천막을 함께 만듭니다.
바울이 천막을 만든 이유는 생활비와 전도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후견인을 두지 않았기에 바울은 스스로 자금을 충당하길 원했습니다.
당시 부자 후견인을 두는 문화가 있었지만 그만큼 후견인에게 보상을 해줘야 해서 바울은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바울과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의 천막 장사는 잘되었습니다.
고린도에는 올림픽같은 체육대회가 열렸는데 그때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천막을 치곤했습니다.
그래서 천막을 만드는 일만큼 돈벌기 좋은 일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기쁘게 한 것은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바울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된 것은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 그 자체입니다.
그들과 함께 천막을 만들고, 같이 식사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분명 자신의 간증과 하나님 나라 복음 이야기를 나눴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도 자신들의 간증을 함께 나눴을 것입니다.
그 자체로 바울은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을 것입니다.
함께 신앙을 나눌 동역자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에게도 평생을 함께할 신앙의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나의 믿음이 약해질때 옆에서 위로해주고 격려해줄 사람말입니다.
나의 브리스길라, 아굴라는 누구입니까?
그런데 사실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가 살던 곳은 고린도가 아닙니다.
로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부부가 고린도에 오게 되었을까요?
주후 49년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 사이에 큰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로마 황제인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때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도 쫓겨나 고린도로 이사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지 않습니까?
물론 몇년 후 만날 바울을 위해 하나님이 글라우디오 황제를 움직인 것은 아닐 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아니었다면 바울은 평생의 동역자인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교회에서 서로 만난 것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아닐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만남도 우연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교회에 모였다면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요?
의기소침해질수 있는 까칠한 세상 속에서 서로에게 따뜻한 격려자가 되어주면 어떨까요?
믿음으로 거대한 세상의 벽을 넘어갈수 있도록 서로의 담쟁이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름을 알고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게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게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한 지체, 한 식구가 된 것이야말로 비밀입니다.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될수 있다는 것이 바로 교회의 비밀입니다.
이렇게 브리스길라, 아굴라를 통해 격려받은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을 찾아갑니다.
유대인들과 성경에 대해 토론을 벌이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울이 구약에 능통한 사람일지라도 안 믿기로 작정한 유대인들과 토론한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지치고 두렵고 낙심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또다시 하나님은 바울을 격려해주십니다.
바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같은 마케도니아 교회들에 보냈던 디모데와 실라가 고린도를 찾아온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를 보면 심지어 교회들이 잘 성장하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들고 왔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교회들이 걷은 바울 후원금도 가지고 왔습니다.
바울에게 이 후원금은 단순한 돈이 아닙니다.
얼마 안됐지만 그들의 신앙이 잘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까요?
제가 이전에 섬기던 교회를 그만둘때 참 감동받은 일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평소 저랑 그리 가까이 지내던 집사님도 아닌데 예배때 제 옆에 앉으시더니 봉투 하나를 건네셨습니다.
자신이 가족들과 운영하는 하늘 호주머니 선교회가 있는데 거기서 이번에 저한테 후원금을 전달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봉투에는 50만원이 들어있었는데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 돈으로 대학원 들어가기 전에 성경 프로그램 로고스를 살수 있었습니다.
제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되던지요.
이런 경험이 있으니까 저도 나중에 누군가를 후원한 적이 있습니다.
저랑 함께 학교다니던 목사님인데 자녀가 4명이었어요.
한번은 학교에 가족들을 다 데려오셨는데 막내 딸이 나이에 비해 키가 너무 작은 거에요.
막내 딸은 그게 불만이라고 그러더라구요.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막내딸이 키도 작으니까 제 마음이 좀 아리더라구요.
그래서 기도한후 아내와 상의해서 그 목사님 사물함에 아무도 몰래 여름 휴가비 20만원을 넣어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잘 안하는데 설교때문에 하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누군가를 격려할때 나도 격려받을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게 격려의 비밀이구나 깨달았습니다.
이제 디모데와 실라가 후원금을 가져왔기 때문에 바울은 더이상 천막을 만들지 않고 복음전하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바울은 이제 더욱 담대하게 회당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 전에는 구약 말씀을 가지고 토론했는데 이제는 곧바로 선포해 버립니다.
