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교회의 두 가지 디아코니아(Diakonia)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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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 일까요?
여러분의 교회는 좋은 교회 입니까?
우리 구세군 시드니 한인 교회가 더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 지고 제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초대교회를 핍박하고 예수의 부활의 도를 전하는 것을 막아서던 제사장 무리까지도 복종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꼭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은 본문의 기사가 단지 초대교회가 대형교회가 되고 있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좋은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과정은 평탄한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마귀의 수 많은 공격과 음해를 극복하며 한 마음 한 뜻으로 전진한 결과 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 했을까?
우리 구세군 시드니 한인교회가 부흥 하기를 소망하며 오랫동안 기도해 오신 분이라면 관심을 갖고 공부해보야 할 말씀 입니다.
오늘 구세군 시드니 한인교회가 부흥 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 하십니까?
오늘 말씀에서 그 해답과 도전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무엇인 중요한가? 를 알게 해주는 갈등
함께 해결하는 성령의 공동체, 교회
좋은 교회에게 나타난 일
1. 무엇이 중요한가? 를 알게 해주는 갈등
1. 무엇이 중요한가? 를 알게 해주는 갈등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기독교 교회는
처음에는 “1천 명에 불과하던 숫자가
서기 100년경에는 7천~1만 명으로,
200년경에는 20만 명으로,
300년 즈음,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에는 500만~600만 명으로 성장했다”
이 기독교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세는 초대교회에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1절의 기사는 그 사실을 단편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6:1 (KRV)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
초대교회의 성장세는 폭발적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흥은 수 많은 외부적 핍박과 내부적 갈등을 이겨낸 결과 입니다. 교회의 부흥위한 수많은 외적 내적 도전은 숙명 이었습니다.
수많은 갈등을 영적이고 지혜롭게 극복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폭발적으로 성장 하였고
그렇지 못한 교회는 정체 하거나 퇴보하고 때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도 했습니다.
앞선 설교에서는 선한 사역에 동참하는 성도의 마음의 자세가 거짓되거나 위선 되었을때 나타나는 죄의 누룩이 갈등의 요소 였다면
오늘 본문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존 스토트는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 합니다.
교회의 성장으로 인한 흥분은 유감스럽게 ‘공귀스모스’(goggysmos), 곧 ‘투덜대는 형태로 표현되는 불평으로 인해 경감되었다.
당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초대 교회에 불평과 원망의 누룩이 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는 구제사역이 매일 행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구제에서 헬라파 유대인 그 중에서도 헬라파 과부에 대한 구제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특히, 당시에는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도 인생의 황혼기가 되면 예루살렘에 돌아와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폭넓게 퍼져 있던 헬라문화권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돌아와 죽고 그 미망인들이 대거 남게 된 것입니다. 그녀들을 보살피는 일은 초대교회에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헬라파 과부들의 소외 문제는 전혀 나쁜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시스템은 감당하지 못하고 과부하가 걸렸던 것 같습니다.
이런 비판과 원망과 분란에 대한 사도들의 반응과 대책은 무엇이었을 까요?
2절에서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사도들은 일단 제자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일반 성도들과 제자들이 갖고 있는 원망의 원인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시 합니다.
이 분란은 단지 구제의 문제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사역의 균형이 깨졌다는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의 구제 사역의 두 가지 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큐파와 탐휘 입니다.
‘Quppah’와 ‘Tamhuy’
매주 금요일이면 ‘Quppah’ 라고 하여서 구제 헌금을 걷었습니다. 그것으로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매일 매일 음식을 장만하여 집집마다 배달해주는 ‘Tamhuy’ 탐휘 라는 사역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반찬 봉사와 비슷한 전통이 그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초대교회에서는 이 두가지를 매일 구제사역으로 실행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일을 하면 칭송을 받아도 모자란 마당에 왜 원망을 샀을까요?
