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못 찬 굴 바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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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
능력과 믿음의 담대함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나오며,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주실 은혜를 사모하는 심령으로 귀한 예물 드리는 손길들 있습니다.
감사헌금, 일천번제, 00헌금, 00헌금을 올리오니
받으시고, 만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드릴 것이 차고 넘치게 부어 주시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성령의 지혜로 깨닫게하시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믿음도 부어주소서.
부족한 종이 말씀을 대언할 때, 나의 연약함은 감추시고
하나님의 지혜만 나타나게 하옵소서.
말씀을 사모하여 주 앞에 나온 우리 영혼을 불쌍히 여기사
성령으로 기름부어 주시고, 내일을 살아갈 새 힘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일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모든 말씀 오늘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은
전도서 4장 1~6절 말씀입니다.
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2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5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6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성전에 모인
성도님들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옆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더럽고 치사해도 욕심부리지 맙시다.
오늘은 전도서 4장 1~6절 말씀을 통해
“다 못 찬 굴 바구니”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저는 인사할 때, 오늘 설교를 기억할 수 있는 문장을 생각합니다.
혹시 인사할 때 제가 말씀드렸던 멘트가 기억나시나요?
불과 1분 전인에요. 우리가 이렇게 연약합니다.
더럽고 치사해도 욕심부리지 맙시다.
오늘 본문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전도자 솔로몬이
오늘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분, 선거철만 되면 후보들은 국민을 위로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장담하면서 공약을 내세웁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공적으로 약속한 공약이
빌공, 아무 내용도 실천도 없는 텅빈 공약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은 이런 세상을 향해
모두가 학대받는 세상이라고 외칩니다.
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1절을 보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았도다’라는 히브리어 원어는
성경에서 1,300번이나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무언가를 보고 발견하는 행위를 넘어
‘깊이 관찰하고 숙고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전도서를 기록한 전도자 솔로몬이
다시 돌이켜서 깊이 관찰하고 숙고하여 바라본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높은 궁궐의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예루살렘의 풍경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높은 곳에서 바라본 예루살렘의 정겨운 풍경을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 깊이 관찰하고 숙고해 보았더니.
그 이면에는 비참함과 치열함, 온갖 음모와 속임수가 가득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솔로몬은 그것을 가리켜
‘학대’라는 단어로 표현하였습니다.
여러분, 학대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권리나 인격을 무참하게 짓밟는 것입니다.
권력이나 힘을 이용하여 부당한 방법으로
권리나 이익을 빼앗는 것입니다.
힘을 가진 자가 그 힘으로 타인을 돕고 약한 자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 힘으로 약한 자들을 압제하고 괴롭히며
자신의 힘을 더 크게 만들고, 과시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아마도 자신의 뛰어난 지혜로 그 어느 때보다도,
주변의 어떤 나라보다도 행복하고 살기좋은 나라를
만들었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자세히 들여다 본 이스라엘은
자신의 이런 확신과는 상관 없이
솔로몬의 힘과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무수한 악의 횡포와 부조리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솔로몬은 이런 현실 앞에서 탄식하며
절망하고 좌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솔로몬의 좌절은 그때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9세기, 20세기 초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더할 나위 없는 평화와 호황을 누리는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외치며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지상낙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망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인해 수많은 인류가
지상최대의 지옥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절망과 비극은 3천년 전 솔로몬 시대 때만,
100년, 200년 전 세계 대전이 일어날 당시의 일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하루에 수백, 수천 건씩 쏟아져 나오는 뉴스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사악함과 죄악된 모습 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고, 자식이 부모를 학대하고,
고용자가 직원을, 선생이 학생을, 요즘은 제자가 스승을 학대하죠.
