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왜 예루살렘에 가려하는가
Notes
Transcript
[서론]
예전에 제가 영국에서 공부할때의 일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식사할때 항상 이야기를 많이 나눕니다.
저는 그게 참 부담스러웠습니다.
온통 그 사람 말에 신경써야 해서 제 입으로 뭐가 들어가는지 모를지경이었습니다.
그냥 말해도 잘 들리지도 않는데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하니 발음이 뭉개져 제가 이해하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제게 식사시간은 때로는 공포의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영국 사람 옆에 앉을때는 말이죠.
그런데 하루는 참 마음이 뭉클한 적이 있습니다.
나이드신 영국 사람인데 제게 한국말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제가 놀라서 어떻게 한국말을 아시냐고 했더니 자신도 한국에서 자랐다는 것입니다.
알고봤더니 아버지가 한국선교사셔서 어릴적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웠습니다.
그 전에는 영어로 대화하는게 불편해서 소화가 안되었었는데 이번에는 너무 마음이 뭉클해서 밥이 잘 안 넘어갔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이런 선교사님들이 계셨구나 싶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해방되기 전까지 활동하셨던 선교사님들이 몇명일까요?
약 1500여명이라고 합니다.
그 분들은 왜 몇 달을 걸쳐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우리나라까지 와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셨을까요?
심지어 죽어서도 자신들의 무덤을 이 땅에 두셨을까요?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울을 보며 우리나라에 헌신하신 선교사님들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본론]
오늘 우리가 볼 말씀에는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앞장에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눈물의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두번 다시 못 볼것 같은 예감에 서로 부둥켜 안고 기도하며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바울일행은 다시 배를 타고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을 향해 떠납니다.
밀레도에서 배를 타고 고스와 로도를 거쳐 바다라에 도착합니다.
그후 또다시 배를 타고 페니키아 지방인 두로에 도착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는 배 위에서 바울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1-2절 속에 감춰져있는 바울의 생각과 감정을 거룩한 상상력을 활용해서 생각해볼까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배 위에서 바울은 과연 무엇을 묵상했을까요?
어쩌면 바울은 바다를 바라보며 지금까지 함께 하신 바다보다 깊고 넓은 주님의 은혜를 묵상했을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배를 항해하시는 선장되신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이 만난 수많은 성도들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결심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가는 모든 길이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지만 이번 길은 더욱 그렇습니다.
13절에 보시면 바울 스스로도 이번에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바울의 이 여정을 막으려 하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두로에서 제자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말합니다.
바울이 큰 고난을 받고 죽을수 있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계속 가겠다고 하니 바울을 떠나보낼때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합니다.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간절히 구했을 것입니다.
한번 인간적으로 생각해볼까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죽는게 나을까요?
아니면 안전하게 여기서 사역을 오랫동안 하는게 나을까요?
생각해보면 바울이 가서 죽는 것보다 여기 남는게 훨씬 유익한 것처럼 보입니다.
더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더 많은 교회를 개척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바울이 굳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죽는다면 하나님도 손해 아닐까요?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바울을 말린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만약 여러분 가족중에 누군가 위험한 이슬람 선교를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무리 신앙이 좋은 부모님도 아들이나 딸이 이슬람 선교사로 가는 것을 마냥 기뻐하긴 힘들 것입니다.
‘꼭 너가 가야만 하니? 너 아니어도 갈 사람있어’ 라고 물을 것입니다.
틀린 말도 아니죠.
하나님이 반드시 그 사람만 쓰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잘 준비된 다른 사람을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 사람이 이슬람 선교를 가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이렇게 바울이 가는 길을 막는 사람은 또 있습니다.
10절에 등장하는 예언자 아가보입니다.
그는 바울이 사도행전 6장에 나온 유명한 일곱집사중 하나인 빌립의 집에 머물러 있을때 방문합니다.
빌립에게는 딸이 4명있는데 모두 예언을 합니다.
그만큼 아가보의 예언이 굉장히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가보는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와서 자기 손과 발을 묶고 예언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체포되어 로마 사람들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말로만 예언을 듣는 것보다 이렇게 직접 보여주면 더욱 효과가 큽니다.
충분히 두려움을 가질수 있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반드시 예루살렘을 올라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도 성령의 뜻 때문입니다.
20장 22절에 보시면 바울은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의지나 고집때문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게 성령의 뜻일까요?
아니면 큰 고난이 올 것을 알려 주셨으니 올라가지 않는게 성령의 뜻일까요?
성령의 뜻을 해석하는데 있어 성도들과 바울의 의견이 완전히 상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상황 속에서 과연 진짜 성령의 뜻은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성령은 왜 계속해서 바울이 고난받을 것을 알려주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알려주시니까 성도들은 바울을 막아서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막아서는 것이 믿음 부족 때문일까요?
