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20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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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받을 영광
인자가 받을 영광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내용인데 짧은 구절이지만 담고 있는 내용과 이에 따른 의미는 만만치가 않습니다. 준비를 할 때는 36절까지를 하려고 했으니 결코 쉽지가 않았습니다. 먼저 상황은 예루살렘의 입성으로 큰 무리의 선동 그리고 왕의 대관식을 준비하듯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난 주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읽을 때 그렇게 의미를 발견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36절 후반부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는 표현은 당시의 긴박함과 파장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시작은 헬라인 몇이 왔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헬라인이와 예수를 만났다는 내용보다 이를 전하는 과정인 헬라인이 빌립에게 청하고 빌립은 다시 안드레에게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께 가서 물었다는 상황과 23절부터 대답을 하시는데 전혀 다른 대답의 내용과 사건이 발생합니다.
일단 헬라인 즉 예루살렘 당시에 헬라인이라면 그리스를 점령한 로마가 여전히 그리스의 문화 속에서 헬라어 즉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예배했다는 의미에서 성전을 찾아 유대인들의 성전 중심인 예루살렘을 방문했고 앞서 벌어진 소동에 따라 예수를 뵙고자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미 앞선 2년의 상황이 있었기에 그 때에도 들었을 가능성도 분명이 있을 것입니다. 등장하는 빌립은 1장에서 예수께서 직접 ‘나를 따르라’한 제자이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 예수를 소개함으로 나다나엘 역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런 빌립은 6장에서 오병이어 기적에서 예수께서 큰 무리를 보신 후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대화를 했고 그 이유가 ‘빌립을 시험하고자’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빌립은 다른 사람을 예수께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굳이 필요해 보이지 않은 내용을 넣었을까요? 좀 지나서 요한복음 14:9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고 빌립을 책망하십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변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빌립은 여전히 예수께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물론 가룟 유다도 그런 사람이죠. 아무튼 그럼에도 앞서 예수를 만난 개인들의 놀라운 변화에 비하면 그렇지 않는 빌립은 어쩌면 현실에 충실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시작의 뜨거움은 오히려 갈수록 사라지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소개됩니다. 지난주 우리는 아무것도 안하면 아무일도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동치는 무리에 휩쓸릴 가능성이 크다고 했고 오늘날에도 시대의 사조/ 즉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빌립처럼 자기의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여도 실상은 믿음의 세계,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길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2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아무튼 빌립은 이제 3년을 채우는 마지막 시점에 이렇다할 변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 어쩌면 또 다른 무리인 제자의 무리에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내용을 두고 예수님은 전혀 다른 대답과 말씀을 이어갑니다.
첫 번째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라는 것입니다. 인자는 쉽게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이지만 예수께서 자신을 지칭하는 매우 독특한 표현으로 ‘인자’라는 표현을 썻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본문의 맥락을 따라서 ‘영광을 얻을 때’라는 의미를 생각을 해보는 것이죠. 우리가 가끔 독립 투사를 다룬 영화나 히이로를 다룬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은 항상 어떤 때를 아는 사람들로 그려집니다. 예를 들어 죽음을 알면서도 그 길로 가는 모습 속에서 자신의 이익이나 가족의 평안보다 큰 나라를 구하는 시간 속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이죠. 주인공이 짊어져야할 무게 같은 것을 의미있게 다루는데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 지금의 때를 ‘영광을 얻을 때’라고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몇 주전에 한 여인이 순전한 나드 한 근을 드릴 때 예수님은 여인의 이러한 행동을 자신의 장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죽음의 의미까지 제자들은 알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땅에서의 인간사 즉 빌립처럼 사람의 부탁을 받고 예수께 소개하는 일상의 시간과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실 때와 겹쳐지고 있는 장면을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굳이 먼 곳에서 예를 찾지 않아도 저는 05년에 맡은 아이들에게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싶어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저 ‘나의 공부’ 였지만 3년 반의 시간이 지나고서 전문적인 신학 공부를 하겠다하고 시작하려 할 때 저의 시간과 가족의 시간이 겹치는 때가 됩니다. 특히 교회의 전도사가 되고 여러분들이 교회를 정하게 되는 것도 일종에 때가 겹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거야 그렇다 하겠지만 이제 목사 고시를 보고 목사로서 교회 사역을 시작한 건 또 다른 상황입니다.