인간이 인간을 짐승과 같이 취급하는 일들이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러한데, 우리가 이 세상에 가지는 희망과 기대가
얼마나 헛되고 허망한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솔로몬은 전도서를 통해서
결국 자신이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했던
모든 수고와 노력이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솔로몬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하는 노력과 수고가 결국 헛된 것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노력하고 수고해도,
나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고,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서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고
조약을 맺고, 평화 기구를 조성해도
그것이 사람의 본성을 바꾸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큰 갈등과 죄악, 모순과 한계만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 솔로몬은
이런 불의한 현실을 벗어날 방법이 뭐가 있겠느냐.
이것밖에 없다고 2절에서 한탄하며 토로합니다.
2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죽은 자들이 더 복되다’
이런 세상을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게 낫다.
전도자 솔로몬이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이 말처럼,
오늘날에도 막막하고 절망적인 인생 문제의 탈출구로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몇년 전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유명인사들의 자살 소식이
뉴스에 나오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것도 자살 풍토를 조장한다고 하여
언론에서 기사화하지 않고 있죠.
그렇다는 건, 사실 지금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죠.
이렇게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이나
절망 가운데 어찌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자살이 마치 해답인 것처럼 세상은 유혹합니다.
죽음으로써 인생의 모든 고통을 끝낼 수 있다고
우리를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어떠한 순간에도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죽음조차 인생의 허무와 절망을 극복할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헛되이 여기는
아주 큰 죄를 범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룟 유다를 보세요.
그는 물론 예수님을 팔아 넘긴 죄인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실수입니다.
만얀 그가 나중에라도 그 사실을 깨닫고 눈물로 회개하고 돌아왔다면
그는 누구보다크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절망하고
죽음이란 도피처를 찾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열심히 주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래서 존경받는 사도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죽음은 결코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 고난과 절망이 우리를 누르고 짓밟아도
우리가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너머에는 더 큰 절망, 영원히 끝나지 않는 형벌,
지옥의 고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되는 것일까요?
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아무리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고, 비겁해도
나만 열심히 노력해서 잘 살면 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4절을 보면, 그것도 아니라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재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된다고 말합니까?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내가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하면, 그 모습을 보고
이웃들이 나를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너무 열심히 해도 별로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해답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내가 아무리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성실히 무엇인가 노력해서 얻고, 그것으로 선을 만들어도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은 시기와 질투 뿐입니다.
이런 상대적인 빈곤과 실망감은 우리를 만족하지 못하게 만들고,
어느 누구도 진정한 축하를 받는 승자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동료와 친구를 짓밟아야 살아남은 경쟁 사회는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결국 우리가 재능을 가지고 열심히 수고해도
그것도 모두 헛된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될까요?
5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5절의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어리석은 자는 자기 손을 모으고 자기 살을 먹는다’ 입니다.
즉 이 말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어리석은 자들은 일을 안하고 빈둥거리다가
자기 스스로를 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생계 뿐만이 아닙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돈이 너무 많아서 평생을 다 써도 남는다면
일을 안해도, 그 돈을 쓰는게 일이고, 의미가 되겠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렇게 돈이 넘쳐나지 않는 이상
하나님께서 주신 삶과 내가 지켜야 할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생계를 유지하며,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나의 삶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악하고, 부조리하다고 해서
열심히 살아봤자 의미없다고 판단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자라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잠언에서는 계속해서 ‘어리석은 자가 곧 악인이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실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서 성실하게 살아야 할 의무를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생각해 보세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열심히 일해서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을 하기 싫어서였을까요? 너무 힘들고, 피곤해서?
원래 게으른 종이어서? 그가 변명한 것처럼 이윤을 남기려다가
사업에 실패하면 그 책임을 종에게 모두 물을까봐?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이유는
주인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인이 물질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가진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수고하지 않고 남을 이용해서 재물을 모으는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수고해봤자 자기에게 돌아올 것은 없고,
오히려 잘못하여 맡긴 달란트를 잃게 되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물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오해로 인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다른 두 종과 달리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인을 오해한 종을 향해
주인이 했던 조치가 무엇입니까?
