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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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창조하심: 모든 만물의 지배자로 삼으시다(1:26–28)
피조물 창조의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심으로 그 마무리를 지었다. 본문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1:26–27). 여기에서 사람은 다른 것들과 다르게 특별한 모습으로 창조하셨음을 본다. 또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셔서 번성하게 하시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짐승들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이것이 사람 창조의 목적이었다. 바로 땅을 통치할 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앞의 6일간 창조는 전체적으로 또 하나의 지배자를 위한 준비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셔서 앞에 준비한 모든 것을 다스리고 충만케 하셨다.
이러한 인간의 창조기사에서는 곳곳에 특이한 점들이 나타난다. 그것들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① “바라(בַּרַא)” 단어가 사용되었다(27절)
인간의 창조기사에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단어는 바로 바라(בָּרָא)라는 단어이다. 바라는 창조 기사에서 세 곳에서 사용되었는데, 1:1(천지의 창조)과 1:21(동물의 창조)에 사용되었었고, 이제 사람을 창조할 때에 다시 사용된다. 세 경우 모두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셨음을 의미한다. 바라는 27절에서만 세 번 나온다. 이것은 사람의 경우에는 그 이전의 어떤 물질세계와 비교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것의 특별한 창조였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②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26–27절)
1:26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한다. “우리”라는 표현이 다신론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 또한 천사를 포함하여 “우리”라고 했다는 주장도 합당하지 못하다. 혹자는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또 장엄복수로 사용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24) 양자가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베찰메누, בְּצַלְמֵנוּ)”와 “우리의 모양대로(키데무테누, כִּדְמוּתֵנוּ)”의 표현에서 첼렘(צֶלֶם)이라는 단어는 학자들이 그 어원을 정확하게 밝히지 못한다. 간혹 아랍어의 ‘자르다’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고 신체적 형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데무트(דְּמוּת)는 동사 다마(דָּמָה, ~와 같다. ~를 닮다)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모형’ 혹은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단어는 성경에서 서로 교체되어 사용된다(5:3의 경우를 참조할 것). 따라서 두 단어의 의미는 같다고 할 것이다.
본문에 의미가 같은 두 단어가 사용된 것은 히브리 문학의 반복법에 기인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의미의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그것을 강조하며, 또 약간의 다른 표현을 가미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위의 두 명사들 앞에는 각각 다른 전치사가 붙어있다. 베(בְּ)는 ‘안에(in)’의 뜻이며, 케(כְּ)는 ‘따라서(after)’의 의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창세기 5:1–3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5:1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 “형상대로(비데무트, בִּדְּמוּת)” 창조하셨다고 했고, 3절에는 아담이 아이를 낳고 그것에 대하여 묘사하면서 “우리의 모양(비데무트, בִּדְּמוּת)”과 “우리의 형상대로(케첼렘, כְּחֶלֶמ)” 아들을 낳았다고 표현한다. 여기에도 1:26과 같이 데무트와 첼렘이 사용되었는데, 전치사만 서로 바뀌었다. 아담이 낳은 아이는 아담을 닮았을 뿐만 아니라, 또 같은 사람의 부류에 속한다. 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대화도 하고, 한 밥상에 앉을 수 있는 것이다.
5:3을 근거로 하여 1:26도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닮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대화할 상대가 될 수 있으며, 한 밥상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것을 의미이다. 즉 하나님 부류에 속한 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편 8:5에 “그를 하나님보다(메앨로힘, מֵאֱלהִים)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노래한다. 이 구절은 사람이 하나님 다음으로 창조되었으며, 천사들보다 뛰어남을 나타낸다. 천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천사보다 하나님에게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부분 학자들은 신체적인 유사성보다는 영적 혹은 속성적인 유사성으로 이해한다. 특히 하나님의 속성 중 ‘지.의.거룩’에 주목한다. 그 근거는 신약의 골로새서 3:9에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εἰς ἐπίγνωσιν κατά εἰκόνα)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와, 에베소서 4:24의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ἐν δικαιοσύνῃ καὶ ὁσιότητι τῆς ἀληθείας)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라는 구절에 둔다. 중세 로마 가톨릭 세계, 루터, 칼빈 등 기독교 전통이 주로 이 견해를 취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인 세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은 영과 육을 가진 것으로 창조되었다(창 2:7 참조). 성경은 이 육을 포함한 전 인격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것을 말해주고 있다. 창세기 9장에 하나님은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 것을 명령하면서 그 이유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창 9:6). 피를 흘리는 것은 육체적인 손상을 가하는 것이다. 또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에 그 의미는 육체적인 살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영과 육이 합쳐진 전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이어야 한다(2:7의 주석을 참조할 것).