원인은 급성장에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하나 같이 일선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 구제금을 나눠주는 현장에서 봉사하고 상담하고 기도해주었습니다. 그것은 곧바로 전도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가 매일 매일 구제 현장에 나간다면 말씀을 준비할 시간은 언제 가질 수 있을까요?
아무리 성령이 충만한 사람도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 없이 은혜로운 말씀을 즉흥적으로 전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사도들은 구제사역에 참여 하면서 큰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동시에 마음 한켠으로는 말씀을 준비하고 기도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입니다.
저도 모퉁이 사역에서 만나는 이 지역 주민들을 보면 하나 라도 더 주고 싶고 이야기 들어주고 기도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 합니다. 모퉁이 사역을 더 확대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돕고 전도하고 싶습니다. 학교 등교, 하교 시간에 이 버우드 로드를 지나는 학생들을 보면 아침에 토스트 라도 해서 먹이고 싶은 마음이 끌어 오릅니다.
종종 교회 놀이터에 찾아 오는 아이들을 보면 플레이 그룹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다시 솓아 오릅니다.
하지만 다 누르고 누릅니다.
왜냐하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 입니다.
내가 기뻐 참여하는 사역에 모두 참여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소명에 따라 맡겨진 사역에 전념 해야 합니다.
과거 교회에서 너무 많은 일을 맡았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 있습니까?
처음부터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충성이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충성은 사실 받은 소명을 끝까지 놓치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충성하려면 내가 받은 부르심에 맞게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신실하게 헌신하면 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제자들과 성도들은 초대교회에서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헬라파 과부들의 원망을 잠재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더 바쁘게 잠을 줄여서라도 둘다 완벽하게 열정적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판단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바로 직전 장까지 사도들이 수모를 당하고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히면서 까지 굽히지 않은 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작게 보면 한 명이라도 더 구제 사역에 참여 해야 하는 시점에서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헬라파 과부들의 원망으로 촉발된 초대교회의 분란은
사도들에게 무엇이 소명이고 사도로서 무엇을 더 중요하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사도가 자신들의 소명을 다시 깨달은 것 같이
제자들과 성도들도 그와 동일한 소명이 있고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수 있게 더 헌신된 구제사역의 리더를 세워야 한다는 필요성을 깨닫게 했습니다.
2. 함께 해결하는 성령의 공동체, 교회
2. 함께 해결하는 성령의 공동체, 교회
사도들은 당시 교회의 평신도 리더들인 제자들을 불러 모읍니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하나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2절)
여기서 접대라고 번역된 말은 영어로 “wait on table” 입니다.
웨이터 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음식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테이블 앞에서 대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하는 시간이 부족하면 구제 사역을 줄이면 되지 않는가? 반문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초대 교회 부터 지금 까지 끊임 없이 갈등의 원인이 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이뤄지는 사역의 본질적인 문제 입니다.
본문에서 사역이라는 헬라어 단어 Diakonia 라는 단어의 사용 하는데,
1절에서 구제 사역 자체를 디아코니아 로 표기 했습니다.
4절에서 말씀사역 이라는 표현에도 동일한 단어 디아코니아를 사용 했습니다.
이 말은 바로 이 두 사역이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구제 사역 때문에 말씀 사역에 지장이 생기니 구제사역을 줄입시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렸다면 그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면 삶에 실천이 나타나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이 구제사역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구제 사역은 전도로 이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들은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했을까요? 여기서 마땅치 않다는 말은 하나님이 기뻐 하지 않으신다는 말 입니다.
목회자가 먼저 섬기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은 아주 보기 좋은 모습 입니다.당연히 목회자도 교회를 청소하고 커피를 타고 설겆이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상황은
구제 사역에도 사람이 부족하고
말씀 사역에도 충분한 시간이 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없이는 아무것도 돌아가는 것이 없는 상황이 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제 사역은 평신도 리더들이 맡아 더 열심히 수행해야 하고 사도들은 사도들의 자리로 돌아가 전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상화 또는 균형을 잡는 문제 였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해결책을 제시 합니다.