“그래, 니가 나를 오해했구나. 충분히 그럴만도 하지.
한 달란트가 작은 돈도 아니고, 네 입장에서 이런 큰 돈을
그냥 맡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너를 이용하려고
착각했을수도 있겠구나.”
이렇게 너그럽게 이해하고, 용서하고, 다시 종을 받아 주었을까요?
아니죠.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낙인찍고,
그를 바깥 어두운 데로 쫓아내어 이를 갈며 슬퍼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오늘 전도자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에요.
4절에서는 열심히 살아봤자 남들이 시기할 것이고
5절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여
자신의 살을 스스로 파먹는 것과 같은 악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장단을 맞춰 살아가야 하는 거에요?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는 거에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으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과 명예, 권력과 즐거움, 내가 노력한만큼 얻어지는 성취감.
그것을 인정해주는 정직한 세상.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해주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위해 살아가면 100% 다 만족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정말 행복하고, 기쁘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정말 그것을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고,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모두 헛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현실적으로 솔로몬처럼
모든 것을 얻고, 누릴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돌아가도록 만드셨어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얻을 수 없고, 누릴 수 없고,
때로는 노력하고 수고한 것조차 그대로 보상받을 수 없는
부조리하고 비겁한 현실 속에 우리를 방치해 두는 것일까요?
이대로는 우리 모두가 아무도 행복해 질 수 없는데 말이죠.
오늘 전도서는 이런 현실을 보면서 생각하라는 거에요.
그 말인 즉, 행복은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으려고 했던 부귀영화, 노력한 대가와 보상,
성취감, 즐거움, 삶의 목표, 의미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정말 원했던 나의 행복의 조건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달은 솔로몬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하기를
결국 이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잡으려고 하는 저 높이 있는 목표, 이상
그거 아니야. 그거 잡아봤자 결국 그게 너를 행복하게 할 수 없어.
너를 구원할 수 없어. 그거는 정말 헛된거야. 내가 잡아봤어.
전도자가 오늘 우리에게 외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본질적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6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한마디로 조금 적게 가질지라도 스스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기쁨과 평안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즉 자족하는 것이 모든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두 손에 다 가득하게 잡으려고 허우적거리며 아둥바둥
사는 것보다 한 손만 채워도 만족하며 사는게
더 평온하게 누리며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우명옥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왕실의 진상품을 만들던 도공으로서
스승도 이루지 못한 설백자기를 만들어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막대한 부를 얻게 되었는데, 오히려 이게 독이 되어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모든 재산을 탕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이런 실수를 실수를 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경계하고자
‘계영배’라는 신비의 술잔을 만들었습니다.
<계영배 사진 1>
이렇게 생긴 술잔인데요.
계영배란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잔의 70% 이상 술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영배 사진2>
계영배의 단면을 보면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물이 어느정도 높이가 되면 가운데 관을 통해
밑으로 물이 빠지는 구조입니다.
<계영배 사진3>
이렇게 물이 차면, 가운데로 물이 쑥 빠집니다.
그림이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지요.
나중에 이 잔은 조선시대의 거상 임상옥이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계영배를 늘 옆에 두고 끝없이 솟구치는 과욕을 다스리면서
큰 재산을 모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서 모든 과욕과 욕망을 버리는 것이
우리 인생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전도자는,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참새 좋아하세요?
자, 다같이~ 참새! 짹짹! 오리! 꽥꽥 서울제일교회! 아멘!
참새는 뭔가 우리에게 익숙하고, 가까운 느낌이 듭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많이 나오고, 동요, 동화에도 많이 등장하죠.
그렇다면, 참새는 좋은 새일까요? 나쁜 새일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참새는 곡식을 빼앗아 먹는 해로운 새, 해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새에게 옳고 바르다는 뜻의 ‘참’자를 붙여
참새라고 부릅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만약 이 세상에 참새가 사라진다며 어떻게 될까요?