③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27절)
27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남자의 경우 자카르(זָכָר)이며, 여자의 경우 네케바(נְקֵבָה)이다. 이 두 단어는 흔히 사용되지 않는 용어이다. 이 단어들은 서로 구분되는 남성과 여성의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된 것은 단지 구분만을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단성(單性)의 사람을 만들지 않고 이렇게 양성(兩性)을 만드신 이유는 첫째로 번성케 하기 위함이다. 곧 뒤를 이어 28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번성할 것을 명령하신다.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한 쌍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양자가 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각기 홀로 살아갈 수 없다. 하나님은 남자가 독처하는 것을 좋게 여기시지 않아 여자를 만들어 주셨다(창 2:18). 둘이 함께 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가정이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이루고 계시는 삼위의 공동체를 반영한 것일 수 있다.
④ 사람에게 복을 주시다(28절)
28절에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창조한 인간에게 복을 주셨다. 여기에 의미가 비슷한 세 개의 명령어들이 사용되었다. 페리(פְּרוּ < פָּרָה, fruitful)는 ‘열매를 맺으라, 자손을 낳으라’의 의미이다. 레부(רְבוּ < רָבָה, multiply)는 ‘증가하라’이며, 밀우(מִלְאוּ < מָלֵא, fill)는 ‘가득 채우라’ 이다. 이상은 짐승들에게 주신 복과 같다. 이것을 요약하면 땅을 가득 채울 만큼 번성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사람과 짐승에게 주신 복이면서도 명령이다. 사람이 후손을 많이 두어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 때에 주신 복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본문은 짐승들에게 준 것보다 다른 두 가지 명령을 더하여 주셨다. 땅과 모든 짐승을 “정복하고(키브수하, כִבְשֻׁהָ < כָּבַשׁ, to subdue)” 그리고 “다스리라(레두, רְרוּ < רָדָה, to rule over)”는 명령이다. 이 명령은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설정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우주에 대한 왕적인 통치권과 감독권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기도 하다(26절). 통치의 영역은 앞서 6일 동안 창조하신 모든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우주적인 통치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통치권은 하나님이 자신의 것을 자기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에게 위임한 사항이다. 인간을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 역할을 하게 하신 것이다.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것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땅과 짐승을 학대하거나 황폐화시키라는 의미가 아니다. 땅과의 관계에서 2:15에서 명령한 것과 비교해 보면 그 의미가 명백해진다.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고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개역성경) 하셨는데, 이때에 “다스리다”에 사용된 아바드(עָבַד)의 의미는 ‘봉사하다’이다. 또한 “지키다”의 솨마르(שָׁמַר)는 ‘보호하다’의 의미이다. 사람이 땅을 지배한다는 것은 강압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고 가꾸라는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셔서 앞에 이루어진 모든 자연을 통치하도록 하셨다. 만약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여기에서 끝나면 창조된 나라는 인간의 왕국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하나님 왕국의 건설이다. 따라서 제7일에 하나님 안식에서 하나님 왕국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조의 구속은 아직 진행 중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교훈과 적용
1.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고귀한 존재이다. 비록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은 사람이 가졌던 하나님 형상의 가치를 인정하셨다(창 9:4–6). 따라서 사람은 어떤 동물보다 그리고 심지어 천사들보다 고귀한 존재이다. 우리가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과 교제하며 지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이 특권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회복이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이 고귀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는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사명을 주기 위해서였다. 오늘도 이 창조의 목적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먼저 자연을 돌보며 다스려야 한다. 탐욕적으로 땅을 소유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거나, 자연을 마구 훼손하는 일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자연을 자연답게 가꾸고 보존해야 하다. 정복한다는 것은 착취하는 것과 다르다. 봉사하고 섬김으로써 다스려야 한다. 창 2:15에 사용된 동사 아바드(עָבַד)가 ‘봉사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지금도 우리는 이 사명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해야지,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 자연은 우리가 소유하고 다스릴 것이지 숭배할 대상이 아니다. 자연을 두려워해서 미신적으로 자연을 달래는 굿을 하거나 자연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이 자연을 잘 지배할 수 있는 현명한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3. 인간은 남자와 여자, 양성(兩性)이 함께 짝을 이루도록 창조되었다. 그 목적은 가정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함이며, 또한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성에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동성연애가 성행할 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는 동성결혼이 합법화가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양성을 창조하신 근본 목적에 위배된다. 우리는 창조질서를 지키기 위해 이런 반 성경적인 운동을 단호히 배격해야 할 것이다.