그것은 구제사역을 책임질 일곱 집사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처음으로 집사 라는 직분이 생기는 순간 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일곱 집사의 조건으로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함으로 들었습니다.
구제 사역을 리드 하기 위한 노하우를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제사역에는 사무적인 능력도 필요 합니다. 이런 지혜는 배울 수 있는 것들 입니다.
더 필요한 것은 성령의 충만함 입니다. 복지기관에서 사람을 뽑는다면 사무능력과 함께 동정심, 봉사정신 등등의 마음을 보겠지만 교회의 구제사역에는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 합니다. 단지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단지 자선을 배푸는 수준이 아니라 복음 전파의 사역의 또다른 모습이 구제 사역 이었습니다.
도움을 받으러 오면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환대하고 친절하게 대함과 동시에
기회를 봐서 기도해주고 복음을 제시 해야 하기 때문 입니다.
이런 일들이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 리더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교회를 지양 했던 것입니다. 평신도 리더들이 사관이 하던 일을 이어받아 해야 합니다. 영적인 사역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올라서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좀 더 영적인 부분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사관만 기도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관만 리더가 아닙니다.
부교님들이 먼저 나서서 아프신 분들 어려운 일 당한 분들 위해 기도해주시고 교회의 작은 모임을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한 축이 온전히 서기 위해서는 평신도 사역자들이 영적으로 바로 서고 성령에 충만하여 리더로 서야 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사역에 힘쓰겠다 선언 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가장 훌륭한 해결 방법을 제시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 사역과 구제 사역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동등한 디아코니아 이기 때문 입니다.
집사들을 세워 구제 사역을 더 체계적으로 소외되는 사람없이 꼼꼼히 챙기고 매일 매일 신실하게 책임질 7집사를 더 세웠습니다.
사도들은 본래의 사명에 따라 교회의 근본이 되는 말씀과 기도에 전념 하게 되면서
각자 받은 사명에 더 집중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다시 본 궤도에 복귀 하게 됩니다.
교회에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문제를 해결하며 가는 방식은 결국 자신의 소명을 찾아 각자의 자리에서 성장하고 헌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힘과 지혜를 합치는 사람은 진정한 교회의 일원 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초대교회 제자들과 성도들은
사도들의 결정에 한 마음으로 기뻐하며 따랐습니다.
사도들은 일곱명의 집사를 고르는 일을 성도들에게 맡깁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그것은 해결 위해 한 마음으로 더 힘써 기도하라는 뜻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인맥이 몇번 걸러지는 시기가 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울때, 진정한 성도가 드러납니다.
교회는 부흥하고 규모는 점점 커져가는데, 일꾼이 나오지 않으면 목회자는 애가 탑니다.
특히, 구세군 교회는 목회자가 주기적으로 교체 되기 때문에 다음에 올 사관이 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오면 교회가 좋아지겠지 하는 기대를 하곤 합니다.
하지만 사관이 바뀐다 하여도 결국 사관은 말씀 사역이 주된 사역이 될 것이고 실질적으로 교회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부교님들과 리더급 일꾼들이 헌신 해야 합니다.
사관이 강단에서 애끊는 마음으로 외치고 소리쳐도 그 마음에 헌신 하고자 하는 다짐과 행함이 없으면 교회는 주일만 반짝 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사역에 참여 하려면 부담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저도 이 말씀을 준비하고 설교 하는 일이 너무나 부담 됩니다. 일주일 내내 말씀과 기도에 메달려 삽니다. 최소 주석이나 관련 책을 5-7권을 찾아 읽어야 합니다. 내 생각이나 주관을 빼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과 집중이 필요 합니다. 책상 머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고3때 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차라리 봉사 활동을 하라면 즐겁게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나 떨리고 두려운 일이 바로 말씀을 준비하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참으로 영광스럽고 즐거운 일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면 욥의 말처럼 깊은 땅밑에서 보석을 깨낸 광부의 마음 처럼 기쁩니다.