인간사가 그러한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죠. 시작을 25절 ‘진실로 진실로’라고 시작합니다. 다른 이유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30절에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내용을 살펴보면
영광의 때 즉 십자가의 사건 1)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사건입니다. 그래야만 열매를 맺는 필연적인 자기 희생입니다. 흙에 뿌려진 씨는 죽는 것 같아도 결국은 싹을 틔웁니다. 생명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사람도 그런 생명을 갖고 있고 당연히 속성을 갖습니다. 복음성가에도 ‘생명이 또 다른 생명 낳고’ 라고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노래합니다. 저자 요한은 요한복음 15:13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합니다. 그렇지만 자기 생명 사랑은 가장 깊은 뿌리에 있어 ‘자기 희생’의 싹을 틔우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성경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잠언 4:23 “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렇듯 2)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당연함은 오히려 잃어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 하도록 보전 된다는 표현은 매우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소방관은 자기 몸을 불 속에 던져 또 다른 생명을 구합니다. 그분들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필요하다고 너는 소방관이 되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분들 마음에는 정말로 하늘의 마음을 심은 듯 생명을 살리는 최고의 가치를 향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언제라도 바치겠다는 자기 희생을 본 분들이죠. 다른 복음서인 마태복음 16:25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그리고 누가복음 9:24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에서는 명시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나를 위하여’라는 조건이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없습니다. 즉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의 완전한 대조를 통해 세상 속에 속한 생명의 유한성을 시사하고 그러나 믿음을 통한 영생은 세상 임금의 권세에서 벗어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인간사의 빌립의 평범함 시간 속에 예수의 영광의 사건인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사는 기쁨과 슬픔이 뒤썩인 혼돈 자체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 죽음이라는 벽 앞에서 한 없이 무력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의 죽음 그리고 뜻하지 않는 사고로 인한 이별도 그렇습니다. 그럴 때 유한한 세상에서의 가장 소중한 자기 생명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삶과 연결되어 진다면(하늘이라는 땅에 심기는 것) 우리는 잠시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자기 생명에 대한 사랑 그리고 생명을 미워하는 것은 마태와 누가의 ‘나를 위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우주적’인 시각을 이제 곧 있을 ‘영광의 사건’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한’ 것은 이어지는 3)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예수를 따른 자에 대한 확실한 보상은 ‘거기 있는다’ 와 내 아버지께서 (귀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둘은 서로 같습니다. 거기는 영원한 생명의 땅입니다. 누구나 영원에 대한 갈망이 있지만 지금 빌립 앞에 열린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를 보지 못한다면 결코 거기에 있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걸 다 빼고 ‘너는 귀한 존재’라고만 외치죠. 귀한 존재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주님을 위해’ 즉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를 직접적으로 연결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 십자가의 영광’이 없는 주입식과 훈련을 통한 ‘자기를 미워하는 결과’는 결코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면서도 일반 시민 의식 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이 대표적으로 그렇고 우리도 그럴 가능성이 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27절의 예수님의 기도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내 마음이 괴로우니’라고 하시는 표현은 예수께서 죽음을 앞두고 불편한 심기나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표현이라고 읽힐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요한복음에서 흔하지 않은 예수님의 이러한 표현이 불과 얼마전에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서 예수께서 하셨던 '심령이 불쌍히, 애통히 여기셨다’할 때 불쌍히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표현은 타인을 향한 상태보다 예수님 자신의 상황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은 요한 복음에 나타나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해당 본문을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와 연결합니다.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셨다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약함 가운데 드러나는 강함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한복음을 차례로 살펴보면 얻는 유익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 인간이 갖는 현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의 시선은 그들을 향한 애통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람들의 인식은 예수를 메시아,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며 맞이하면서도 앞으로 일어날 십자가의 죽음과의 극명한 대비 속에서 사람들이 만나고 살아가는 인생사의 한 지점에서 교차하고 있는 예수의 시선은 여전히 ‘괴로움’의 연속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런 자신을 향해 이렇게 시편에 말합니다. 