5. 일곱째 날: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다(창 2:1–3)
창조는 제7일에 하나님이 안식하심으로 그 모든 과정이 완성된다. 이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의 목적이며 또 골인점이다. 그런데 이 안식에 대한 논란이 많다. 하나님의 안식을 일에서부터 쉼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구속의 완성으로 보아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누림인지가 그 논쟁의 핵심이다. 7일간의 창조를 사역의 구도로 보는 사람은 안식도 일에서부터의 쉼으로 보려고 한다. 반면에 7일간을 구속의 구도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누림으로 본다. 본 저자는 후자가 맞다고 본다. 본문 주석을 통하여 이것이 밝혀질 것이다.
창세기 2:1은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고 말한다. “만물”의 콜-체바암(כָל־צְבָאָם)에서 차바(צָבָא)는 ‘군병, 천사들의 무리’의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며, 콜-체바암은 천지의 구성요소인 ‘모든 무리들,’ 즉 ‘만물’을 뜻한다. “이루어지다”의 칼라(כָּלָה)는 ‘완성하다’의 의미이다. 본 절은 천지창조의 작업이 완성되었음을 선언한다. 더 이상 창조될 것이 남아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7일에 안식하고, 다음 날인 제8일에 다시 일을 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창조는 완성되었고, 그날에 안식하신 하나님의 안식도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
2절에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라고 말한다. 어떤 번역 성경은 이 본문을 엿샛날까지 다 마쳤다고 바꾸어 번역하기도 한다(공동번역과 표준 새번역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번역은 칠십인역본(LXX)의 일부(바티칸 사본)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것을 채택한 이유는 칠일간의 창조행위를 사역의 구도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물을 만드신 사역을 육일 동안만 하셨고, 제7일에는 그 일에서부터 쉰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웬함(Gordon J. Wenham)은 그러한 번역은 2–3절에 거듭 나타나는 “일곱째 날”이라는 “삼중적 반복을 망쳐놓는 결과이며, 또 칼라(כָּלָה, 완성하다) 동사의 뉘앙스를 간과하는 것이다”며 거부한다.
명확한 증거가 없이 히브리어 성경(MT)의 본문을 바꿀 이유가 전혀 없다. 창조사역을 구속의 구도로 볼 때에 일곱째 날에 마쳤다는 것이 당연하다. 카일과 델리취(C. E. Keil and E. Delitzsch)는 제7일에 하나님이 일하신 것으로부터 쉬셨지만, 그러나 그 쉼 자체가 창조과정에 속하는 것이며, 그로써 창조를 완성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창조는 제7일의 안식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 모든 구속의 과정이 하나님의 안식으로 완성된 것이다.