여러 사람들의 격려를 통해 바울이 담대함을 얻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바울이 얼마나 담대해졌는지 알수 있습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며 상징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당신들이 멸망을 받아도 자신은 더이상 책임이 없다는 의미로 옷에서 먼지를 떨어버립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제 당신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방인들에게 가겠다고 선포합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이방인 땅을 벗어날때 부정함을 털어버리겠다며 몸의 먼지를 털곤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정 반대로 합니다.
이 행동은 이제 당신들이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분노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말대로 회당을 떠나 회당 바로 옆에 있는 디디오 유스도의 집으로 갑니다.
디디오 유스도는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때 아무 열매가 없던게 아닙니다.
그곳에는 유대교로 개종하려는 이방인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디디오 유스도입니다.
그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반응한 것입니다.
그는 회당을 떠난 바울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의 집을 거점으로 복음을 전파합니다.
회당에는 들어가지 않고 회당옆에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회당의 대표인 그리스보와 그의 온 집안 식구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어찌보면 굉장히 위험한 전략아닐까요?
마치 이런 상황과 같습니다.
영험한 무당집 옆에 교회를 개척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무당이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듣고 회심해 버린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무당집은 이제 망했다는 의미입니다.
무당이 교회를 다니는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 사람들이 무당집을 안 찾아가고 교회를 찾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회당에 있던 불신 유대인들은 어땠을까요?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얼마나 혈안이 되었을까요?
이 지경이 되면 다른 도시였다면 바울은 이미 쫓겨났거나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은 또다시 하나님의 격려를 받습니다.
앞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 격려 하셨다면 이번에는 직접 말씀으로 격려하십니다.
9절에 보시면 밤에 하나님이 환상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고린도에는 구원받을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격려를 증명해주는 일이 일어납니다.
12절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갈리오 총독에게 고소합니다.
바울이 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선동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유대교도 아닌 다른 종교를 전하니까 이건 불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갈리오 총독이 먼저 말합니다.
요약하자면 그건 너희들 문제니까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말하는 것은 유대교 내에서 일어난 일이니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고소를 기각해 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갈리오 총독이 부임한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자신들의 눈치를 볼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자신들의 요청을 완전히 무시하고 법정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이 사건이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고린도에서는 로마법을 근거로 유대인들이 바울을 어떻게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도시와 달리 1년 6개월동안 고린도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가만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도 바울을 핍박하고 못살게 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위협과 간섭만큼은 피할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다른 지방에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이 예상치 못한 갈리오를 통해 이뤄지게 된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기만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화가 나서 누구를 때립니까?
회당장 그리스보 다음에 회당장이 된 소스데네를 붙들어 때립니다.
아마 율법에 따라 39대를 때렸을 것입니다.
그럼 왜 바울을 안 때리고 소스데네를 때렸을까요?
바울은 이미 많이 맞았을 가능성이 높고, 바울보다 더 미운게 소스데네이기 때문입니다.
소스데네가 회당장인데도 불구하고 복음을 듣고 회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보도에 이어 소스데네까지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렸으니 유대인들이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1 절에 보십시오.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이때 보내는 사람에 바울 이름과 함께 소스데네가 들어가 있습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고전1장 1 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 받은 나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얻어맞고 쫓겨나 바울을 따라 에베소로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와 놀랍지 않습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아니고 소스데네가 들어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회당장이었던 소스데네가 받은 고난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내는 사람 이름에 소스데네가 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믿음의 동역자들을 통해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격려를 받아야 하고, 또 누군가를 격려해야 합니다.
서로 격려하며 나아갈때 우리는 모두 담쟁이가 되어 어쩔수 없는 벽, 절망의 벽, 넘을수 없는 벽을 넘어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한 격려보다 더 강력한 격려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날마다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잊어 버립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묵상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음성을 날마다 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우리가 쫄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가 의기소치해 질때마다 우리를 말씀으로 격려하십니다.
내가 함께 있어 아무도 해칠자가 없으니 담대하게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처음 읽었던 시를 다시 읽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함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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