시편 43:5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데 노래 가사에 이런 표현이 기억납니다. ‘살다보면 하루하루 힘든일이 너무도 많아 가끔 어디 혼자서 훌쩍 더났으면 좋겠네’ 그러다 가사는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꿈으로 살지만 오늘도 맘껏 행복했으면 그랬으면 좋겠네’라고 바람을 그리며 노래가 끝납니다. 그런 꿈만으로도 사는 세상인데 성경은 ‘그러나’ 로 완전하게 반전 시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라는 예수의 기도는 ‘내가 이를 위하여’라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아버지’ 우리가 기도할 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도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이자 예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의 시작도 그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항상 응답되는 기도입니다. 예수는 알고 계셨습니다. 11장 돌 무덤 앞에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셨고 이어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그것이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용입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여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광경이 영광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죽음은 비참합니다. 거기에 십자가의 죽음 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인간사의 시선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소리는 ‘하나님의 시선’이 그러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의 시선을 인정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누가는 예수께서 태어나는 장면을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2:14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여기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라는 말씀이 예수를 환호하던 큰 무리와 비교한다면 과연 그들일가요?
엄청난 소리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반응은 여전히 몰랐습니다. 천둥이 울었다거나 천사가 말했다는 놀라운 반응에도 예수께서는 30절에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로 인해 일어난 예루살렘의 큰 소동, 그 가운데 예수를 만나고자 찾아온 헬라인 몇과 이를 전하는 빌립과 안드레 현장은 예수님의 말씀과 함게 혼돈, 무질서 그 자체일 것입니다. 마치 팡빠레처럼 예수에게 집중시키는 ‘천둥과 같은’ 소리는 시선을 집중시키고 이어지는 말씀을 기대하게 합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너희를 위한 것’ 왜냐하면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고,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난다’는 메시지 입니다. 무리는 어떻게 이 말씀을 이해했을까요? 앞서 각자의 시간(세상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보이지 않는 그러나 알것같은)이 나에게 일어 날 때 하나님의 시간을 믿고 방향을 틀었다면/변화했다면 반드시 자신의 시간(세상의 시간)에서 변화로 나타납니다. - 이제라는 시간의 변화는 이 세상에 대한 심판으로 나타나는데 앞서 요한복음 3:18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중심에 ‘십자가의 사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심판입니다. 무려- 20차례나 나오는데 3장에서 ( 3:17,18; 5:22(아들에게 맡긴 심판) 24(믿는자 심판에 이르지 아니함) 27(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심(받음) 29. 악한 일을 자는 심판의 부활) / 30 - 듣는 대로 심판.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는 심판의 의로움. 7장에서, 9장에서, 9:39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 // 그리고 12장에서 12:31. 심판이 이르렀다. 이 세상의 임금이 좇겨난다. 12장 - 내 말을 듣고(듣고다. 이제는 내가 심판 안한다. 나는 구원하러 온것이다. 48절. 누가 -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마지막으로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그러니까 중요한 순간 앞뒤에 기적이나 사건이 있고 나서는 항상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판은 요한복음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를 받아 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는데 믿지 않는 상태가 심판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심판 아래 놓여있습니다. 그랬던 시간이 이제 판사의 판결봉이 내려쳐지는 순간이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 사건입니다. 심판의 결과는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 납니다’ 이런 내용을 다 살필 순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상은 아직 신자에게 불안정한 곳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이 내려진 세상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6:33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힘드시죠. 알바 때문에 학업 때문에 일 때문에 , 사람 때문에 그리고 돈 때문에 그렇구요. 그러나 평안을 누리기시 바랍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성령 하나님은 예배의 말씀을 통해 여전히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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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들리는 사건.