2절 하반에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라고 하셨고, 3절 하반에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고 말한다. 혹자는 “안식하다”의 솨바트(שָׁבַת)가 근본적으로 ‘중지하다, 쉬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따라서 솨바트는 ‘노동으로부터 쉬다’ 혹은 ‘노동을 그치다’라는 뜻이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본문이 메누하(מְנוּחָה)가 아닌 솨바트를 사용했음을 지적하면서 이것은 순수하게 쉼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메누하는 좀 더 ‘안식(평안을 누림)’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솨바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안식을 노동에서부터의 쉼으로 해석하는 성경 번역 중에 대표적으로 표준새번역을 들 수 있다. 표준새번역은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2:2하–3상). 물론 히브리어 성경에는 “손을 떼다”는 말이 없다. 그런데도 그것을 삽입하여 번역한 이유는 하나님의 안식을 순전히 노동으로부터 쉬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솨바트를 단순히 쉼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특별한 신학적인 의미가 더 부가된 ‘안식’으로 볼 것인지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위와 반대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안식에는 창조된 모든 것을 유지하고 즐기심도 포함한다고 말한다. 단순한 쉼으로 보는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메누하가 아닌 솨바트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그 근거로 내세우는데, 그러나 이 두 용어들을 너무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가 없다. 출애굽기 20:8–11의 제4계명(안식의 법)에서 솨바트와 누아흐가 같이 사용되었다. 특히 출애굽기 20:11에 안식일의 기원을 말하면서 창세기 2:2–3을 인용하는데, 이때에 누아흐를 사용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다른 십계명인 신명기 5장에서 안식의 율법을 말할 때에 누아흐가 사용되었다(신 5:15). 이와 같이 솨바트와 누아흐는 서로 교차하여 사용되었다. 따라서 누아흐가 누림의 안식이라면 솨바트도 그런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제7일에 하나님만이 안식에 참여하였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해 보아야 한다. 만약 단순히 노동에서의 쉼이라면 그 안식에 하나님만이 참여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인간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이 창조의 행위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식의 율법에는 하나님 아닌 사람과 짐승, 심지어는 땅까지 참여하도록 명하신다. 출애굽기 20:10에는 여호와의 안식일에 사람들과 짐승들도 쉬라고 명하신다.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안식년의 제도에서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고 명하신다(레 25:4). 하나님의 안식에 땅도 참여시키는 것이다.
창세기 2:3 상반절에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말한다. 그날을 복주시고 거룩케 하심이 누구를 위함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만약 하나님만의 안식이라면 그날을 복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을 위해 그날을 거룩케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은 홀로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날을 복주시고 거룩케 하심은 다른 피조물을 참여시키기 위함이다. 이날을 거룩케 하심으로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여셨다. 카일과 델리취는 “이날을 복주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이 그의 창조물들 위에 부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35) ‘복주심’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앞에서 그 복이 사용된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1:22에 짐승을 창조한 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주셨고, 1:28에 사람에게 복주셨다. 그곳에서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는 것이었고, 또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7일에 복주셨다는 것은 사람과 자연을 위한 것이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창조의 목적도 하나님의 나라 완성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창조기사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제6일에 하나님이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세우셨다. 거기에서 창조가 끝나면 창조의 목적은 인간의 나라 완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여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가 어디에 나타나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안식에서 찾을 수 있다.
근본적으로 제7일의 안식은 하나님의 안식이었다. 하나님은 그 만물을 만드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심으로써 구속을 완성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날을 거룩케 하심으로써 창조물도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날을 복주셨다. 하나님과 함께 번영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복지국가의 모습이다. 이러한 복은 통치권과 관계있다. 왕이 자기에게 충성하는 백성들에게 복을 베푸는 것이다.
통치권자가 주는 복은 뒤에 있을 모세의 언약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모세언약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통치권 행위이다. 그 언약을 통하여 그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레 26:12). 그리고 그 율법을 준행하는 자에게 왕이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을 내린다(레 26:3–10; 신 28:2–14 참조). 하나님이 사람의 순종을 즐겨하시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이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이 복지국가에서 통치자와 백성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안식이다.