3. 좋은 교회에게 나타나는 일
3. 좋은 교회에게 나타나는 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모두 각자의 부르심에 따라 협력하여 합력한다면 찾아오는 선한 결과가 있습니다.
사도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예수님과 동거동락하며 수련 사람들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을 경험한 사람들이 입니다. 거기다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을 통한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들 입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일당백의 복음의 증인 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각성하여 다시 말씀과 기도에 전념 했고 말씀이 왕성 해졌더니 다시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 합니다.
목회자는 전심을 다해 말씀의 디아코니아에 헌신 할때, 하나님의 말씀은 왕성하여 질 것입니다. 자기 자리에 돌아가 간 것입니다.
한편으로 말씀을 통해 성령에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ㅎ여 졌습니다. 각자 소명에 맡게 성도의 디아코니아에 헌신할 때,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질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심지어 교회를 핍박하고 반대하였던 제사장의 무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에 복종하게 됩니다.
이것은 잛은 언급 이지만 중요한 구절 입니다.
지금까지 반대하던 자들, 세속에 찌들었던 권력자들이 복음 앞에 복종하는 사건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 시키는 방법은 우리가 정치적인 힘을 키우는 것도 아니고 교회 밖에 나가 선행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세상도 변화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버드에서 인재를 뽑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은 사회에 기여 할 수 있는 인재라고합니다. 창밖을 보면 눈에 보이는 신호등 하나당 설치하는 비용이 거의 1000만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바다의 방조제를 만드는 드라이포트 라는 콘크리트 구조물도 한개당 그 정도 한다고 합니다. 도로를 포장하는 것은 얼마 일까요? 도시를 유지하는 비용은 얼마 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우리가 내는 세금 보다 훨씬 많은 혜택을 우리에게 주고 있고 함께 사는 많은 사람들의 힘이 합쳐지고 국가의 복지와 도움으로 우리는 지금 사회에서 안정되게 경쟁도 하고 삶을 영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우리는 어느 정도 사회에 기여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 입니다.
특히 교회에게 사회가 바라는 것은 일반인들 보다 더 높은데,
교회는 그것에 한참 못미치는 사회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반인들과 사회구성원이 갖는 실망감이 발생 합니다.
초대교회는 당시 사회가 바라지도 않았던 수준의 높은 도덕성과 옳바른 삶의 본을 보여주는 공동체 였습니다. 희생하고 기여 하는 기본을 충실히 수행 했습니다.
이런 선한 사역들은 철옹성 같은 편견과 여리고성 같은 증오에 금을 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말씀과 기도 성령님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 여리고성이 무너지듯 총과 칼과 무력이 아닌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역사가 심령 가운데 일어납니다.
세상사람 특히, 반대자들을 전도하는 일은 한순간에 일시적 노력을 되지 않습니다. 제사장 무리 처럼, 교회를 핍박하고 비난하고 교회에게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도 바른 길로 가는 좋은 교회를 보며 차츰 차츰 마음을 열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 앞에 복종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참 받은 것이 많은 축복 받은 교회 입니다.
다양한 연령대의 교인 구성과 악대와 찬양팀이 온전히 구성 되어 있는 요즘 시대에 흔치 않은 교회 입니다. 교회 학교는 외형적으로 작은 사이즈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오랜 시간 과도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교회의 규모에 비해 일꾼이 턱없이 부족 합니다.
이것은 단지 연약한 목회자의 볼맨 소리가 아닙니다.
교회의 생명력에 대한 엄중한 경고의 메세지 입니다.
교육파트와 구제파트는 목회자의 직접적인 관여가 없이는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상황 입니다.
새로운 사역을 기획하거나 기존의 사역을 확장 시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 입니다.
우리 교회야 말로 초대교회의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 충만한 일곱 집사가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일곱 집사들 입니다.
오늘 능력과 지혜가 부족하다면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십시오
오늘 지혜 부족하다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 하십시오
나의 부르심에 합당한 헌신이 있는 충만하고 복된 신앙생활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