32 내가 이땅에서 들리면(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시간을 자신의 땅에서 시간으로 변화가 일어나죠)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이러한 사실 때문에 예수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시간을 이 땅에서 순종함으로 가셨고 결과로 인해 -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다는 변화가 실제화 된다.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피하거나 역행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치 운명처럼 모든 일이 정해진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반면 우리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보시는 분에게 ‘당신은 다 아시니 그렇게 하신 것 아닙니까’라고 할 때 안다는 것은 우리가 마치 로또 복권의 번호를 알면 그것을 사서 1등이 되는 것을 안다고 할 때 예수께서 아신다는 것은 물론 누가 그 번호를 맞춰 1등이 되는 것을 아시지만 인생은 대부분 그렇게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아시고 자신이 가게에 가서 맞는 번호를 적어서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주세요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안다는 것과 예수께서 아신다는 것은 이렇게 극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죠. 그분이 ‘어떠한 죽음’을 아셨다면 피할 방법도 아시는 분. 막다른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미래가 오늘 공부하고 자신을 깨워 부지런을 떨고 남들보다 더 서두르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죠. 그래서 우리는 다른 길 즉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아도 성실하지 않아도 되면서 돈을 버는 길을 찾고 그것을 아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앎’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34절 - 무리의 반응 - 무리에 대해서는 이야기 했고.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다’ - 그들이 아는 메시아관 - 영원하신 통치자로 오실 분. 이야기로는 맞습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로또나 우리 시대의 성공에 대한 앎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이죠. /
그래서 ‘들려야 함’ 즉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들려지는 것 - 손에 물건을 들어서 올리는 상태적 접근이 아니라. 이렇게 보는 건데 - 최근 채상병의 죽음은 다른 시각에서 위험한 물에 들어갔기 때문에 일어난 사고라고 보는 것인데 그러나 본질은 잘못된 명령, 자기의 공신을 위해서 부하의 희생을 강요하고 책임지지 않는 모습은 채상병의 죽음을 일상에서 있는 사고처럼 여기게 만드는 것은 마치 당시 잔혹한 범죄자나 로마에 대항한 반역자를 쉽게 십자가 처형으로 죽이는 평범한 사건 정도로 아는 것 그래서 그런 죽음이 의미 없는 죽음인데 스스로가 의미있는 죽음으로 만들고 있으니 자신들이 믿는 율법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조금 살을 보태면 채상병의 죽음은 그런 사고가 아니라 잘못된 관행과 자기 욕심이 불러 일으킨 사건의 피해자이며 올바른 공의가 세워져 해병대의 명예와 군인된 자들의 명예가 분명하게 회복되게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올바른 길이라면 이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이해를 위해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의 모습 즉 구원과 생명있음, 메시아의 오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너희를 위하여’ ‘보이시는 방식’으로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35절 여전히 ‘빛’입니다. 시작에 예수님은 어둠 가운데 오셔 비추시는 빛입니다. 빛과 비췸은 동전의 양면 정도가 아닙니다. 태양이 발광 그 자체이듯 예수님 역시 빛 그 차체로 빛이 비췸과 동일입니다. 그래서 어둠은 빛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몇 차례 예를 든 것처럼 태양의 1%의 빛으로도 지구를 밝힌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 아직 계신 동안 ‘여전히 비취고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께서 이제 얼마 동안의 예루살렘 안에서의 시간이지만 부활 후 승천 그리고 재림의 시간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지금 역시 빛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을 최대로 끌어 올려보십시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은하인 안드로메다 은하는 250만 광년 거리입니다. 빛이 1년을 가는 거리가 1광년이라면 우리에게 2024년의 거리는 얼마전에 불과합니다. 그속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면서 그런 삶이 영원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빛과 같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조차도 태양을 공전할 때 시속 1670킬로의 속도로 달리고 있지만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비취고 있는 태양의 빛처럼 하나님의 빛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전히 기회라는 찰나의 시간을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니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