이러한 안식의 모습은 에덴동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안식하심으로서 7일간의 천지창조 구도가 완성되었다. 그 완성된 창조의 구조를 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요약적 결론
창조는 크게 세 구분으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이다(1:1). 성경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진술한다. 둘째는 구속 이전의 상태이다. 창조한 하늘과 땅 중에 땅의 모습은 아직 혼돈하고 공허했으며, 흑암으로 가득 찼으며, 물로 덮여 있었다. 셋째는 구속의 과정이다. 구속의 과정은 7일의 구조로 이루어진다. 첫 삼일은 준비의 단계로서 ‘분리’를 통하여 땅을 정리하심으로써 다음의 것을 위해 준비하여 나가셨다. 이후의 삼일간은 이미 준비된 것에 지배자를 두시고 생명력을 부여하심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시고 충만케 하셨다. 그리고 6일간의 모든 것도 인간을 위한 준비였다. 마지막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가 준비된 모든 자연을 다스리고 충만하게 하였다.
그러나 6일로서 창조가 끝나버리면 그것은 사람의 왕국이 된다.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바로 제7일째 하나님이 안식하신 것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백성이 창조한 땅에서 즐기는 것, 그것은 복지국가가 이루어진 모습이다. 그 복지국가에서 하나님과 백성이 함께 즐기는 것 그것이 또한 안식이다. 창조 때에 이루어진 이 안식은 우리가 들어갈 미래의 완성될 하나님 나라이기도 하다(히 4:3–4 참조).
교훈과 적용
1. 하나님이 안식하심으로서 창조의 구속이 완성되었다. 땅은 혼돈에서부터 아름답고 질서정연한 것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안식하심으로 그 모든 아름다움을 누리셨다. 여기에 사람과 자연도 참여시킴으로서 그들도 하나님과 함께 누림을 가지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사람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도록 얽매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신약에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꼬투리 삼아 예수님을 정죄하였다. 그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 안식일의 주인은 하나님이며 예수님이다. 그리고 그 안식에 사람도 참여한다. 오늘날도 우리는 안식일을 율법의 올가미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즐기는 참 안식의 의미를 살려야 하겠다.
2. 현재의 안식은 모형에 불과하다. 우리는 현재 안식을 조금 맛보면서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3장과 4장에서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안식(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안식으로 표현함)에 들어가지 못하였음을 경고하면서, 우리도 들어가야 할 안식이 남아있으니 조심하라고 한다(히 4:1, 9). 우리에게 남아있는 저 안식은 어떤 것인가?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히 4:3–4).
우리가 들어갈 그 안식은 세상 창조 때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창세기 2:2을 인용한다. 바로 창조기사에 나타난 제7일 하나님께서 하신 그 안식이 바로 우리가 들어갈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창조에서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그 안식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리도(물론 다른 피조물도 함께) 참여하는 것이며, 또한 영원한 것이며, 구속역사의 목표점임을 알 수 있다.
계시역사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그런데 그 나라가 왜 이루어져야 하는가? 그 이유는 복지국가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그 복지국가의 누림 그것이 바로 안식이다. 이 안식은 창조의 목적이기도 하였으며, 또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려야 마지막 목표이다. 우리는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이 안식을 사모해야 하겠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나님은 공동체이시며 창조주이시다. 창조하다는 말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사용하실수 있으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다. 남자만 만드신것이 아니라 여자도 만드셨다. 사람도 공동체로 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사람이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존재로 지으신 나이다. 그리고 너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너를 사랑하며 가정 공동체, 교회 공동체를 이루며 살라고 하신다. 우리는 항상 관계 가운데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과의 관계로 살아간다.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서 모든 다른 존재보다 특별하다. 하나님을 많이 닮았다.

안식일의 역할

일(work)은 적절한 조건 내에서는 선하다.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을 식물을 심고 정원을 가꾸는 일꾼으로 묘사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만드시고, 채우시고 나서 모든 것을 ‘좋다’(선하다)고 여기셨다. 창세기 3장 이후부터 일이 수고로 변했다. 창조의 마지막 날에 나오는 짧은 두 문장(2:2–3)이 결국에는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의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를 쉬시고 당신의 쉼을 ‘거룩하다’고 여기셨다. 우리 문화에서는 ‘거룩하다’라는 단어에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한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여기에서 ‘거룩하다’는 ‘따로 떼어놓다’와 같은 뜻이다.