뻔히 죽을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데도 막지 않는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보기 힘들 것입니다.
‘바울 목사님, 거기 가시면 죽을수도 있는데요. 그래도 죽을때 죽더라도 용기내십시오. 화이팅!’
이렇게 말하는게 사랑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들이 바울을 막아서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자식이 위험한 이슬람 선교를 간다는데 부모가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역시 우리 아들, 언젠가 큰 일 할줄 알았어. 잘 가서 주님을 위해 죽어라”
과연 맞는 것일까요?
부모가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는 자식을 위해 슬퍼하며 막아서는게 잘못된 것 아닙니다.
부모님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여겨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치 믿음 기계처럼 반응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분명 성령께서 바울이 고난받을 것을 알려주신 것은 바울을 막아서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그것을 알게 하신 이유는 그런 바울을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가는 길이 험난한 길이기에 그를 격려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바울을 막아서는 것도 사랑입니다.
동시에 성도들이 바울을 보내주며 그를 눈물로 격려하고 기도해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행위의 동기가 모두 사랑이라면 둘다 성령의 뜻입니다.
바울은 분명 고난 속에서 성도들의 격려와 사랑, 기도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가 큰 고난을 견뎌내는데 있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럼 바울은 죽을수도 있는데 왜 예루살렘에 꼭 가려는 것일까요?
성도들이 그렇게 막아서는대도 꼭 올라가는게 과연 성령의 뜻일까요?
그럼 왜 전에는 유대인들이 박해하면 그것을 피해 바울은 다른 도시로 이동한 것일까요?
우선 바울이 전에는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다른 도시로 이동한 이유가 있습니다.
쉽게말해서 계속해서 복음 전파를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역 초기에는 바울이 죽으면 더이상 복음을 전파할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목숨이 아까워서 그런게 아닙니다.
복음 전파를 위한 그의 전략적인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바울이 아니더라도 복음을 전할 많은 전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선택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예루살렘에 꼭 가야하는 정말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사명때문입니다.
바울이 다마스쿠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때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만이 바울의 사명은 아닙니다.
바울의 사명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복음으로 연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바울의 사명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맨 몸으로 올라가는게 아닙니다.
바울의 손에는 이방인 교회들이 어렵게 모은 헌금이 들려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을 돕기 위한 헌금이 있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게 바울의 사명입니다.
바울에게 돈은 사랑입니다.
이방인 교회들이 어렵게 모은 돈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된다면 그들이 얼마나 큰 격려를 받겠습니까?
이방인 교회들이 더 부자고, 예루살렘 교회가 더 가난해서 보내는게 아닙니다.
그것을 떠나서 이방인 교회들이 힘껏 모은 돈은 그들의 사랑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간혹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려운 교회나 성도들을 위해 구제헌금을 모은다고 하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도 가난한데 내가 누굴 도와주나? 나나 도와주쇼”
인색하고 삐뚤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돈이 부족한게 아닙니다.
믿음과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돈을 단순히 돈으로 여기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돌려주는 것이라고 여기면 태도가 달라집니다.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지고 풍성해집니다.
바울은 20정 35절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지도자가 돈에 인색해지면 믿음과 사랑도 빈곤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려는 이유는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만류에도 십자가를 지시려던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던 장벽을 허무신 십자가로 허물어 뜨리신 예수님처럼 바울도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장벽을 허물려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들을 연결하는 십자가의 제물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수 있다면 기꺼이 자기 목숨을 제물로 바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에 대한 순종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을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른 성도들은 바울 말고 다른 사람이 헌금을 전달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갈수도 있습니다.
누가가 갈수도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충분히 갈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반드시 자신이 가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사명이 무엇일까요?
왜 사명이 무서운 것일까요?
사명은 이 일에 있어 나 아니면 안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나 아니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이슬람 선교에 분명 더 준비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명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을 부르신다고 느낍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나 아니어도 할 사람 있겠지.”
이건 겸손일지 모르지만 사명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많은 사람들중 나를 부르신 거야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사명과 소명은 부르심이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사명은 반드시 해야할 특별한 임무를 말합니다.
반면 소명은 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과 방향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소명은 분명합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은 각자 다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좋으면 잘되는 일만 있고, 평안한 삶만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믿음이 좋으면 고난이 따르는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은 하나님의 뜻, 사명을 이루는 통로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고난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결국 로마황제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이 이 고난을 피했다면 이런 기회는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큰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고난으로 깊이 패인 마음의 웅덩이를 하나님은 위로와 격려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고난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명입니다.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사명입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저와 우리 성도들 모두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끝까지 이뤄내는 무서운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