더 많은 곡식을 추수할 수 있느니까 훨씬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1958년 농촌을 순방하던 모택동은 참새를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새는 해로운 새다.”
왜 그렇습니까? 식량이 가뜩이나 부족한데
참새가 곡식을 쪼아먹으니까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날로 참새 섬멸운동본부가 발족되었고,
참새를 그 지역에서 박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참새가 사라지자 해충이 창궐했고,
농작물이 초토화되어 1958년부터 3년 동안 중국인 3천만명이
굻어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알고보니 참새는 해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공동체를 살리는 복조였던 셈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모든 것을 얻고자 욕심을 내려하면
오히려 모든 것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더 큰 것을 지키기 위해서,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
거룩한 낭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밭의 가장자리는 베지 말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더 가질 수 있지만 자족하며 나누고 품어주었던 것이
탕자를 조건없이 받아준 아버지의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새 한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려 한다면 더 큰 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모든 것을 깨닫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실 사도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기 어려운
조건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학자였고, 정치가였으며, 권력가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안 또한 훌륭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몸은 병마와 매일 싸워야 했고,
언변이 시원찮아 전도자로서 멸시를 당했고,
사도직을 인정받지 못해서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도
늘 논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유대교를 배반했다고
그를 죽이려는 수많은 대적들로부터 도망다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 속에 모든 욕심을 버리고,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높이 오르려 하기보다
주어진 것에 먼저 만족하고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복의 조건이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와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그에게는 늘 천국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섬집아이’라는 노래를 아시나요?
공포영화나 스릴러물에서 많이 등장하는 노래여서
많이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사실 이 노래는 자장가를 목적으로 만든 노래입니다.
다 알고 계시지요? 초등학교 때 동요시간에 자장가로 배웠잖아요.
귀신을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자장가라고 생각하고
너무 느리지 않게 이시간 다같이 한번 불러보실까요?
<섬집아이 악보>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 팔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 엄마는 모랫기를 달려옵니다.
사실 이 노래는 이렇게 아기가 엄마를 기다리며
평온한 바닷가에서 갈매기 소리,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잠이 드는 광경을 상상하며 만든 노래입니다.
어머니가 굴 따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런데 어머니 머리에 이고 오는 바구니에는
굴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다 못찬 굴 바구니를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구니에 가득 담을때까지
굴을 따서 오면 더 좋겠지만, 더 늦어지면
사랑하는 자녀가 너무 오래 기다릴까봐
다 못 찬 굴 바구니를 이고 사랑하는 자녀를 보고싶어
모랫길을 달려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서울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도 바구니에 굴을 가득 다 채우고 퇴근하셨습니까?
그렇게 내가 얻으려는 목표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삶이
정말 내 삶에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어떠한 상황과 환경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정말 우리에게 주시고 싶었던 행복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엄마가 다 못 찬 굴 바구니에도 실망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단번에 뛰어올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랑하는 자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전도자 솔로몬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세상은 악하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열심히 한만큼 대가를 받지 못한다.
오히려 시기와 질투 뿐이다.
결국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 달려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모든 만족을 채워줄 수 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상한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 우리의 바구니를 다 채우지 못해서
다 못 찬 굴 바구니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열두광주리가 넘치고도 남는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함께 <충만>이라는 찬양을 믿음으로 고백하기 원합니다.
가사 안에 오늘 말씀의 내용이 다 담겨있습니다.
무명이어도 공허하지 않는 것은 예수 안에 난 만족함이라
가난하여도 부족하지 않는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부요함이라.
가사를 묵상하며 나의 삶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하며
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
기도
타인과 경쟁하며 과도하게 욕심을 부리기 보다 주신 것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자족의 삶을 누리게 하옵소서.
각종 학대를 막고, 학대받는 자들을 위로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몸과 영혼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하여 주옵소서
각자의 기도제목을 위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