안식은 일이 아니다. 안식일의 어원은 히브리어 샤바트(shabbat)로, 샤바트를 직역하면 ‘쉬거나 중단하다’라는 뜻이다. 이 안식일은 거룩하게 복을 받았으며,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떼어놓은 날이다(2:3).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후에 예언자들에게 계속해서 집중 포화를 받았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일의 기초이지, 창세기 3장에서 발생한 암과 같은 수고에 대응하기 위해 덧붙인 사항이 아니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신약에서는 안식일이 폐지되기는커녕 예수님은 안식일이 인류를 위해 있다고 하시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유대교의 태도를 전환시키신다(막 2:23–28). 유대교 지도자들은 안식일의 역할을 시행해야 하는 일종의 의무로 오해했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이 창조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렇기에 우리와 우리 가축들과 종들을 위한 날임을 일깨우신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해서 안식일이 우리 삶의 체계를 잡아 줄 뿐 아니라 사회와 정치의 체계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지를 지도자들에게 상기시키신다. 안식일의 양면을 보지 못하면 결국은 잘못되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

창세기를 제쳐두더라도 안식일을 대충 다룰 수는 없다. 안식일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중심 역할을 해서, 안식일을 기준으로 일주일과 1년과 온갖 절기의 체계가 잡힌다. 안식년은 종살이의 최대 기한으로, 7년이 한 주기가 된다(신 15:12). 토지의 소유권 해제도 안식년 주기를 기반으로 한다(레 25:31). 전국적으로 지키는 안식일 덕분에 인권과 동물권이라고 알려진 권리의 전제 조건이 처음으로 생겼으며, 누구나 사회경제적인 지위와 관계없이 평등하게 매주 쉬게 되었다고 주장한 이들도 있다. 종과 나귀와 일꾼은 모두 일주일에 하루를 쉬라는 명령을 받았다. 안식일이 창조에 뿌리를 둔 (하나님이 직접 실행하신!) 관습이라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어길 때마다 예언자들에게 꾸지람을 받는 근거가 되었다(느 13:18; 사 56:6; 렘 17:27). 예언자들은 안식일을 경외하는지를 보고 이스라엘을 판단했으며, 이 판단은 정의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사 56:2; 렘 17:21–27 참조).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내가 복덩이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나에게 복을 주시고 그 복을 흘려보내는 사명자로 살라고 하신다. 이 세상은 내가 하나님의 복을 흘려보내는 나의 사명지이다. 정복하고 다스리라~~~ 보살펴주라고 하신다. 영혼을 보살피고, 아름다운 자연과 생태계를 보살피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지를 찾으며 사명자로 살라고 하신다. 그러먄 하나님은 나에게 정복하고 다스릴만한 복을 부어주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나에게 매일매일 일만하라고 하시지 않고 안식도 누리라고 하신다. 안식, 하나님이 주시는 잠잠한 ㄴ평안을 쉼을 누리며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신다. 잘 쉬고 잘 먹고 영혼이 숨을 들이마시고 영혼의 평안을 누리고 살라고 하신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와 공동체와 함께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신다.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사명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1> 복을 주신다.
2> 생육하고 번성하라
3> 정복하고 다스리라
돈많이 버는것이 나의 사명이 아니예요.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것이 나의 사명이 아니예요. 돈많은 백수가 나의 꿈이 아니예요. 자녀를 낳지않고 사는것이 옳지 않아요. 동성애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해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야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만의 일을 충성되게 해야해요.
일만하고 사는 일벌레가 아니라, 영혼의 쉼을 누리고 육신의 쉼을 누리며 살아요.
혼자만 애쓰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관계속에서 살아요. 서로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꽃과같은 형상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며 살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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